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 특정 세력 독점보단 세대 따라 내려온 것”
“서석재 의원에 살아가는데 필요한 충고 배워”
“YS, 군정 종식하겠다는 신념 실천한 지도자”
“노무현, 명분과 실리의 국부론 펼친 대통령”
“상도동계 김영춘 대선주자 감인데 아쉬워”
“기회 닿는 대로 정치개혁 공론화에 힘쓸 것”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체제를 바꾸긴 어렵다. 한 국가의 질서가 제도화된 이상 그 틀을 깨기란 쉽지 않다. 동유럽은 붕괴하고서야 체제 전환이 이뤄졌다. 중국은 공산주의 100년, 북한 독재는 70년이 넘었다. 대한민국 군정은 30년여 년이나 유지됐다. 독재 체제의 벽을 넘어 제도적 민주주의 체제라는 역사적 물줄기를 만들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싸워야 했다. 거쳐 간 발자국들을 헤아릴 수 있을까.
돌아보면 1965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6·3항쟁이 일어났다. 1969년 YS(김영삼)는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맞서다 초산테러를 당했다. 1971년 40대 기수론을 들고나왔다. 민의를 등에 업고 박정희 정권에 대항했다. 1972년 유신이 선포되자 해외에 체류 중이던 YS가 긴급히 귀국했다. 엄혹한 상황에서도 투쟁을 이어나갔다. 1973년 일본에서는 국내 상황을 알리던 DJ(김대중)가 중앙정보부에 납치됐다, 극적으로 살아났다.
1979년 YH무역 여공 진압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던 YS는 9월 외신을 통해 박정희 유신을 비판하다 의원직에서 제명됐다. 이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부마항쟁)가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일어났다.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신군부가 들어섰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 <YS회고록>, 민주산악회 산행 중-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정치 지도자들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침묵했다. 1983년 YS는 무기한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같은 시기 미국에 망명해 있던 DJ는 YS 지지 선언에 나섰다. 8·15 기념식에서는 민주화를 촉구하는 ‘김영삼·김대중 공동성명서’가 나왔다. 대학가에서는 전대협 시초격인 전국학교연합 대회가 이성헌 주도로 진행됐다.
1984년 5월 18일 양김 세력이 뭉쳐 정치결사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었다. 신당을 창당, 1985년 12대 총선에서 제1당으로 올라섰다. 같은 해 민추협에서는 1천만 개현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서울미문화원점거농성사건, 고대 앞 사태, 이듬해 건대 사태가 일어났다.
1987년 1월 박종철 추모 농성대회가 민추협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4월 13일 전두환의 호헌조치에 반대하며 양김에 의한 통일민주당이 새로 창당됐다. 감옥에 수감 중이던 이부영으로부터 고문치사의 전모를 알게 된 민추협의 김덕룡 등은 천주교에 이를 전달해 폭로하도록 조치했다.
5월 20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가 열리던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수환 추기경이 성경의 아벨에 빗대 박종철 열사를 추모했다.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하는 성명이 발표됐고 민추협을 주축으로 재야, 학생, 종교계가 뭉쳐 범국민적 결사체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출범했다. 6월 9일 이한열 군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다음날(6월 10일) 체육관 선거가 열리면서 전국민적 시위로 확산됐다. 넥타이 부대가 거리로 쏟아졌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내 손으로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뽑자”는 구호가 잇따랐다. 구속자가족협의회에서는 전경들 가슴팍에 꽃을 달아주는 평화투쟁을, 학생들은 경찰을 피해 명동성당 안에서나마 시위를 이어나갔다.
6월 25일 YS는 전두환과의 회담이 결렬됐다고 선언했다. 6월 항쟁의 폭발력과 같은 그 한 마디는 26일 100만 국민 대행진을 촉발시켰다. 이윽고 6월 29일 신군부는 호헌 조치를 철회했다. 국민 요구인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
길고도 긴 터널을 지나 1987 체제의 여명이 오는 순간이었다.
박재호를 만나다
“권위주의 체제라는 말이 맞는지 몰라도요….”
