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표 “6월항쟁 시발점 5·3 인천사태…전두환 끝났다 직감” [6월항쟁 되짚기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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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6월항쟁 시발점 5·3 인천사태…전두환 끝났다 직감” [6월항쟁 되짚기⑬]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3.06.12 11:4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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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5·3 인천사태 주도)
“신민당 개헌 현판식 활용 대중 집회 효율 모색”
“5·3 인천사태로 전두환 정권 항복 받아내려 해” 
“성공한 4·19 꿈꿨지만 미완으로 남아 6월 동력”
“민주화 주요 시점마다 역할한 YS 재평가받아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6월항쟁 시발점은 5·3 인천사태라고 발언하고 있다. 그는5·3 인천사태를 주도한 인물이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6월항쟁 시발점은 5·3 인천사태라고 발언하고 있다. 그는5·3 인천사태를 주도한 인물이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마침내 1987년 6월항쟁을 향한 해빙기는 서서히 끓는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83년 YS(김영삼) 단식 투쟁을 계기로 이듬해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정치결사체 민추협은 신민당(신한민주당)을 창당했고 12대 총선에서 관제 야당을 갈아치워 버렸다. 국민의 손에 의해 선명 야당이 태동한 것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해볼 만한 싸움이다.’ 전두환 신군부의 폭압 아래 침체돼있던 재야와 노동계, 학생들도 자신감을 되찾아갔다. 직선제 쟁취 구호의 개헌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6년 5·3 인천사태(이하 5·3사태)는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폭발적으로 점화했다. 훗날 6월항쟁의 승리를 가늠할 시금석이 돼줬다는 평가다. 
 

“민주화 운동은 나날이 발전해갔다. 1985년, 1986년쯤에는 혁명이 무르익어갔다. 1986년 인천 5·3투쟁 같은 경우 학생, 노동자, 야당 지지자까지 수만 명이 들고일어나서 혁명 상황을 연출했다. 인천 5·3 투쟁에서 동지들은 정말 날아다니는 청년들이었다. 당시 인천은 수도권에서 공장이 가장 많고 노동자가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인천은 노동자와 지식인이 만나고, 노동운동과 사회주의가 결합한 혁명을 꿈꾸는 우리에게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페테르부르크 같은 곳이었다. 거기에는 수백 명의 위장 취업자들이 몰려들어 ‘학출(학생운동 출신)’ 활동가가 없는 공장이 없었다.”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 현대사> 중-

 

“6월항쟁서 5·3사태는 중요한 사건”


‘전태일 친구’이자 ‘영원한 재야의 대부’로 불리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하 장기표)은 5·3사태의 배후로 지목돼 재판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다. 재야단체인 민통학련(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에서 정책실장을 맡고 있었다. 

“5·3사태는 6월항쟁으로 가는 시발점이었다.”

지난 4월 중순 여의도에서 만났을 때였다. 그는 “6월항쟁을 생각할 때 5·3사태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 어째서 그런가.

“우리는 5·3사태를 통해서 전두환 정권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다. 4·19혁명처럼 성공을 꿈꿨지만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다. 대신 대중투쟁에 의해 이 정권이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민주화 투쟁의 열기가 보통 거센 것이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에서도 인천 대회를 지켜보면서, 계엄령을 선포해 진압한다면 굉장한 큰 사태가 날 수 있다고 봤을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87년 6월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이 더 이상 탄압하지 않고 항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5·3사태는 미완으로 남았지만, 6월 항쟁 성공의 동력이 된 셈이다. ”
 

1986년 5월 신민당 개헌추진 인천결성대회 시위인, 이른바 5·3 인천사태가 민정당 사무실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연합뉴스
1986년 5월 신민당 개헌추진 인천결성대회 시위인, 이른바 5·3 인천사태가 민정당 사무실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연합뉴스

- 처음 어떻게 계획하게 된 건가.

