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녹취록 파일 무려 3만 건…증거 확보
현역 의원과 당 관계자 70여명 연루 가능성
당시 집권여당 전당대회 금권선거로 얼룩
정치자금 부패, 언제까지 반복되나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병도 주필)
한국 정치의 구시대 적폐는 도대체 언제나 끝장날 것인가.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는 우리나라 정당정치가 뿌리 내리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이어진 전형적 악습이다. 돈으로 권력을 사는 행위나 다름없다. 이번엔 최대 의석의 거대 정당에서 노골적인 의혹이 또 불거졌다.
민주당 전당대회 때 송영길 당대표 후보 캠프에서 불법 정치자금이 오갔다는 이른바 돈봉투 의혹이 터져 나왔다. 특히 돈 봉투 살포 정황이 담긴 휴대전화 녹음파일까지 공개돼 만만찮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20년 전도 아닌 불과 2년 전에 당시 집권 여당이었고, 지금도 국회 최다 의석을 보유한 정당이 검은돈을 주고받으며 당 대표 선거를 치렀다는 의혹은 믿기 어려울 만큼 초현실적이다.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돈봉투 사건’이 벌어진 것이 2008년이다. 그때도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민주당은 일단 검찰 수사를 ‘기획 수사에 의한 야당 탄압’으로 몰아갔지만, 터무니 없다. 압도적인 의석을 가진 민주당 대표를 뽑는 과정에서 돈을 주고 표를 사려고 했다는 의혹이 일어난 것만으로도 충격적이다. 돈 봉투 의혹은 이재명 사법 리스크와는 차원이 다르다. 개인과 측근 비리가 아닌 당 전체의 문제로 봐야 한다.
압수수색 영장 정황 증거 상당
이번 의혹은 송영길 캠프 관계자들이 국회의원과 대의원 등에게 총 1억 원에 이르는 현찰을 봉투에 담아 살포했다는 내용이다. 검찰은 지난 12일 전대 당시 송영길 캠프에서 활동한 윤관석, 이성만 의원과 강래구 한국감사협회 회장의 자택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압수수색 영장에 기재된 정황 증거 자체는 상당하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강래구 당시 한국공공기관감사협회장이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에게 “봉투 10개가 준비됐으니 윤 의원에게 전달해달라”고 한 통화 내용은 적나라한 수준이다.
당시 대표 경선후보였던 송영길 전 대표가 돈봉투 살포에 관여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민주당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과 강래구 한국감사협회장의 통화가 담긴 휴대전화 녹음 파일에 따르면 송 전 대표는 자금책인 강 회장이 돈 봉투를 지역 본부장들에게 나눠줬다고 보고하자 ‘아유 잘했네, 잘했어’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금품이 전달됐는지는 검찰이 수사로 밝힐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속 의원들이 줄줄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검찰수사를 받는 것만으로도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상식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수사를 무조건 야당 탄압·검찰 독재로 몰아가는 행태를 무한 반복만 하고 있으니 보기에 딱하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 수사2부의 압수수색 영장에는 명백한 돈 봉투 살포 정황이 적시돼 있다. 검찰은 10억여 원의 금품수수 혐의로 4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1심)받은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이 민주당 전·현직 의원은 물론 청와대 관계자 등과 주고받은 전화 녹취록 3만 건을 토대로 증거를 확보했다.
녹취록에는 강래구 당시 한국수자원공사 상임감사가 이 전 부총장을 통해 불법 정치자금 9000만 원을 윤 의원에게 건넸고, 이 돈 가운데 6000만 원은 300만 원씩 봉투에 넣어 의원들에게, 3000만 원은 50만 원씩 대의원들에게 전달됐다는 내용이 있다.
대의원들 사이에서도 수십만 원 돈봉투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의 휴대전화 녹음 파일이 계속 나오면서 돈 봉투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100만 원씩이라도 봉투에 넣어달라”, “저녁 먹을 때 전화 오면 (봉투) 10개 줘” 등 범죄 혐의를 부인하기 어려운 육성이 수없이 담겨 있다. ‘야당 탄압’이라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2년 전 전당대회 당시 송영길 후보 캠프에서 준비한 돈 봉투는 모두 90개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 20개는 현역 의원들 몫이었고 최소 10개는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총 액수가 9400만 원에 이르고 현역 국회의원과 당 관계자 70여명이 연루됐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검찰은 민주당 현역 의원 10명을 돈 봉투 수수자로 특정하고 차례로 소환 조사할 방침이라고 한다.
