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침투한 남한 문화…‘겁나서 교류 못하겠다’는 게 북한 상황”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습했다. 이스라엘은 ‘고통스러운 보복’을 공언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하마스를 비롯한 주변국들과도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다. 2년여 전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혹자의 말처럼 ‘전쟁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자유로울까. 세계 유일의 분단 휴전국. 군사적 긴장 상태는 여전히 최고 수준이다. 북한이 ‘전쟁의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어느 때보다 북한의 동향이 궁금한 요즘. <시사오늘>은 4월 16일 ‘북악정치포럼’ 연단에 선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을 만나기 위해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으로 향했다.
“북한, 남한 문화 빠져든 청년들 보며 체제 위협 느낀 듯”
아마도 무력 충돌의 위험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통일’이리라.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장관을, 문재인 정부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지냈던 정 전 장관은 대표적인 ‘협상주의자’다. 당연히 그의 입에서 나올 단어도 ‘통일’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통일은 이제 물 건너갔습니다. 불가능해요.”
정 전 장관은 ‘통일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며 강연의 문을 열었다. 반평생을 통일 문제만 연구했다던 그는 왜 이런 도발적인 주장을 하는 걸까.
“공산주의 국가는 공산당이 정부를 운영합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맨 위에 국가가 있고 그 밑에 정당들이 있고 또 행정·입법·사법부가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조선노동당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운영하는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국무회의보다도 훨씬 높은 격입니다. 그런데 최근 북한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우리를 남조선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했어요. 남조선 북조선이라는 말을 쓰다 보면 그들도 우리의 일부고, 우리가 그들의 일부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서로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거죠. 그래서 남조선이라는 표현은 물론이고 조국이라는 말, 통일이라는 말도 쓰지 말라고 한 겁니다.
심지어 그들의 애국가에 들어가 있는 삼천리라는 단어도 빼버리기로 했습니다. 삼천리라는 건 함경북도 동북쪽 끝에서부터 목포까지 직선거리를 뜻해요. 그러니까 삼천리라는 단어를 쓰면 자연히 남한을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통일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제 북한은 남한을 같은 민족, 통일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교전 중에 있는 적대 국가, 별개 국가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제목처럼 남한과 ‘헤어질 결심’을 한 거예요.”
정 전 장관은 통일이 불가능한 이유로 북한이 남한을 ‘통일의 대상’이 아닌 ‘별개의 국가’로 보기 시작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면서 북한이 남한에 대한 시각을 전환하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2020년 연말에 북한이 난데없이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남조선의 동영상이나 음반 같은 걸 가지고 들어오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남한의 드라마를 보거나 노래를 듣는 사람은 5년 이상 7년 이하 징역입니다. 가지고 돌아와서 유포하면 사형이고, 보거나 듣기만 해도 징역이죠. 남쪽 문화를 유해한 반동 문화라고 규정한 거예요.
2023년에는 평양문화어보호법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젊은 사람들이 남한 말투를 흉내 내는 걸 막겠다는 의도입니다. 북한도 사람 사는 동네니까 남녀가 연애를 하잖아요. 옛날 같으면 연애를 해도 서로 동무라고 불러요. 누구누구 동무 그렇게 불러야 되는데 갑자기 서로 오빠 자기 이렇게 부른다는 거예요. 오빠 자기가 젊은 사람들이 쓰는 호칭이 돼버린 거죠. 그만큼 젊은 사람들이 남한 드라마에 빠졌다는 뜻이에요.
북한 입장에서 더 큰 문제는 드라마를 보고 남한 말투를 흉내 내는 사람들은 하층민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드라마를 보려면 컴퓨터도 있고 CD플레이어도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려면 당 간부 정도는 돼야 해요. 최소한 중간급은 돼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북한 사회의 기층 조직이 흔들리고 있다는 얘깁니다. 당 간부, 중심 세력의 자식들이 남조선 말투를 흉내 내고 남조선식의 연애를 하는 걸 놔뒀다가는 체제가 흔들리니 그걸 막겠다는 게 평양문화어보호법이에요.
