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시사오늘>은 지난 한 달 동안 우리나라 정당사를 간단히 훑어봤습니다. 네 편에 걸쳐 해방 이후 자유당 창당부터 민주당의 탄생과 분열, 박정희의 등장, 야권 통합까지를 다뤘는데요. 왠지 모르게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은 분들이 계실 겁니다. 우리 현대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이름,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두 사람은 신민당 창당 이전에도 이미 정치권에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다만 정치적 ‘거물(巨物)’이 되기는 전이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입지를 다져가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죠. 개인적으로는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지만, 정치사적으로 이름을 남기기에는 아직 영향력이 부족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를 발판 삼아 정치사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되는 만큼, 두 사람이 전면에 등장하기 전 행보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YS는 제3대 총선에서 자유당 공천을 받아 거제군에 출마, 당선증을 받고 국회에 입성합니다. 이때 YS의 나이는 만 26세 5개월로, 아직까지도 역대 최연소 당선 기록으로 남아 있죠.
하지만 YS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 입당 7개월여 만에 자유당을 떠나 민주당으로 향합니다. YS가 자유당을 탈당하기 전, 이승만 대통령 면전에서 “박사님, 개헌하시면 안 됩니다. 국부(國父)로 남으셔야 합니다”라고 설득했던 건 그의 성격을 나타내는 유명한 일화로 회자됩니다.
민주당에 입당한 후에는 친분이 있던 조병옥과 유진산을 따라 구파로 활동합니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YS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 출전해 2위를 차지한 적이 있었는데요. 이를 인상 깊게 지켜봤던 장택상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장택상이 국회부의장이던 시절에는 비서로, 국무총리로 활동하던 때는 인사담당 비서관으로 일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YS는 조병옥·유진산과도 인연을 맺게 됐고, 민주당 입당 후에는 그들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활약하게 되죠.
이러다 보니 구파가 민주당을 탈당해 신민당을 만들 때도 자연스럽게 참여합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치활동 재개가 허용됐을 때 역시 구파가 중심이 돼 창당한 민정당에 몸을 담았죠.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에 따르면, 민주공화당 창당 당시 JP는 YS를 만나 공화당 합류를 권했는데요. YS는 “전부 다 군사 정권 세력에 휩쓸리면 발전이 없다. 거기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야 한다. 그런 뜻에서 나는 지금 걷는 길을 가겠다”며 거절하고 민정당에 입당했다고 합니다. JP의 증언을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고인을 처음 가까이서 본 건 5·16 혁명 이듬해인 1962년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나는 극비리에 신당(민주공화당)을 만드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각계각층의 신진 엘리트를 신당에 합류시키고자 했는데 30대의 젊은 정치인 중에서 돋보이는 인물로 YS가 거론됐다. 54년 제3대 총선에서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된 YS는 일찍부터 특출한 야당 정치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에 대해 많은 곳에서 추천이 들어왔다.
그를 공화당에 합류시키기 위해 내가 직접 만났다. 서울 한남동 유엔 빌리지에 있던 정보부의 안가(安家)였다. 나는 YS에게 “우리 혁명세력과 같이 합시다. 우리와 함께 협력해서 이 나라를 제대로 엮어 나갑시다”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YS는 “전부 다 군사정권 세력에 휩쓸리면 발전이 없습니다. 거기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지금 걷는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내 제안을 거절했다. 정보부장이었던 내 앞에서 스스럼없이 혁명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출하는 정치인은 당시 드물었다. 나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굳은 신념을 가진 YS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신당 참여 권유를 깨끗이 중단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다. 그때 YS에 대한 첫인상은 고집이 보통이 아닌 인물이구나, 외고집이 쇠심줄같이 세지만 거짓말은 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거였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YS의 당적은 민정당과 민주당이 합당해 탄생한 민중당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YS는 원내총무 겸 대변인 자리에 오르며 자신의 정치 철학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윤보선 탈당으로 다시 한 번 야권이 분열되자, 원내총무였던 YS는 유진오를 영입해 윤보선을 압박해 나갑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통합 협상을 지속, 결국 윤보선이 대권을 유진오가 당권을 맡는 조건으로 야권 통합을 이뤄냅니다. 이게 바로 신민당이죠. YS가 ‘40대 기수론’을 주창하고 나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성과가 있었던 겁니다.
DJ의 행보는 YS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달랐습니다. YS가 역대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국회로 입성했던 제3대 총선 당시, DJ도 무소속으로 목포시에 출마합니다. 그러나 YS와 달리 고배를 마셔야 했죠. 1956년엔 민주당에 입당했지만 신파로 활동하며 구파였던 YS와 다른 길을 걷습니다. 제4대 총선 때는 당내 ‘파워게임’에 밀려 목포시 지역구를 포기하고 강원도 인제군에 출마하려 했으나 자유당의 전횡(專橫)으로 후보 등록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1년 후 열린 강원도 인제군 재보궐선거와 제5대 총선에서도 강원도 인제군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두 번 다 자유당 전형산 후보에 밀려 낙선하고 맙니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1961년 재보궐선거에서 드디어 민의원으로 당선되지만, 이틀 뒤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정활동은 해보지도 못했죠.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정치인생 초년을 보내던 DJ는 1963년, 정치활동 재개 허용 후 실시된 제6대 총선에서 드디어 목포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첫 의정활동을 하게 됩니다. 당시 YS는 이미 신민당 원내부총무, 민정당 대변인 등을 지낸 ‘촉망받는 30대 정치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DJ의 시작은 다소 늦었던 셈이죠.
그러나 DJ는 특유의 영민함과 성실성을 발휘하며 빠르게 ‘라이징 스타’로 도약합니다. 1964년 당시 야당이었던 자유민주당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이 상정되자 5시간 19분 동안 원고 없이 필리버스터를 진행하면서 정계의 주목을 받았고, ‘국회도서관 대출 1위’ 타이틀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연구 활동에 진력(盡力)하면서 당내 중진들로부터 ‘실력 있는 젊은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이끌어냈습니다. YS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치력으로 입지를 다져갔다면, DJ는 뛰어난 지성미를 발휘하며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던 거죠.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신민당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자신들만의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