“시기상으로 전두환 정권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였다. 학원안정화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학생운동을 없애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많은 대학에서는 이에 반대하고 있었다. 때마침 1986년 2월 신민당이 개헌 현판식을 했다. 서울 흥사단에서 첫 번째 현판식이 열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개헌 현판식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3월이 되면서 부산 서면 현판식이 있었다. 군중이 굉장히 많이 모였다. 당시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조직적으로 개헌추진위를 구성했고, 전국 대회를 확대해갔다. 이를 본 나는 재야와 노동권, 학생운동권까지 결합할 경우 전두환 정권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봤다. 현판식을 잘만 활용하면 대중 집회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겠다는 전략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전국 거점에서 열리는 신민당 현판식 대회에 맞춰서 민통련을 주축으로 독자적인 장외투쟁을 전개하는 방식이었다. 부산 현판식에 이어 3월 30일은 광주에서 현판식이 진행됐다. 이때를 기점으로 민통련은 사람도 동원하고 마이크도 준비해 가면서 3·30 투쟁을 전개했다. 

“한 20만 명이 모였다. 굉장한 반응이었다. 이윽고 5월 3일은 인천에서 개헌 현판식이 있었다. 당시 나는 재야인사부터 학생들, 해고 근로자와 시민 등 참여자 1만 명을 조직해 서울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사회주의 아닌데 용공 몰이 매도돼” 


하지만 신군부는 “체제 전복을 위한 용공 세력의 폭력 시위”로 규정하고 무차별 진압에 나섰다. 진압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증언이 있다. 민추협 소속으로 현판식 가두시위에 앞장섰던 송석찬 전 의원은 최근 <시사오늘>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5·3사태 때 개헌 현판식을 인천시민회관에서 했다. 최루탄을 밖도 아니고 내부를 향해 쏘아댄 것은 역사상 처음 목격하는 장면이었다. 민추협은 비폭력 시위를 하고 있었다. 화염병이나 돌을 던지는 행동은 없었다. 재야에서도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못 봤다. 그런데도 신군부는 최루탄을 직선으로 쏘아대며 위협을 가했다. 상당한 과잉 진압이었고 폭압이었다.”

하지만 제도권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던 민추협과 달리 재야와 노동, 학생 집단의 시위는 강도가 높았다는 증언도 있다.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관련해 “그 시기 학생이었고 5·3사태 현장에 있었다. 외곽으로 갈수록 민민투와 자민투 등 학생운동권 중심의 가격 시위가 격렬했다. 나라를 부정하며 혁명으로 제헌의회를 만들자는 구호도 상당했다”고 기억했다. 
 

민통련 정책실장이던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 노트에 적립해 놓은 민주통일민중운동론 초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 자료 캡처
민통련 정책실장이던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 노트에 적립해 놓은 민주통일민중운동론 초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 자료 캡처

장기표의 증언을 통해서도 오해를 불러일으킨 측면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5·3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민통련 구성원한테 교육용으로 ‘민주통일민중운동론’ 이론을 인쇄해서 뿌렸다. 사회주의도 아니고, 북한 추종식 주체사상도 아닌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중주체 민주주의론을 말했다.”

장기표가 정립해 노트에 작성한 이론서에 따르면 “민중의 정치적 의사가 자유로이 표현될 수 있고 이에 기초해 국가정책이 수립·집행되는 민주정치 체제가 확립돼야 할 것이며, 경제적으로 혹사와 수탈, 특혜와 부정이 없이 능력과 개성에 따라 일하고 공정한 분배가 이뤄져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재화를 조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쓰여 있다. 
 
“나는 그때부터 독자적으로 새로운 이념을 주장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에서는 엉뚱하게 이것을 사회주의로 몰아 민통련 구성원들을 잡아갔다.”

- 고초가 컸겠다. 

“이부영(민통련 사무처장) 씨는 나중에 나보고 ‘장 형 때문에 사회주의 취급을 받아 처벌받게 된 것’이라며 농담 삼아 말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말하자면 그게 사실이지.” 조용히 혼잣말하듯 말했다.

