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의식 선심성 예산 경쟁
역대 최악 예산 국회 될지 모른다는 우려
집권 세력부터 먼저 허리띠 졸라매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병도 주필]
새해 정부 예산안이 또 법정시한에 처리되지 못했다. 국민은 고물가·고금리·고환율에 아우성인데 여의도가 정쟁으로 날을 지샌 탓이다. 경기 부양과 민생에 써야 할 657조 원이 언제 국회 문 턱을 넘을지 현재는 기약하기 어렵다. 여야의 ‘강 대 강’ 대치가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생법안 시계’도 멈춘 지 오래다. 이래선 국민만 죽어난다.
예산과 민생안은 국회 본연의 임무라는 점에서 이를 외면하고 내년 총선을 앞둔 헤게모니 싸움에 열중하는 정치권에 큰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1차적으로는 거대 의석수(168석)을 앞세워 민생보다 탄핵과 특검정국으로 몰아부치는 민주당의 책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방통위원장 사퇴로 탄핵 국면이 일단락됐지만 여야 극한 대치가 풀리기는커녕 점점 꼬여가고 있다. 거대 야당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대장동 50억 클럽 등 이른바 ‘쌍특검’의 본회의 표결 강행을 예고했다. 무리수가 좌절되자 또 다른 무리수로 공격하는 행태다. 김건희 여사를 겨냥한 ‘도이치모터스 특검’은 문재인 정부에서 2년 넘게 파헤치고도 기소조차 못 한 건이다. ‘50억 클럽 특검’ 역시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 ‘물타기’ 혐의가 짙다.
여야의 극한 대치가 도를 넘었다. 거대 야당에 의석수에서 밀리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집단 퇴장하고, 더불어민주당이 일방적인 단독 의결에 나서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656조9000억 원 규모의 정부 예산안에서 불요불급한 사업을 걸러내고 소중한 세금을 올바르게 사용토록 한다는 본래의 심사 취지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역대 최악 예산 국회
예산안을 앞세운 여야의 정쟁은 상임위와 안건을 가리지 않는다. 환경노동위원회에서는 문재인정부의 청년지원정책 예산 삭감과 증액을 놓고 여야의 설전이 벌어졌다. 예산안 심사가 시작된 지 4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검찰 특수활동비 삭감이 쟁점인 법제사법위원회,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대회 파행 이후 대폭 삭감된 새만금 사업과 고속도로·신공항·신항 예산으로 다투는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와 국토위원회, 전액 삭감된 지역사랑상품권(지역화폐) 예산을 민주당 단독 의결로 되살린 행정안전위원회 등에서 파행이 이어졌다.
총선 5개월을 앞두고 여야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국민의힘이 경기 김포의 서울 편입을 통한 ‘메가시티 서울’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1기 신도시의 재건축·재개발 규제를 풀어주는 내용의 특별법을 발의하자 더불어민주당은 서울 지하철 5호선 김포 연장 사업의 예비 타당성 조사 면제, 1기 신도시를 위한 ‘노후계획도시 정비·지원 특별법’을 발의했다. 당정이 용인, 청주, 제주 등 전국 5개 지역에 8만 가구 규모의 신규택지 후보지를 선정한 이후 민주당은 옛 지방 도심 개발에 특혜를 주는 도시 재정비 촉진 특별법으로 대응하고 있다.
상대를 정치적으로 몰아세우기 위해 예산안 심사를 이용하겠다는 정략만 넘쳐난다. 게다가 여야 모두 내년 총선을 의식한 선심성 예산을 늘리는 데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어 올해가 역대 최악의 예산 국회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쏟아진다.
KBS·EBS와 방송통신위원회 예산 삭감 문제로 홍역을 치렀던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예산안심사소위원회에서는 기초과학 지원액을 문제로 여야가 거칠게 다투다가 국민의힘 소속 위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민주당의 단독 의결이 이뤄졌다. 그동안 여야의 이견이 크지 않았던 연구·개발(R&D) 예산마저 윤석열 대통령의 과학계 카르텔 발언 이후 정치적 유불리를 앞세운 정쟁의 소재로 전락한 것이다.
