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1980년 11월 12일 전두환 신군부는 정치풍토쇄신법을 공포하고 1차로 정치활동 피규제자 명단을 공개했다.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을 비롯해 이철승·이민우·박영록·조윤형·이기택 등 야당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대거 포함됐다.

엄혹했던 시절이다. 2년이 흘러서야 1차 해금이 발표됐다. 1983년 2월 25일이었다. 구신민당의 김원만·황낙주·김윤덕 등 전직 의원 68명과 당직자, 대학교수 등 250명이 정치 규제에서 풀려났다. 

“나도 그날 1차 해금에서 풀려났지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의 김철배 상임운영위원(이하 김철배)과 6월 22일 여의도에서 만났다.

“지금처럼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 아닙니까. 해금 전에는 동지들과 연락할 길도 없고 섬에 갇힌 것만 같았어요. 붓글씨를 쓰고 성당에 가서 기도하며 세월을 보냈지요.”

그는 1960년 스물네 살의 나이로 4·19 대열에 참여한 이후부터 야당 투사로 활동했다. 제5대 7·29총선을 앞뒀을 때는 고향인 충남 서천으로 돌아가, 민주당 제6지구당 청년부 차장을 시작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한참 활동하던 와중 5·16이 일어나면서 군대에 갔고, 1964년 제대 후 야당 생활을 이어갔다. 1967년 제7대 6·8총선 당시 김옥선 신민당 후보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중앙당의 후농 김상현·박철용·김재만·노승삼·이동희·김덕원·민정기·박종률·백관옥·백근옥 등과 가깝게 지냈다. 김대중 사단(동교동계)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야당 투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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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이 끝나자 사찰계에서 찾아왔다. 선거 당시 박정희를 겨누며 '3000만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맹폭을 가한 것이 문제가 돼 당국에 쫓기는 신세로 야반도주하다시피 해야 했다. 

- 어디로 피신했습니까.

“강원도 철원이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살고 있지요.”

타향살이도 어려운데, 유신을 거치는 동안 야당 투사의 삶은 더 고달팠다. 10·26사태가 나고 서울의 봄이 왔지만, 본격적인 정치활동의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신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발이 묶여야 했다. 앞서 언급했던 정치활동 규제자의 대상이 된 거였다. 

그랬으니 몇 년 뒤 규제에서 풀려난 1983년 2월 25일이 주는 의미는 컸을 거로 짐작된다. 민주화 인사들에게는 여전히 살얼음판 같은 정국이었겠지만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일이었다. 

더 심하게는 “지옥과 같았다”며 몸서리쳤다.

- 특히 어떤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까. 

“정치활동에 딱 묶이니까, 가까이 있던 친구들도 끊기고, 하던 사업도 기울어져 가더라고요.”

충남사료를 운영했다. 처음엔 거의 독점 운영하다시피 해서 장사가 잘 됐다. 한 포에 100원씩 하루에 500~1000포대가 팔려 나갔다. 너끈히 10만 원 매상을 올린 셈이다. 하지만 정치 규제에 묶이면서 사업에도 지장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가장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김철배는 빨갱이다’, ‘김대중의 조카다’, ‘김대중의 동생이다’ 등의 낭설들이 돌기 시작하면서 거래처 발길도 끊긴 거예요. 우리집이 골목 커브에 있었는데, 그 앞으로 차도 못 세웠어요. 항상 사법경찰들이 감시하고 있었거든요. 감시가 삼엄하니까 동지들이 나를 만나러 올 때는 등산객이나 낚시꾼처럼 변장해 찾아왔더랬죠. 이렇게 해서 그 시대를 보냈습니다.”

해금동지회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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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금이 되고서는 어떻게 활동했습니까. 

“해금동지회를 만들었어요.”

83년 여름이었다. 

- 처음 듣는 증언입니다. 동교동계만 참여한 모임입니까.

“아니에요. 최훈·안동선·이윤수·오석보·박종진·김장곤·오정보·장원준·김진억·강외신·신경설 씨 등 동교동계, 상도동계가 골고루 참여했지요. 회장은 최훈과 신경설 씨가 공동으로 맡았지요. 민추협이 공동대표로 시작했잖소? 원조는 해금동지회라고 할 수 있지요(웃음).”