“네.”
박재호 의원을 만났다. 지난 1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사무실에서였다. 마주하면 시대 담론에 대한 고민부터 풀어놓으려 했다. 예전부터 그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해 왔다. 이를 모르지 않았다. 시대가 책갈피라면 그의 페이지는 부마항쟁 때부터 등장할 것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학생 신분으로 시위에 가담했다. 이후 YS(김영삼)-노무현의 후예가 돼 지금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의 성지 부산을 지켜 왔다.
- 우리나라가 구체제와 결별해 민주화 제도를 이루고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민주투쟁을 통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기 때문이잖아요.
“당연하죠.”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뭣하냐는 표정.
- 그 중심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있었는데요, 체제를 이루는데 큰 획을 그었음에도 조명을 받지 못하는 부분 중 하나는 뭘까요?
“…”
- 생각하면 그 공을 지금의 586이 전부 뺏어갔다고 보이거든요.
“민추협은 정치권에서 만든 거잖소.”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두 분(YS-DJ)이 다 대통령 됐고, 그 밑의 뿌리들이 정치권에 있다가 나이 들면서 그만두고 학생운동권 세력들이 영입되면서 성장해왔던 거겠죠. 이들도 한 3,4년 되면 물러가야 할 때가 오지 않겠소.”
“특정 세력의 독점이라기보다 시대에 따른 것”이라는 얘기였다.
- 상도동이건 동교동이건 지금의 민추협 원로들은 ‘우리의 민주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은 정당이 없다’고 하거든요.
“정서적 계승은 이어올지 모르지만, 시대가 지나버렸으니까.”
담담하니 말했다.
“다음 세대로 가야 하는 게 맞지.”
허스키한 목소리다.
나지막한 톤의 부산 사투리가 아득한 곳의 뱃고동 소리처럼 들렸다.
- 미래로 가려면 권력구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판을 바꿔줄 때가 왔지.”
잘라 말했다.
“지금 우리의 정치문화는
올오어낫싱(all-or-nothing) 게임이에요.”
할 말이 많다는 듯 몸을 앞으로 숙였다.
“대통령도 5년마다 바뀌기 때문에 잘하든 못하든 매일 비판하면 돼. 국회의원은 공천에만 매달려. 정책 대안은 없고 상대 당, 상대 후보가 잘못돼야 내가 이득을 본다는 생각을 갖는다, 이 말이에요.”
혀를 찼다.
“진짜 똑똑하고 괜찮아도 정치권에만 들어가면 똑같은 사람이 되잖아요. 이걸 바꿔야 해요. 지금 체제가 한 40년 됐잖아요. 바꿔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 선거구제 개편이라도 필요한 일 아닌가요.
“중대선거구제로 가야 해요. 지역구 안에서 한두 명 뽑으면 싸움할 이유가 별로 없어요. 대통령직선제라도 결선투표제를 하면 억울함이 좀 덜할 겁니다. 기업들도 5년마다 정권이 바뀌니 불안하지. 그렇다고 4년 중임제를 하면 포퓰리즘만 더 생겨요.”
“사실 최고 좋은 건 내각제”라며 말을 이었다.
“국민이 뭐라 해도 국회의원만큼 투명한 게 없어요. 일본의 내각제를 생각하면 안 돼요. 한 당에서만 나온다면 발전이 없고 침체 되겠지만 우리나라는 여야가 명확하거든. 국회의원이 많으면 국민은 오히려 좋아요. 실제 일도 많이 하고 관료들도 감시감독하니까. 내각제가 뿌리내리면 관료들도 다 따라와요.”
관료들이 문제냐는 듯 묻자,
“세종시로 간 지 몇 년 됐잖아요?”
운을 뗐다.
“거기 가고부터는 자기들끼리만 논다는 얘기가 있어요. 과천에 있을 때만 해도 친구들과 만나 술도 먹으면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한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대요. 그러면서 순치를 하는 건데, 갈수록 괴리만 커지는 거예요. 이를 바꿔야 해요. 5년 단임제가 되면 관료를 못 이겨요. 국회의원도 법을 만드는 권한이 있지만, 국가 살림이나 이런 건 아무 권한이 없어. 승인만 해줄 따름이지.”
