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측근들, 주위서 엄청나게 고통받으며 민주화 투쟁”
“신군부 들어서며 정치규제,DJ 귀국하면서 민추협 참여”
“민추협 문교국장 학원안정법 투쟁, 고대앞 사건 고초”
“양김 출마로 민추협 용두사미 돼, 역사적 인정 받아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김장곤 전 국회의원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서 문교국장을 맡았다. 그를 만난 것은 5월 28일 초여름 날이었다. 국회 헌정회 2층 운영위원회실. 자리에 앉자마자 김 전 의원은 자료 사진과 서류 한 뭉치를 펼쳐 보였다. 감사패 위에 적힌 ‘민주의 편에 서서’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고대 앞 사태에 관한 신문 보도, 민주광장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외치는 모습, 김영삼(YS)-김대중(DJ) 양김 지도자가 주재한 민추협 회의에 참석한 전경 사진 등도 보였다. |
그는 1938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목포고,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정치 활동은 DJ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됐다. 대학 재학 시절 동양웅변전문학원에 들어간 것이 인연이 됐다.
“원장이 김대중 선생이었어요.” 목포에서 사업을 했던 DJ는 1955년 정치에 대한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했다. 웅변학원은 그때 차린 거였다.
“50명 안팎의 원생들을 가르쳤는데 그중에는 웅변 강사도 더러 있었다. 직장인, 정치 지망생들이 많았다. 야망을 웅변에 담는 연습이었다. 목소리 높낮이, 제스처, 원고 내용까지 세심하게 연마했다. 나는 목포상고 때부터 웅변에는 소질이 있었다. 훗날 정치적 동지 김상현, 김장곤 전 의원도 그때 만났다.”
-<김대중 자서전> 중-
김 전 의원은 그 뒤부터 동교동계가 됐다. DJ가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할 때는 총무부장으로 선거를 도왔다. YS에 역전해 화제가 됐던 1971년 신민당 대선 경선에서는 DJ 보좌역을 비롯해 충청남도 조직을 관리했다.
“경찰이 말이요….” 신민당 대선 경선 당시의 일화가 생각났는지, DJ 집 마당에서 폭발물이 터진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폭발물 사건
“대선후보로 결정되자마자 김대중 후보 자택 주변에 폭발물이 던져집니다. 경찰당국에서 ‘너희들이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자작극 벌인 게 아니냐’며 추궁을 하는 거예요.”
처음엔 DJ 측의 범행인 양 보도가 됐다. 하지만 김 전 의원은 ‘경찰의 자자극 몰이’라고 했다. 폭발물이 처음에 어떻게 발발된 것인지 잠시 ‘옛날신문’을 살펴봤다.
“김대중 후보 집마당서 폭발물 터져 …27일 밤 9시 38분쯤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씨집(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의1) 마당에서 종류미상의 폭발물이 터졌다. 김 후보는 마침 지난 25일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도미중이었으며 집에 있던 가족들도 다치지 않았다. 폭발물은 사제로 요란한 폭음만 내었을 뿐 유리 한 장 깨어지지 않은 점에서 살상용이 아닌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중략) 외부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폭음을 듣고 경찰에 신고한 동교동 파출소 소속 방범대원 조기환 씨는 김 씨 집에서 30m쯤 떨어진 초소에 전등을 내걸 때 듣고 달려왔으나 범인 같은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씨 집 뒷담에 있는 가로등은 3일 전부터 고장이 나 있었다. 대문은 닫혀 있을 뿐 빗장이 걸려있지 않았다. ”
- 1971년 1월 28일 <조선일보> 중-
해당 사건으로 나중엔 국회 조사단까지 나섰다.
“(공화당 의원들이) 나를 증인으로 불러서는 ‘너희가 한 게 아니냐’ 묻길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했지요. 나보고 불순하다고 하는 거예요. 사과 안 하면 회의 진행 못 한다고 펄쩍 뛰어요.”