구민주당 당사 자리인 종로 2가 인사동에다 사무실을 차렸다. 김철배는 모임에서 조직 담당을 맡았다.

“김영삼 총재(신민당)가 격려사를 해줬지요.”

당시 DJ는 망명 중이었다. 

- 호구지책으로 생활은 어떻게 영위해 나갔습니까.

“다들 어려웠지요. 나는 그나마 경제력이 있었지만, 어느 동지는 부인이 식모살이해서 겨우 연명하다시피 했어요. 한 친구는 신발이 없어서 우리가 돈을 모아 구두를 사주기도 했지요. 저녁이 되면 대여섯이 찐빵 가게로 갔어요. 100원어치 시키면 양은접시에 수북하게 나올 때였죠. 허겁지겁 먹고 나면 다들 차비가 없어서는 또 걷고….”

순간 울컥하더니 금세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 시절만 회상하면 이내 목이 메어오는 듯했다.   

민추협 창당 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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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를 돌려 민추협 얘기로 넘어왔다. 그는 창립운영위원회를 거쳐서 노동어민회, 문화위원회 부위원장, 상임운영위원을 맡았다. 
 
- YS(김영삼) 단식을 계기로 민추협이 1984년 결성됐는데요. 전원이 참여한 상도동계와 달리 동교동계는 두 갈래로 나뉘었잖습니까. 후농(김상현)과 친한 이들은 먼저 들어오고, DJ(김대중) 가신들은 후에 가입했는데 말이죠. 어느 시기에 들어왔습니까. 

“첫 번이죠. 동교동계를 대표해 김상현 씨를 중심으로 김녹영·조연하·박종률·박성철·김윤식·예춘호 씨 등이 참여할 때 같이 했었지요.”

동교동계 민추협 참여파들은 당주동에 있는 박종률 개인 사무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곳이 지금의 동교동계 본산이라고 할 수 있지요.”

- 민추협 가담을 반대했던 이들은 선장(DJ)이 없는데,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느냐며 후농의 행보에 관해 비판적이었잖습니까. 

“자신들 자리를 보존하기 위한 기득권들의 생각이었다고 봐요.”

- 후농(김상현) 생전에 인터뷰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민주세력 통합을 위해 YS와의 연대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DJ는 독자노선을 만들라며 민추협 구성을 반대했다고 하더라고요. 

“망명 중이라 국내 사정에 어두웠을 텐데 한쪽에서는 반대하고, 다른 쪽에서는 찬성하니 DJ는 입장이 곤란했을 거예요. 하지만 반대라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양반이 노(NO)했으면 민추협 결성은 힘들었을 겁니다.” 

- 후농 말로는 자신이 끝내 참여하면 절교할 거라는 엄포를 측근을 통해 밀사로 전했다고 하더라고요. 

“글쎄요.”

믿기지 않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게 사실이면, 후농이 더욱 대단한 거지요. DJ가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민추협을 만들었다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반문했다. 

- 정대철 조윤형 등은 DJ가 신민당 참여 대신 민한당으로 출마하라고 했다던데요.

“DJ가 그 말을 했다기보다 민추협 참여를 반대하던 기득권자들이 그렇게 주장한 것 아닐까요.”

- 정대철 등은 민한당 간판으로 낙선하자, DJ가 미안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글쎄요.”

하면서, 상황을 추측해 나갔다. 

“그때 보면 민추협을 반대한 세력들은 신민당이 승리하기를 바라지 않았어요. 사쿠라 논란이 있었음에도 민한당 지지도 많았고요. 심지어 어떤 얘기들이 있었냐면 민정당은 항아리, 민한당은 단지, 국민당은 종지라고들 했지요. 종지는 단지 안에 들어가고, 단지는 항아리 안에 들어가잖습니까. 관제 야당의 속성이 그렇다는 것을 빗댄 말이었지요. 결국, 신민당이 만들어져도 어용야당인 민한당을 꺾기는 어려울 거라는 시각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망명 중이던 DJ로서는 국내 조직을 살리기 위해 민한당도 좋고, 신민당도 좋은 일거양득을 취했다고 봐요.”