- 왜 안 될까요.
”정치 오래 한 사람도 쉽지 않아요.”
-윤석열 대통령은 하지 않을까요.
”집권 1,2년 차에 꺼내겠어요. 예전 노무현 대통령이었으니까 그런 시도조차 하려 했던 거지. 문재인 대통령도 못 했잖아요.”
노무현은 당선 후부터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언급했다. 임기 중 개헌 카드를 내놓기도 했다.
- 어쨌든 제도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를 만들려면 모멘텀이 필요한데요. 과연 있을까 싶어요.
“중요한 것은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예요. 정치권에서만 앞서가면 기득권 챙기기로 비칠 수 있어요. 학계와 언론이 나서줘야 해요.”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공감대를 넓혀가야 한다는 얘기였다.
- 정치문화를 바꿔야 하는데 지금 부산도 위기 아닌가요.
“하하...”
3전 4기를 시작으로 재선을 이어온 그지만, 정권이 교체되면서 부산 민심은 싸늘해져 있다.
“최근에는 좀 나아졌어요.”
- 어떻게요.
“윤석열 대통령이 못하잖소. 부산에서도 ‘잘못 찍었다’하는 분들도 생기고 있고….”
뚜껑은 열어봐야 한다는 듯. “2년 후 어떤 바람이 부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정치의 시작
“처음엔 정치를 어떻게 하게 됐나요.”
‘정치인 박재호의 시간’으로 들어섰다.
1959년 부산서 태어났다. 연산초, 동해중, 동성고를 거쳐 동아대학교에 입학해 부마항쟁에 참여했다. 이후 부산외국어대학교에 입학, 졸업했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를 받았다.
“부산서 학생운동할 때 우리 고등학교 선배가 이종혁이었어요. 서석재(상도동계·5선) 의원 비서관이었어. 서울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동문 선배들 만날 때 그때 뵙게 됐지.”
동성고 선배 중에는 그룹 <벌떼들>의 현철을 비롯해 서울서 잘나가는 이들이 몇 됐다. 이종혁과는 고등학교와 대학 선후배 사이였다. 친구들과 그 집 가서 술 먹고 잔 뒤 부산에 내려갔다. 하루는 연락이 왔다.
대학 4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의원실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의였다. 이왕 하는 것 “선배가 있는 서석재 의원 밑에서 하고 싶다”고 했다. 당장 자리가 생기지는 않아 기다리는데 통일민주당이 만들어졌다.
“그때 통일민주당은 상도동, 동교동 딱 반이야.”
민추협때부터 지켜지던 원칙이었다.
“돈도 반반, 자리도 반반. 언론부장이 하나 비었는가 봐. 내보고 하라 해서 그때 아마 통일민주당서 최연소 언론부장을 했을 거야.” 안양의 누나 집에서 출퇴근했다. 새벽 5시 반에 나와 출근하면 사무실 청소부터 했다.
“속기록부터 신문 스크랩하는 게 일이라.”
서석재로부터 배운 것
“한번 보자.”
서석재 의원한테 연락이 온 건 한두 달 뒤였다.
#무교동 일식집 “같이 하자.” “정치하려면 세 가지만 조심해라. 첫째 무조건 겸손해라. 둘째 절대 거짓말하지 마라. 불리한 말을 하지 마라. (불리하면 차라리 침묵을 지키라는 말이었다) 셋째 인심을 얻어라. 주변 사람들한테 잘해라. 그리고 할 말 못 할 말 구별하라.” |
비서관 시절의 일화도 전해졌다.
#87 대선 운동 조직 관리를 하던 서석재, 박재호한테 돈 맡기면서 |
문민정부 비서관
YS 얘기로 넘어왔다. 상도동 막내인 그는 YS 방계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통령 비서실 인사재무비서관으로 일했다. 청와대 요직을 두루 거쳤다. 실세라 불렸다.
