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후 우리 세대 전쟁 없는 평화‧평등의 시대”, “농지개혁이야 말로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 돼줘”
“이승만‧김성수‧신익희‧조봉암‧조만식 등… 기억해야”, “자유와 평등은 건국 통해 얻게 된 훌륭한 유전자”
“건국부터 삼권분립‧대의민주주의‧언론 자유 형성”, “학생운동 흐름, 北으로부터의 독립 vs 의존이냐”
“유신 때조차 中‧北의 일당 독재에 비하면 양반…” , “광주 항쟁 마음의 빚 이후 좌경화…친북 주류로”
“6‧10~26일까지 전 국민 참여…6‧29 선언 이끌어”, “87, 유신체제 선포된 지 15년 만에 민주헌정 부활”
“한국 좌파 중국 모택동 사상에 깊은 영향받아”, “천안문 유혈 사태‧소련 붕괴 계기로 사상 전향”
“386세대, 사상적 입장 분명치 않아 전향도 못해”, “영미식 진보주의자 되면서 건국의 위대함 발견”
“386, 해방전후사의 인식 사고의 틀에서 못 벗어나”, “정권 무너뜨린 경험에 중독돼 그들만의 권력 누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이럴 때 아이러니하다.
건국 당시 이승만 초대 정부는 반일 캠페인에 주력한 바 있다. 독립 운동가였던 그는 대통령이 된 후 거리마다 무궁화를 심었다. 일본말을 우리말로 바꾸는 등 민족 자존심 회복운동에 앞장섰다. 박정희 정권도 민족주의 정서 주입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색채를 지우는 방편으로 백범 김구 선생을 활용했다. 국민으로부터 충성심을 발로시키고자 성군으로서의 이순신 장군을 적극 부각했다.
이들 정권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들 중 일부는 차츰 더 근본주의적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이제, 민족주의를 강조했던 두 지도자는 이들로부터 친일파 혹은 반민족주의자로 지탄을 받는 신세가 됐다.
65년 한일협정 당시도 아이러니하다. 그 시절 DJ(김대중)는 나름의 소신으로 한일협정을 찬성하다, 사쿠라로 몰렸었다. 반면 MB(이명박)와 이재오는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주도한 민주화 투사였다. 시간이 흘러 DJ도 MB도 대통령이 됐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은 친일파로 몰려 있다.
이는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제3의길>발행인>가 쓴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에 나온 내용들이다. 책을 읽다, 아이러니함에 주목하며 공유해봤다.
이번 6월 항쟁 되짚기는 진보사관의 성역과 금기를 깨온 주대환 대표와의 시간여행이다. 만난 지는 좀 됐다. 두어 달 전(지난해 11월 23일) 역사박물관 근처였다. 보충 대목이 필요한 부분은 그가 쓴 책 등을 참조했다.
<신생독립국의 탄생>
이야기는 2차 세계 전쟁부터 시작한다. 1945년. 인류는 전체주의에 맞서 싸워 이겼다. 독일 히틀러 파시즘과 일본 군국주의가 비로소 패망에 이른 것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참변으로 기록될 만큼 수천만 명이 목숨을 바쳐 이룬 끝에 얻은 승리였다. 그 희생 덕분에 8월 15일 우리나라가 해방될 수 있었다는 평가다.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려는 유엔(연합국)이 개입해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신생 독립국에서 태어났다.”
어딘지 그 말이 신선하게 와 닿았다.
“나는 1954년생이다. 1년 전(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났다. 그로부터 65년간 평화의 시간이 이어오고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때만 해도 내내 전쟁이었다. 1931년 만주 사변부터 45년 8월 해방이 될 때까지 태평양 전쟁을 경험하고 너무너무 힘들었을 거다. 마지막 3년간의 한국전쟁은 최고로 압권이었다. 우리 세대는 전쟁이 끝난 뒤 태어났다. 한 번도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다. 당신들이 그렇게 고생한 줄을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미안하다.”
- 철이 든 건가.
“그렇지(웃음) …. 어찌 보면 식민지나 전쟁의 아픔, 어른들의 상처를 몰랐기에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수 있던 배경이 됐을 테지만.”
- 그 시대(50년대)는 어떤 시대로 기억되나.
“우리 세대는 평화의 시대였고, 무엇보다 평등한 시대였다.”
- 전쟁 직후 배고픔의 시대였을 것도 같다.
