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보호 위해 필요 vs 쌀 공급 과잉 부추겨…양곡관리법 갈등 [거부법안 돌아보기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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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보호 위해 필요 vs 쌀 공급 과잉 부추겨…양곡관리법 갈등 [거부법안 돌아보기③]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4.09.04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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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과 생산된 쌀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라는 게 골자
정부여당 “쌀 공급 과잉인데 쌀농사 더 지으라는 법안”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예상대로입니다. 제22대 총선 결과를 본 모든 사람이 예견했던 것처럼, 비토크라시(vetocracy)가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비토크라시란 미국 스탠퍼드대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가 미국 양당 정치를 비판하며 만든 용어로, 상대 정파의 주장이라면 모조리 거부하는 극단적 파당 정치를 의미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비토크라시가 ‘야당의 입법독주-대통령의 거부권’ 형태로 발현되고 있습니다.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한 야당은 주요 법안을 밀어붙이고,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활용해 법안을 무효화하는 행태가 반복됩니다. 국회 내에서도, 국회와 행정부 사이에서도 조정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늘 강조하듯, 이 같은 극단적 갈등의 피해자는 국민입니다. ‘밀어붙이기’와 ‘거부권’이 오가는 무의미한 시간 속에, 정작 민생에 필요한 법안들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지방 소멸을 넘어 국가 소멸을 걱정할 정도의 위기가 닥쳐오는데도, 눈앞의 권력을 향한 탐욕에 우리 정치권은 파멸을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정신 나간 질주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국민뿐입니다. 절대다수 의석을 가진 여당 시절에도 손대지 않았던 법안들을 충분한 검토 없이 ‘일단 내밀고 보는’ 야당이나, 야당의 말이라면 비난부터 하고 보는 정부여당 모두에게 회초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치가 바뀌고, 대한민국이 바뀝니다.

이에 <시사오늘>은 야당이 단독으로 국회를 통과시키고, 윤석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야당 지지자는 무조건 윤 대통령을 욕하고, 여당 지지자는 무조건 야당을 욕하는 이 공멸의 정치를 끝내기 위해선 먼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본 기획이 정치 복원의 작은 단초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국회 앞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 통과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 앞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 통과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양곡관리법 개정안


야당 입장
“쌀값 안정·농민 보호 위해 꼭 필요해”

양곡관리법이란 쌀이 너무 많이 생산돼 가격이 폭락하면 정부가 나서 쌀을 매입하도록 하는 법안입니다. 양곡관리법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농민들이 계속 쌀농사를 짓게 만드는 겁니다. 쌀은 우리 국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곡식이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은 반드시 우리 땅에서 우리 손으로 생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쌀값이 폭락하면 농민들은 쌀농사를 포기하고 다른 상품을 재배하려 할 겁니다. 그래서 정부는 지나치게 쌀값이 떨어지면 초과 생산량을 매입함으로써 쌀 가격을 어느 정도 이상 유지되도록 합니다. 그래야 농민들이 계속 쌀농사를 짓고, 우리 국민의 생존권도 보장할 수 있으니까요.

두 번째는 물가 안정입니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쌀 생산량이 급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쌀은 우리 국민에게 꼭 필요하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겁니다. 이럴 때 정부는 초과생산 됐을 때 사들였던 쌀을 시장에 풉니다. 그러면 물가가 안정되고, 쌀이 없어 배를 곯을 위험도 사라지겠죠.

더불어민주당이 내놓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이런 매커니즘을 강화하는 법안입니다. 현행법에 따르면, 정부는 필요성이 인정될 때 쌀을 ‘매입할 수’ 있습니다. 쌀을 사들일지 말지는 정부가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쌀이 너무 많이 생산돼 가격이 떨어졌다고 해서 꼭 정부가 나서야 하는 건 아니죠.

민주당은 바로 이 부분을 의무화하겠다는 겁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민주당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보면, 쌀 수요 대비 초과 생산량이 3~5%거나 쌀값이 전년 대비 5~8% 하락할 때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전량 매입하도록 돼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쌀이 너무 많이 생산되거나 쌀값이 떨어지면 정부가 의무적으로 쌀을 사들여라’라는 거죠.

정부여당 입장
“양곡관리법은 쌀 공급 과잉 부추기는 법안”
“쌀 매입에만 매년 1조 원 넘는 예산 들어”

하지만 정부여당은 민주당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포퓰리즘’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쌀이 과잉 공급되고 있습니다. 생산량은 그대로인데 쌀 소비량은 나날이 줄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니 정부가 매입하는 쌀의 양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2021년까지 35만 톤 내외였던 정부의 쌀 매입량은 2022년 45만 톤, 2023년 40만 톤, 올해 45만 톤을 기록했습니다.

이 같은 공급 과잉을 개선하려면 쌀농사를 짓는 농민 일부가 다른 작물을 재배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쌀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면 다른 작물을 재배하려고 했던 농민들도 쌀농사를 계속하게 되고, 새로 쌀농사를 지으려는 농민들도 생길 겁니다.

이 경우 오히려 식량 안보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2022년 기준 쌀은 104.8%에 달하는 자급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밀은 0.7%, 옥수수는 0.8%, 콩은 7.7%의 자급률에 그치고 있습니다. 쌀 생산량을 줄이고 밀, 옥수수, 콩 등의 생산량을 늘려야 할 상황에, 쌀 가격을 보장하는 건 비합리적이라는 게 정부여당의 주장입니다.

쌀 매입에 너무 많은 예산이 소모된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올해 매입량인 45만 톤을 가마당 20만 원에 사들이면 약 1조1250억 원의 예산이 듭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30년이면 쌀 매입비가 2조7000억 원 안팎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죠. 여기에 보관비용까지 합치면 3조 원 이상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형평성의 문제도 있습니다. 사실 가격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는 업종이 쌀만 있는 건 아닙니다. 농·수·축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업종이 드물 겁니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어 다른 모든 업종에서 비슷한 정책을 시행하지 않을 거라면, 양곡관리법만 통과시키는 건 형평성 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죠.

식량 안보를 위해, 또 농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양곡관리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민주당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쌀이 과잉 공급되고 있는 상황에서 법으로 쌀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소득을 보장하는 건 타 작물을 재배할 유인을 떨어뜨리고 재정 부담도 지나치게 커진다는 정부여당 입장에도 귀를 기울여 봐야 합니다. 또 하나의 쟁점 법안인 양곡관리법,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대통령실 출입)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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