임기 말이 다가오면서 이회창 대선후보가 무리수를 뒀다. 대구 유세에서 YS 인형을 들고 와 화형식을 한 것이다.
“그때 나는 마음이 돌아섰지.”
이회창을 지지할 수 없었다. 청와대 있으니 공개 의사 표시를 못 했지만 내심으로는 서석재 의원이 돕고 있는 이인제를 지지했다.
“DJ가 됐음에도 우리 쪽 부산시당은 죄다 민정계가 잡았어요.”
당은 이회창 쪽으로 넘어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민주계가 다 죽은 거지. 김무성, 박관용 선배가 있어도 힘을 쓰나.”
‘아, 이건 진짜 아니다.’
한나라당과 멀어지고 있었다.
- 미국에 가잖아요?
“가족들 다 데리고 갔어요. 아이오와라고 아주 시골이죠. <도망자> 책에 나오는 옥수수밭이 가장 많은 곳이었지.
아이오와 주립대학 객원 연구원으로 한 2년 있었다. 부산으로 돌아온 것은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면서다. 출마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났다.
- 그때만 해도 한나라당 출마를 고려했지요?
“그러려 했죠.”
마음은 떠나 있었지만, 현실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어느 지역구에 나오려고 했나요.
“부산사하구나 진구에 나오려 했지요.”
- 그러다 노무현을 만나잖아요.
“교보문고에서 우연히 광재(이광재)를 만난 거예요.”
#교보문고, 이광재 “우리 대장 한 번 만납시다.” |
박 의원도 예전부터 노무현을 알고 있었다. 이광재를 포함해 셋 다 통일민주당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3당 합당 과정에서 박재호는 YS와 함께했지만, 반발한 노무현은 꼬마민주당에 잔류하다 DJ의 새정치민주당으로 옮겨갔다. 그의 비서관으로 정치를 시작한 이광재도 돌고돌아 노무현을 만났다.
“그래서 시작된 거죠.”
암튼 이런 연유로 다시 노무현과 마주하게 됐다는 얘기였다.
“같이 점심 먹는데 한 5분 만에 꼬여서는…(웃음).”
- 빨아들이는 힘이 있나요.
“있었죠. 딱 하는 말이 서울서 참 고생했다. 정치권에서 깨끗하다는 얘기 들었다. 나도 부산에서 잘나가는 변호사인데 서울 오니까 아무도 안 봐주더라. 당시는 평준화가 없었거든요. 명문대학만 나오면 무위도식하면서 평생 그 학력 하나로 브로커처럼 사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다….”
- 통추(통합추진위원회 : 노무현, 김원기, 이부영, 제정구 등 3당 합당과 새정치국민회의창당 반대 인사들 모임) 사람들 만나보면 노무현이 학력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하더라고요.
“오히려 그것이 새로운 활기가 됐죠. 학력만 있다고 해서 무위도식하는 그런 세상 말고 열심히 하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지 않느냐.”
그것이 노무현의 꿈이라고 했다.
“나도 그런 걸 많이 느꼈어요. 지방에서 올라오면 느끼게 돼요. 서울에는 인맥으로….”
노무현과 함께
“어쨌든 만나서는….”
다시 노무현과의 일화로 넘어왔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득됐습니까.”
#盧와의 대화 “부산 가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내가 내 지역 놔놓고 서울에서 4선하면 뭐해요. 내 지역 가서 할랍니다.” |
노무현은 부산북강서로 출마했다. 체육관서 사자후를 터트리던 일화는 유명하다.
#북강서 체육관 연설 ““호남에서도 콩이면 부산서도 콩입니다. 부산서도 팥이면 호남에서도 팥입니다. 부산 시민들이 나만 도와준다면 호남 표를 가져올 자신이 있습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
하지만 떨어졌다. 이때부터 ‘바보 노무현’이 바람 불기 시작했다. 대선주자 노무현의 길이 열렸다.
“노무현이 해양수산부 장관 갔을 때 대통령 출마하겠다고 하더라고요.”