“상대적인 얘기다. 최소한 밥 굶는 사람은 없었다. 가난했지만 대한민국은 자영농의 나라였다. 조그맣지만 논밭이 있었다. 부모 세대는 너무너무 부지런했다. 달밤에도 일했고, 새벽같이 일어나 온갖 것을 땅에 심어 재배했다. 닭도 기르고 토끼도 길렀다. 보리밥, 고구마도 먹고 농한기가 돼 식량이 떨어지면 제방을 쌓는 공사를 했다. 그런 걸 하면 미국에서 밀가루 등 원조물자를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전쟁이 끝난 후 시대는 암흑기만은 아니었다. 상의 군인들이랄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쟁의 상처는 있었다. 그러나 다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해방 당시만 해도 문맹률이 78%였지만, 60년대 20%대로 떨어질 정도였다.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다.”
- 원동력을 뭐로 보나.
“건국에 있다. 대한민국 건국이 가진 위대함.”
주 대표는 유년시절의 추억에 빗대 설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신화를 들려주듯 경건한 마음인 듯했다. 대한민국 건국이 가진 위대성에 대해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조심조심 말하는 것도 같았다.
요 부분은 1인칭 시점으로 기술.
<평등의 시대>
우리 세대는 최소한 모두가 학교에 입학했다. 유치원 다닌 사람들은 굉장히 적었지만 초등학교도 모두 공립이었다. 전국의 모든 아동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입학을 했다.
나(주대환)도 그중 한 아이였다.
내 고향인 경남 함안은 남쪽이라 전쟁도 일찍 끝났다. 나는 농촌에서 자랐다. 100호쯤 되는 마을이었다. 같은 나이의 친구들이 무지 많았다. 우리는 전쟁 직후 태어난 베이비부머의 맏이들이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게 소몰이 가는 풍경이다.
학교를 파한 친구들이 소들을 낙동강 지류의 강둑에 데려다 놓으면 알아서 풀을 뜯어먹곤 했다. 물장구치다 보면 해가 졌고, 소들의 배도 불룩해졌다. 그 소를 몰아 동네로 데리고 오는 게 일상이었다. 애들이 끌고 가는 게 아니었다. 소들이 알아서 자기 집으로 들어갈 줄을 알았다. 새까만 얼굴에 검정 고무신을 신은 아이들도 소의 뒤를 따랐다. 그 사이 뱀도 잡고 개구리도 잡으면서 집으로 왔다. 지금 그 같은 풍경 사진을 요즘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인도네시아나 베트남이 아니냐고 할 거다.(웃음).
밭을 갈아주는 소는 집집마다 중요한 재산이었다. 부잣집에는 두세 마리, 여느 집에도 보통 한 마리씩은 있었다. 부잣집에서 낳은 송아지를 가난한 집에서 키워주고 그 소가 새끼를 낳으면 본인들이 새끼를 갖고 어미는 돌려주는 방식이었다.
<모두가 양반인 나라>
우리 때는 모두가 양반의 시대였다. 윗대만 해도 누구는 노비의 자식이고, 누구는 양반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양반이었다. 김해김씨, 전주이씨, 경주김씨, 경주박씨… 왕후장상이 따로 없었다.(웃음)(전주이씨가 전국에서 300만 명이 될 정도로 기왕이면 왕족이 되자며 족보를 산 경우도 많았다는 얘기도 있다.)
신분사회였다면, 아버지가 누구인가가 굉장히 중요했겠지만, 그 시절 우리에겐 친구들 아버지가 뭘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친구에만 관심을 뒀다. 어떤 놈은 주먹이 셌고, 어떤 놈은 깡이 좋았다. 공부를 못해도 다른 재주가 있었다. 중학교만 나와도 성공할 기회가 있었다. 사장이 된 경우도 많았다.(이 대목에서 주 대표는 그때와 다르게 오늘날이 되면서 오히려 '조국 사태' 등에서 말해주듯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나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전근대적 신분 질서의 잔재가 완전히 정리된 나라는 구대륙에서 우리가 유일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 개혁이 이뤄져 지주 소작제 토지 개념이 완전히 정리됐다. 50년대부터 이미 우리는 토지소유에 대한 평등지수가 전 세계에서도 압도적으로 높았다.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과 달리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뿌리내린 특별한 나라였다. 전쟁이 종료되고, 남북 관계도 정리되고 본격적으로 한 시대를 열었다. 이 모두가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이뤄진 일들이었다.
특히 건국과 동시에 이뤄진 농지개혁이야말로 대한민국 발전의 지렛대가 돼준 가장 혁명적인 일이었다. 농지개혁을 알아야 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왜 토지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나.
