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자 뒷바라지, 민가협 지원에 나서”
“12대 총선, DJ 민한당에 더 많은 관심”
“양김, 어떻게든 단일화해야 했다고 봐”
“민주화 초석 깔고 완성이 민추협 성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박 군을 살려내라!”
신민당 유준상 의원(이하 유준상)이 외쳤다.
유관순 열사 일가다. 4·19부터 6월항쟁까지 한복판을 지켰다.
1987년 2월 7일 조선호텔 부근이었다. 박 군은 고문치사 은폐 사건의 희생자 박종철을 말했다. 추도식이 있던 날이었다. 유 의원은 박찬종·이재근·김성식 등 의원 10여 명과 시청, 명동을 거쳐 행진을 이어갔다.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회원들이 뒤를 따랐다. 학생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이들은 누군가 선창하면 진상 규명 촉구와 고문 추방 구호를 연호했다.
눈앞에는 경찰이 가로막고 있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빵….”
그때 약속이나 한 듯 지나가는 차량들이 일제히 클랙슨을 울려댔다.
“박 군을 살려내라!”
요란하게 휘몰아치는 경적을 뒤로하고 다시금 뜨거운 함성이 쏟아졌다. 저항의 열기는 찬 겨울의 끝자락을 금방이라도 쫓아버릴 기세였다.
누군가 성냥개비에 불을 붙였다. ‘타타탁!’ 착시였을까? 저마다의 심장 위로 민주화를 향한 불길이 타올랐다. 들불처럼 번지는 노랫소리.
그 시절 청년들은 한 번도 민주주의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불과 스무 살 남짓의 학생들. 태어나 보니 세상은 군부 독재 아래였다. 자유의지는 인간 존엄의 영역이다. 민주화가 그리웠다. 경험해 본 적도 없으면서, 굶주린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찾아다녔다. 책을 탐독했고 서클에 가입했다. 양김(김영삼-김대중)은 교과서였고 재야는 지주였다.
모두 한데 모였다.
‘와….’
독재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대의 돌격.
영원한 독재는 없다.
한낮의 태양 위로 부정하게 빼앗겼던 서울의 봄이 다시 오고 있었다.
성큼. 찬란한 아지랑이와 함께.
구속자 석방 촉구
유준상, 그가 민추협에 들어간 건 1985년 4월이었다. 특별위원을 맡았다. 구속된 학생들을 도왔다. 이들의 뒷바라지부터 석방 촉구, 인권 문제 해결 등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지원에 나섰다.
“박종철이 엄마, 이한열이 엄마, 김민석이 엄마….”
모두 민가협 회원이었다. “나 모르는 사람들이 없어요. 송영길(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도 구속됐을 때 내가 면회 갔지.”
지난 3월 17일 여의도 21세기경제사회연구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지나간 얘기 해 뭐해?”
인터뷰에 응했으면서도 중요한 건 미래라며 대뜸 말해왔다.
“흘러간 과거, 역사를 증언하는 겁니다.”
인터뷰 섭외를 도와준 조찬옥 민추협 사무총장이 기자들을 대신해 답했다.
‘알지. 알지만 서도….’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은 흘러간 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내색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차세대 보안 리더 ‘화이트 해커’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 얘기는 나중하고, 민추협부터 되짚어 나갔다.
“민추협은 처음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경위를 묻자, 민한당 때로, 거슬러 올라가 설명이 시작됐다.
# 증언 1.
“1985년 12대 총선은 민한당에 불리했다. 전남 보성에서 재선에 도전한 나는 이대로 가다간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중선거구제 때라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다지만 민정당은 유력 정치인이 경쟁자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당(신민당)의 돌풍이 거셌다. 묘수가 필요했다. 기지를 발휘해 1월 18일 미국 LA로 날아갔다. 체류 중인 김대중(DJ)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김대중 선생이라고 꼬박꼬박 불렀다.)
그날은 선생이 국내로 귀국하겠다는 기자회견을 앞두던 때였다. 김홍일(DJ 아들) 의원과 먼저 만나 DJ와의 만남을 요청했다. 처음 대면하는 날이었다. 회견을 마치고 찻집으로 옮겨온 선생은 내게 민추협, 신민당에 관해 물었다. 민한당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물어왔다. 특히 민한당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선생과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걸 갖고 와 선거에 활용했다.”
12대 전남 보성 유준상 당선.
“신민당이 전남을 싹쓸이할 땐데도 유준상만은 산 거야. 사진 하나로 끝낸 거요. 신당 바람을 막은 거지.”