- 사회주의가 아니면 뭔가. 핵심이?

“사회주의는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없애고 계획경제와 프롤레타리아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반대해온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사유재산과 시장경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나 보러 우경화됐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아직도 꿈에서 못 깨어난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북한을 추종하고 있지 않나.”

어쨌거나 사회주의나 주체사상에 반대하는 이론을 펼쳤음에도 그의 의도와 달리 신군부의 용공 몰이(?) 혹은 관련 논란에 휩싸여 수난을 당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5·3 인천사태는 5공화국 권력이 사회적 현상을 조작·변용시켜 정치적으로 악용했던 수많은 정치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정부·여당은 민주화와 외세로부터의 자주화를 외치던 평화적 시위를 좌익세력의 극력 폭력시위로 규정해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의 계기로 삼았다. 전두환 정권이 5·3 인천사태를 통해 노린 것은 2·12 총선 이후 급신장한 신민당과 대학가 재야의 직선제개헌요구에 쐐기를 박는 것이었다.”
- 1988년 진상 특별기획 한국의 정치사건 <한겨레> 기사 중-

 

“전두환 정권 얼마 가지 못한다 예감”


장기표는 5·3사태로 “아마 1300여 명이 검거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 역시 주요 관련자 40여 명과 함께 지명수배됐다가 결국은 붙잡혔다. 재판에 넘겨져서도 그는 자신의 이론을 설파하는 데 앞장섰다. 
 

“1986년 5·3 인천사태 주도 혐의로 구속됐을 때 약 3000매 분량의 항소 이유서를 썼다. 그는 ‘우리는 잘 살 수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잘 살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는 말로 시작해, 우리 모두가 자유와 평화와 복지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안을 이 글에서 밝히고 있다.” 
- 김정남 <인간 해방을 위한 긴 여정, 장기표> 중에서-

 

시사오늘은 YS 서거 7주기를 맞아 87년 체제의 성과 이를 실질적으로 이끈 주역 YS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사진은 6월 항쟁 당시 시청 광장에 시민들이 운집해 있다.ⓒ연합뉴스
시사오늘은 YS 서거 7주기를 맞아 87년 체제의 성과 이를 실질적으로 이끈 주역 YS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사진은 6월 항쟁 당시 시청 광장에 시민들이 운집해 있다.ⓒ연합뉴스

‘얼마 가지 못한다’는 예견은 이듬해 실체로 증명되기에 이르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도화선으로 여론적 분노에 기름을 부은 4·13 호헌조치, 최루탄을 맞고 숨진 이한열 군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6월항쟁은 걷잡을 수 없는 범국민적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결국, 전두환 정권이 6·29를 선언하면서 6월항쟁은 마침내 성공을 거뒀다. 

민주화 투쟁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석방됐지만, 장기표는 1988년 12월이 돼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복역 중에도 재소자 인권 운동을 펼쳤다. 감옥 안팎의 경계 없이 어디서든 인간 존엄을 위한 투쟁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던 그였다.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6월항쟁 시발점은 5·3 인천사태라고 발언하고 있다. 그는5·3 인천사태를 주도한 인물이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6월항쟁 시발점은 5·3 인천사태라고 발언하고 있다. 그는5·3 인천사태를 주도한 인물이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때나 지금이나 민주화와 노동, 학생운동과 관련해 장기표라는 이름 석 자를 빼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견해다. 사상가이자 실천가로서 반백 년 넘게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삶의 존엄성을 높이는 민권 운동을 주도했다.

유신독재 반대시위와 청계피복노조 사건(전태일 분신 사건을 계기로 조직), 민청학련 사건,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긴급조치 9호 위반, 5·3인천 배후조종 혐의 등으로 12년을 수배자 신세로 지냈고, 다섯 차례 투옥됐으며 복역한 햇수만 9년이다. 그렇다고 재심을 청구하거나 이렇다 할 보상금도 신청하지 않았다. 