- 일종의 투트랙 전략이라는 거죠?

“그럴 수밖에 없는 거죠. 시대적 명분상으로는 신민당이 맞지만 성공 가능성으로 볼 땐 새로 생긴 정당보다 민한당이 더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거잖습니까. 지금도 금태섭‧양향자가 신당을 만든다지만 누가 성공하리라고 보는 사람이 있나요.” 

DJ와 후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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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2대 총선은 신민당의 돌풍으로 끝났다.

“그런 것 보면 후농이야말로 결단력 있고 판단력을 갖춘 지도자, 혜안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네요.”

새삼 대단하다는 듯 존경심을 표했다.

- 그럼에도 후농이 지도자 반열에 못 올라선 것은 왜 그렇다고 봅니까.

“바로 그런 것 때문이죠.”

- 뭐 말입니까. 

“험담요.”

- 그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어야 지도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지도자가 못된 것은 호남 정치인이라는 한계, 지역주의 피해를 본 게 아닌가 싶어요.

“그것보다는 양김의 벽이 높아서겠죠. 민주세력을 판가름하는 것은 김대중‧김영삼 두 분이었잖습니까. 두 사람 그늘에서 커가기가 쉽지 않았던 거예요.”

- 민추협을 통해서라도 조명돼야 하는데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 양반이 연세대 병원에서 임종을 했어요. 2018년 4월 18일 저녁 6시인가 했는데 아들 삼형제와 비서, 내가 임종을 지켰지요”

- 한때 실어증도 왔다고 하더라고요. 자신은 DJ한테 헌신만 했는데, 정작 대통령 됐어도 그 흔한 사무총장 하나 못 맡았다고 말이죠. 화병이 아니었나 싶어요. 

“결론적으로 이 양반(DJ)이 끝까지 가까이 안 했어요. 옛날 후농으로 생각 안 한 거죠. 1971년 대선 경선 때도 후농이 DJ를 신민당 후보로 만든 것 아닙니까.”

YS와 DJ, 이철승 등을 중심으로 40대 기수론 바람이 불 때였다. 

“측근이라 치면 후농 하나였어요. 초대 비서실장도 후농일 정도로 바늘과 실이었는데….”

잠시 뜸을 들이다, “내가 이 얘기는 처음 하는 건데요…. 기회를 봐서 DJ한테 후농 얘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 번 정도였을 거예요.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 가만히 듣고만 있더라고요. 감정이 풀리지 않았구나, 직감했지요.” 

정치는 명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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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농이 눈 밖에 난 시기를 정확히 언제로 봅니까. 평민당(평화민주당) 창당 때 명분이 없다면서 안 따라갔던 때아니었을까요?

“(DJ가) 서운했을 수는 있겠죠.”

1987년 대선을 앞두고 후농은 YS와의 야권단일화 협상을 깨고 독자노선을 택한 DJ를 따라가는 대신 통일민주당에 남았다. 

“그분의 정치는 명분이었어요. 명분을 제일로 알았지요. 87 대선 때 양김이 갈라서는 걸 극구 반대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분이 옳았다고 생각해요. 양김이 갈라서지 않았다면 한국 정치사는 달라졌을 겁니다. 어떻게 노태우가 됐을 수 있겠어요. 조금만 양보했더라면….”

- 한 명이 양보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경선하면 되는데 그걸 깨고 나갔으니 DJ한테 명분이 없던 것 아닐까요. 

“그래서 후농이….”

- 후농과 같이 가도 됐잖습니까. 

“당시 나는 평민당 창당 조직국장이었어요. 마포에 동교동계가 만든 민권회라고 있었는데, 나중에 여의도 대하빌딩으로 이사 가서는 평민당을 창당했지요. 이석현·이협·남궁진 씨처럼 나도 자연스레 평민당으로 흘러왔어요. 후농이 나한테 같이 하자고 할 수도 없었고 말이죠.”

