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주역, 586 세대의 …明暗과 ‘선진화 과제’
“진짜를 봤다, 학생운동권 핵심에 있을수록 전향해”
“밀레니멀 세대 위한 공간 못 만들면 역사적 죄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이현종 문화일보 논설위원과 타임머신을 탔다. 그는 우울한 낯빛을 보였다.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침울해한다고 한다. 586세대 전반에 흐르는 고민이라고 했다. 콕 짚어 트라우마라고 하지는 않았다. ‘조국 정국’ 이후 생긴 심리적 문제인 것만은 분명한 듯 보였다. 혹자는 ‘나쁜 586’이 있다면 ‘착한 586’도 있다고 했다. 이 논설위원은 어느 쪽일까. 지난 7일 중구 한 카페. 시간은 80년대로 맞춰졌다.
<타임머신>
1.
80년 5월 18일. 사실은 전혀 몰랐다. 전두환 정권에서 땡전 뉴스하던 때였다. 정부 입맛에 맞춘 보도가 전파됐다. 관련해서는 보도도 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얘기를 들은 기억은 난다. 그때 나(이현종 문화일보 논설위원, 87년 서강대 총학생회회장)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수험생이었고 세상 돌아가는 일엔 관심이 없었다.
진실에 눈을 뜬 것은 대학생이 되면서부터다. 5‧18 광주항쟁에 대한 사진전을 봤고, 엄청난 충격이었다. 국가 폭력이란 걸 처음으로 인식하게 됐다. 누군가 학생운동을 하게 된 계기를 묻는다면 그날의 사진전 때문이라고 말할 것 같다.
나는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84학번이었다. 대학가에서 84년은 전환의 해였다. 83년만 해도 학원가에는 사복경찰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시위가 일어나면 붙잡혀가기 일쑤였다. 총학생회도 아닌 학도호국단 체제였다. 전방입소, 문무대 병영 훈련 등 군사 관련 교과목인 교련도 배웠다.
84년은 달랐다. 학원 자율화(민주화) 조치가 시행됐다. 교내 경찰들은 철수했고, 제적됐던 학생들도 복학이 가능해졌다. 학도호국단은 폐지됐고, 직접 선거에 의한 총학생회가 생겨났다. 79년 12·12 쿠데타를 거쳐 강압으로 일관하던 전두환 정권이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구사한 일종의 유화책이었다. 88올림픽 유치를 앞두고 경제도 괜찮아지면서 자신감을 찾은 것에 대한 발로였다. 저항의 힘을 누그러트리려는 전략이면서도 불가피한 흐름이었다.
선배들과 우리는 표정부터 달랐다. 입학하자마자 자유를 맛본 84학번이 ‘놀자’ 분위기였다면 83학번부터는 엄혹한 시기를 경험한 세대였다. 교내를 누비는 경찰들에 의해 질질 끌려도 갔다. 시위에 참여했단 이유로 남학생들 경우 군대에 강제 징집됐다. 특수 관리 대상 중엔 암암리에 일부 죽어나갔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있었다. 시위를 한번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있었다. 소규모 시위를 해도 바로 잡아가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우린 좀 달랐다. 공포라는 걸 잘 몰랐다. 아이러니하지만, 오히려 학생운동이 대중운동으로 커질 수 있던 배경이 됐다. 전에는 결심한 소수만 지하운동을 했다. 점조직이었고, 누가 누군지 모르게 했다. 언더 운동을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한 계기 점을 준 게 학원 자율화였다. 대중운동의 기폭제가 된 거다.
나는 처음부터 지하서클에 들어갔다. 총학생회장에 앞서 신방과 학회장도 하고 오픈 공간 활동과 병행했다. 당시 나를 지배하던 건 정의감이었다. 별다른 고민 없이 결단을 했던 것 같다.