돈도, 조직도 신당의 바람 앞에 속수무책일 때였다. 민한당 후보들은 민추협에서 만든 신민당 후보에 밀려 우수수 떨어졌다.
유준상은 특유의 돌파력으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얘기였다. 훗날 그는 정치권에서 돌격대장으로 불렸다. 학창 시절부터 당수라는 애칭이 붙여질 정도로 지도력이 있다고 들어왔다. 목표 달성에 능한 데다 순발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게 신문 기자들 평가였다.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던 어느 해 최고위원 경선 때도 병상 선거를 감행, 선출되는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알래스카에서 냉장고를 팔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고 하니 알 만했다. 그만큼 현실적응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어쨌거나 그의 증언에서 우리가 눈여겨본 것은 DJ가 신당보다는 민한당에 더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대목이었다.
- 정대철(9·10·13·14·16대) 의원한테 물어보면 DJ가 민한당으로 나가라고 했다더라고요. 본인은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고 싶었는데 DJ 말 듣다가 낙선했다는 거죠. 나중에 DJ가 사과했다고는 하지만 왜 그랬다고 봅니까. 후농 김상현 얘기 들어봐도 민추협 참여에 DJ가 소극적이었고 말입니다.
“적극적으로 민추협에 참여하라고 하긴 어려웠겠죠.”
- 왜 못마땅하게 여긴 걸까요?
“(후농은) YS(김영삼)와 가까이했잖소.”
조찬옥 총장이 끼어들며 냉큼 말했다.
“두 지도자(YS-DJ) 모두 식견과 리더십을 갖췄지만, 정점을 향해 가다 보면 장애물로 여기거나 도움이 안 된다고 보면 마음이 달라지지 않겠소?”
유준상이 정리하듯 답을 마무리했다.
DJ 측근이던 후농은 YS와 함께 민추협 출범을 주도했다. 신민당 창당에도 적극적이었다. 미국에 있던 DJ로서는 국내 사정에 어두운 데다 조직이 와해되는 것을 우려해 경계했을 수 있는 노릇이었다. 권노갑-한화갑 등 가신들이 민추협 초반 참여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유준상 증언을 통해서도 그의 의중이 가늠됐다.
단일화로 정권교체 바랐지만…
1985년 4월 유준상도 신민당 품에 안긴다. 총선 전 박관용-홍사덕 등이 이탈했다면, 그는 총선 후 탈당파에 속했다.
# 증언 2
“김대중 선생이 민추협 공동의장이 됐잖소. 7가지 조항을 쓴 게 있어요. 총무는, 상도동은 김동영, 동교동은 유준상. 딱, 합의서를 썼어요. 나는 동교동 총무도 맡고 대변인도 맡았죠. 동교동 인권문제 연구회 사무실 얻을 때도 당직자 이름으로 하되 내가 계약했어요. 동교동계 신민당 상임위원들 배정도 내가 했고 말이오.”
DJ 신임이 두터웠다는 증언이었다.
- 완전히 최측근으로 생각했던 거네요.
“나를 아들처럼 생각했어요. 앞좌석을 타본 적이 없어요. 김옥두나 전갑길이 앞에 타지, 나는 항상 옆좌석.”
평민당 시절 경제과학위원회 위원장을 할 때도 DJ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다.
“나중 보니까 말이죠.”
운을 떼며 질문에 들어갔다.
- DJ한테는‘영남·기업인·공직자·군부에서 반대해 어렵다’라는 4대 불가론이 있었잖습니까. 결국, 단일화해서도 당선될 수 없으니 평민당을 만들어 4자필승론(노태우와 YS가 영남표를 가르고, 김종필이 충청표를 가져가면 호남 몰표와 수도권에서 우세한 DJ가 이길 수 있다는 공식)을 밀고 나간 게 아닌가 싶어요. 차후 정치를 펼치려 한 거죠.
“….”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간파했으면서 일단은 잠자코 듣고 있는 모습이었다.
- 처음엔 YS와의 단일화 약속을 깨고 평민당 만들어 87년 대선에 출마한 것은 대의에서 한참 벗어난 행동으로 보였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YS가 미창당 지구당 수를 양보하면서까지 동교동계 요구를 받아준다고 했지만, DJ로서는 이번 판은 내 판이 아니다. 그리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나 싶어요.
“나는 그렇게 안 봅니다.”
동의하지 않았다.
