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에 버금가는 민주화로 가는 역사적 분수령”
민추협과 김영삼민주센터 공동주최 ‘문민정부 출범 조명’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정진호·김자영 기자]
민주화 지도자 김영삼(YS)은 유명하다. 그러나 선진국 세계화의 초석을 다진 대통령 김영삼에 대해서는 역사적 조명이 잘 되지 못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내게 말하길 서운하다. ‘나는 산업화 대통령도 했는데 왜 나보고 민주화만 했다고 하느냐’.”
얼마 전 박명림 연세대 대학원 교수는 손학규 이사장이 주최하는 동아시아미래재단 포럼에 참석해 YS와 만난 일화를 공개하며 대통령 시절 평소 이 점을 애석하게 여겼다고 전했다.
신한국창조, 세계화, 역사바로세우기, 정보화, 정치개혁의 시작점이 문민정부였다는 것이 제대로 평가받기를 원했던 YS의 바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문민정부 출범 30주년을 맞아 故김영삼(YS) 전 대통령 재조명에 속도가 붙고 있는 점은 그런 점에서 반가움을 주고 있다.
YS 민주사 투쟁사와 함께한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는 김영삼민주센터와 함께 ‘민주화 30년, 문민정부 출범 30년’을 기념하는 세미나를 15일 오전 10시 30분 국회의원회관에서 가졌다. 이번을 시작으로 문민정부 출범을 조명하는 세미나는 6차례 열린다. 다각도로 문민정부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짚어나갈 예정이다.
특히 첫 세미나를 통해서는 민주화와 문민민주주의를 연 YS는 물론 신한국과 세계화의 첫걸음을 내디딘 YS에 대해 균형감 있게 조명돼 뜻깊음을 더했다는 평가다. 먼저 원로들은 민주화를 완성 지은 시점이야말로 문민정부가 출범한 때였다는 일성으로 역사적 의미를 밟아나갔다.
“우리는 민주화를 말하면서 1987년 체제를 출발점으로 하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화는 문민정부를 출범해 군사정치문화를 청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14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전광석화와도 같이 군 하나회를 척결했습니다. 취임사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이 없게 했습니다. 금융실명제를 통해 경제정의를 실현하고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 정책으로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켰습니다. 이 나라 민주주의는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됐습니다. 대도무문의 큰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권노갑 민추협 공동이사장-
“30년 전, 1993년 2월 25일, 국회의사당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은 단순한 한 대통령 취임식이 아니라 30여 년에 걸친 군사정치문화를 청산하고 문민 민주주의시대로의 위대한 전환을 선언한 역사적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는 군사정치문화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두 분을 앞에 두고 김영삼 대통령은 당당하게 문민 민주주의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 장면이야말로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버금가는 위대한 역사적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덕룡 민추협 공동이사장(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김영삼 대통령 하면 민추협 의장 시절에 단호하면서도 인자하고도 너그러운 웃음이 떠오릅니다. 문민정부 30주년을 돌아볼 때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김영삼 대통령이 민심에 귀를 기울이고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전두환 노태우를 단죄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를 만드는 게 쉬운 게 아니었는데 국민 여론이 기우니 그 일을 해냈습니다.”
- 이석현 민추협 공동회장-
“YS와 함께한 문민개혁”
인사말이 끝난 뒤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한 문민개혁과 나’를 주제로 추억을 회고해 나갔다.
그는 1995년 12월에 총리로 취임했다.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는 없었습니다. 5000년 역사 속에 좋은 정치도 나쁜 정치도 있었지만 민주는 없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민주주의자였지만 3선 개헌을 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는 안 됐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역사적 평가부터 점검한 이 전 총리는 임기 시절 YS에 대해 기억에 남는 일화부터 풀어놨다.
“1996년 겨울에 굉장한 가뭄이 왔습니다. 제일 심한 곳이 해남과 영덕 두 곳이었습니다. 그때 김영삼 대통령이 국방부, 행정안전부, 경찰청 전부 강운태 장관을 지원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역사상 최대 풍작이 났습니다.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농민 아픔을 위해 군경을 모두 동원하라고 지시한 사람이 바로 김영삼 대통령이었습니다.