대학가 학생운동 노선은 크게 세 가지였다. 서강대를 비롯해 서울대, 연대, 고대, 한양대 등에서는 자주파인 NL(민족해방파)이 주류였다. 성균관대 등은 PD(민중민주주의 혁명파)노선이 강했다. 제헌의회라고, CA도 한 축을 이뤘다. 노선은 미국과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로 나뉘었다. NL은 반미자주 민족공조가 구호였다. 우선적으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쪽이었다. PD는 북한 문제는 나중 일이고, 노동자 권리부터 강화하자는 입장이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흐름과도 엇비슷하다. 북한을 어떻게 보고 문제를 풀어야 하느냐가 노선을 가르는 결정적 기준이었다.
2.
나는 NL 노선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중 변곡점을 맞은 사건이 있었다. 86년 10‧28 건대사태에서였다. NL이 주도한 애학투련(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발족식이 열리던 날이었다. 양정철(현 민주연구원장)이 애학투련 위원장이었다. 경찰은 작심하고 대규모 진압작전을 구사했다. 삽시간에 건물 주변을 포위했다. 학생들은 최후의 전선이라 할 수 있던 옥상에서 일주일 넘게 투쟁을 했다. 막판에는 1500여 명 이상이 연행되고 1300여 명 가까이 구속됐다. 그 속에는 내가 데려간 후배들도 있었다. 갓 학생운동을 시작한 친구들이었다. 나를 믿고 온 건데 후배들만 연행됐다. 부모님들이 오고, 죄책감이 파고들었다. 힘든 시기였고 책임감이 밀려왔다. (이 논설위원이 학생운동에 더욱 전념하게 된 또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지난 2017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 전한 바 있다. “86년 아주 친했던 과 후배와 함께 시위를 하다, 후배가 최루탄을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너무 힘들었다. 여기에 박종철 사건까지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학생운동에 전념하고 내 몸을 던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당시 운동권 씨가 말랐다고 할 정도로 조직은 초토화가 됐다. 파탄 났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87년 총학생회 선거가 다가왔다. 위에서는 나보고 나가라고 했다. 조직 재건이 필요했다. 남은 자들이 감당할 몫이었다.
투표 결과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총학선거는 3파전이었다. NL vs. PD계 제헌의회파 vs. 학도호국파 대결이었다. 당시 제헌의회파 중앙위원이 민병두(현 민주당 4선 국회의원)였다. 아주 치열하게 맞붙었다.
NL계를 대표해 나온 나는 군사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 전두환 타도를 구호로 내세웠다. 우리는 직선제 쟁취가 중요했지만, 제헌의회 근본주의자들은 직선제는 필요 없다고 봤다. 노동자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더 큰 강조점이었다. 투표 참여도 굉장히 높았다. 경찰에서는 요주의 감시를 벌였다. 회유도 하고, 수배당하기도 하고….
학생운동 안에서는 투쟁 노선이 화두로 떠오를 무렵이었다. 한쪽은 학생운동 중심의 반합법 투쟁을, 다른 한쪽은 대중 노선을 주장했다. 나는 대중들과 함께 투쟁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대중조직을 확대해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소수 운동권 투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NL이 대중운동을 표방하면서 합법적인 학생운동 연합체가 필요하다는 데 많이들 공감했다.
그 결과 6월항쟁 전후로 서대협(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을 발족했고, 전대협(전국지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이 만들어졌다. 전대협 1기 의장이자 고대총학생회장인 이인영(현 민주당 원내대표), 연대의 우상호(현 민주당 4선 국회의원), 경희대 김태년(현 민주당 3선 의원) 서울대의 이남주(현 성공회대 교수), 전남대의 김승남, 한양대의 김병식 등과 함께 전대협 결성에 동참했다.
나는 학내 시위 참가 혐의로 경찰에 쫓기던 중이었다. 집시법 위반 명목이었다. 6·29 선언 직후에는 수배도 잠시 풀렸다. 하지만 (이)인영에 이어 (우)상호 형이 구속되고, 의장 대행을 맡던 나도 전대협 주동 혐의로 도망자 신세가 됐다. 하루는 양김(김영삼‧김대중)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것을 TV로 보며 절망했던 기억이 난다. 붙잡혔고, 징역 1년 6개월을 살고 88년 봄 출소했다.
