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 정치권이라 평가 못 받아”
민추협 원로들 한목소리로 법 통과 희망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바야흐로 내년 40주년 때는 민추협 유공자법 개정안이 통과돼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안긴 이날(22일)의 민주화추진협의회 39주년 결성 기념식은 어디 한 구석도 빛 바랜 데가 없었다.
1984년 5월 18일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YS·DJ(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두 지도자를 주축으로 상도동·동교동계가 모여 민주화 대장정의 첫걸음을 내디딘 그날처럼 모두가 젊고 앳된 얼굴들로 돌아간 듯 보였다.
기념식이 진행된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강당은 금세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끌고 87 체제를 주도한 민주주의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를 품은 거대한 바다처럼 변모했다.
몸은 노쇠하지만, 민주화 정신만큼은 팔딱팔딱 뛰고 있는 싱싱한 물고기들 같은 민추협 원로들의 웃음소리가 초여름 청량함을 더했다.
여야 대표 참석에 북적
‘찰칵찰칵-----’
22일 민추협 39주년 결성을 기념하는 행사는 유독 카메라 셔터들의 분주한 움직임들로 번쩍였다. 현역도 그냥 현역이 아니다. 힘 있는 여야 대표가 등장했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상도동계 김덕룡 민추협 공동이사장과 김무성 공동회장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동교동계 권노갑 민추협 공동이사장과 이석현 공동회장이 초대했다.
이번에도 민추협을 이끈 양대 세력은 단상에 올라가 ‘김영삼-김대중’, ‘김대중-김영삼’ 이렇게 두 전직 대통령의 이름을 두 번 번갈아 가며 부르는 정통을 이어갔다. 민주화운동 당시 50대 50으로 똑같이 지분을 나눠 가졌던 정신을 계승하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우대하는 보기 좋은 모습을 자랑했다.
또 어떤 시사점으로 가르침을 안길지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한 사람을 향해 쏠린 가운데 첫 민추협 원로의 기념사 일성은 두 여야 대표를 향한 정치 통합의 강조점으로 시작됐다.
영원한 DJ 비서실장으로서 엄혹한 시절 온몸으로 고초를 겪어온 권노갑 공동이사장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내재돼 있는 이념-지역, 계층과 세대 갈등의 벽을 허물고 하나 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며 극심한 내전을 극복할 통합의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민추협 유공자법 통과 당부
뒤를 이어 단상으로 올라온 원로 인사들은 한목소리로 국회 정무위에서 계류 중인 민추협 유공자법(민추협 유공자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안)을 조속히 개정해야 한다며 까마득한 정치 후배들인 여야 대표를 향해 간곡히 호소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해당 법안은 민주당 노웅래 의원에 이어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이 지난 1월 대표로 나서고 여야 40여 명 의원이 동참해 발의됐지만, 국회 소위원회에 발이 묶여 표류 상태다. 법안이 통과된다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단체로서의 정신을 계승하고 미래 세대로까지 민주주의 교육의 상징적 역할과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실질적 토대가 마련될 전망이다. 현재는 민주화 정신을 계승하려 해도 사업을 추진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근거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원로들은 하나같이 기념사 끄트머리에 민추협 유공자법 개정안이 꼭 통과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이며 간곡한 마음을 모았다.
YS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서 민추협 시작부터 신민당 창당,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폭로를 거쳐 직선제 쟁취 구호를 만들어내기까지 어느 하나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순간이 없을 정도로 민주화에 앞장서 온 김덕룡 공동이사장 역시 기념사를 마치며 법안 통과를 강조했다.
“민추협 유공자법은 여야 40여 명 의원이 공동발의해 전국 소위원회 계류 중입니다. 저희가 무슨 보상을 받겠다는 게 아닙니다. 단지 명예를 회복했으면 하는 정도의 법안입니다. 부디 여기 계신 여러분께서도 관심을 가지고 조속히 통과되는 데 힘을 모아주기를 바랍니다.”
5·18에 비분강개해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이래 문민정부 당시 5·18특별법 제정에 앞장섰고, 집권여당 대표일 때도 매해 빠짐없이 민주묘지를 참배하는 정성을 보여왔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 역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한 일은 잘한 일이라며 감사의 말을 전하는 한편 민추협 유공자법은 통과돼야 한다며 힘줘 말해 인상을 남겼다.
“정치권이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어 억울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후회 없이 민주화운동을 했고 아낌없이 희생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야 대표께서 그 점을 잘 감안해 법안에 관심을 가져주길 부탁합니다.”
잘나가는 기업의 청년 임원이 되는 길을 마다하고 민추협에 뛰어들어 엄혹한 군사 독재에 맞서온 이석현 공동회장은 키가 작아 단상에 오르기에 앞서 동교동계 임성규 국장이 헐레벌떡 가져온 발판 위에 올라서며 “안 그래도 되는데…”라고 말해 좌중에 폭소를 안겼다. 이어 이 공동회장도 민추협 유공자법 필요성에 힘을 실었다.
“선배 동지들께서 연세가 많아 많이들 돌아가시고 계시다. 그전에 명예만이라도 가슴에 안겨드리자,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목숨을 던져 수행했던 것을 국가가 인정해 주는구나, 이런 뜻에서 민추협 유공자법이 발의됐다. 꼭 통과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힘써주셨으면 한다.”