강원도 고성에 산불이 크게 난 적이 있었습니다. 가서 보니까 집, 소, 돼지들이 다 불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거기서 흙에 뒤덮인 얼굴로 놀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집도 지어주고 할 테니까 걱정 마라’ 하고 돌아와서 김영삼 대통령께 보고를 했습니다. 그때 어마어마한 돈을 지원했습니다. 국가에서 지원한 액수로는 그때가 최고였습니다. 경제관료들은 ‘반만 해도 충분하다’ 주장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강원도는 경기북부와 같이 대북문제 때문에 개발이 제한되는 곳이다. 전 도가 힘을 합해서 도와줘야 한다. 한 푼도 깎지 마라’고 지시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지시해서 해결한 게 강원도 산불이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분들에 얘깁니다. 군국주의 일본 군인에 의한 피해자 할머니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 피해자 할머니들께 국가 예산으로 연금 비슷하게 돈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상의할 때는 200만 원을 주자고 했습니다. 당시는 큰돈이었습니다. 일본한테 배상금을 받아서 아동복지, 여성문제 이런 걸 다루는 기금으로 조성할 생각이었습니다. 경제 관료들이 나서서 ‘50만 원밖에 안 된다’고 하기에 YS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하면서도 ‘내가 그만두더라도 계속 올려야 한다’는 약속을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깨져서 아직도 57만 5000원입니다.”
YS가 애석하게 여겼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세미나 중간 “YS 만큼 국민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두려워한 역대 지도자는 없었다”고 김병준 배재대 석좌교수가 말한 바 있었는데, 이 전 총리가 전해준 YS에 대한 얘기 모두가 그의 애민에 기초한 국정운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문민정부의 시대적 의미”
문민민주주의 시대를 연 문민정부는 그냥 온 것이 아니다. 민주화의 여명을 향한 30여 년의 터널을 지나왔기에 출범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해당 세미나의 책자 첫 장을 장식한 YS의 웃는 모습 아래로 ‘32년 만의 문민정부 출범’이라는 글자가 새삼 역사적 무게감을 안겼다.
YS 문민정부를 출범하면서 ‘변화와 개혁을 통한 신한국건설’을 선언했다.
그 뒤 YS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이날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의 ‘문민정부의 시대적 의미’라는 제목의 발표문에 따르면 YS는 신한국 창조를 위한 당면 과제로 부정부패 척결, 경제 회생, 국가 기강 확립을 제시했다. 하나회를 척결해 일말의 군부독재 가능성을 종식시켰다. 공직자 재산 공개를,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기득권층에 대한 시대적 사정을 실시했다. 정경유착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오늘날 한류 번영의 씨앗을 심은 세계화도 문민정부에서 출발했다. YS는 1994년 11월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을 마치고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세계화 정책의 구상을 밝혔다. 귀국 직후 세계화추진위를 발족했고 문민정부의 정책브랜드로 부각시켰다. 1995년 출범한 WTO 체제를 받아들였다.
정보화 기틀도 문민정부에서 마련됐다. 정보화 추진을 위해 정보통신부를 설립하고 정보화 추진에 필요한 법적 근거로서 정보화촉진기본법을 제정하고 1996년 10월 제1차 확대보고회의에서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보화 전략을 선언했다. 초고속정보통신기반을 구축하고 전자정부 구현, 지리정보시스템 및 지능형 교통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역사바로세우기는 일재잔재 청산, 민주화운동 재조명, 5‧6공 단죄 등 세 가닥으로 진행됐다. 일제의 총독부 건물과 외세 상징인 남산 아파트 허물었다. 4·19 공원을 국립묘지로 승격, 12‧12 사태와 5‧17을 주도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전격 구속해서 단죄했다.
정치개혁적으로는 돈 안 드는 선거를 위해 통합 선거법, 정치자금법, 정당법 등 관계법 개정을 단행했고 지방자치제도를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김 교수는 강연에서 “김영삼 문민정부가 국민들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자긍심이다. 문민정부 30년 빠른 세월이지만 미국에서 유학할 때 동료들이 해줬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우스 코리아. 드디어 민주주의가 됐구나’ 한 바 있다”며 “한 영국 기자가 ‘한국에서 민주주의 꽃을 피운다는 건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진단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매년 민주주의 지수를 발표합니다. 대한민국은 10점 만점에 8.03이다. 완전한 민주주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완전한 민주주의로 평가받은 기초는 문민정부에서부터였습니다. 민주주의 이행을 넘어서 공고화 과정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어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 눈높이 정치를 했다. 집권 초기에 국민들이 열망하는 것을 집권 초기에 전광석화처럼 이뤘다. IMF라는 나름대로의 국난이 있지만 그 이전 YS가 이룬 업적은 가히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평했다.
무엇보다 김 교수는 문민정부의 “신한국창조와 세계화”에 주목했다.
“지도자를 볼 때 두 가지를 본다. 인사이트, 즉 통찰력이 있느냐와 추진력이 있느냐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 두 가지 모두 갖춘 지도자였다. 세계화라는 틀 속에서 신한국당을 창조했고 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지방자치 전면실시도 문민정부 때 실시했다. 정보화는 냉정하게 평가하면 뿌리는 문민정부 부터였다. 세계화와 정보화, 민주화, 역사바로세우기, 문민화…. 국가가 역사를 바로세우지 못하면 발전할 수 있겠나.”