회의는 정회됐다. “하는 수없이 신민당 소속이던 김상현 의원이 저를 불렀어요. “‘네가 사과해라. 회의를 진행하자’ 그래서 ‘아이고. 내가 좀 죄송하게 됐습니다. 너무 건방지게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그제야 회의가 재개됐지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1971년 2월 1일 여야 합의로 구성됐던 국회특조위는 여야의 엇갈린 심증만으로 5일간의 조사 활동을 끝난 것으로 흐지부지 처리됐다.
# 신민당 경선 때로 돌아가
-그런데 1971년 신민당 경선할 때를 복기하면 말이죠. DJ가 YS한테 열세였는데 승리한 요인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대의원을 전부 찾아갔습니다. 충청남도는 내가 다 훑었습니다. 한 번은 부여에서의 일인데 공중변소에 들어갔다가 그만 빠져버린 적도 있어요. 완전히 똥바가지를 뒤집어쓴 거예요. 그 일로 친구 집에 머물렀는데….”
생각이 잘 안 나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도 잊어버렸네요…. <동아일보> 지국장이었는데 아주 재미있는 친구였어요.”
암튼 “위원장은 YS계인데, 대의원들은 우리에게 표를 준 겁니다.”
생사고락 동지들
상도동도 그렇지만 동교동계 역시 충성파가 많았다. 저마다 DJ와 생사고락을 나눈 동지들이었다.
“김대중 선생 측근들은 주위에서 엄청나게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공포 정치를 말로는 다 표현 못 해요. 야성이 있는 집안은 공무원이고 뭐고 파면시켰어요. 고문도 고문이지만, 내 아들은 초등학교 때 아빠가 간첩인 줄 알았다고 해요. 집에 오면 신발부터 감추고, 경찰이 밖에서 서성대니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나뿐 아니라 측근들은 모두 탄압 속에서 지냈습니다.”
3선 개헌 후 신민당은 진산파와 반진산파로 나뉘었다. DJ는 망명을 갔고 김 전 의원은 반진산파 소속이 됐다.
“진산파는 완전히 사쿠라로 불렸어요. 나는 반진산파에 소속돼 있었어요. 양일동, 장준하, 김홍일, 김선태 선생 등 거물들이 민주통일당을 만들 때 나도 그 당에 들어갔지요.”
김 전 의원은 선전국장 겸 지구당위원장으로 일했다. 1973년 12월 중구 소재 명동예술극장에서 민주통일당 전당대회를 마친 후 당원들과 함께 유신헌법 긴급조치 1인 장기집권에 항거하는 집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 일로 구류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1975년 DJ가 돌아와서는 함석헌, 박영규 등과 함께 한국기독교주최연합 헌법 무효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또 그 일로 붙잡혀 구류를 살았다.
고난은 신군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그의 나이 환갑 때 돌아가셨다. 시골서 장례를 치르는데 경찰들이 왔다.
“아니 세상에, 야당 사람은 죽을 자유도 없는 거냐. 이럴 수가 어디 있느냐. 옛날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하늘이 무너졌다고 해서 삿갓을 쓰고 하늘을 못 올려봤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땅이 꺼졌다고 했다.”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장례를 치른 뒤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지하실이었다. 하도 답답해서 밖을 내다보려는 데 거울만 보였다. 안에서는 바깥이 안 보이고, 밖에서는 볼 수 있게 한 감시 장치였다.
“거울을 보는데, 그때 흰머리를 처음 보았습니다. 머리가 하얗더라고. 세상에나. 내가 이렇게 됐구나.” 여러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민추협 참여
-신군부 때는 정치규제에 묶였던 건가요.
“그렇죠.”
상념을 뒤로하고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정치규제 동지회도 만들었지요. 회장은 최훈 국회의원이 하고, 내가 부회장을 봅니다. 그때 생각하면 너무 암울하고 그랬죠.”
# DJ 귀국
-민추협은 언제부터 참여한 건가요.
“그 양반(DJ)이 귀국하면서입니다.”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내란음모죄로 투옥된 DJ는 사형집행에서 풀려나 미국으로 망명해 있었다. 1985년 12대 총선을 나흘 앞두고 귀국했다. YS와 김상현이 주도한 민추협을 주축으로 한창 신민당이 소리 없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을 때였다.
