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병도 주필]
정신은 오래전부터 이미 썩어 있었다. 국권이 통째로 이민족에게 넘어간, 한민족 최악의 귀결, 일제 침탈 36년 말할 수 없는 수모와 고통을 겪고도 '반성'은 결코 없었다.
‘홍익인간’ 민족정기는 계속 균열되고 흔들렸고, ‘충효(忠孝)’ 역시 착근을 못한채 ‘사기와 협잡’의 권력 장난질 속에 나라의 정신은 더 썩고 병들어 갔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 국가운영의 기본 틀인 ‘헌법’을 누더기로 만들어 버린, 최고 권력자들의 잇딴 사술과 협잡은 가뜩이나 민족혼이 침화된 국민 정신을 더욱 도탄에 빠뜨리게 하고, 국가 존립의 기본 근거를 숱한 병리의 질환으로 물들게 했다.
이승만부터가 그러했다. 그의 사전에 나라와 겨례의 독립 자존을 향한 ‘순수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언제나 자신의 ‘권력(權力)’만이 최우선 화두였다. 국민과 역사를 기만했다.
독재 권력들의 술수와 유린으로 얼룩진, 일그러진 한국 개헌사(改憲史)를 재정리, 다시 상기한다.
제 1차 개헌(1952.7.1)부터 뒤틀렸다. 온통 권력 싸움박질일 뿐이었다.
제헌 헌법은 건국 일정에 쫓겨서 대통령제이면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이상한 정부 형태가 되었다. 이승만은 정당의 당적을 갖지 아니하며 초연한 지위에서 국정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독재는 국회의원들의 배척을 받았고 차기에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직선제를 겨냥해 두 차례나 정부에서 낸 개헌안이 부결되었다. 이에 초조한 정부는 다시 직선제 개헌안을 내면서, 관제 데모대를 동원해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하기에 이르렀다. 국회는 이에 맞서서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발의했다. 이에 정부는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발의한 중진 의원 10명을 공산당과 연루되었다는 구실로 구속하고, 공비가 출몰한다는 이유로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정부와 의회가 협상으로 양 개정안에서 발췌한 발췌 개헌안을 만들어 공고 절차도 없이 기립 표결로 통과했다.
이로써 대통령의 재선의 길이 열렸다. 이는 6·25동란 중 부산 임시 수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를 본 영국 런던타임스 기자가 '한국에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는 말을 런던 타임스에 실었다.
독재자의 말로를 재촉한 제2차 개헌(1954.1.23)이 있었다. 이승만의 3기 집권은 대통령 연임을 두 번으로 제한한 헌법 규정으로 좌절되게 되었다. 이때 정당의 지지 없이 정치를 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 이승만은 자유당을 만들어 국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자유당은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하여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특정인을 위한 예외조항을 두는 개헌안을 상정했다. 국회에서 재적 203명 중 135표를 얻어서 개헌선에 (재적 3분의 2인 135.333)에 0.333인이 미달돼 부결됐다.
의장은 부결을 선포했으나 2일 후 4사 5입 이론을 내세워 개헌선을 135표로 수정하여 개헌을 선포했다. 이는 분명히 위헌인 개헌이었으나 자유당은 그대로 밀고 나갔다. 당시 YS는 이에 저항, 자유당을 탈당했다.
제3차 개헌(1960.6.15) 역시 이승만 권력을 위한 편법이었다.
2차 개헌으로 3기를 재임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이 대통령과 후계자인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하여 대대적이고 공개적인 3·15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3·15부정선거는 대대적인 국민의 저항을 받아 4·19로 이어지게 되고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이승만은 하야해 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 후 의원내각제 정부 형태로 3차 개헌을 하게 되었다.
제4차 개헌(1960.11.29)은 정치적 산물이었다.
4·19이후 부정 선거범을 처벌하기 위한 법적인 근거가 없어서 반민주 행위를 한 부정 선거의 원흉이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에 4·19 학생들의 시위와 4·19 부상 학생들의 의사당 점거에 의한 강요로 국회는 마침내 개헌을 하게 됐다.
부정 선거범과 부정 축재자들을 소급 처벌할 근거를 헌법에 넣는 개헌이었다.
제5차 개헌(1962.12.26)은 군사 쿠데타 산물이었다.
제2공화국은 5.16군사 쿠데타로 무너져 헌정이 중단되고, 박정희를 정점으로 현역 군인들로 구성된 국가재건 최고회의가 3권을 장악하고 군인들이 국가 전권을 장악하는 군정이 실시되었다.
우여곡절을 거쳐서 민정 이양을 위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게 됐다. 대통령제로 복귀하고 대통령의 재임을 2기로 국한하는 5차 헌법 개정안이 국민 투표로 확정되어 제3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전역 후 민정에 참여한 후 치른 윤보선 후보와의 선거전에서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어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고 근대화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등 부국강병을 위한 노력을 보여 주긴 했다.
이어, 박정희 권력 강화를 위한 제6차 개헌 (1969.10.21)이 있었다.
박정희 2기에는 윤보선 후보와의 경쟁에서 상당한 차이로 당선돼 국민의 신임을 획득했다. 이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과를 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힘을 얻은 박정희는 경제 개발을 시작한 자신이 더욱 박차를 가하여 기반을 닦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통령 연임을 3기로 연장하는 개헌을 시도하였다.
처음에는 공화당에서조차 반대했다. 그러나 집요한 설득과 회유로 3기 연임의 개헌안을 제안하게 됐고. 야당의 결사적인 반대에 봉착한 여당은 야당이 국회 의장석을 점거한 사이에 일요일 새벽 2시 38분에 국회 별관에서 여당 의원들과 매수한 야당 의원 3명(122명)에 의해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박정희 권력은 허물어지는 조짐에도, 마침내 국민을 정면으로 속이는 제7차 개헌(1972.11.24), 이른바 ‘유신 개헌’까지 단행한다.