반문한 김 교수는 발표문에서 YS 리더십에 대해 김병문 학자의 연구를 인용하며 ‘변혁적 지도력’이라고 규정했다.
“변혁적 리더십이란 사회와 정치과정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리더십이다. 강한 도덕성, 예리한 역사의식, 저항하기 어려운 설득력, 누구나 희구하는 미래의 비전,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상징성 등이 포함된다. 변혁적 리더십이 행사될 때 국가와 지도자의 관계는 승화돼 정치과정을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
- 김병문 2002년 <변화 주도형 리더십>-
김 교수는 이 변혁적 리더십을 갖춘 이가 “미국에서는 국가통합을 위해 남북전쟁을 불사했던 링컨과 큰 정부를 지향하며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을 극복했던 루즈벨트 대통령이다. 한국에서는 최초의 문민정부를 수립하면서 민주화의 틀을 완성한 김영삼 대통령과 산업화를 주도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형 변혁적 리더십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을 80년대까지 끌고 간 것은 산업화 패러다임이었습니다. 이 패러다임은 박정희 패러다임입니다. 경제발전, 경제성장을 이뤘습니다. 90년대 민주화 패러다임은 문민정부에서 전환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문민정부가 없었으면 국민의정부, 참여정부도 없었습니다. 문민정부의 위대한 업적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전환기 정의를 세웠다는 점입니다.”
김 교수는 그러면서 “‘우리 국민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역사를 긍정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식이 기억에 남는다”며 “역사는 기록이 아닌 정신이라는 말이 있다. 민주주의 철학과 변혁적 리더십을 끝까지 지킨 YS의 정신을 되새겨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문민정부 청와대 인사들의 YS 추억담
문민정부 청와대 인사 대담회로 이뤄진 세 번째 발표 시간에는 이각범 정책기획수석, 김기수 수행실장, 김영춘 정무비서관, 최양부 농림해양수석 등 문민정부 청와대 인사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YS를 추억하는 여러 일화들을 소개해 나갔다.
“민추협에서 김영삼 당시 총재를 만났을 때 그분은 '민주주의는 우리가 이룩하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민주화운동으로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고 하는데, 김영삼 총재는 대통령 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어떻게 이 나라를 좋은 나라로 만드느냐가 중요했던 분이었습니다.
야당 지도자로서도 김영삼 대통령은 나라를 먼저 생각했지 본인이나 당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야당 지도자를 했다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한일관계 미래지향적으로 풀어가는 것에 대해 주력했을 것입니다. 제2의 이완용이니 삼전도 굴욕이니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미래지향적 관계에 동의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 이각범 전 대통령 정책기획수석(카이스트 명예교수)-
“김영삼 대통령은 발상 자체가 고인 분이 아니라 창조적 파괴를 많이한 분이었습니다. 비서를 하던 시절이나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하던 시절이나 뵙자고 하면 아무리 바빠도 꼭 만나서 30분에서 한 시간씩 얘기를 들어줬습니다. 큰 결정을 앞두고도 진보와 보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분들을 만난 뒤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겼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지도자를 막론하고, 우리 정치사에 그렇게 경청하는 자세를 가진 분은 없을 것 같습니다.
3당 합당도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그런 결단을 못했을 겁니다. 대학원 다닐 때인데 당시에 저는 3당합당이 못마땅했습니다. ‘왜 그러는지 이해는 하지만 저는 못 갑니다’ 했습니다. 1년쯤 김영삼 대통령이 ‘한 번 보자’고 해서 나갔더니 ‘영춘아, 내가 많이 힘들다. 니가 좀 도와주면 안 되겠냐’ 했습니다.
겨우 30살 지난 새파란 비서 출신 막내한테 ‘나 요즘 힘들다. 니가 와서 도와다오’ 그렇게 토로하면서 요청을 한 겁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했으면 안 갔을 텐데, 인간적으로 도와달라고 하는데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인간적 매력이 철철 넘쳐나는 분이었습니다.”
- 김영춘 전 대통령 정무비서관(전 해양수산부 장관)-
“취임 이전부터, 퇴임 뒤까지 김영삼 대통령을 보좌했습니다. 1980년대 초는 엄혹한 상황이었습니다. 상도동 뒤엔 경찰차 1대, 동교동 뒤엔 2대가 따라다니며 식사 자리마다 도청하고, 경찰 검찰정보보안사가 일거수일투족을 캐묻던 시절이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83년도에 광주민주항쟁 3주년을 추모하며 장문의 성명서를 내고 단식투쟁했습니다.