“4대 불가론이든 4자필승론이든 결국 단일화했으면 우리가 이겼습니다. 국민적 지지가 있었으니까요.”
여기까지 말하고는
“나는 4자필승론에 반대했어요.”
덧붙였다.
“정권 교체하길 바란 건데….”
동교동계 내부에서는 강하게 4자필승론을 앞세웠다. 유준상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단일화 아닌 이상 어떤 것도 이길 수 없다고 봤다.
“그래도 두 분 다 어진 관계 아니오. 결국, 제 길을 잘 갔기 때문에 92년, 97년 모두 대통령이 된 거예요.”
- 시간이 흘러보니 모든 게 정치적 행위더라고요. 3당합당도 그것을 통해 YS가 대통령이 됐잖습니까. 군정 종식 후 금융실명제 등 개혁을 이뤘으니 성공한 대통령으로 봐야죠. DJ도 단일화 깬 책임은 있지만 여러 개혁을 이뤘으니 성공한 대통령이고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잖소. 두 분 다 선거에서 떨어지니까 길이 보이는 거야.”
그러다 갑자기,
“과거에 매달리면 안 돼요. 나는 4차 산업혁명 하이테크 원장이에요.”
한국정보기술연구원 원장을 지내고 있다. 차세대 보안리더 BOB 탄생의 주역이다. 11기까지 배출했다. 국제해킹방어대회 데프콘에서 아시아 최초로 한국팀 첫 우승을 거뒀다.
“내가 기른 화이트 해커들이 전 세계를 제패하고 있어요. 과거로 가면 발전이 없는 거야.”
또다시 옛날 일 꺼내 뭐 하냐는 취지로 말해왔다. 중요한 미래 가치들이 산더미인데, 지난 시대를 돌아보는 것이 스스로 낯설게 느껴졌던 것일까.
- 이런 증언이 있어야 미래도 있죠.
“그렇지.”
뜨끔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민추협 최대 목표는 대통령 직선제였다고 보는 데 동의합니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죠. 이 나라가 산업화 겪으면서 민주화 초석 깔고 완성하는 것이 목적 아니오? 대통령 뽑는 방법보다 국민이 주인이다. 그래서 직선제 천만인 운동 본부 만들었던 것 아닙니까.”
반문하고는 퍼뜩 말을 돌렸다. “국회에서 연설 잘하는 사람들 다섯 명이 있었어요. 김대중-홍사덕-박관용-박찬종-유준상.” 본인의 이름이 들어갔다. “기자들이 뽑은 연설 대가들이었지.” 별안간 생각난 모양이었다.
- 민추협의 최대 공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해낸 겁니다. 하지만 양김이 단일화에 실패한 거 보면, 대통령 직선제도 결국 정권을 잡겠다는 두 사람의 권력 의지가 일부 반영된 게 아닌가 싶은데요. 아니라고 하면 이민우의 내각제 구상에 그리 반대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건 잘못된 거지. 대통령 직선제는 민주주의지만, 이민우의 내각제 구상 자체는, 홍사덕이랑 짜고…. 그때 헤어진 건 잘한 거야.”
신민당 분당 때를 말했다.
- 두 사람이 왜 내각제 구상에 끌려 들어갔다고 보나요.
“확인할 길은 없지만 사쿠라 논쟁이 있었죠.”
그때, “(전두환 군사 정권) 공작에 넘어간 거 아니냐는 풍문이 들리긴 했지.” 옆에서 듣고 있던 조찬옥 총장이 거들었다.
- 민추협이 정치권에 끼친 영향은 뭔가요.
“한국 정치 헌정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잖소. 민주주의, 인권, 노동 문제 등 구심점 역할을 했지.”
- 6월 항쟁의 도화선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알린 것도, 범대중 조직인 국본을 실질적으로 만든 것도 민추협입니다. 87체제의 주역임에도 오늘날 왜 이렇게 조명이 안 됐냐 이거죠.
“조 총장 같은 분이 발 벗고 뛰잖소.”
추켜세웠다.
“YS 문민정부 출범 30주년 기념 세미나도 하고, DJ 탄생 100주년도 준비하고….”
차츰 좋아질 거라는 얘기로 들렸다.
“지금 대한민국은 김영삼-김대중 정신이 증발해버렸어. 그래서 나라가 허둥대는 거야. 두 분은 애증 관계이기도 했지만 해결하는 리더십이 있었어요. 내가 국민의힘 상임고문이지만 제대로 못해. 민주당 보세요. 양김 정신은커녕 노무현 정신도 없어요.”