1948년경 덩치 큰 중국이 대대적 공산혁명을 벌이던 때였다. 중국 내 장개석 군대는 미국의 지원을 받음에도 공산주의 모택동 군대에 밀려 대만으로 밀려나는 상황이었다. 왜 그런가 보니, 모택동 부대가 농지개혁을 요구해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그 영향력이 동아시아로 미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을 대상으로 한 강력한 토지개혁이었다. 중국의 공산혁명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토지개혁을 철저히 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아래 농지개혁법안을 과감히 추진했던 이가 죽산 조봉암 선생이었다. 또 그를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한 이가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건국 초기의 토지개혁은 매우 훌륭한 안이었다. 연세대 박명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북한식 토지개혁의 경우 무상몰수 무상분배라 자랑했지만, 국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만 무려 40%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50%소작료를 받았던 것과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 농민들이 사고팔 수도 없을뿐더러 50년대 중반부터는 아예 집단농장을 추진해 국가 소유가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으로, 자영농이 30%의 세금을 5년 간만 내면 자기 땅이 되는 방식이었다. 소유권이 온전히 농민에게 가는 거였다. 해방 당시만 해도 85%가 소작농이었는데, 이들이 토지개혁을 통해 자기 땅을 갖게 되면서 열심히 일했고, 자녀들을 가르쳤다. 또 그것이 저력이 돼 대한민국은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지금의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강국이 되는데 가장 중요한 밑천이 돼준 것이다.
필리핀이나 남미나 라틴아메리카는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높았어도 농지개혁을 못해 가난해진 경우였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도 자신들이 농지개혁을 못해 빈곤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평한 바 있다. 멕시코는 두 차례의 토지개혁을 했지만 우리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경우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어디서 오나. 결정적으로는 경영능력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멕시코나 브라질, 필리핀 등은 작업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대규모 농업노동자들에 가까웠다. 우리는 지주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소작농일 때부터 경영능력을 터득해오고 있었다. 그 능력은 자영농이 돼 완전한 자기 땅이 되면서 날개를 단 격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조건들에 힘입어 대한민국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탄생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건국의 아버지들>
또 그러기까지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있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만의 원맨쇼는 아니었다.
미국을 보면 조지 워싱턴, 알렉산더 헤밀턴, 존 애덤스, 제임스 매디슨, 토머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등 수많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있지 않나. 대한민국도 자유와 평등을 헌법에 새긴 최초의 제헌의회 의원 등 여러 건국의 아버지들이 존재했다.
우남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스타였다. 그는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냉전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양국의 밀월 관계가 계속 유지되기 어려울 거라고 예견했다. 미소 합의에 의해 통일 정부 수립이 어렵다고 본 그는 분명한 반공 노선을 갖고 1946년 6월 최초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다. 그것이 시대를 예측한, 그 유명한 정읍 발언이었다.
인촌 김성수 선생은 대한민국 건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대 최대의 지주이자 경성방직을 만든 최초의 자본가였다. 일부 친일 논란도 있었지만 실은 독립운동 자금을 많이 댄 분으로 유명했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그로부터 돈을 받아 조직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건국 당시 한민당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를 담당한 유진오 선생도 그의 사람이었다.
1공화국의 제헌의회 국회의장을 지낸 해공 신익희 선생은 김구 선생의 임정계로 임시정부의 내무 부장격이었다. 1956년 한강 백사장에서 대통령 선거에 임할 당시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30만 명이 모일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아 대권 역시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비운을 남겼다.
농지개혁의 공신인 죽산 조봉암 선생은 독립운동도 치열하게 하고 건국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도 큰 역할을 한 분이다. 건국 전 박헌영계로 공산당원이었지만 미국과 접촉한 이후 전향해 건국에 참여하게 됐다. 하지만 색깔론 논란을 비껴가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52년 만에 간첩 혐의를 벗자, 이번에는 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작은 기사를 근거로 친일 논란에 휩싸이며 새삼 수모를 겪고 있다. 김성수 선생과 마찬가지로 건국 초기 반민 특위 명단에도 없었던 독립유공자에 이런 불명예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죽어서도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친일몰이가 얼마나 천박한 민족주의에 근거해 있는지에 대해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고자 한다. 창씨개명만 해도 일제가 내선일체를 주장해 조선 사람은 모두 일본식 이름이 있었다. 그것은 민족의 아픔이지, 개인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 말은 지금의 우리가 보는 북한처럼 광적인 모습이었다. 41년부터 45년까지는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던 전시 상황으로 일본이 미처 날뛰던 때였다. 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사들이 칼을 차고 다녔고, 대민 전쟁을 지지하거나 학도병 지원을 격려하는 연설을 강요하는 일은 예삿일이었다. 이렇듯 전시 상황의 특수성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김규식 안재홍 조소앙 등 독립 운동가들 만하더라도 북한의 강요로 대남방송에 이용될 때가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점을 감안해 그분들에게도 건국훈장을 추서했고 독립유공자로 예우했다. 마찬가지로 일제 때 신문이나 잡지 등의 일부 기록물을 전체인양 판단의 근거로 삼아 조봉암 선생을 친일파로 매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유와 평등의 유전자>
흔히들 우파에서는 자유를 강조한다. 대한민국은 자유의 나라라고, 그래서 공산당과도 싸워 목숨을 바쳐 이겼다고 얘기한다. 우익적 관점으로 보면 건국의 역사도 반공적 입장이 되고 마는 거다. 그러나 나는 좌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평등이라는 가치 역시 자유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라는 건국을 통해 얻게 된 훌륭한 유전자라고 생각한다.