-초창기 때인 1984년에는 왜 참여 안 한 건가요.
“민언련(민주언론연구회)에 있었어요. 동교동계에서 만들었죠.”
당시 동교동에서는 김상현, 예춘호, 조연하, 김녹영, 박종률 등만 민추협에 참석하고 다른 가신 그룹은 불참하고 있었다.
“그때는 전부 다 배신자라고 그랬어요.”
-후농(김상현의 호)요?
“어떻게 상도동계와 함께하느냐.”
동교동계 내 민추협 가담 찬성파도 있었지만, 반대 일각에서는 DJ가 부재한 상황에서 YS 주도의 민추협에 참여하면 조직이 와해될 수 있다는 걱정도 한 듯했다. 이 때문에 초창기에 전체가 참여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DJ 역시 미국에 있던 터라 국내 정세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민추협과 함께는 가되 소극적으로 참여한다는 투트랙 전략을 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후농이 DJ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아 신민당 창당의 밑거름이 됐다는 정설이다. 후농은 2009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DJ 반대를 무릎쓰고 민추협과 신민당 창당에 나섰다가 후일 그 흔한 사무총장 한번 못 해봤다"고 술해했다.
지난 민추협 되짚기에서 이석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당시 복잡했던 동교동계 셈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한 바 있다.
“김상현 대행은 현실 감각이 뛰어나요. 동교동, 상도동이 손을 잡는 방법밖에 없다. 전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누가 옳고 그른 게 아니라 상황을 보는 판단이 달랐던 겁니다. (DJ로서는) 한국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받으니까 반대하는 쪽과 찬성하는 쪽이 상반된 거예요. 참여하는 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 판단이 안 선거죠. 초기에는 그랬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에 있던 김대중 선생이 최소한으로 양해해 줘 출범할 수 있었던 거라고 봐요. 그랬기에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모았다고 생각해요.”
-2022.4. 이석현 민추협 기획위원 <시사오늘> 인터뷰 중-
민추협 조직 후 창당된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데에는 양김 세력이 하나로 뭉쳤기 때문에 가능했다. 라이벌 관계이던 YS와 DJ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DJ가 귀국하면서는 동교동계도 대부분 민추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후농 측에서는 좀 아쉬워했던 측면도 있어요.”
김 전 의원으로부터 DJ 귀국 전후에 대해 듣고 있는데, 인터뷰 자리에 배석한 사단법인 민추협의 조찬옥 사무총장이 끼어들며 말했다.
“어떻게 양김 씨만 부각이 되느냐는 거였지요.” 대중적으로는 양김이 워낙 유명해 후농이 부각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가늠된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민추협을 말할 때 ‘삼김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추모식도 후농도 해야 하고요.” 민추협을 만드는 데 앞장섰던 공로를 그만큼 인정해 줘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해야지요.” 듣고 있던 김 전 의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 고대 앞 사건
-민추협에 참여하면서는 어떤 활동을 주로 했나요.
“초대 문교국장을 맡았습니다. 그 뒤 인권국장, 그다음 기획실장 등을 했지요.”
-일화를 들려준다면요.
“고대 앞 사건이 일어났지요.”
학원안정법 반대를 주도한 지 한 달여 뒤의 일이다. 1985년 9월 초였다. 고대 안에서 전국에서 모인 학생 2000여 명이 운집해 전학련 민중민주화 선언대회를 시작으로 범국민 시국대토론회 등 집회를 이어나갔다. 김 전 의원을 비롯해 민추협 인사들과 신민당 의원들은 학생들을 돕기 위해 고대 앞으로 달려갔다.
“여기 신문 보면 말이오….”
김 전 의원이 가지고 온 신문을 들췄다.