돌이키면 6월항쟁은 국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전대협 386(60년생 80년대 학번) 세대인 우리들이 어찌 보면 그걸 발아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는 평가할만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멘털 붕괴다. 생각도 갈등도 많아졌다. ‘조국 사태’를 맞으면서 50대가 된 386, 우리 586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나만 해도 요즘 친구들을 잘 못 만나겠다. 전대협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자주 가져왔다. 요즘은 만나도 다들 우울해한다. 조국 사태를 맞으면서 첨예하게 갈라졌다. 페이스북 등 SNS 에서 각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고 있다. 논쟁과 토론도 격렬했다. 의혹이 하나둘 사실로 밝혀지면서, 이제 그 단계조차 지난 게 됐지만.
<현재>
- 책임감을 느끼는 건가?
요즘의 고민에 대해 느끼는 이 논설위원의 고민은 큰 듯 보였다. 여기서부터는 인터뷰 형식으로 전환한다.
"586, 진화하지 못한 채 왔다"
"미래 세대 위해 한 것 없다"
“그동안 가져왔던 인간관계? 일단은 깨진 거다. 우리가 해왔던 게 뭐냐. 회의감이라고 표현하면 좋을 것 같다. '조국 수호를 하려고 청춘을 받쳤나?' '조국을 옹호하려고?' '검찰개혁만 따라 하고 조국 수호는 못 외치겠더라.' 서초동 촛불집회 간 친구들이 해온 말이다. '아니 우리가 왜 걔를 보호해줘야 하냐?' '걔가 뭘 했는데?' '검찰개혁이란 것 때문에 나온 것이지, 조국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다.' 정치적 내적 갈등이 심해지는 거다.”
요즘의 현상에 대해 이 논설위원은 심판으로 봤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가 심판당하고 있구나. 기득권을 누려왔던 것에 대한 심판이라고 할까. 사회적으로 우리 세대는 직장도 구하기 쉬웠다. 나름대로 재테크 기회도 있었다. 학생운동한 것이 훈장처럼 돼 대우도 받고 살았다. 전쟁도 겪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네트워크 인맥도 두루두루 갖췄다. 누릴 만큼 누려온 세대다. 젊은 세대들에겐 고스란히 부담이 되고 말았다. 공정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가 기득권이 돼 버렸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비판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거기에서 소외됐던 이삼십 대가 겪는 문제들을 적극 풀어가지 못한 거다. 우리는 과실만 따먹고 살았다. 그런 생각을 한다.”
- 길을 열어주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직장을 많이 못 만들어줬다. 저출산과 학교에 대한 문제, 경쟁사회에 대한 문제 등 개혁과 미래 세대를 위해 뭘 못한 거다. ‘80년대에 뭔가를 했다’는 추억 속에만 빠져서 지금까지 살았다. 진화하지 못한 채 온 거다.”
- 이유가 뭔가.
“어떻게 보면 자폐적이라고 할까.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계속 만나면 변하는 게 어려워지는 것 같다.”
이 논설위원은 변화해나간 쪽인 듯 보였다. 20년 넘게 언론사 기자로 있으면서 다양한 입체적 현상과 맞닥트렸다. 나름대로 사회를 많이 접하며 실체적 진실에 접근한 경우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들은 바 있지만, “학생운동권 핵심일수록 전향한 경우가 많다”는 얘기가 이번에도 나왔다. 이 논설위원도 지하조직에서 활동한 핵심이었다.
“진짜 핵심적으로 운동한 친구들 중에는 소련이나 혹은 북한에 갔다와서 전향한 사례가 많다. 뉴라이트 운동한 친구들 보면 대부분 과거 학생운동의 핵심으로 있던 친구들이 많다.”
- 아이러니하다.
“현실을 봤기 때문이다. 동구권의 몰락을, 소련의 붕괴를 봤으니까. 현장에 있을수록 느끼는 체감은 다르다. 북한에 직접 가서 실제로 보면 정말 기가 막히다. 나도 북한에 가서 현실을 봤다. 2000년대 세 번 정도 갔을 거다. 그전에 품었던 것들이 모두 환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저 그곳은 독재국가 그 이상도 아니었다. 많은 친구들이 그래서 전향한 경우도 많다. 주사파를 대중화시킨 강철서신의 김영환도, 하인호 등 전부 다 전향했다.”