한국 전쟁이 났을 때를 보자. 대한민국으로 군대를 보내 공산군의 침입으로부터 구해준 나라는 모두 16개국이었다. 당시 영국은 노동당 정부였고, 미국은 민주당 정부였다. 영미의 진보 정당들이 보내준 것이다. 함께 참전해준 호주나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도 영국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노동당 정부들이 선 나라들이 꽤 많았다. 유엔 감시단이 돼 인권이 잘 지켜지는지, 자유선거가 잘 이뤄지는지 등 한국을 돕는데 나선 것이다. 토지개혁만 해도 원래는 진보 쪽에서 주장한 어젠다였다. 우파들이 자랑하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 모델이 성공할 수 있던 것도 대한민국이 농지개혁에 성공한 이미 평등한 나라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이처럼 자유와 평등의 유전자로 발전을 이뤘건만, 그럼에도 보수 쪽 이들은 이런 생각을 잘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다.
<천생 좌파>
표정에 씁쓸함이 어렸다. 화제를 돌릴 겸 그의 집안에 대해 물었다.
- 본인 집에는 소가 몇 마리가 있었나.
“하하. 두세 마리 정도 있었을 게다.(미소)”
부자라는 말을 돌려 말하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유지로 꼽혔다.
“그렇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종이 한 장, 나락 한 톨을 그냥 버리지 않으셨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들이었다.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시장에서 코르덴(골덴) 바지와 흰 운동화를 사주셨다. 학교에서는 내가 부잣집 아들이고 공부도 잘하고 하니 (선생님들이) 예뻐하셨다. 나로선 친구들에게 미안한 일이 많아졌다. 내 성향이 그래서 좌파인 건가 보다.(웃음)”
- 많이 가진 것에 대해 미안해한?
“나를 더 예뻐하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공평한 대우라고 생각돼 마음이 불편했다. 조금 불리한 조건에 있는 친구들을 위해 내가 뭐라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은 그게 다다. 중‧고등학교 때는 문학청년이었고.”
- 그런 성향이 학생운동을 하게 된 이유가 됐을까.
자연스레 박정희 유신 시대로 넘어갔다. 주 대표는 마산 중‧고등학교를 거쳐 73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 입학했다. 72년 10월 유신헌법이 만들어졌으니 그 이듬해였다.
“72년 10월부터 87년 6월 15년간은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유일하게 중단된 시절이었다. 내 나이 20살부터 35살까지의 기간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청년기에 하필 한국의 민주정이 위기를 맞은 것이다. 나로선 민주화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혁명을 이룰 수 있을까에 집중했던 것 같다.(웃음)”
민청학련 사건부터 긴급조치 9호 위반, 부마항쟁 가담 등 네 번의 옥고를 치른 그는 5‧18 광주 민주화 항쟁 이후 전국 규모의 지하 조직을 결성하는 등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계의 대부로 불린다. 86년에는 가장 큰 노동운동 조직 중 하나인 인민노련(인천민주노동자연맹)을 결성해 6월 항쟁에 결합, 87체제를 여는 데 앞장선 장본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학생운동사의 흐름>
- 이 참에 학생운동 발달사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 주로 어떤 사상을 중심으로 공부한 건가.
“당시는 온갖 종류의 사조들이 들어왔다.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중국의 모택동 사상(마오주의)이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하면 많이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인용하지만, 동아시아에서 뿌리내린 것은 모택동 사상이었다. (토지개혁 당시 설명한 바 있듯) 중국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지 않나. 모택동 사상의 권위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한국과 일본의 좌파 지식인들은 그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 국내는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나.