3선으로 당선된 박정희는 다시는 개헌하지 않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을 깨고 7.4공동 성명 등 남북 대화로 국민의 마음을 통일 문제로 돌린 후 남북 통일과 능률의 극대화를 기한다는 명분으로 10월 유신이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스스로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하고, 국무 회의에서 자신이 제안한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후 국민투표로 확정시켜 사실상 정권 교체가 불가능한 유신 헌법을 만들었다.
유신 헌법은 대통령 직선제가 국론을 분열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통일 주체 국민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그 기구를 통해 대통령을 간선하도록 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통일 주체 국민회의의 동의로 대통령이 추천할 수 있게 하고, 사법부의 인사권도 대통령이 장악해 비민주적인 절대 대통령제(신대통령제)를 만들어 냈다.
이 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와 저항이 끊이지 않자 정부는 긴급조치라는, 헌법까지 정지시킬 수 있는 헌법상 대통령의 권한을 이용해 이를 봉쇄하려 했다. 헌법 개정 논의나 헌법 비난을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긴급조치를 선포했다.
1978년 국회 의원 선거에서 의석에서는 여당이 야당을 앞질렀지만 전국의 유효투표자 수의 1.1%를 야당에 뒤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는 부정 선거 속에서도 민의가 박정희 정부를 외면함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여당은 의기소침해지고 야당은 용기를 얻게 됐다.
여당은 신민당 당수 김영삼 씨의 강경 노선을 잠재우기 위해 그의 유신을 비난하는 국회 발언을 문제 삼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는 비상처방을 사용했다. 이를 계기로 데모가 격화되고 특히 부산과 마산에서 소위 부마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혁명의 전야와 같았다.
4공화국의 종말을 예측한 중앙정보부장(지금의 안기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박정희가 피살됨으로써 제4공화국은 7년 9일만에 종언을 고하게 됐다.(79.10.26)
이어, 제8차 개헌(1980.9.29)도 불필요하게 소용돌이친 ‘군사쿠데타 개헌’이었다.
10·26 사태 후 계엄이 선포되고 정국이 불안한 가운데 전두환. 노태우 등 이른바 신군부가 79년 12월 12일 병력을 동원해 계엄 사령관인 육군 참모 총장을 연행 감금하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신군부 세력의 집권 계획에 따라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방임되다가 5월 17일 서울과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과잉 진압이 시민과 충돌을 일으켜 이른바 광주민주화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다수의 희생자를 내고 무력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이 진압됐다.
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자의로 국가 보위 입법 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헌법을 만들고 국민 투표로 확정했다. 이 헌법은 전면 개헌으로서 대통령을 간선으로 하고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했다.
국가 보위 입법 회의는 소위 개혁 입법이란 이름으로 정치 정화법 등 비민주적인 악법을 양산했다. 전두환이 5공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정치와 언론 탄압에 의하여 가장된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바라는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것이 1987년 6월 시민 항쟁이다. 결국 정부와 민정당은 이에 굴복해 국민의 직선제 요구와 헌법 개정을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하게 됐다.
제9차 개헌(1987.10.29)은 그 결과이다. 6·29선언의 결과 여야 합의로 개헌을 하게 됐다. 이것이 현행 헌법으로, 대통령을 직선제로 하고 5년 단임으로 했다.
이상이 헌법 개정사를 통해 본 우리 정치의 험난한 민주주의 역사이다. 그동안 5.16후, 10월 유신 후, 5공화국 때 등 정변이 있을 때마다 정치 정화법이란 이름으로 야당 인사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여 쿠데타 세력들의 집권을 유리하게 하는 데 이용했고, 이때마다 많은 야당 인사와 진보 계통의 재야 인사들이 옥고를 치르고 모진 고문을 당하는 수난을 겪어 왔다.
학생들은 기성세대를 대신하여 반정부 시위를 하고 시위와 분신자살 등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최근 다시 ‘개헌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개헌론 봇물이 터져 나오고 있다. 4년 중임제 개헌, 대통령의 당적 포기, 거부권 제한, 탄핵 소추 의석축소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는 정치 경제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총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대통령을 무력화하고, 거대 야당의 권력을 극대화 하기위한 것으로 보인다.
개헌은 당리당략에 따라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기 위해 무리하게 추진해선 안 된다. 그래서는 ‘삼권분립’의 틀이 무너지고, 다수의 폭력이 ‘민낯’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더럽힐 대로 더럽혀진 ‘권력투쟁의 개헌사’는 이제 끝장나야 한다.
정권 교체의 경험을 한 많은 후진국에서도 과거 민주 투사가 독재자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국민은 교육 수준이 높으나 아직 정당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민의식 속에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볼 수 없다. 민주화는 정치가뿐만 아니라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감시와 비판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 다음은 내각제 개헌 갈등 이어집니다. >
이병도는…
부산고·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정치부 기자로 출발한 후 연합뉴스 정치·경제·외신부 기자·차장, YTN 차장, 평화방송(PBC) 정경부장, 가톨릭 출판사 편집주간을 지냈다. 연합뉴스 재직 중에는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일했고, '홍콩 유령바이어 사기사건' 보도로 특종상을 수상했다. 일본 FOREIGN PRESS CENTER 초청으로 자민당을 연구하였고, 남북회담 취재차 평양을 방문하였다. 저서로는 <6공해제(解題)>,<YS 대권전쟁>, <최후의 승자>, <영원한 승부사>, <대한민국 60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