“검찰과 경찰은 지난 6일에 고려대 정문앞에서 신민당 의원과 민추협 간부 등이 학원자율화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부른 행위와 김민석 피고인의 옥중메시지가 전달된 점을 실정법위반행위로 보고 처리할 방침이다. 치안본부는 9일 지난 6일 오후 고려대에서 있었던 학생시위현장에 참석한 야당 정치인 민추협 대변인 등 23명의 재야인사 중 신민당의 박찬종 조순형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21명 전원을 형사조치키로 방침을 정했다. 경찰은 이들 21명 중 이미 경찰에 연행된 3명을 제외한 나머지 18명을 연행하기 위해 소재수사를 벌이고 있다. (중략) 경찰은 1차로 7일 밤과 8일 아침 사이 민추협대외협력국장 백영기, 사회국장 원성희, 의장비서관 박종웅 씨 등 3명을 연행 조사 중인데 일단 즉심에 넘긴 뒤 조사를 계속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밖에 국민대토론회에 참석하려했던 민추협노동국장 김수일, 문교국장 김장곤, 청년국장 이유형, 대변인 한광옥, 인권부장 양회구, 부간사장 김병오 씨와 민청련간부 서원기 씨 등도 소재가 확인되는대로 연행, 조사를 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후략)”
-1985년 9월 9일 동아일보 중-
문교국장으로 참석했던 김 전 의원은 집행유예 2년에 실형 8개월을 선고받았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정치 탄압이었다. 훗날 이 사건은 대법원으로부터 무죄를 받았다.
민추협 정신
“필리핀 2월 혁명 당시도 생각이 나요.”
무슨 이야기를 더 들려줄까, 찬찬히 생각하던 김 전 의원이 말을 이어나갔다.
1986년 2월 25일 필리핀에서는 100만 명이 저항해 마르코스 독재 정권을 종식 시키는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어떻게 민주화에 성공했는가. 민추협에서도 현장 조사단을 꾸려 필리핀을 방문하게 된다.
동교동에서는 김 전 의원과 정대철 의원이, 상도동에서는 서청원 의원 등이 4박 5일 일정으로 가게 됐다. 가서 보니 민주화 운동 발발의 결정타가 돼 준 사건이 있었다.
“부정선거가 폭로된 거예요. 시민단체에서 투표한 날 일일이 인원 들어오는 것을 체크했고, 실제 확인 결과 투표지보다 더 많은 인원이 투표한 것이 발견된 거예요. 명백한 부정선거 아니냐. 어떻게 조작한 것이냐.”
첫 번째 민주화의 고리로서 도화선이 돼줬다.
“다음으로는 방송국에서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시민들이 들고일어나게 된 거였어요.”
이듬해 한국에서도 6·10 항쟁이 일어났다. 통일민주당(신민당 후신)은 직선제 개헌안 10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전 국민 동참을 모아나갔다.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희생은 국민을 슬픔에 빠트렸고, 4·3 호헌 조치는 분노를 일으켰다. 비폭력 저항의 상징으로 꽃을 나눠주며 참여한 어머니들부터 거리 곳곳 회사원들로 구성된 넥타이 부대가 등장했다. 거센 저항에 밀려난 전두환 정권은 마침내 직선제를 받아들인다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기까지 민추협이 있었잖아요?
“6·29 선언이 나왔을 때 내가 기획실장을 맡고 있었을 때입니다. 시위하다 투옥된 이들을 만나 격려도 해주고 용기도 주고 전국 교도소에 안 간 데가 없었어요. 구속자 가족협회에서 감사패도 주고 그랬었지요.”
-민추협의 최대 목표가 대통령 직선제라고 보면 될까요.
“우리가 천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지 않았습니까. 회원들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들고 다니면서 서명을 받았습니다. 민추협 간부들도 수천 명 많게는 1만 명 정도 받았지요. 내 경우도 거의 1만 명 가까이 받았을 겁니다.”
-시민들 반응은 어땠나요.
“누구 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식당 종업원, 구두닦이, 노동자고 뭐고 다들 지지해줬어요. 심지어 민추협 간부들이 남대문 경찰서에 연행돼 갔는데 거기서도 ‘이건 국민을 위한 것이다’며 우리가 경찰들을 설득해 공감을 얻을 정도였어요. 동대문 경찰서, 서대문 경찰서, 중량구 경찰서…. 많이도 갔지요(웃음).”