- 열심히 안 한 사람들은 그럼?
“조국(전 장관)이 딱 그런 경우다. 학생운동 겉돌다가 언저리에 있게 된 케이스다. 사노맹(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도 조금 하는 등. 학생운동 때 열심히 못했다는 부채의식이 나중에 오히려 (시민사회운동에) 적극 뛰어드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얘기는 다시 ‘586 심판’ 영역으로 돌아왔다.
- 청년 세대를 위해 길을 열어주지 못했다고 아까 말했다. 대안은 뭔가.
“이삼십 대들이 커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물러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거라도 안 하면 정말 역사의 죄인이 되는 거라고 본다. 끝까지 누리겠다고만 하면 예전에 우리가 비판했던 그 꼰대들하고 똑같은 꼰대들이 되는 거 아니겠나. 자녀 세대에 대한 책임감을 너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오만하기까지 했다. 정부 초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국회에 와서 전희경 의원이랑 설전을 벌인 적이 있지 않나. 전 의원이 주사파라고 비판하자 ”당신은 그때 뭘 했느냐“고 묻더라. 오만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586이 심판받아야 한다고 본다.”
"청년 정치인 진입로 열어줘야"
"변화 줘야, 안 그러면 답 없다"
- 내년 총선이 중요할 것 같다.
“나는 586이 총선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 그러면 발전이 없다. 19대 총선에서 586 당선자는 전체 대비 30%가 넘었다. 20대 총선에서는 40%가 넘었다. 유럽만 하더라도 40대 이하 당선자가 38%~41%정도 된다. 일본만 해도 40대 이하가 8%대이다. 한국 국회는 30대 국회의원이 3명밖에 안 된다. 말이 안 된다. 진입로가 너무 좁다. 인위적으로라도 장을 열어줘야 한다. 변화를 줘야 한다. 안 그러면 미래세대를 위한 답이 없다.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에서 더 이상 못 크는 이유는 리더들의 문제다. 지금 있는 정치권으로 3만 불 이상 넘어갈까? 불가능하다고 본다. 우리식의 사고방식으로는 미래 세대를 위한 답이 없다. 변해야 한다. 프랑스 마크롱 같은 대통령이 우리도 나와야 한다. 가장 큰 사회당을 제치고 아무 정치 경력이 없는 사람들을 영입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초기 노동개혁 등 엄청난 저항에 부딪쳤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은 정착해가고 있다. 유럽의 병자 취급받던 프랑스가 탈바꿈한 것이다.”
- 차기 대권주자 라인에서 보면 586은 상대적으로 젊어 보이는 면이 있다.
그런 생각이 들만큼 대권주자 지지도 상위권에는 60대 주자들이 여럿 된다. 나이순으로 이낙연 총리는 만66세, 박원순 서울시장은 만63세,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만62세, 유승민 전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는 만61세,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 만61세, 심상정 정의당 대표 만60세,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만60세다.
50대 주자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 만58세,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공동대표 만57세,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 만57세, 원희룡 제주지사 만55세, 이재명 경기지사 만54세 등이 거론되고 있다.
“(대권은) 아마 그 세대 쪽에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 내년 총선 전망은.
“결국 양당제로 갈 가능성이 높다. 지금 상황으로만 보면 민주당은 선전하기 힘들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전보다 좋은 성적을 거둘 것으로 보인다. 황교안 유승민 체제로 가지 않을까 싶다. 우리공화당은 한국당과 못 합칠 거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민평당, 대안신당 등) 호남신당은 흡수되거나 총선서 어렵지 않을까 싶다.”
- 선거법도 주요 변수다. 통과될 거로 보나.
“특별한 고육책이 나오지 않는 한 쉽지 않을 거다. 현역의원 의석수 28석이 줄어든다. 반발이 심할 것이다. 나는 그 제도가 옳은 제도라고 보지 않는다. 국회의원은 지역에서 많이 뽑는 게 대의민주주의 기본이다. 미국 등 대통령제 하에서는 비례대표제가 잘 없다. 독일 등 의원내각제에서는 일부 있지만, 우리 시스템 하에서 대안은 아닌 것 같다. 정답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패스트트랙에 상정된 선거법 개정안 통과 시 지역구 의석수는 253석에서 225석 줄어드는 대신에 비례대표석은 기존 47석에서 75석으로 늘어난다.
