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무너뜨린 신민당 [한국정당사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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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무너뜨린 신민당 [한국정당사⑤]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3.07.06 0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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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창당돼 1980년까지 지속된 신민당…박정희 정권 무너뜨리는 데 핵심적 역할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1967년 창당한 신민당은 1980년까지 지속되며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시사오늘 김유종
1967년 창당한 신민당은 1980년까지 지속되며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시사오늘 김유종

<4편에서 계속>

1955년 민주당 창당 이후, 민주당계 정당은 분열과 통합을 반복했습니다. 야권이 통합된 상태로 존재했던 건 6년에 불과했죠.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등장으로 야권에선 ‘힘을 모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그 결과 등장한 정당이 바로 신민당입니다.

1967년 문을 연 신민당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 전까지 무려 13년 8개월 동안 존속했습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 14년 3개월 동안 당명을 바꾸지 않았던 한나라당 다음으로 긴 기록입니다.

이처럼 신민당이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건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功)이 큽니다. 사실 1970년 이전 신민당은 ‘무늬만 야당’이라는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신민당의 주류는 ‘투사’보다 ‘관료’에 가까운 기성 정치인들이었고, 이들은 사회 변혁보다 정권 획득에만 열을 올리는 경향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실제로 신민당은 제6대 대선과 제7대 총선에서 연달아 참패하고,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막는 데도 실패했지만 이렇다 할 대안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3선 개헌 당시에는 성낙현·조흥만·연주흠 등 세 명의 신민당 소속 의원이 개헌 지지 성명을 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제명시키기 위해 당을 자진해산하고 재창당했던 건 신민당의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죠.

그랬던 신민당이 군사독재정권의 ‘대항마’로 자리를 굳힌 건 1970년 이후입니다. 1971년 제7대 대선을 앞두고 YS는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전면에 나섰는데요. YS는 박정희 정권의 군정 연장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히고, 3선 개헌을 강하게 비판하다가 ‘초산 테러’를 당하는 등 그야말로 목숨 걸고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던 ‘강경파’였습니다.

이런 YS가 ‘라이징 스타’ DJ, 이철승과 함께 전면에 등장하자 신민당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여기에 공개 경선 방식으로 치러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드라마틱한 승부가 펼쳐지고, 본선에서도 DJ가 박정희와 박빙의 승부를 벌이면서 국민들의 뇌리에 신민당은 ‘박정희 정권의 대항마’로 아로새겨집니다.

물론 신민당 역시 ‘강경 투쟁의 길’만 걸었던 건 아닙니다. ‘2차 진산파동’이나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사건’과 같은 ‘흑역사’도 있었습니다. 2차 진산파동이란 제8대 총선을 앞두고 유진산이 갑자기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구갑을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로 등록한 일을 말하는데요. 당시 서울 영등포갑에 박정희 대통령 처조카사위 장덕진이 출마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진산이 박정희 정권과 ‘거래’를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죠.

1976년엔 신민당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는 전당대회 각목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신민당에 ‘온건파 지도부’가 들어서길 원했던 박정희 정권은 YS가 총재로 선출되지 못하도록 이철승을 적극 지원했는데요. 나아가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은 정치 깡패인 김태촌을 사주해 신민당사를 습격, 당의 직인을 강탈합니다.

얼마 뒤 열린 전당대회에서는 김태촌이 난입, YS 측 대의원들의 입장을 막아버렸습니다. 이에 주류 측 대의원들은 따로 전당대회를 열어 YS를 총재로 선출하는 등 극한 대립을 이어갑니다. 당이 분당 위기에 몰리자 양측은 통합 전당대회 개최에 합의하면서 갈등을 봉합했지만, 결국 이철승의 당선으로 신민당은 ‘온건 야당화’의 길을 걷습니다.

하지만 신민당이 이전 야당들과 달랐던 건, 여러 위기 속에서도 분당 없이 단일대오를 유지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1978년, YS가 신임 총재로 선출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YS는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인 YH무역 여공들에게 신민당사를 내주는 등 그야말로 ‘야성(野性)’ 가득한 행보를 보였죠.

<뉴욕타임즈>와의 기자회견에서는 미국이 박정희 정부를 압박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쳤습니다. 결국 인내심을 잃은 박정희 정권은 YS를 의원직에서 제명시켜버렸고, 이에 대한 반발로 부마항쟁과 10·26 사건이 발생하면서 ‘박정희 시대’는 종말을 맞게 됩니다.

YS의 의원직 제명이 빌미가 돼 그해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고, 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10·26사태를 맞게 된다. YH사건, 야당총재에 대한 의원직 제명, 부마항쟁, 10·26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YS와 신민당이었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

<6편에서 계속>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대통령실 출입)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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