전당대회 과정에서 송 전 대표 후보 캠프 관계자 9명이 국회의원 등에게 불법자금을 뿌린 혐의를 포착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에게 20여 개의 돈 봉투가 살포되고, 이와 별도로 대의원들 사이에서도 수십만 원이 든 봉투가 오갔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당시 집권여당 전당대회가 금권선거로 얼룩졌던 셈이다.
부패 비리 감추기 위해 검수완박법 강행
무턱대고 피의자들을 변호하며 야당탄압 프레임으로 맞서기 어려울 정도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공당이라면 우선 자체적으로 사실관계를 밝혀서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도록 하는 게 응당한 처사다. 이재명 대표는 더는 침묵하지 말고 공명정대한 진상조사를 통해 당내 선거 비리와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할 것이다.
당대표 등 소속 의원들이 잇달아 수사 대상이 되고 있는데 검찰 탓만 하면 민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항상 이런 식으로 검찰수사 자체를 부정하니 자신들의 부정부패 비리를 감추기 위해 검수완박법을 강행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듣는 것이다.
50억 클럽 특검을 밀어붙이는 결기로 2년 전 전당대회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돈봉투 실체가 있는 건지 등 스스로 자체조사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게 순리다. 그래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 자체 조사로 전모가 밝혀질지는 의문이다. 비난 여론에 떠밀려 마지못해 조사에 나서겠다고 한 것을 보면 진상 규명 의지가 의심된다. 송 전 대표가 줄곧 이재명 대표 측과 긴밀한 관계를 보여 온 점도 조사의 실효성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비명(비이재명)계는 지난 대선 경선 때 송 전 대표가 사실상 이 대표를 지원한다며 ‘이심송심(李心宋心)’ 논란을 제기했다. 이 대표가 대선 패배 후 송 전 대표 지역구였던 인천 계양을 재보선에 출마하면서 논란은 거듭 불거졌다. 조사하는 시늉만 하다 끝날 공산이 크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야권 전체 뒤흔들 ‘판도라 상자’…대충 봉합땐 당 와해
이정근 씨는 사업가에게 각종 이권 개입을 약속하며 뒷돈 10억여 원을 받은 혐의로 최근 1심에서 징역 4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씨는 정치권에 입문한 2016년부터 지난해 구속되기 전까지 6년 넘게 통화를 녹음했는데 그 파일 개수가 무려 3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 파일에서 민주당 노웅래 의원의 뇌물수수 의혹, 노영민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이학영 의원의 취업청탁 의혹도 불거져 나왔다.
양측 주장을 떠나 검찰 손에 있는 이씨 파일은 돈봉투 의혹을 거치며 야권 전체를 뒤흔들 '판도라의 상자'가 됐다. 문제는 총선이 1년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식이라면 판도라의 상자가 잊힐 만하면 열린다는 정치적 오해가 확산하면서 수사에 부담을 줄 것이다. 검찰은 이씨 비리 수사를 전방위로 확대하고 속도를 내주기를 촉구한다.
검찰의 투명한 수사가 요구된다. 무엇보다 민주당은 스스로 의혹을 낱낱이 규명한 뒤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대충 봉합하는 형태의 ‘셀프 조사’에 그친다면 자멸할 수 밖에 없다.
민주당은 반성과 성찰이 우선이다. 의혹이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된 시점에서는 국민들이 납득할만한 조치를 내놓고, 철저한 혁신도 뒤따라야 한다. 후진적 사고와 의식은 그대로인 채 얼기설기 겉모양만 바꾼다면 유권자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심판할 것이다.
이병도는…
부산고·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정치부 기자로 출발한 후 연합뉴스 정치·경제·외신부 기자·차장, YTN 차장, 평화방송(PBC) 정경부장, 가톨릭 출판사 편집주간을 지냈다. 연합뉴스 재직 중에는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일했고, '홍콩 유령바이어 사기사건' 보도로 특종상을 수상했다. 일본 FOREIGN PRESS CENTER 초청으로 자민당을 연구하였고, 남북회담 취재차 평양을 방문하였다. 저서로는 <6공해제(解題)>, <YS 대권전쟁>, <최후의 승자>, <영원한 승부사>, <대한민국 60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