“박현채‧리영희‧강만길 선생 등이 80년대 학생운동 사상의 자양분이었다. 특히 시리즈로 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당시 젊은이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줬다.”
<민족경제론>의 박현채, <전환시대의 논리>의 리영희, <한국민족운동사>의 강만길 선생 등은 민족 평론지 <창작과 비평>등을 통해 학생운동을 하던 청년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故송건호 전 한겨레신문 대표가 지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80년대 학생운동권들의 의식화를 견인한 대표적 책으로 친일 문제와 분단체제 등을 다뤘다.
- 주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나. 어떻게 하면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등이 아니었나 싶은데.
“‘전두환 쟤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우습게 생각해라. 쟤들은 친일파의 후예들이고 원래부터 씨가 나쁜 놈들이야. 우리는 독립 운동가들과 같은 존재야. 도덕적으로 얼마든지 우월감을 가져도 돼. 그런 얘기들이 주를 이뤘던 것 같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을 시리즈로 내보내며 젊은이들에게 해준 건 그런 얘기였다. 그러니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386 운동권 출신 중 다수가 우리나라를 볼 때 아직도 친일 청산이 안 됐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이 잘못됐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건국 과정의 다른 좋은 면은 쏙 빼고 주야장창 그 얘기만 하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그처럼 빠져들게 만든 결정적 영향을 준 계기가 있다면 뭐라고 보나.
“유신시대를 거쳐 서울의 봄과 87 체제가 오기까지 중간에 전두환 군사정권에 저항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80년 봄 전국 대학교에서는 학생회 추진 운동이 일어났고, 정권에 맞서 다가올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광주에서만 격한 저항 운동이 일어났고, 전두환 정권은 이를 타깃으로 무참히 짓밟았다. 우리들에게 있어 마음의 빚으로 남은 그 사건을 계기로 많이들 좌경화로 빠지게 됐다. 청년기를 보낸 세대의 절대다수는 주체사상파가 될 정도였다. 이들이 친북 반미, 민족주의 성향으로 가면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주류가 돼간 것이다.”
- 주류가 나온 배경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유신체제 하에서부터 파생된 학생운동 흐름과 계파에 대해서도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유신체제 하에서의 탄압이 세지면서 학생운동은 더욱 지화 화됐다. 학림, 무림, 남민전, 민민투, 자민투, NL(자주파), PD(평등파), CA(제헌의회파) 등이 좌파 족보에 속했다. 학생 때 나는 무림이라는 지하조직의 책임자였다.
그 시기 학생운동의 흐름은 두 가지였다. 인디펜던트 vs 디펜던트. 즉 독립파와 의존파였다. 어떤 독립이냐면, 북한으로부터의 독립이냐, 의존이냐를 말한다. 사실 이런 흐름은 이미 50~60년대 초부터 있어왔던 거다. 그때는 ‘통일혁명당은 의존파’, ‘인민혁명당은 독립파’ 등으로 나눠져 있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의존성이 승리한 적이 없지만 우리나라는 분단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80년대에 와서 친북 성향의 의존파가 득세를 하기 시작했다.”
- 아까 말한 광주 민주화운동의 계기 때문인가?
“그렇다. 당시 학생운동권에서는 ‘전두환 세력인 저 악마를 몰아내기 위해 어떤 놈하고도 손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주체사상을 대중화한 강철서신의) 김영환이나 그런 친구들이 북한이라는 존재를 재발견하며 급속도로 범대중화의 물결로 나아간 것이다. 당시 북한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일수록 김영환이 말하는 ‘전국적 관점’이라는데 쉽게 넘어가기 일쑤였다.”
- 전국적 관점은 무얼 말하나.
“전국적 관점이란 남한만 따로 떼어내서 생각할 수 없는 관점을 말한다. 다행히 나중에 김영환은 잠수정을 타고 북한으로 가 김일성을 직접 만난 후 오히려 실체를 직면하며 전향하게 됐다. 그런데 정작 북한을 모른 채 의존성 사고에 길들여진 일부 386 운동권 세대 중에서는 여전히 80년대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한편으로 돌이키면 당시 운동계는 감히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과 모택동의 <식민지 반봉건론>의 틀을 벗어날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여러 모순이 발생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예를 든다면?