‘선심성 퍼주기’ 경쟁
내년 예산안 심사를 시작한 여야가 ‘선심성 퍼주기’ 경쟁에 돌입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지난 13일 ‘5대 분야 40대 증액사업’을 제시했다. 여기엔 명절 기간 반값 여객선 운영이 ‘기후위기 선제적 대응’ 명목으로 들어가 있다. 반값 여객선이 기후위기 대응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타 지역 기업 인턴 참여 청년에게 체류 지원비 지급 등 현금성 지원도 다수 포함돼 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증액 요구는 더하다. 지난 6일 예산안 심사 방향을 밝히면서 5대 생활 예산 추진을 발표했다. 월 3만 원만 내면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하게 해주는 ‘청년 3만 원 패스’와 ‘요양병원 간병비 급여 지원’ 등이다. 국회 각 상임위에선 민주당 주도의 증액이 한창이다. 민주당은 국토교통위원회 예산소위에서 잼버리 파행 이후 정부가 대폭 줄인 새만금 관련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1400여억 원을 복원시켰다. 또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 예산소위에서 정부가 삭감한 연구개발(R&D) 예산 중 8000억 원을 증액했다. 행정안전위원회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핵심 정책인 ‘지역사랑상품권’ 사업 예산을 올해의 3525억 원에서 7053억 원으로 증액했다. 당초 정부는 사업비를 전부 감액해 국회로 넘겼는데 민주당이 배로 늘린 것이다.
선거용 예산 늘리기 골몰
올해 사상 최대인 약 60조 원의 ‘세수 펑크’가 예상되면서 정부는 긴축 기조를 강조하고 있지만 여야는 나라곳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선거용 예산 늘리기에 골몰하고 있다.
정부가 매년 편성하고 국회가 확정하는 예산안은 국가 차원의 정책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수단이다. 그렇기에 국회가 우선 순위와 진정성을 엄격하게 따져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민들이 심사 과정에서 일부 의원의 과격한 발언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이유다. 그러나 지금 여야는 그런 정상적인 과정을 벗어났다. 예산의 적절성과 합리성에 대한 토론 자체가 아예 실종됐다. 정부여당은 야당의 요구와 주장에 대한 고려 없이 일방적으로 예산안을 편성, 추진하고 야당은 의석수를 무기삼아 정략적으로 밀어붙이고만 있다. 올해도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을 넘긴 뒤 거대 정당의 고위 당직자 몇명이 밀실에서 적당히 타협하는 구태를 되풀이할 것인가.
정부는 올해 약 60조원의 세수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한다. 사상 최대의 ‘세수 펑크’에도 여야 모두 나라 곳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선심 쓰기 경쟁에 골몰하고 있다. 여야가 증액을 요구하는 사업 상당수는 다급하지 않거나 우리 재정 형편상 시행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매표성’ 사업, ‘포퓰리즘 예산’이 다분하다. 아무리 내년이 총선이라지만 이럴 수는 없다.
특히 실망스러운 것은 여당인 국민의힘의 태도다. 가뜩이나 민주당이 국회 다수 의석을 앞세워 선심성 예산을 밀어붙일 판인데, 여당이 오히려 앞장서서 예산 증액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2005년 이후 19년 만에 최소(2.8%) 증가로 짰다는 656조9000억원의 내년 예산안 방어는 물 건너갈 것이다. “‘선거 매표’를 단호히 배격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각오만 무색해지는 형국이다. 재정건전성을 지키자면 집권 세력부터 먼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이러니 국민의힘이 여당답지 않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예산안과 민생법안이 타격 받으면 국민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예산안 심사와 통과의 키를 쥐고 있음에도 강성 지지층을 의식해 탄핵 폭주를 일삼았던 민주당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함은 물론이다.
이병도는…
부산고·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정치부 기자로 출발한 후 연합뉴스 정치·경제·외신부 기자·차장, YTN 차장, 평화방송(PBC) 정경부장, 가톨릭 출판사 편집주간을 지냈다. 연합뉴스 재직 중에는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일했고, '홍콩 유령바이어 사기사건' 보도로 특종상을 수상했다. 일본 FOREIGN PRESS CENTER 초청으로 자민당을 연구했고, 남북회담 취재차 평양을 방문했다. 저서로는 <6공해제(解題)>, <YS 대권전쟁>, <최후의 승자>, <영원한 승부사>, <대한민국 60년> 등이 있다. 평소 역사주의와 세계주의를 기준으로 한 집필 경향을 보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