- 비례대표는 전문성을 반영할 때 이점이 있지 않을까.
“나도 정치부 기자 시절 오랜 기간 국회를 출입해봤지만 국회의원은 오히려 정무적 판단이 중요하다. 민심과 잘 소통하고, 잘 설득하고, 협치와 갈등 조정을 통해 합리적 해결책을 내놓는 게 필요하다. 그에 필요한 전문적 지식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된다. 국회에는 입법조사처가 있다. 미국의 의회조사국처럼 전문적이다. 이런 곳의 기능을 강화해 도움을 받으면 되는 일이다.”
이 논설위원은 선거법 문제보다 개헌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대통령제는 한계점에 다다랐다”고 했다.
“권력 독점은 부작용을 낳는다. 우리 사회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각계각층의 다양한 욕구를 융화시켜나가는 게 필요하다. 의원내각제가 답이라고 본다. 헌법 개정을 해야 할 텐데, 다음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본다.”
"업그레이드 vs. 나락, 기로에 선 국가"
"민주주의 다음단계의 선진화로 가야"
다시 6월 항쟁 되짚기의 마무리로 넘어왔다.
- 한계와 과제는.
“진화하지 못한 게 한계다. 좀 더 진화했어야 됐는데 성장하지를 못했다.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 과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국민들이 바뀌었고, 세대가 바뀌었다. 거기에 걸 맞는 생각과 새로운 발전전략이 필요하다. 3만 불까지 성장하는 데는 유효했다. 그 이상 가려면 더 나은 대안이 요구된다.”
- 어떤 대안인가.
“선진화라고 생각한다. 6월항쟁으로 ‘제도적 민주주의’를 이뤘다면 앞으로는 선진화 시스템이 요구되고 있다.”
- ‘제도적 민주주의’하면 YS(김영삼 전 대통령) 공을 빼놓을 수 없다. YS 서거 4주기를 맞아 평가한다면.
“YS는 재평가돼야 한다. 흔히들 3당합당을 비판하지 않나. 그나마 YS가 3당합당을 하면서 민주주의가 순탄하게 제도적으로 정착해갔다. 만약 그 과정이 없었다면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어려웠을 거다. 비록 IMF라는 과(過)가 있었지만 제도적 민주주의를 완성한 것은 엄청난 업적이다. 금융실명제를 비롯해 하나회 척결을 통해 군사 쿠데타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아직도 중동이나 남미의 중진국들 중에서는 군의 정치개입을 확실히 못 끊은 사례도 적지 않다. YS로 인해 우리는 군이 더 이상 정치에 개입 못하게 된 결정적 이유를 얻게 된 것이다.”
-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586인 우리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냉정하게 봐야 한다. 내년 총선은 우리 국가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것인가, 정말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가라는 중대한 분기점에 와있다. 아르헨티나, 칠레는 세계 최강대국에서 하류 국가가 됐다. 왜 몰락했나. 퍼주기 정책, 포퓰리즘 때문에 몰락했다. 어떤 리더십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가는지 중남미로 가는지가 결정될 거다.”
- 어떤 리더십 유형을 주목하나.
“마크롱 모델이 매력 있다. 적극적으로 어젠다를 제시하고, 소통 능력과 비전, 미래 사회를 보는 혜안이 있는 리더가 나올 때다.”
p.s.
요약하면 이번 87년 6·10항쟁 되짚기 다섯번 째는 그래서 ‘진화하지 못한 586의 명암(明暗)’(이현종) 편이다. 12대 총선의 재발견(정세운)을 모티브로 민주항쟁의 결집체 역량(김민석), 전대협의 방향 전환(함운경), 비폭력 평화 운동(김현), ‘4‧13 호헌조치가 결정타’(유기홍)에 이어 학생운동권 그룹으로서의 6월 항쟁 되짚기를 조명했다. 다음에 타임머신을 함께 탈 주인공은 ‘진짜 진보의 진화일까’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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