“원래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르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봉건제 또는 전근대의 유산을 타파하지 않으면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나와 있다. 이 관점에서 박현채 선생 등 그 시대 스승들은 우리나라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이전의 단계인, 식민지 반봉건 사회의 발전 단계에 있다고 가르쳐왔다. 문제는 실제 현실에서는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거다. 이 명약관화한 현실을 설명하지 못함에도 당시 우리는 모순에 문제 인식을 던지지 못했었다. 그저 한국 경제가 신식민지적 상황이자, 제국주의 자본에 의해 수탈을 당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한국에 대한 전망 역시 외형적으로는 성장을 하더라도 대외 종속이 심화됨에 따라 머지않아 외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한계에 부닥친다고 봤다. 이런 것을 뒷받침해준 논리가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이었다. 또 이 책은 모택동 사상의 <식민지 반봉건>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종속이론>도 우리의 생각을 뒷받침해주고 있었고 말이다.”
- 따지고 보면 모든 문제가 독재의 그늘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그에 저항하려다 보니 모순이 있음에도 무작정 매몰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사실상 우리나라는 72년부터 79년이라는 유신 기간을 제외하면 엄밀히 독재는 아니었다.”
- 무슨 말인가.
“초창기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있었지만, 이를 유신 체제 기간과 동일시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 설령 유신 체제를 비롯해 전두환 시대를 독재 시대로 규정한다 하더라도,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나 리콴유 등의 일당독재와 비교하면 그조차 양반으로 비치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는 얘기다. 오늘날 중국이 보이는 최악의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는 일당독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그에 반해 건국 당시부터 이미 언론의 자유는 물론 삼권분립과 대의민주주의가 확립되는 토양을 갖추고 있었다. 건국 초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2년간 대통령을 하고, 네 번째 또 하려고 하니까 4‧19 혁명을 통해 내려오게 된 것도 그 같은 시스템이 받쳐줬기 때문이다. 반대로 북한은 어떤가. 김일성부터 홀로 48년을 해 먹고 손자까지 3대째 독재를 세습하고 있다. 역시 사람보다는 제도가 중요함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단면이다. 선거가 있고 임기가 있고 다당제와 삼권분립이 이뤄지고, 언론의 자유가 있으니 북한 독재화처럼 될 수가 없는 것이다.”
<87 체제가 오기까지>
87년 6월 항쟁이 온 것도 그 관점으로 보니, 대한민국 건국 시스템이었기에 더 이상의 장기 독재가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싶었다. 4‧13 호헌조치까지 강행하며 전두환 군사정권은 독재를 이어가려 했지만, 민주적 토양의 나라였기에 더는 이를 용납할 수 없는 거대한 저항에 부딪쳐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다.
87년 그는 27세 청년이었다.
- 6월 항쟁 전후에 대해 얘기해 달라. 당시 무엇을 했나.
“87년을 앞두고는 故노회찬 씨 등과 함께 인천과 부천을 배경으로 한 인민노련 지하조직의 공동지도부를 맡고 있었다. 소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인천을 무대로 삼고 있을 만큼 그 시절 인천은 수도권에서 공장과 노동자가 많던 곳이었다. 혁명을 꿈꿨던 우리에게는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페테르부르크 같은 곳이자,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와 노동자가 만나는 곳이었다. 그런데 87년 1월 서울대 언어학과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에서 취조를 받다, 경찰이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발표가 났다. 그것이 도화선이 돼 국민들의 분노는 들끓기 시작했다.
우리 인민노련도 정권 타도를 위한 인천노동자투쟁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투쟁에 들어갔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를 외면했다. 개헌 대신 4월 13일 호헌 조치를 발표하며 마지막까지 버티는 쪽을 택했다. 이것은 각계각층의 반발로 이어졌고, 87년 5월 18일을 기점으로 전 국민적 저항으로 번져나갔다. 당시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에 대한 경찰의 은폐 조작 사건을 폭로하면서 임계점을 건드린 것이다.
그로부터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18개 도시에 열렸다. 그날(6월 10일)을 기점으로 26일까지 전 국민이 참여하는 6월 항쟁이 날마다 전국 주요 도시 시가지에서 전개된 것이다. 그 결과 전두환은 할 수 없이 6‧29 선언을 했다. 유신체제가 선포된 지 15년 만에 드디어 국민의 손으로 민주헌정 체제를 열어젖힌 것이다.”
<영미식 진보주의자>
87이 가져온 시대적 진보 앞에 그 또한 좌파적 세계관에 있어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된다.
- 어떻게 변해갔나.
“386의 잔소리꾼이 됐다.(웃음)”
스스로 볼 땐 386세대를 향한 잔소리를 많이 해 편하게 살지 못했다는 자조적 웃음인 듯 보였다.