누가 누굴 비판하는 일도 없이 각자가 처한 상황과 선택을 이해하고 존중했던 듯했다. 

- 평민당도 함께했는데, DJ가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 때는 왜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14대 총선 때 입후보하면서 유권자에게 한 얘기가 있었습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강원·화천·철원에 나간 바 있다. 

 “‘여러분, 87년 대선 때 양김이 단일화하지 못한 책임이 나한테도 있습니다. 단일화하지 못한 죄를 지었으니 나에게 돌을 던져주시오.’ 그런데 다시 이 양반이 이기택 씨와 갈라졌으니….”

말끝을 흐렸다.

“나야 물론 DJ를 존경하죠.”

이 말을 강조하며, 

“하지만 명분이 없는 거라…. 그 당시는 (동교동계를 향해 세간에서) 새떼같이 쭉 따라간다고들 표현했어요. 설사 불이익이 있다 해도 감수하겠다, 해서 같이 안 간 거예요.”

- 따라갔으면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않았을까요. 정치적 선택을 잘못해 한 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선은 지금도 어려워요.”

그는 강원도라는 지역이 민주당 진영에는 불모지와 같다고 했다. 

- 원주의 이광재, 강원도의 최문순 등 민주당 인사들도 꽤 됐지 않습니까. 

“인물로들 된 거죠. 그들 빼면 또 누가 있습니까.”

있어도 손에 꼽을 일이라고 했다. 

- 차라리 서울로 출마를 염두에 두진 않았습니까?

“조직국장도 한 적 있으니 국회의원을 하려고 맘먹었다면 서울서 지역구를 하나 선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겠지요. 그러나 내가 철원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이곳 사람들한테 장담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빗자루 들고 쫓아와도 절대 뜨지 않겠다!’ ”

그의 입이 앙다물어졌다. 

“철원에 정착하면서 민주화에 뛰어드느라 빨갱이라는 모함까지 듣고 살아야 했던 나입니다. 어떻게든 국회의원이 돼 분위기를 반전시키리라. 강한 집념과 뚝심, 오기가 있었습니다. 내가 본래 충청도 짠물 먹은 사람 아닙니까. 자식들에게까지 뜨내기 소리 듣게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삼남매 모두 초·중·고등학교 전부 똑같이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 아버지가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니 자식들도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한 번은 연금당하고 있을 땐데 내가 1층에서 뛰어내릴까 봐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겁니다.”
 
봉고차, 지프 등이 집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빼꼼히 창문을 내다보니, 아이들 삼남매가 손으로 들고 다니는 책가방을 끼고서 경찰들 옆을 지나 등교를 하는 겁니다.” 

잔뜩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경찰들 눈치를 보며 걷는데…”

순간 목이 메어왔다. 

“그걸 지켜보는 아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오는 듯했다.

- 장남이 김정우 전 의원이지요?

“네 맞습니다.” 

김 전 의원은 최근 13기 민화협 공동의장에 선임됐다.

“사위가 현재 강서구청장 권한대행(박대우)을 맡고 있지요.”

배석했던 조찬옥 민추협 사무총장이 부연했다.

“그만하게. 이 사람아.”
쑥스러운 듯 손사래를 쳤다. 

“암튼 나는 명분이 없다고 본 일을 연거푸 할 수는 없었어요.”

잠시 샛길로 빠진 인터뷰였다. 본론으로 돌아와, 새정치국민회의를 왜 따라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매듭을 짓겠다는 요량으로 이 말을 강조했다.

다시 후농 얘기로 돌아와,

- 199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정대철 대권, 김상현 당권. 이것도 있었잖습니까. 

“나도 그 주장에 앞장섰지요.”

- DJ가 맞서는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DJ 이후를 생각한 건데 오해가 있을 수는 있겠죠.”

- 견제의 의미도 있었다고 봅니까. 

“DJ가 잘못한 것이 있어요. 후배를 키우지 않았잖습니까. 후농과 정대철을 키웠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정대철 씨가 대권을 잡았을지 몰라요.”