- 어떤 면에서요?
“국가 발전을 위해 힘 보탤 건 보태야지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게 하잖아. 당리당략에만 빠졌지. 양당이 점수로 치면 낙제점이야. 그래도 윤석열 대통령이 사심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잘 끌고 가면 경제와 안보 모두 잘 될 거로 봐요.”
- 노동-연금-교육 개혁 다 좋은데 저렇게 선언만 하면 공무원들이 움직일까요.
“보이지 않게 해야 해요.”
- 그게 가능하다고 보나요.
“궁극적으로 해내야 하지.”
생각난 게 있는지, “나는 꼭 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 가지 있어요. 사이버 정당을 만들어야 해요. 패권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사이버 영토에요. 주도권을 잡아야 해요. 그러려면 인재들이 필요합니다.”
그는 보안 리더 1000만인 양성을 주창하고 있다.
“한국이 사이버 중심의 국가가 되면 25년 후에는 G2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어요. 정치도 지금처럼 하면 안 돼요. 앞으로는 4차산업 혁명과 메타버스를 이해하지 못하면 지도자가 될 수 없어요. 지금과 같은 아날로그 시대 정치는 끝난 거예요.”
때아닌 유탄 맞고 DJ와 멀어져
흥미로운 이야기를 뒤로하고, 다시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 1995년 지방선거 때는 누굴 민 건가요?
“….”
금세 낯빛이 어두워지는 느낌이었다. 밝은 표정의 ‘웃는 상’이더니 이내 찌그러졌다.
알고 보니 과거 얘기를 기피하려는 이유가 있었다.
억울하게 생각하는 두 건의 정치적 사건 때문이었다.
1995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던 때였다. 민주당은 영국에서 돌아온 DJ와 당 총재인 이기택을 둘러싸고 내홍이 불거졌다. 경기지사 후보 경선 파동에서 갈등은 격화됐다.
DJ는 서울은 조순-경기도는 이종찬을 내세우면 수도권을 싹쓸이할 수 있다고 봤다. 반면에 이기택은 DJ 구상대로 된다면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 것으로 보고 경기지사 후보로 장경우를 고집했다. 이종찬 카드가 수용되지 못하면서, 경선은 이기택이 미는 장경우 vs 동교동계 측 안동선의 대결로 좁혀졌다. 하지만 장 측의 돈 봉투 살포 의혹까지 터지면서 진영 간 몸싸움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준상은 때아닌 오해를 받게 됐다고 회고했다.
#증언3
“세간에서는 내가 이기택 총재가 내세웠던 장경우 의원을 지지했다고 아는데 사실이 아니에요. 나는 장 의원을 밀지 않았어요.”
- 그럼 누굴 지지했나요.
“안동선 후보죠.”
동교동계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이기택 측에서는 유준상이 장경우를 지지했다고 떠들어댔다. 그는 당시를 두고 해당 ‘썰’들은 와전이요, 정치적 덫, 모략에 빠진 격이라고 규정했다. 이 일로 DJ로부터 오해를 사게 되면서 측근 그룹에서 소외돼갔다고 통탄했다.
# 증언 4
“지방자치제 관철을 위해 DJ와 단식투쟁했을 때가 기억난다. 그러나 이후 DJ가 전남지사 선거에 나가라고 세 번 권유했음에도 한사코 거절했을 때부터 어쩌면 일은 꼬여갔는지 모르겠다. 여기에 이기택 편에 섰다는 오해까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내 환상적인 계획(총선 전략)을 깨버렸다.”
자신을 원망하는 듯한 DJ의 그 말이 폐부를 찔러왔다. 각별했던 관계였으나 이미 금이 간 그릇이었다. 생채기가 아예 없던 때로 돌아가기는 어려웠을 거로 짐작됐다.
“이희호 여사가 날 굉장히 이뻐했는데 말이오. 김홍일 의원과도 형제 같았지.”
그 말을 하는 데 씁쓸함이 감돌았다.
“나중엔 김대중 선생과도 잘 지냈어요.”
안타까워하는 눈빛을 읽었는지, 애써 강조.
멈추지 않은 새로운 도전
6·27 지방선거 때부터 유탄을 맞았던 유준상은 이듬해인 1996년 15대 총선마저 공천에서 배제되는 쓰라림을 겪고 만다.
“이기택-장경우 때문에 내가 공천에서 탈락한 거요.”