-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나요.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지. 이광재, 안희정, 이광철 선배 등 그때 한 여덟 명이 돕고 있었어요.”
- 당시만 해도 완전국민경선하기 전이라 위에서 대선후보를 내리꽂는 분위기였잖아요. 그런데도 된다고 생각했습니까.
“나는 왜 노무현이 된다고 생각했냐면…. 부산 내려와 친구들을 보니까, 30대 초중반들인데 대다수 노무현이야. 내가 ‘노무현 돕는다’카니까 ‘형, 진짜 잘했습니다.’”
다들 이런 반응이었다.
“기득권 쪽에서는 못 느꼈겠지만 젊은 사람들의 열기는 대단했어.”
- 왜 노무현이었나요.
“상당히 깨끗한 데다 지역 타파하고 확실히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꿈을 준 거예요. 현상만 유지하는 자가 어떻게 정치를 하겠어요. 뭔가 변화를 줘야죠.”
노풍은 PC통신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라는 조직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면서 불이 붙은 거죠. 다들 닉네임으로 했잖아. 서울대 나오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는 거라. 저것끼리 만나서 회장도 뽑고 자기 돈 내고 참여했잖아요.” 출신도 배경도 상관없었다. 팬덤 현상이 신드롬처럼 일어났다.
- 노무현 대통령 되고는 정무비서관을 했잖아요.
“갔다가 한 8개월쯤 됐나. 출마해야 하니까 나왔죠.”
- 왜 하려고 했나요.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
- 무대(김무성) 지역구였단 말이죠.
“되고 안 되고 센 후보와 붙어야 될 거 아니가.”
- 그래도 일단 당선이 돼야?
“어디를 가나 똑같아요. 정동영 의장의 노인폄하 발언 같은 게 나오니까 답이 없는 거지.”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의 노무현 탄핵 역풍에 힘입어 대승을 거뒀다면, 한나라당은 정동영의 노인폄하 발언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대참패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간 박재호도 선전했다. 하지만 폄하 발언 등이 나오면서 역부족이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처음 나왔는데도 45%가량 받았으니까 잘했지”라고 덧붙였다.
- 좀 더 쉬운 지역구를 나가지 그랬어요.
“후배들도 어려운 데 가서 붙는데 내가 어떻게 쉬운 데 간다 하겠어요.”
- 하여간 세 번 내리 도전해 떨어졌고 그사이 횟집도 했잖아요.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도 했었죠. 그 뒤 출마해도 안 되더라고.”
19대 총선을 말했다.
“떨어지고 나니 느낀 게 지금은 타이밍이 아닌가 보다.”
타이밍을 잡기까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후배 소개로 회사에도 다녔지만, 청와대 출신이다 보니 찾아와 청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잘못하면 브로커가 되겠다 싶어 “내 손으로 벌어먹고사는 걸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부산서 삼삼횟집을 보고 서울서 해야겠다고 했다.
“요리학원을 갔죠. 한 6개월 배웠을 거다.” 지인들 17명과 십십일반 모아 횟집을 차렸다. 수익도 났다. 경기가 안 좋을 때도 있었지만 수년 동안 생활이 됐다. 그만둔 것은 20대 국회의원에 도전하면서다. 후배가 인수해 줬다.
- 지금도 있나요.
“없어요.”
- 꽤 맛있었는데.
“맛있었죠.”
- 이제 술 마시는 문화가 많이 사라져가고 있잖아요.
“많이 바뀌고 있죠.”
- 왜 또 출마할 생각을 한 건가요.
“다들 내보고 ‘또라이(미친놈의 비속어)’라 했지(웃음).”
“하하.”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 집사람이 세상을 떠났어.”
2015년 10월이었다. “출마를 접으려고 했어.”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후배들이 다 찾아왔어.” 구의원 등 정치하는 후배들이었다. “‘형님 나중에 나이 들면 누구하고 살낍니까. 우리하고 있을 거 아닙니까. 다시 힘내서 합시다.’” 한참을 숙고했다. “그래. 마지막이니까 하자.” 이듬해 20대 총선에 출마했다. 3전 4기 만에 48.11%를 얻고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불쌍해서 찍어준 거지.” 겸손하니 말했다.