독립운동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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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정적을 깨고, 

- 민추협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는 뭔가요. 

“DJ가 78일간 연금됐을 때가 있었는데요.”
 
1987년 호헌 조치가 있던 4월 13일부터 가택 연금됐을 때를 말했다. 

“동교동 로터리 심지다방이라고, 아침 11시가 되면 80여 명이 모였어요. 한쪽에는 박영록·최영근·박종태·김종환·정기영·최희철 같은 원로들이 모여 있었고 중앙엔 행동대원, 다른 쪽엔 사법경찰들이 앉아 있었죠. 밖에는 항시 열대 이상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어요.”

다방을 주 거점으로 삼은 이들은 민추협 회원들이었다. 때가 되면 밖으로 나가 “직선제 개헌!” “김대중 석방” “연금해제!”를 외쳤다. 사방으로 경찰들이 에워싸고 있었지만, 기세를 몰아 독재 타도를 외쳤다. 그 순간 펑펑! 건너편에서 최루탄을 쏘아댔다. 사방이 삽시간에 희뿌옇게 변해가는 동안 ‘퍽’ ‘으악’ ‘타다닥’ 곤봉으로 두들겨 패거나 누군가가 질질질 끌려가는 소리가 뒤엉켜 들려왔다. 

“특히 황명수(상도동계)씨는 닭장차(경찰자)에 붙잡혀 실려 갔다가 경찰관들이 옆구리를 쳐서 사람 죽인다고 소리 지르고 그랬습니다.”

김철배는 당장이라도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한 눈을 하고선 침을 튀기며 열심히 설명해나갔다. 

“또다시 최루탄이 날라오면 눈물콧물 범벅이 돼요. ‘철수!’ 다방 안으로 우르르 돌아와서는 문을 탁 내리는 겁니다.”

몰려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고 한다. 

“헌데도 다방 마담이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수박을 썰어 갖다 주고는 했어요. 끼니때가 되면 배가 고프잖아요. 주변 식당으로 가서는 백반 한 그릇에 500원, 자장면 한 그릇에 200원…먹으면서 다시 힘을 내곤 했지요.”

- 여담인데 말이죠. 당시는 정치인들이 다방에 많이 모였지 않습니까. 많이들 담배를 피웠을 텐데 폐가 안 좋았을 것 같아요. 

“맞아요. 맞아.”

질문을 잘해줬다는 듯 격하게 맞장구쳤다. 

“다들 담배를 피우니 온통 뿌연 거예요. 밖에는 최루탄 때문에 뿌옇고 안에는 담배 연기에 뿌옇고…. 껄껄껄.” 
 
고생스러웠던 순간들이 자욱한 담배 연기 얘기에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그때 우리는 독립운동하듯 했어요.”

뭔가가 생각났는지, 가지고 온 가방 속을 뒤적거렸다. 

“이것 보세요.”

우체국 소인이 찍힌 낡은 우편 봉투를 보여줬다. 

“여기 ‘민주엽’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민추협이라고 하면 발각될까 봐 서신을 주고받을 때면 다른 이름으로 발송을 하곤 했어요. 일부러 우체국도 주소지에서 먼 곳으로 가서 부쳤고 말이에요.”

귀중한 자료였다. 

민주화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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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공화국 직선제를 만든 주역은 민추협이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주역은 민추협이죠.”

- 조명이 안 된 느낌입니다. 

“굳이 얘기한다고 하면 두 분이(YS·DJ) 끝마무리를 못 했기 때문이라고 봐야지요. 민추협을 통해 합치는 것까진 좋았지만, 밥상을 차려놓고 나서 정작 뒤엎고 갈라섰잖아요.”

두고두고 아쉬운 노릇인 듯 인터뷰 중간중간 이 점을 애석하게 여겼다. 

- 87의 공은 전대협 출신 등 586 운동권들이 가져갔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한테 묻고 싶어요. 그 당시에 어디 있었느냐. 과연 민주화 운동을 했느냐 말이에요.”

