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우 구상’과 또 다시 분열된 신민당 [한국정당사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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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구상’과 또 다시 분열된 신민당 [한국정당사⑧]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3.07.27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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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구상에 주류 vs 비주류 갈등 격화…주류 측 탈당 후 통일민주당 창당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시사오늘 정세연
이민우 구상으로 인해 신한민주당은 다시 분열의 길을 걷는다. ⓒ시사오늘 정세연

제12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신한민주당은 여세를 몰아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국회 내에서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고 나섰고, 국회 밖에서는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민주제 개헌 1000만 명 서명 운동’을 전개하면서 분위기를 잡아 나갔습니다.

그런데 1986년 12월 24일, 신민당 초대 총재 이민우가 갑작스럽게 ‘선(先) 민주화 7개항 실천, 후(後) 내각제 협상용의’ 입장을 밝힙니다. △국회의원 선거법 협상 △언론자유보장 및 언론기본법 폐지 △국민 기본권 확립 △국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보장 △극렬 용공분자 제외 양심수 석방 및 사면·복권 △2개 이상 정당제도 확립 △지방자치제 실시 등 7개 조항이 실현된다면 내각제도 검토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민우 구상은 YS와 DJ에게 충격을 안겼습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내각제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내각제로 개헌을 한 뒤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다수당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두면 사실상의 정권 연장이 가능하다는 게 전두환의 계산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민우가 상의 한마디 없이 내각제도 검토할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을 했으니, YS와 DJ가 뒤집어진 건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이민우 구상 발표 후 YS와 DJ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쉼 없이 움직였습니다. YS는 이민우를 만나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고, DJ도 수시로 YS와 회동하며 향후 행보를 상의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생긴 균열은 좀처럼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DJ는 자서전에서 당시에 대해 “이민우와 YS는 몇 번이나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합의했지만 이민우는 틈만 나면 이를 뒤집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YS와 DJ는 ‘이민우 구상은 직선제 당론에 어긋난 것’이라는 회동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러자 이민우는 두 사람의 과도한 간섭을 비판하면서 충남 온양으로 잠적해버립니다. 그러면서 “민주화 7개항이 이뤄진다면 민정당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영구집권음모가 아니라고 국민들이 인정할 것”이라고 날을 세웠습니다.

이민우와 YS·DJ의 갈등에, 당내 의원들도 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철승 △김옥선 △김재광 △박한상 △박해충 △신도환 △이택돈 △이택희 △조연하 등 신민당 내 비주류 의원 9명은 민주연합을 결성해 이민우 구상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고, 주류 측은 당내 의원 90명 중 70명으로부터 이민우 구상을 배격하겠다는 서명을 받아내면서 맞섰습니다. 이민우 구상에 대한 찬반을 놓고 주류 측과 비주류 측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겁니다.

이민우 구상이 발표된 지 100여 일이 지난 4월 8일. 결국 신민당은 분당을 결정했습니다. 분당은 YS측 현역 의원 40명과 DJ측 현역 의원 34명, 총 74명이 신민당을 떠나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는 형식으로 이뤄졌습니다. 당시 신민당 전체 의원이 90명이었으니, 사실상 세간만 남기고 전부 집을 떠나버린 셈이었습니다. 이후 이민우는 같은 해 11월 신민당 총재와 국회의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 은퇴를 선언했고, 신민당에 남았던 의원 16명은 모두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신민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분당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987년 4월 8일 오전 9시, 서울 무교동 민추협 사무실에는 현역의원 및 신민당 당료, 민추협 관계자, 내·외신 기자 등 4백여 명이 몰려들었다. 분당선언의 자리이자 신당 창당선언의 자리였다. 내가 양김 이름으로 된 회견문을 낭독했다.
“신민당의 내분은 결코 당내만의 사건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현 정권의 공작정치의 소산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번민과 숙고를 거듭한 끝에 신민당을 폭력 지배의 무법천지로 만들고 농락 대상으로 전락시킨 불순세력과 단호히 결별키로 했습니다.”

김영삼 회고록

이민우 총재와는 더 이상 함께 직선제 개헌을 위한 투쟁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영삼 씨와 나는 분당을 공식으로 선언했다. 1987년 4월 8일 신민당 의원 90명 중 74명이 탈당했다. 이 총재가 왜 ‘선민주화론’을 포기하지 않고 틈만 나면 계속 주장했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이철승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비주류의 부추김이 있었고, 잇단 미국 고위 인사들의 지원성 발언에 고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대중 자서전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대통령실 출입)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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