- 부산서 민주당이 꽤 많이 당선됐잖아요. 돌풍의 근원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끊임없이 도전했던 사람들이었잖아요. 김혜영 의원 빼고는 세 번씩 다 떨어졌어. 적어도 45, 46%는 받아왔어요. 주민들이 볼 때 저것들 참 안 됐다. 한번 시켜보자. 이리 된 거지.”
민주당의 박재호·김영춘·최인호·전재수·김해영 등 부산의 ‘갈매기 5형제’라 불린 후보들은 20대 총선서 모두 승리했다.
- 특히 김영춘과는 YS-노무현 후예라는 점에서 부산의 상징성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기도 한데요.
“상도동에서는 영춘이가 내보다 조금 빨리 시작했어요. 참 대단한 친구였는데, 너무 깨끗하고 선비 같거든요. 정치적으로 엄청 클 수 있는 인물이었지. 만약에 영춘이가 이번에 당선됐으면 대통령 후보도 못 할 거 없잖아요. 안타깝죠.”
김영춘은 21대 총선서 부산진구갑 재도전에 실패했다.
- 21대 총선 앞두고 무대(김무성)와 인터뷰했는데 그러더라고요. ‘박재호는 되는데 김영춘은 힘들다’고요. 결과를 보고 신기했어요.
“나는 지역에서 오래 있었잖아. 어느 집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다 알만큼 누볐으니까. 아직도 어르신들은 빨갱이 정당이라고 해서 안 뽑지만 아주머니들은 오래 다니고 하면 불쌍하다면서 찍어주기도 해요. 형, 동생하는 사람들도 많아.”
혼자 받을 수 있는 표가 한 15% 된다.
“영춘이는 서울서 정치를 배웠으니까 세력이 없어요. 그런 면이 좀 약했던 거지.”
- 부산이 3당 합당 전에는….
“다 우리 쪽이었지.”
민주계를 말했다.
- 근데 왜….
“3당 합당 후 (보수당이 된 민주계가) 선거에서 이길 방법이 뭐가 있겠어요. 이길 수 있는 명분이 부족하잖아. YS만 보고 찍어주지는 않잖아. 대통령까지 됐으니까, 그래서 한 게 뭐냐면 호남론, 빨갱이 덫을 놓은 거야. 영남 사람들이 거기엔 약하잖아요. 너무 많이 퍼트린 거야. 토착화돼 버린 거지. 한쪽이 오랫동안 집권하다 보면 유착되면서 집단적인 의식 구조가 생기는 거죠.”
- 지금의 민주당이 예전 민주당과 좀 차이가 있다는 말도 있잖아요.
“차이는 있을 수 있는데, 저쪽보다는 낫죠. 저기는 (3당 합당 후) 민정당이 돼 버렸잖아요. 지금도 자기들 내부에 사람이 없으니까 황교안부터 윤석열 등 외부에서 데려오잖아요. 나라가 어떻게 되든 여당을 해야 한다는 거 아니야. 정권을 잡았지만 뻔하잖아요.”
덧붙여 “정치는 이너서클(측근), 주류, 비주로 딱 세 종류”라고 했다.
“이너스클이 누구냐. 자기하고 오래 한 사람들. 인사의 95%는 이들이 다해요. YS때는 김현철을 비롯해 홍인길·김덕룡 선배가 있었잖아요. 이명박, 박근혜도 똑같아. 윤석열 대통령이라고 다르겠어.”
- 그건 뭐 정치의 속성상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이재명 의원은 초선이지만 정치를 좀 했잖아요. 거긴 이너서클이 성남 쪽이지.”
어쨌든 “YS나 이명박, 박근혜는 실세들이 오랫동안 정치한 인물들이잖아요. 지금은 한동훈·이상민 등은 정치하고는 아무 관계없는데 끌고 온 거잖아. 맨날 눈치 보고 앉아 있는 집단이 무슨 정치를 하노.”