- 이현종·김근식 등 비판에 앞장섰던 분들도 민주화 운동을 했습니다. (이들은 ‘조국 사태’ 당시 진보 진영의 자성을 촉구한 바 있다)  

“물론 했겠지만, 내가 하려는 말은 만약 그들 586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왔겠는가 하는 겁니다. 박종철·이한열 군이 목숨을 잃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수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했습니까.”

- 전두환이가 광주를 내려가 민간인까지 학살하는 정권인데, 학생들이 데모한다고 해서 항복했을 거라고는 안 봅니다. 그것보단 민추협이라는 게 만들어지고, 신민당 통해 선거의 판을 엎으면서 밀어붙인 것 아닙니까. 위기감을 느낀 전두환이 타협 아닌 타협을 한 게 6·29선언이었다, 이렇게 도출이 되더라고요. 

“그건 맞지요.”

그러면서도 

“어떤 권력이나 폭력도 목숨을 앗아갈지 몰라도 마음을 뺏어가진 못합니다. 직선제는 바로 민심의 승리입니다.”

어딘지 서로 평행선을 달렸다.

- 어쨌거나 586이 직선제의 공을 독점하는 것으로 볼 때 역사를 써 내려간 사람들의 오류가 있지 않나, 생각도 듭니다.

“민추협의 제일 막내가 이석현·김무성 등 70대입니다. 나머진 많이들 저세상으로 갔잖습니까. 그때 대학생들이 386으로 불렸고 지금은 586이 됐습니다. 세계적으로나 각계각층으로나 중추적으로 일할 나이들이지요. 세대교체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봅니다.”

- 같은 운동권 출신의 586이라 해도 박재호·이성헌·김영춘·이광재·안희정 등 이런 분들은 계보 정치를 경험해 위아래 단계를 아는데 말이죠. 어느 날 픽업 돼 온 586들은 그렇지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계보 정치, 어찌 봅니까. 

“아주 좋은 말입니다. 사실 정치는 계보 정치입니다. 안 그러면 중구난방 돼요.”

합이 맞는 순간이었다. 

이런저런 갑론을박과 공감을 뒤로하고, 강조하고픈 점을 물었다. 

“내년이 DJ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는 김대중재단 지도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다.

“지금도 나는 DJ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만도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옆에서 모셨으니 얼마나 더 큰 영광입니까. 같은 하늘 같은 땅에서 같은 공기를 마셨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그 양반은 남아공의 만델라, 독일의 브란트, 한국의 김대중 이렇게 세계 3대 지도자 반열에 이미 올라와 있는 분입니다. 3개 재단이 연계해 앞으로 그분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고취해 나갈 계획입니다.”

또 덧붙이기를, 

“내 정신은 4·19 와 윤봉길 사상인 애국과 헌신입니다. ”

윤봉길기념사업회 고문인 그는 1997년 상해에 윤봉길 사적비를 세워 그 공적을 인정받아 2021년 국민포장을 받기도 했다.

“이를(애국과 헌신) 기반으로 더 넓게, 더 높게, 더 크게가 우리 집 가훈입니다. 또 그처럼 잘자라준 자식들에게 이 기회를 빌려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아내와 2년 전 사별하고 홀로 철원에 있는데, 하루에 세 번씩 아이들한테서 전화가 옵니다. 그렇게 착할 수가 없어요. 우리 아이들은 스스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강원도 공기가 궁금해질 정도로 아흔이 가까운 나이인데도 홍조 띤 모습이 흡사 청년과도 같았다. 시간이 무색하게 회춘하는 사람들이 있다. 산삼이라도 먹은 걸까. 누군가 지나가듯 말했다. 애국과 헌신, 깊은 부성애를 전하며 인터뷰는 끝났다. 함께 점심을 한 뒤 제2의 고향, 철원으로 떠났다. 
 

김철배는…1937년 충남 서천, 부인 故 김은숙, 장남 김정우 전 의원, 차녀 김미나(사위 박대우 강서구청장 권한대행), 삼남 김도헌, 민추협 상임운영위원, 평민당 조직국장, 김대중재단 지도위원회 의장, 윤봉길기념사업회 고문, 더불어민주당 고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