- 어떤 계기로 변화하게 된 건가.
“나도 마오주의(모택동 사상)나 <해방전후사의 인식>등의 영향을 받긴 했다. 그러나 서서히 베이징에서 모스크바로, 모스크바에서 베를린으로 사상을 넓혀나갔다. 마오주의에서 레닌주의로 레닌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 등으로 공부를 해간 거다. 어느 날은 동유럽이 무너지는 걸 보고, 여행으로 치면 도보 해협을 건너 영국의 페이비언 소셜리즘(Fabian Socialism 점진적 사회주의)을 공부했다.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 쪽 진보(리버럴리즘)를 공부해나갔다.”
- 그럼 지금은?
“지금 나의 사상을 얘기하자면 영미형 진보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386들은 이런 나의 변화를 변절이다, 전향이다 등으로 얘기하겠지만.”
- 변화하게 된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인민노련을 이끌 때다. 어느 날인 86년 6월경이었다. 중국 베이징에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거다. 중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 요구를 했는데, 자칭 인민해방군이라 했던 정부에서 탱크를 몰고 와 무력으로 밀어붙여 진압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죽고 다치는 등 수천 명의 사상사가 발생한 유혈사태였다.
그 소식을 접한 우리 노동자 회원들이 질문을 하더라. ‘어떻게 된 거냐.’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탱크로 깔아 죽이는 저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달라’면서 말이다.
사실 당시만 해도 공산권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책도 거의 없었다. 공산권 국가를 마음대로 갈 수도 없었고, 국교를 맺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공산권 영향을 받으며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으면서도 정작 교재 정도를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정도였다. 과연 그게 실재에 부합되는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했던 거다. 그러니 우리 지도부가 회원들의 질문에 설명하기가 참 어렵더라. 특히 그 질문 앞에서는 더욱 난감했다. 우리로서는 중국이든 소련이든 사람 사는 곳이니 문제는 있겠지만, 사회주의 나라니, 시민들을 탱크로 깔아뭉개는 무력진압 등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곤란해하던 차 이번엔 동유럽이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잡혀 사형당하는 등…. 그런 현상에 대해 우리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후 우리는 기존의 모든 이론을 되짚어 공부하며 새롭게 수정해나갔다. 그렇게 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부터는 공산주의를 버리고 사회민주주의로 전환해나간 것이다."
- 공산주의랑 사회민주주의랑 뭐가 다르나. 의외로 많이들 헷갈려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영국의 노동당이나 프랑스 사회당과 소련 공산당과의 차이만큼 다른 거다. 쉽게 하자면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기준으로 삼으면 된다. 그 관점으로 공산주의를 보면 소련이나 북한, 중국과 같은 일당 독재를 연상하면 된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의회민주주의와 일당 독재는 너무나 다른 차원이다. 92년경 나는 이런 것으로의 전환을 주장했고, 우리 조직(인민노련)도 치열한 토론과 투표 등을 통해 사회민주주의를 채택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한국노동당이었다.”
92년 만들어진 한국노동당은 그해 4월 장기표‧이우재‧이재오‧김문수 등 재야 운동권 중심의 진보성향 정당이었던 민중당과 합쳐 14대 총선에 도전하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이후 한국노동당은 국민21등을 거쳐 2000년 민주노동당 출범에 합류했다. 지도부 일원이었던 주 대표는 총선서 권영길 선거대책본부, 마산합포구 지구당 위원장, 정책위의장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갈수록 친북 성향의 NL계가 당의 다수파로 올라서면서 주 대표는 “수백만 인민을 굶어 죽이는 김정일 독재정권에 반대한다”며 결국 탈당에 이르게 된다.
뉴레프트 운동가로서 <좌파논어>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 등을 저술했고,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죽산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 부회장 등을 맡았다. 2012년에는 젊은 시절 빈민‧노동‧인권운동가로 유명했던 손학규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을 도왔으며, 그의 싱크탱크인 동아시아미래재단의 이사를 역임했다. 플랫폼자유와공화 공동의장, 바른미래당 혁신위원장 등을 지냈고, 현재는 합리적 좌‧우‧중도 스펙트럼을 폭넓게 넘나드는 논객들이 대거 포진된 <제3의길>웹진 등을 이끌고 있다.
<386의 잔소리꾼>
- 아까 전향해 386 운동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시대도 달라졌고 그들도 변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전향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여기서 말하는 386세대 운동권들은 친북 성향의 NL계 출신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 변화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차이는 뭘까.