요즘엔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5월 말에는 국회 앞에서 5000명이 족히 넘어 보이는 인파와 함께 인간 띠를 형성했다. 고위공직자의 특권을 폐지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긴 줄로 국회를 에워쌌다.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늙지 않는 청년처럼 개혁할 곳을 향해 성큼 가는 모습이다.

노동계 대부이면서 작금의 귀족 노조가 된 민주노총이야말로 개혁돼야 할 대상 1호라고 목청을 돋우고 있다. 그러면서도 어느 하청 노동자의 가난한 투쟁에 가슴이 아프다고 말해 숙연함을 더했다. 젊을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말은 그에게나 어울릴 법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그에게 6월항쟁의 결정타를 물었다. 주저 없이 “명동성당과 부산역 투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6월항쟁의 도화선이라면 성공의 결정타는 명동성당과 부산역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6월 10일 전국적으로 데모가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은 체육관 선거를 강행했고, 노태우 민정당 총재를 대통령으로 간접 선출했다. 이에 반발한 시위였다.

"하루만 투쟁했으면 정권서 겁을 내지 않았을 테지만, 시위 참가자들 몇백 명이 명동성당으로 몰려갔다. 하루 반짝하는 투쟁이 아닌 6월 투쟁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뒤 6월 18일 엄청난 투쟁이 일어났다."

6월 25일은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YS) 씨와 전두환이 영수회담을 했다. 

“정권의 회유 작전이 성공했다면 투쟁 분위기도 가라앉을 수 있었겠지만, 김영삼 씨가 ‘회담 결렬’이라고 선언하면서 다시 가열한 투쟁이 전개됐다.”

YS의 ‘영수회담 결렬’ 선언은 신의 한 수와도 같았다. 시위는 다시 격렬해졌고, 전면전을 불사했다. 여기서 더 가면 4·19나 부마항쟁처럼 될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6·29를 선언했다. 항복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한열 군 영결식에 참석한 YSⓒ김영삼민주센터
이한열 군 영결식에 참석한 YSⓒ김영삼민주센터

장기표는 여기까지 설명하다, 잠시 YS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참 묘하다”고 했다. 
끝으로 해당 발언을 전하며 마친다.
 

“부마항쟁은 YS 제명 사건 때문에 일어났다. 김재규를 거쳐 유신독재가 끝이 났다. 1983년에는 YS가 단식 투쟁을 통해 유화 국면을 만들어냈다. 신민당 총재가 됐고 6월항쟁을 성공시켰다. YS는 묘하게 말하자면, 민주화의 주요 국면마다 중요 역할을 한 사람이다. 당시만 해도 나는 YS를 지지한 일이 없었다. 근데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YS가 펼친 개혁이라든가, 민주화 이런 재평가가 반드시 조명돼야 한다.”

P.S.

요약하면 87년 6·10항쟁 되짚기 13번째는 영원한 재야의 대부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을 통해 6월항쟁의 시발점이라 평가받는 인천 5·3사태를 조명하는 시간을 담았다. YS(김영삼)와 12대 총선의 재발견(정세운)을 모티브로 민주 항쟁의 결집체 역량(김민석), 전대협의 방향 전환(함운경), 비폭력 평화 운동(김현), 4‧13 호헌조치가 결정타(유기홍), 진화하지 못한 586의 명암(明暗)(이현종), 천주교계의 국본 참여(이명준),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을 알린 특종기자의 투쟁기(이부영),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성공의 결정타(이재오), YS총선 참여, 6·10항쟁의 동력(이성헌), 언론인으로서 바라본 6월항쟁(최문순), 넥타이 부대의 참여 계기(최재호)에 이어서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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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단테 2023-06-12 15:54:06
나라가 어려울때면 항상 그자리에서 나라를 걱정하고 책임을 다하시는 장기표 선생이 진정한 애국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