-직선제를 만든 중심은 민추협이잖습니까. 그 공을 586들이 가져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있어요.”
-뭔가요.
“민추협을 어떻게든지 국가적으로 인정받게끔 하자는 거예요. 민추협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민주화가 이뤄질 수 없었어요. 민주화유공자로 다 대접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적 의미이자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 민추협 정신
-민추협 정신은 뭔가요.
“민추협 정신이 5·18 정신이요 4·19 정신이요 6·10항쟁이요, 말하자면 민주 정신입니다. 4·19 정신으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에 대해서는 자긍심을 갖고 있어요. 비폭력 평화적 방법으로 민주발전을 해야 한다는 바탕에서 출발한 겁니다.”
- 4.19, 5.18은 반독재 투쟁이잖아요. 민추협은 하나를 더 보탤 수 있다고 보는데요. 통합의 정신이 아닐까 싶어요. 늘통합을 시도했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맞아요. 맞아. (공감했다.) 그런 통합의 정신이 민주 발전의 핵이 되고 민주 발전의 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 수준이 정치인들 이상으로 높아졌잖아요? 대한민국이 선진국가로 진입하게 된 것도 민추협 정신 때문이다. 나는 그리 봅니다.”
-민추협이 해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양김 대통령 출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요.
“두 양반이 출마하면서 해체가 됐으니…. 용두사미가 된 거죠. 대통령 된 다음에도 민추협에 무관심했다고 봐요. 역사적 조명이 못 된 이유가 됐지요. 뒤늦게나마 자체적으로 모여 사단법인 단체로써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다행이지요.”
-양김 분열로 민추협이 역사적 평가를 못 받게 된 것도 있지만, 민추협이 6월항쟁 투쟁기구인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만들지 않습니까. 민추협 자체가 그에 흡수된 것도 원인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
-앞으로 민추협 정신이 계승‧발전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봅니까.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이 있어야지요. 민추협이 태동한 84년부터 87년 6‧29선언을 받아내기까지… 늦었지만 학계에서도 한창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생존해 있는 민추협 회원인 우리들이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자 노구의 몸을 이끌고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는 것 모두 그 일환이지요. 민추협을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 때문일 것으로 봅니다.”
양김 추억
인터뷰 후반부. DJ와 YS에 관해 물었다.
- 소소한 일화 같은 것 좀 들려주세요.
“우리가 김대중 선생님 집에 방문하지 않습니까.” 동교동계 얘기부터 흘러나왔다. “거실에 모이면 자연스레 잡담도 하게 되잖아요. 누군 이렇고-저렇다더라. 비평도 하고 불만도 하고 말이죠. 듣고 있던 선생께서 ‘신문을 가져오라’ 그래요. 갖다 드리면 ‘김장곤 동지, 사설 한번 읽어봐.’ ‘예.’ 다 읽으면 ‘어디 의견을 내보라’ 이러세요. 한시도 흘려보내지 말아라. 그렇게 우리를 교육했지요(웃음).”
그 시절을 떠올리는 얼굴에 애틋함이 만연했다.
“지금도 가슴속에 항상 남아있는 말이 있어요.”
-어떤 말인가요.
“‘정치는 국민과 함께 가되 한 보 앞서가도 국민이 못 따라온다. 반보 앞서가야 한다.’”
DJ가 자주 한 말이라고 했다. “얼마나 의미 있는 이야깁니까. ‘행동하는 양심.’ 이 어록도 기억이 나요.”
YS에 대한 일화도 더해졌다.
“상도동 집에 가면 말이오. 그 양반(YS)께서 손수 커피를 타줍니다(웃음). 민추협 할 때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면 ‘김장곤 동지, 넥타이도 멋있는데?’ 친밀하게 말을 걸어오세요. 인간적인 분이었지요.”