“386 대다수는 전부터도 그렇게 사상적 입장이 분명치 않았다. 그래서 전향도 없는 거다.”
- 끝까지 가본 자만이 아는, 뭐 그런 건가.
“그렇다. 앞장서서 책임지는 위치에 있으면 구경하는 이들보다 당연히 고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경우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했다.”
- 문재인 정부 들어 '조국 사태' 이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철이 들 때도 됐겠지.”
- 본인은 언제부터 철이 들었나.
“대한민국 건국을 높이 평가하게 되면서부터다. 시간으로 보면 2000년대부터였을 게다. 영미식 진보로 전향하고, 그 시각으로 대한민국을 보니 달리 보이더라. 마오주의와 레닌주의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대한민국이 굉장히 좋은 나라로 만들어졌음을 깨닫게 된 거다. 그게 386과 나의 차이다.”
- 그래서 쓴 소리를 하게 된 건가.
“그들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 책이 잘못된 대한민국관과 역사관을 심어주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극복하자는 주의지만, 그들은 아니다. 나라가 망해가도 상관없이 친일 프레임에 집중하고,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 등을 주장하는 것도 그 사고의 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그 이유는 뭘까.
“황홀감에 취해 있고, 그게 권력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 독재 정권을 타도했을 때의 경험을 잊지 못하고 당시의 환희를 되감아 재생하며 현재를 살고 있는 것과 같다. 정권을 무너뜨린 경험이 있으니까, 형성된 네트워크를 동원해 촛불집회다, 광우병 집회다, 박근혜 탄핵이다, 조국수호다 등… 영화감독하는 사람은 영화 만들고, 만화 그리는 사람은 만화 만들고, 교사된 사람은 학생들 가르치면서 자기들만의 지배적 문화를 계속 사유화하고 있는 거다.”
주 대표는 이를 ‘중독’으로 봤다.
“그러니 약효가 떨어지면 시민단체로부터 한홍구 교수 등의 강의를 듣거나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없는 <암살>같은 류의 영화를 보며 힘을 얻고…. 아마 한 세대가 지나지 않고서는 변하지 않을 거다.”
- 그래도 진화하는 386은 있던데.
“개개인은 성찰할 수 있지만, 세대란 건 어려운 문제다. 주도하는 세력이 갖는 그 힘에 의해 굴러가니까.”
회의적 관점의 그에게 386세대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물었다.
“야, 이 사람들아. 000을 성인으로 받들 시간에 당신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를 존경해라. 일제 때 평범한 사람으로 살며 창씨개명하고, 황국식민 사상 외웠다 해도 그분들이야말로 위대한 분들이다. 얼마나 고생해서 밥을 먹여주고 공부를 가르쳤나. 감사합니다.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이 점을 강조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관도 이분들의 관점으로 봐야 하지 않겠나. 농지개혁 후 자영농이 돼 열심히 일했고, 자녀들을 가르쳐 오늘날의 발전을 일궈냈다. 옥동자로 치면 엄마만 있고, 아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산파도 있고, 물 대주는 이웃집 아주머니도 있고, 많은 손길의 도움으로 아이가 태어나듯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우리 조‧부모세대를 비롯해 유엔 참전부터 건국의 아버지들까지….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뉴레프트 사관이다.(웃음)”
- 뉴레프트 사관?
그 말에 주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파가 신흥 우파인 뉴라이트로 변화했듯 좌파의 진화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니다. 좌우 통틀어 가장 진보된 역사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진보'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뭔가.
“건국의 아버지들. 적어도 이승만‧김성수‧신익희‧조봉암‧조만식 등 최소 이 다섯 사람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하나.
“언젠가 건국에 대해 잘 조명해준 그런 멋진 영화 등을 보고 싶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유전자를 가졌다. 자긍심을 가져도 충분하지 않겠나.(웃음)”
p.s.
요약하면 이번 87년 6·10항쟁 되짚기 여섯 번째는 그래서 ‘진짜 진보의 진화일까’(주대환) 편이다. YS(김영삼)와 12대 총선의 재발견(정세운)을 모티브로 민주항쟁의 결집체 역량(김민석), 전대협의 방향 전환(함운경), 비폭력 평화 운동(김현), ‘4‧13 호헌조치가 결정타’(유기홍), ‘진화하지 못한 586의 명암(明暗)’(이현종) 에 이어 노동운동권 그룹으로서의 6월 항쟁 되짚기를 조명했다. 다음 타임머신은 긴박했던 그때와 87 체제 후를 모색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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