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병도 주필]
분열은 마침내 극점(極點)을 찍고 있다. 광복절 행사까지 두 쪽이 나기 시작했다.
1965년 창립한 광복회가 정부 광복절 행사에 참여치 않기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부 단체 등에선 이번 광복절 행사뿐 아니라 내년 3·1절 행사 등의 공식 보이콧까지 거론하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국가 분열’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홍익인간’을 배척하고 경시한 결과이다. 역사는 오래됐다. 민족 정기를 붙들지 않은채 제멋대로 살아온 결과이다. 서로 속이고 짓밟고 짓이기고 투항을 요구하며 살아온 ‘세월의 역사’, 그 얼마 이던가.
‘중심’이 없다보니 각자 제멋대로 살아가고, 걸핏하면 부딪히고 분열한다. 국가 존망의 위기도 수시로 출몰할 수 밖에 없다.
그러고도,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편법과 사술’만 난무할 뿐이다.
당연히 정치권의 권력쟁투는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국민과 역사’는 안중에도 없는, 온갖 술수의 명분과 실리의 저울질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됐다.
권력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면, 제멋대로 ‘헌법개정’까지 수시로 들이민다. 그러고는 온갖 수단적 책동을 일삼는다. 여기에 맞서야하는 정치세력 역시 이를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그 이상 치열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으로 볼때는 불필요하기 그지없는 권력게임의 ‘국력 출혈(出血)’에 다름아니다.
그 생생한 현대사의 사례가 바로 3당통합을 둘러싼 ‘내각제 개헌 쟁투’다. 필자의 비망록(秘忘錄)을 토대로 그 어처구니없는 갈등과 대결의 정국 실상을, 있는 그대로 정리, 독자와 국민앞에 정확히 알린다.
내각제 개헌 문제는 3당통합 당시 차기 대권경쟁과 관련, YS DJ JP 등 3자간의 ‘정치적 계산’이 첨예하게 얽혀 있었다. JP를 제외하고는 1노2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모두 심정적인 가중치를 찬성쪽에 두느냐, 아니면 반대에 두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계속 이중적이고도 유보적인 자세를 취했다.
3당통합 당시부터 민주자유당내 3지도자(노태우 김영삼 김종필)간에 내각제 합의 또는 밀약설이 설득력을 더하며 증폭돼 왔음에도 그러했다. 즉, 당시 한국 언론 대부분이 ‘내각제 밀약’을 강도높게 추궁하고 있었음에도, 대통령인 노태우가 내각제 추진의사를 분명히 선언하지 못하고, YS가 반대의사를 못박지 못하며, DJ가 내각제 자체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설명하지 않은 배경은 무엇이었던가.
당시 노태우는 3당통합후 청와대에서 처음 가진 여야 영수회담을 통해 DJ가 내각제 개헌 진의를 묻자 ‘정부형태는 국민의 뜻에 따를 것’이라는 완곡한 유보적 입장을 피력하면서도 “내각제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골고루 줄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발언했다.
즉, 3당통합 과정에서 상당한 소외감을 느꼈다고 볼 수 있는 DJ를 상대로한 자리에서 이같이 ‘특별한’ 언급을 했다는 사실은 곧 3당통합후 정국 주도세력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DJ에게 ‘제휴’를 위한 새로운 시사점을 던진 것이었다.
당시 일부 관측통들은 특히 이날 회담에서 노태우의 발언보다도 더 깊은 ‘민자-평민 연정구상’에 대한 내밀한 의견타진이 있었을 것이란 분석들을 했다.
따라서 노태우는 이같은 시사점의 제공을 통해 DJ와 평민당의 3당통합에 대한 강경공세와 이로 인한 정국경색을 막고, 내각제 개헌시 여야 합의에 의해 DJ에게 불리한 ‘대접’을 하지 않겠다는 개헌의 길을 열어놓는 한편으로, 여론이 악화되거나 DJ의 강력한 반대로 상황이 여의치 못하게 돌아갈 경우에는 개헌논의를 포기할 수 있다는 이중적 방향을 설정했음을 보여줬다.