정치인 김장곤
마무리하면서는 ‘정치인 김장곤’에 대해 들어봤다. 9대, 10대, 12대, 13대 총선 도전 끝에 14대 초선을 역임했다. 원내 입성이 늦어진 데에는 혈기가 왕성했던 점도 한몫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화민주당 시절을 들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 후보 청년 기동대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누구나 그가 공천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전남 나주를 목표로 했던 김 전 의원은 자신했다.
DJ가 망명해 있던 9대 총선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로 나주광산에 출마한 경험도 있었다. 이희호 여사의 격려도 받았다. 아쉽게도 차점으로 떨어졌다. 고향인 나주에서는 1등을 했다. 광산에서 표가 모자라 낙선했다. 그러다 나주와 광산 선거구가 분리됐으니 김 전 의원으로서는 당선만큼은 자신 있었다. 평민당에서 공천만 받으면 승산은 떼 놓은 당상이라 여겼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당에서는 지역구가 아닌 전국구를 제안했다.
“나주에서 1등한 내가 지역구를 나가야지. 무슨 전국구요.” 김 전 의원은 펄쩍 뛰었다. 만약 전국구를 수용했다면 당선권을 받았을 것이다. 무난히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을 것이다.
김 전 의원은 그 길로 탈당계를 제출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표가 갈라질 것을 우려한 DJ는 나주로 내려왔다. “평민당 후보가 떨어지면 전국구 후보인 이 몸이 떨어집니다. 김장곤 동지는 내가 책임질 테니 나를 보고 우리 후보에게 표를 주세요.” 호소했다. 김 전 의원을 지지하던 표심이 막판 평민당으로 쏠렸다.
선거 끝나고 당시 총재이던 DJ가 불렀다. “탈당 원서를 안 받겠다고 하더라고. 그만큼 나를 아낀 경우겠죠. 사랑해준 표시지.” 그렇다고 돌아가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혈기에 그랬던 것 같아요.” 진작 국회의원이 되는 건데, 지역구 출마만 고집하다 거절한 비례직도 적지 않았다.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14대 총선 때는 어떻게 당선된 건지요.
“꼬마민주당(통일민주당 잔류파)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그 당에 내가 참여를 합니다.” 중앙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그 무렵 92년 대선을 앞두고 평민당 후신인 신민주연합당은 조직 재정비에 나섰다. 이기택-노무현 등이 있던 꼬마민주당과의 합당을 진행했다. “그때 공천을 받게 된 것이지요.”
“결국, DJ가 공천해 준 것은 없네요.”, “그렇죠.” 덤덤히 말했다. 서운함도 들었을 법한데 함께한 모든 시간이 영광과 감사함으로만 남은 듯했다. 생생한 눈빛과 홍조 띤 얼굴, 보는 이마저 홀가분하게 만드는 표정이 편안함을 안겼다.
한 시간여가 훌쩍 지나갔다. “횡설수설한 게 아닌가 싶어요.” 김 전 의원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아닙니다.” “일어날까요?”
p.s. 김장곤 전 의원이 걸어온 길 △1938년 전남 나주군 다도면 신도리 출생 △나주중학교-목포고등학교 졸업 △고려대 졸업- 연세대 대학원 수료 △정치규제 8년, 4년만에 해금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동문회 이사 △다도공민중학교 설립 및 초대교장 △김대중 신미당 대통령후보 보좌역 △14대 국회의원 역임 △유신헌법 개헌 백만인 서명운동 및 긴급조치위반으로 구금조사 △민주회복운동 전개로 30여회 연행 수배 구금 △민주화추진협의회 문교국장 △학원안정법 반대투쟁위 민추협 특별위 간사 △언론간사 특별대책위 민추협 간사 △고대앞 학생시위선동 혐의로 형사입건 중(해외출국금지) △직선제 개헌안 1차 서명으로 구금 △민주헌정연구회 이사 △한국정치범동지회 상임인권위원 △故박종철군 살인고문 진상조사위원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좌우명 : 꿈은 자산!
홈페이지 국민의 힘 보고배워라 그리고 청년 당원 대폭 개방하라 모든 당직자 지역/ 중앙당 투표방식 바꿔라 당원30% 국민 70% 외부 개혁 비상대책 위원장 영입하라 민주당 모두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