다시 생각해도 분통이 터지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 생긴 또 하나의 억울한 일은 자신과는 상관없이 일어난, 지지자들이 저지른 ‘뱀 푼 사건’이었다. 11대 총선 당시 고려대 선배인 이중재 전 신민당 의원이 정치규제에 묶이면서 전남 보성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국회에 진출한 이래 4선 내리 승승장구하던 그였다. 그러나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지방선거 때부터 DJ 눈 밖에 나면서 벌어진 일이었을 거였다.
이에 반발한 유준상 추종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여의도에서 열린 당 후원회에 뱀을 풀고 만 것이다.
# 증언 5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에요. 집에 있다가 TV 통해 알았어요. 나를 추종하는 지지자들이 많았어요. 공천에서 탈락한 것에 분노해 그만….”
화살은 애꿎은 유준상에 꽂혔다.
- 당황했겠습니다.
“그래서 불출마 선언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 겁니다.”
비록 자신과는 무관하나 대신 책임지는 것으로 논란을 수습했다.
- 이후 민주당에는 왜 안 들어간 건가요.
“내가 상당히 고집이 세요. 한번 당을 떠났는데 또다시 기어들어 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대신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의 적극적 영입을 계기로 현재까지 적을 두고 있게 됐다.
- 여러모로 한이 많을 것 같습니다.
“처음엔 그랬지만….”
- DJ한테 원망은 안 들던가요.
“오히려 고맙죠.”
- 정치 인생의 항로가 바뀌었는데도요?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었잖소.”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정치적 고난을 기회로 받아들이는 경우였다. 미국의 하와이-일본의 와세다-중국의 북경대학에서 유학하며 세계 견문을 넓혔다. 영어, 일어를 넘어 중국어, 스페인어 공부에도 나섰다. 고려대 경제학 석사, 건국대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42.195km)를 완주하고 국토종주 633km도 성공했다. 전현직 국회의원 중 철인의 달리기라 불리는 울트라마라톤대회에서 100km를 완주한 이는 유준상이 유일하다.
“안철수 의원은 울트라마라톤연맹 고문, 나는 명예회장(웃음).”
- 그런가요.
“내 사전에 ‘늦었다’는 단어는 없어요.”
- 아. 네.
“젊은 시절 한양대 입학했다가 고려대로 방향을 틀었는데 말이오. 경제학과 들어갈 땐 차석, 나올 땐 수석으로 졸업했지.”
자랑할 일을 열거하자 단박에 얼굴이 환해졌다.
- 학생 때는 어땠나요.
“한양대 때는 4·19 혁명에도 뛰어들고, 고대 재학 시절에는 총학생회장 직무대행도 맡았었죠.”
# 증언 6
“1960년 4월 18일. 4·19혁명 전날이었다. 학생들이 궐기했고, 나는 한양대 1학년 행동대장을 맡았다. 우리는 이기붕 씨가 해외로 도주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 집 앞을 포위했다. 광화문에서 여의도를 뚫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데모 현장을 누볐다.”
“젊은 시절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 모진 고문도 받았지….”
민주화운동 하다 연행돼서 심한 고초를 겪었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때마다 곁을 지켜준 이는 아내(김경미)였다. 1969년 11월 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YS가 40대 기수론을 주창했던 바로 그날이오(웃음),” 새록새록 떠오르는 옛일이 더해지며 절로 미소가 났다.
말미에는 인터뷰를 잘했다고 보는 눈치였다.
“나는 원위치로 가야겠다.”
여러 의미가 내포된, 혼잣말 같기도 한 이 말을 할 때 그런 감이 전해졌다. 자신의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기록에 남기고픈 강한 욕구가 엿보였다.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 중 <내 인생의 마라톤은 끝나지 않았다>를 건네왔다. 인터뷰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그의 증언은 끝나지 않았다.
◇유준상 = 1942년 전남 보성. 부인은 첫사랑 김경미 씨, 슬하 1남1녀, 유관순 일가 종친회장, 천주교, 고려대 경제과, 동대학원 석사, 건국대 정치학 박사, 11·12·13·14대 국회의원, 신민당정책위의장, 국회경과위원장, 당 최고위원, 현 국민의힘 중앙당 상임고문, 하와이대 객원연구원-와세다 국제자문위원-북경대 연구학자, 현 한국정보기술연구원 원장. <한국이 변해야 산다>(일본이 싫다면서 일제는 왜 써), <내 인생의 마라톤은 끝나지 않았다> 등 다수 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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