당내 반대세력인 YS에 대한 견제포석과 동시에 개헌후의 제2정계개편까지 염두에 둔, DJ 포섭 단서 제공 등 양김에 대한 연금술이 깔려 있었다는 진단이다.
그것은 DJ의 반응에서도 확인됐다. 회담 후 DJ의 내각제에 대한 입장은 일단 거부의 자세에 가중치를 두면서도 내각제 자체의 장단에 대해서는 일체 거론을 피한채 내각제 실현을 위한 ‘전제조건’을 많이 달았다. 대단히 복잡 미묘하게 나타난 것이 YS와 달랐다.
내각제에 대한 DJ의 입장은 평민당 양성우 의원이 90년 7월 5일 국회 행정위에서 행한 대정부 질의 속기록에서 명료하게 나타났다. 평민당 의원들의 질의 내용은 댸부분 DJ의 입장을 거의 일사분란하게 대변한다는 점에서 이 내용은 DJ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민자당의 김윤환 정무 1장관은 내각제를 지론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민자당의 당 강령 1조에 ‘의회와 내각이 함께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는 문구가 명시되자 이에 대해 ‘내각제를 향한 첫 출발’이라고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했는데, 장관의 내각제에 대한 입장을 명시적으로 밝히라. 또 정무장관실에서 주요 정책 연구과제로 국가권력 구조문제를 연구하고 있다는데, 사실인가. 이것은 3개 정당의 통합목적이 장기 집권을 효율적으로 보장하는 내각제에 있음을 증명하는것 아닌가. 내각제가 제도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복수 정당제’ ‘완전한 정치적 자유’ ‘군의 정치적 중립과 문민통치의 전통’ ‘직업 공무원제의 확립’ ‘지방 자치제의 실시’ ‘정치인과 국민들의 수준높은 정치의식과 사명감’ 등이 필히 전제조건이 돼야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은 내각제 자체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평가를 피한채 정부 여당의 내각제 개헌 시도가 ‘장기집권’에 있음을 부각시키면서 ‘안정된 복수 정당제’와 평민당이 집요하게 최대 정책현안으로 주장해온 '지방 자치제 실시'를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사실이다.
즉, 개헌 추진이 먼저가 아니라 3당통합으로 인한 여대야소의 합당구조를 깨기위한 13대 국회의 해산과 조기 총선, 그리고 지자제 실시를 거쳐 양당 구조로 ‘평민당’의 정치적 위상이 일신되거나 지분을 확실히 보장받는 방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배수진을 친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는 곧 1노2김이 모두 가중치는 다르지만, 상황과 역학의 변동에 따라 얼마든지 ‘소신’을 바꿀 수 있는 가변성을 깔아 놓고 있었다는 분석으로 귀결된다.
한국의 ‘권력’들은 그렇게 국가 운영의 큰 틀을 소신도 근거도 없이, 자신의 ‘권력욕’을 가장 큰 축(軸)으로 놓고 항상 제멋대로 재단하려 했다. 국민과 ‘역사’는 안중에 없었다. ‘오늘’의 정치권은, 이제는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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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는…
부산고·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정치부 기자로 출발한 후 연합뉴스 정치·경제·외신부 기자·차장, YTN 차장, 평화방송(PBC) 정경부장, 가톨릭 출판사 편집주간을 지냈다.
연합뉴스 재직 중에는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일했고, '홍콩 유령바이어 사기사건' 보도로 특종상을 수상했다.
일본 FOREIGN PRESS CENTER 초청으로 자민당을 연구하였고, 남북회담 취재차 평양을 방문하였다. 저서로는 <6공해제(解題)>,<YS 대권전쟁>,<최후의 승자>,<영원한 승부사>,<대한민국 60년> 등이 있다. 평소 민족주의와 역사주의를 기준으로한 집필경향을 보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