정치권 “법안 통과에 힘쓸 것”
원로들의 한결같은 법안 통과 호소에 후배 여야 대표들도 화답에 나섰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축사에서 법안이 계류돼 안타까워하는 선배들의 표정을 지켜보는 것에 송구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여당 대표로서 꼭 통과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민주화에 몸담았던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는 말을 전제로 “우리나라는 두 개의 기적이 있다. 하나는 한강의 기적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꽃피운 정치의 기적이다. 여기 계신 존경하는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길”이라고 존경을 표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민추협 유공자법에 대한 별도의 발언은 하지 않았다. 대신에 “오늘날 민주화라는 단어가 다시 한번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 같다”며 “우리 선배들께서 노력했던 그 길이 역행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뒤이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YS 어록을 되새기며 “행동하는 양심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민추협 유공자법이 통과되기를 바라는 축원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가 나선 특별강연에서도 잊지 않고 이어졌다. 함 신부는 “정치권서도 노력한다고 하니 민추협 유공자법이 통과되지 않겠느냐. 잘될 거다”며 힘을 보탰다. 아울러 “민주화추진협의회의 민주화는 진행형”이라며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졌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떤가. 내 가정, 사회, 정치 현실은 어떤가. 민주화추진협의회는 이름 그대로 민주화의 진행형이다. 추진해야 하고 협의해야 한다. 협의는 혼자 하는가. 동지들과 이웃과 함께 항상 논의해야 한다. 이 민주화추진협의회야말로 시대적 명령. 바로 시대정신이다.”
뜨겁게 불러보는 이름들…
민추협이 주최하고 김영호·이채익 의원이 주관한 행사는 이사회 개최에 앞서 다같이 모여 기념촬영하는 시간을 가졌다. 100여 명 남짓의 원로들이 객석에서 일어나 한 명 한 명 무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로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 지난번 민추협 조찬옥 사무총장에 이어 본 행사의 사회를 맡아 주요 원로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던 양순석 사무부총장의 소개말이 떠올랐다.
“(노웅래·김영호 의원부터 이성헌 서대문구청장 등을 보며) 현역 분들의 이름부터 호명해야 하는데 먼 길을 찾아주신 선배 동지분들을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먼저 좀 불러보겠습니다.
남궁진 전 문화관광부장관 오셨습니다. 그리고 한영애 전 의원, 유준상 전 의원, 신하철 전 의원, 조재환 전 의원, 정균환 전 의원, 유인학 전 의원, 이규택 전 의원, 송석찬 전 의원, 김장곤 전 의원, 이희규 전 의원, 조익현 전 의원, 김창환 전 의원, 구자근 전 비서실장, 천준호 전 의원, 안경률 전 의원, 김철배 부이사장…. (후략)”
기념식이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데 세 명의 원로들이 “내년에 과연 (40주년 행사를) 볼 수 있을까 싶어”, “이 사람아. 지금 보면 100살은 넘게 살겠는걸?”, “껄껄 걸” 웃으며 해후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세 그루의 나이테로 다가왔다. 저마다 민주화 꽃을 피워내며 내일을 기약하는 듯 여운을 안겼다.
다시 되새기는 민추협 선언
“민주 투쟁 선언문을 낭독해 보겠습니다….”
그 순간 첫 번째 식순으로 민추협 선서를 읽어내려가던 민주당 김영호 의원의 낭랑한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그는 YS와 DJ에 이어 또 한 명의 민추협 주역인 후농 김상현 전 공동의장의 아들이다. 끝으로 김 의원의 대독을 일부 옮기며 민추협 정신을 되새겨 본다.
“우리는 국민의 긍지와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국가의 존엄을 해치는 군부독재를 청산해서, 국민이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고 시민의 참여가 보장되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민주화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이를 위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하고 다음과 같이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1. 우리는 군인의 정치 개입이 민주헌정을 후퇴시키고 민족사의 불행과 안보상의 불안을 초래한다는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군인 본연의 사명인 신성한 국방의무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고 시민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투쟁한다.
2. 우리는 국민이 자신의 정부와 정부형태를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을 때만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민주주의로가는 길을 봉쇄하고 있는 현행의 모든 제도적 장치와 제약의 개폐를 위해서 투쟁한다.
3. 현정권의 존속을 위한 선거제도 등 규격화된 정치제도와 반민주적 법령이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선거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국민의 참정권 보장을 위해서 투쟁한다.
4. 우리는 학원과 청년층에서 전개하고 있는 민주화 운동과 그 과정에서 희생된 분들에 대해서 경외의 뜻을 전하면서 그들의 애국적 충성에 동참하기 위해서 그 고난의 짐을 떠맡아 지고 투쟁에 나갈 것이다.
5. 우리는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들의 기본적 인권과 생존권 보장을 위한 운동을 적극 지지하며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의고통과 추방당한 교수, 언론인, 근로자들의 아픔을 우리의 것으로 하여 연대하여 투쟁한다.
6. 우리는 정치 피규제자 99명의 전원 해금과 복권 그리고 김대중씨의 조속한 귀국 및 자유로운 정치활동 보장을 위해서 투쟁한다.
7. 우리는 역사에 비추어 한점 부끄럼없이 정당한 것임을 믿는다. 우리는 인간의 양심에 기초하여 비폭력 저항의 평화적 방법으로 투쟁할 것이다.
8.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서라면 그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어느 집단 또는 개인과도 연대할 것이다.
9. 우리는 마침내 쟁취할 민주주의의 영광은 역사와 국민에게, 그리고 모든 고난과 희생은 우리의 것으로 하는 헌신을 우리활동의기초로 삼고 투쟁한다.
1984년 5월 18일
민추협 고문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 김영삼·김상현
좌우명 : 꿈은 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