- 민주당만 놓고 보면 김부겸-이광재-김영춘 등은 공천권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이잖아요. 아쉽단 생각을 합니다.
“안 되는 거 알면서 나갔잖아요.”
그런 정신을 높이 샀다.
홀로 남은 현역
김영춘의 경우는 아예 정계에서 물러났다.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지방선거 부산시장에 출마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반문 바람이 거셀 때였다. 그는 거대 담론의 시대는 지났다는 말과 함께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YS·노무현을 계승하는 현역의원을 찾아보니 유일하더라고요. 김영춘이 은퇴했으니….
“그런가요.”
홀로 남겨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쓸쓸한 웃음기가 스쳤다.
- 두 지도자의 후예로서, 그분들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도 궁금한데요. YS는 민주화를 제도화했고, 노무현은 상향식 국민경선을 통해 대통령이 된 첫 경우잖아요.
“사실은 정치하면서 조직이라든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서석재 의원한테서 많이 배웠어요.”
서석재 의원 얘기부터 먼저 꺼냈다. 양보해야 내 것이 많아진다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YS는 그분의 돌파력과 결단력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고 봐요. 천부적이에요. 정치적 감각은 최고인 것 같아. 금융실명제하고, 조선총독부 철거하고, 하나회 척결하는 것 보면 오랫동안 정치하면서 군부 종식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완전히 신념처럼 생각하고 실천해냈던 것 같아요.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는 명분이지만 국가는 실리로 가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이 있었어요. 왜 정치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외교에서도 자주국방을 위해 군비를 얼마나 확충해야 하는지, 강정마을에 왜 해군기지를 가져와야 하는지, FTA를 왜 해야 하는지 등 시대에 맞는 실용적인 국부론을 펼쳤다고 생각해요.”
DJ 얘기도 보탰다. “벤처 창업을 많이 시키면서 새로운 미래 먹거리를 만들었잖아요. 대한민국 기반과 비전을 만든 세분 지도자에 대해서는 진짜 존경을 넘어 많이 배웠죠. 앞으로 이런 지도자들이 다시 나올까 싶어요.”
뜸을 들이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변화를 주는 사람이 또 나와야 할 텐데 말이죠.”
- 스스로는 그런 사람이 될 생각은요.
“하늘이 내는 거죠.”
인터뷰 후반부는 현안으로 마무리했다.
“정무위원으로서 산업은행 부산 이전 찬성하나요.”
“찬성해야죠.”
“윤석열표 공약인데 국민의힘에 더 좋지 않을까요.”
“지역균형 발전을 위해서 하는 건데 누구 공약이든 뭐든 할 건 해야죠.”
“민주당 전당대회를 바라보는 관점은요.”
“이재명 의원이 되긴 하겠지만, 정당이라는 게 한쪽만 일방적으로 비대해지면 안 좋아요. 주류 대 비주류가 한 6대 4정도만 돼도 견제할 수가 있겠죠.”
“분당 가능성은요?”
“우리 당이나 저쪽 당이나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나버렸어요.”
일어나면서는 ‘체제 얘기’로 매듭을 졌다.
“다음에 또 도전해야 정치문화를 바꾸는 일이든 뭐든 할 거 아녜요?”
“정치개혁해야죠. 기회가 닿는 대로 얘기할 겁니다.” 박 의원이 말하는 정치개혁은 중선거구제로의 선거구제 개편과 내각제로의 권력구조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좌우명 : 꿈은 자산!
독일식 내각제가 좋지만
니들은 일본식 내각제를 하고 싶고
내각제를 할만큼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깨끗하지도 못하고 능력도 없음..그러니 니들은 이재명 같은 능력있는 대통령을 대통령못되게 일부러ㅜ만든거지...무능력한 융석열을 대통령 만든이유지... 대통령의 문제점을 잘 말할수있고 그 핑계로 일존식 내각제를 만들어서 니들만의 기득권부류를 영원히 해먹고 싶을뿐...니들은 네각제를 할 수준이 못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