2021년에는 청년교양보장법이라는 것도 만들었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청소년들이 소위 ‘남한화’ 되는 걸 막아야겠다는 거죠. 남한 드라마는 조선말로 하기 때문에 드라마를 보면서 바로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쉽게 빠져들어요. 이걸 못하게 막겠다는 겁니다.”
“통일 목표하는 한 남북 교류 협력 불가능…유럽연합처럼 가야”
이어서 정 전 장관은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도 원인 중 하나로 언급했다.
“1960년 4·19혁명이 나던 해에 우리나라 1인당 소득은 87달러밖에 안 됐습니다. 북한은 147달러였어요. 우리보다 1.6배 이상 잘 살았던 거죠. 이게 역전된 건 군사쿠데타 이후입니다. 군사쿠데타의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서 62년부터 5개년 경제개발계획이라는 걸 시작했습니다. 10년 동안 경제개발계획을 하면서 우리가 북한을 따라잡은 거예요. 70년대 중반이 돼서야 우리가 북한보다 약 1.6배 잘 살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우리는 수직 성장을 했는데, 북한은 저성장을 계속하더니 80년대에는 그야말로 제로성장을 했어요. 경제가 하나도 크지 못하고 쭉 평면으로 갔습니다.
원인은 간단해요. 국제정세가 변했거든요. 그동안 중국은 자기들이 굶어가면서도 해외에 원조를 해줬습니다. 중국 편을 만들기 위해서죠. 그런데 중국이 남의 나라를 돕지 않는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원조가 끊어져버렸고, 80년대 중반에는 소련마저도 개혁개방을 하니까 북한이 제로 성장을 하게 됐어요.
그렇게 차이가 나기 시작한 결과 지금 우리 1인당 소득은 3만5000달러인데 북한은 1500달러가 채 안 됩니다. 24분의 1정도밖에 안 돼요. 3만5000원짜리 스테이크를 먹든지 불고기를 먹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하고 삼각김밥을 간신히 사먹을 수 있는 사람하고 살림을 합칠 수 있겠습니까. 3만5000 대 1500이 만나면 누가 주도권을 행사할지는 뻔한 거 아니겠어요. 돈 많은 쪽이 하루 종일 끌고 다니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강제로 살림을 합쳐 놓으면 뭐든지 척척 살 수 있는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거죠. 이렇게 너무 차이가 나면 살림을 못 합칩니다. 이쪽에서 합치자고 해도 돈이 적은 쪽은 자존심이 상해서 못 합쳐요. 그게 지금 북한의 현실입니다. 겁나서 상종을 못 하겠다는 거예요. 남북 교류 협력이 다시 활성화되면 북한 청소년들은 완전히 남한화 돼버리고, 김정은의 세습 체제는 흔들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예 바깥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통일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이유를 짚은 정 전 장관은 끝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며 강연의 문을 닫았다.
“이제는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꼭 하나의 국가로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해봐야 할 시기입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도 한때 합치려고 했던 때가 있었어요. 독일하고 오스트리아는 같은 민족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그들은 완전히 따로 삽니다.
그러면 남북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 유럽연합 같은 개념으로 가야 합니다. 유럽연합은 소속 국가마다 언어도 다르고 정치·경제 체제도 다 다르지만 국경을 맞대고 살고 있잖아요. 하나의 경제적 공동체를 만들고, 그 토대 위에서 정치적으로 협조하도록 한 것이 유럽연합입니다. 남북한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려면 이제 통일은 포기를 해야 합니다. 북한은 통일을 하면 자기들이 밑에 깔린다고 생각하니까 그건 안 할 거라는 신호를 줘야죠. 그저 북한이 우리만큼 잘 살도록 도와주는 대신 전쟁은 하지 말자는 약속을 하는 겁니다. 이제 와서 미국과 손을 잡고 북한을 압박해 들어가서 통일을 노리는 건 이뤄질 수 없는 꿈입니다. 꿈 깨야 해요.
물론 유럽연합 같은 구조를 만드는 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차라리 남이었으면 쉬울 텐데, 같은 민족이고 서로가 통일을 노렸던 처지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래도 북한이 열등의식에서 벗어나서 남한과 공존하는 방향을 찾도록 하게끔 연구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고 봐요.”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