1991년 지방선거서 참패…야권 통합 위해 DJ 신민주연합당과 통합하며 사라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3당 합당으로 인한 양당제 회귀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정당이 있습니다. 바로 ‘꼬마민주당’입니다. 꼬마민주당의 원래 당명은 민주당(民主黨)이었지만, 민주당 계열 정당 가운데서는 두드러지게 당세(黨勢)가 약했던 데다 독자적으로 활동한 시기도 1년여에 불과해 민주당보다는 꼬마민주당으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꼬마민주당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3당 합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창당하다 보니 규모에 비해 인기가 좋았고, 구성원의 면면도 화려했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지역주의와 싸우며 ‘바보 노무현’으로 불렸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몸담았던 정당이라는 점에서 특유의 이미지가 강화된 측면도 있습니다.
통일민주당 소속이었으나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에 반대해 탈당한 사람들이 주류였던 꼬마민주당에는 이른바 ‘스타 정치인’들이 다수 몸담고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초대 총재였던 이기택이었는데요. ‘4·19 영웅’으로서 당시 이미 6선 의원이었던 그는 장고(長考)를 거듭하다가 꼬마민주당 창당을 택합니다.
“4·19 세대를 대표해 온다고 자부해온 사람으로서 3당 합당은 4·19 정신에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5공 세력과 함께 정당을 한다는 것은 정치적 양심상 용납할 수 없었다.”
이기택 <조선일보> 인터뷰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다가 YS에게 발탁돼 통일민주당에 입당, 5공 비리 청문회를 거치며 ‘스타 정치인’으로 떠올랐던 노무현도 민주자유당이 아닌 꼬마민주당으로 향했습니다. 초선이었음에도 청문회에서 정주영·전두환 등을 몰아붙이고,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YS와 결별하는 모습을 보인 노무현은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죠.
“3당 합당은 두 가지 충격을 줬다. 첫째,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됐고 영남은 보수 정치세력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 정치사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둘째, 우리 정치를 통째로 기회주의 문화에 빠뜨렸다. 철새 정치 수준이 달라진 것이다.”
노무현 자서전
이밖에도 김정길, 김광일, 장석화 등 민주화운동가 출신 의원들에 무소속이었던 이철, 박찬종 등이 합류한 꼬마민주당은 당세에 비해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창당(1990년 6월 15일) 한 달 뒤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과 지지율이 비등한 수준이었습니다. 겨우 8석을 가진 정당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수치였죠.
(전략) 민자당 지지도는 13.9%에서 11.4%로 2.5%포인트 떨어진 반면 평민당 지지도는 15.6%에서 16.0%로 0.4%포인트 올라갔다. 새 야당인 민주당에 대한 지지도는 12.5%에서 13.5%로 1%포인트 늘어나 순위 면에서 민자당을 앞지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략)
1990년 7월 16일 <동아일보> ‘3당 통합 결국 잘못된 것 66.6%’
그러나 꼬마민주당은 겨우 1년 3개월여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1991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겨우 21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기 때문입니다. 전체 득표율로만 따지면 무려 14%를 획득하는 돌풍을 일으켰지만, 야당 성향 표가 신민주연합당(평화민주당이 재야세력과 결합해 만든 정당)과 꼬마민주당으로 갈라진 탓에 유의미한 결과를 얻는 데는 실패했죠.
이처럼 야권 분열의 한계를 절감한 꼬마민주당과 신민주연합당은 거대 여당에 맞설 수 있는 ‘통합 야당’을 창당하기로 뜻을 모읍니다. 그렇게 두 당은 당명을 민주당으로 하고, 김대중과 이기택이 공동대표를 맡으며, 대의원 구성도 1대1로 하는 등의 조건으로 합당을 결의합니다. 그렇게 꼬마민주당은 1991년 9월 16일 ‘민주당’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