첫 문항이 언론자유였습니다. 당시 민주산악회를 통해 김덕룡, 김정남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시절 언론은 반달곰 죽음 기사 톱으로 나오고 단식 투쟁 이야기는 1줄 나오던 것이 전부였을 때입니다. 그만큼 언론 자유가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한다는 철학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문민정부 당시 김일성 사망 소식을 TV에서 보고 ‘아쉽다’ 세 글자를 이야기한 것부터 전두환-노태우 시절 골프 치는 장소로 이용하던 녹지원을 조깅하는 장소로 바꾼 것이나 ‘김영삼은 골프 안 친다’고 선언한 것 등이 기억에 납니다. 남들이 보기엔 전격적인 인사처럼 보이지만 평소에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행실은 어떤지 툭툭 물어보고 확인하던 분이었습니다. 여성이 장관되기가 지금보다 어렵던 시절인데 장관-경찰-사관학교 등에 임명하며 여권을 신장시켰던 대통령이었습니다.”
- 김기수 전 대통령 수행실장(퇴임 후 비서실장)-
“각하의 가장 특징적인 리더십은 승부사적인 면모입니다. 미국과의 쌀시장 개방 빅딜이야말로 각하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대표사례입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쌀 개방 관련 흥정을 하는데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에도 1~2% 정도로 아주 파격적인 조건을 성사시켰습니다. 빅딜, 대박을 터트린, 최고의 협상을 한 것입니다. 해외에서도 ‘대단한 사람이다’ 극찬했습니다. 그럼에도 국민들한테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터라 약속을 못 지켰다, 대국민 사과부터 하는 대통령이었습니다.
시드니에서의 세계화 선언은 또 하나의 깜짝쇼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즉흥적 언론플레이였다는 평가입니다. 세계화의 주체가 되려면 정부부터 달라져야 한다며 재정경제원, 정보통신부, 보건복지부, 환경부 등 새로운 주체들을 만드는 등 조직개편에 나섰습니다. 참고로 IMF 평가 관련 저는 법정 다툼을 벌였는데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지난해 5월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내가 정치적으로 모든 책임을 진다’고 한 각하와 달리 대통령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관료가 있다는 것에 가슴이 아픕니다. 관련 시리즈를 통해 IMF와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 제대로 조명할 계획입니다.”
- 최양부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신유통연구원 고문)-
문민정부 청와대에서 정무비서관을 지낸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일정차 참석하지 못해 영상을 통해 대신 YS 추억담을 전했다.
“만 36살 나이에 청와대 비서관으로 발탁됐습니다. 문민정부는 냉전 종식이라는 급변하는 외교환경 속에서 세계화, 다변화, 다원화, 지역협력, 미래지향이라는 5대 기조를 바탕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습니다. 1993년 북한 핵문제 해결 방식에 대해 했던 한미정상회담이 기억납니다. 1시간 반 동안 이어진 회담 끝에 북핵 문제에 대해 ‘철저하고 광범위한 접근’이라는 새로운 공식이 탄생했습니다. 방탄 리무진 안에서 제게 ‘박진이, 잘 봤제? 이건 담판이데이’라고 했던 대통령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을 위한 국익 수호에 앞장섰습니다. 한국과 호주 간 워킹홀리데이 비자 시작도 정상외교에서 정면돌파로 뚫었습니다. 영어도 배우겠다는 우리 청년들이 호주에 가서 꿈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994년 12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 청와대에서 만난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빌 게이츠 회장은 ‘김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과 비전을 듣고 싶다’고 물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주의는 변화와 개혁입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때의 인연으로 아직도 빌 게이츠 회장과 백신 개발, 소형원전 개발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웃음).”
-박진 전 대통령 정무비서관(외교부 장관)-
오는 4월 중 열릴 것으로 보이는 문민정부 출범 30주년 두 번째 세미나에서는 YS의 민주화투쟁에 대해 집중 조명될 전망이다.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은 마무리 인사말을 통해 “앞으로 부패 없는 투명한 나라 금융실명제, 하나회척결, 역사바로세우기, 민주개혁과 고속정보화와 세계화, IMF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다”며 “진정한 대한민국 민주화의 30주년이 곧 문민정부 출범 30주년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세미나는 민추협과 김영삼민주센터가 공동주최하고 이채익-김영호 의원이 공동주관하고 있다. 김도현 문체부 차관과 김석우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장, 문정수 전 부산시장, 안경률 한반도미래정책포럼 이사장, 이철-유준상 전 의원, 이채익 의원 등 문민정부와 상도동계, 정치권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행사는 이각범 문민정부 출범 30주년행사 준비위원장과 조찬옥 민추협 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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