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뤄낸 YS 일화와 의의 조명돼
“문민정부 민주화 투쟁과 승리의 역사”
“보편의지 실천해…국제적 조명돼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김자영 기자]
“광주 쪽에 사업장이 있어서 5‧18 참상의 진상을 접할 수 있었다. 젊은 혈기에 비분강개했다. 대한민국 국군이 어떻게 국민을 발포해 죽이느냐. 민주화 투쟁 대열에 동참했다. 김영삼(YS) 총재 연금이 풀리는 날 상도동에 갔다. 민주화 대열에 동참하겠다고 했다. 그때 YS가 ‘나는 연금을 당하니 김덕룡 비서실장과 모든 것을 이야기하라’ 했다.”
여기까지 말하던 김무성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김덕룡) 꼬붕으로 있다(웃음)”고 전했다.
“하하하.”
좌중도 따라 웃었다.
YS 최측근이었던 두 인사다.
이 이야기가 나온 건 80년대 야당 출입 기자들과 YS 관련 민주화 대장정에 얽힌 에피소드를 전할 때였다.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 주최의 문민정부 출범 30주년 기념 2차 세미나는 ‘문민정부로 가는 민주화 대장정’을 주제로 21일 서울 동작구 김영삼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100여석이 꽉 찼다. 국민의힘 동작을 지역위원장인 나경원 전 의원도 방문해 반가움을 더했다.
대부분 자리는 희끗희끗한 원로들로 채워졌다. 만 97세의 홍운표 테너 성악가는 행사 중간 YS가 좋아했다는 ‘옛날의 금잔디’를 불렀다. 그를 기리는 노래 ‘선구자’가 이어졌다. 한 소절 한 소절 연로함을 이겨내고 힘껏 터져 나오는 목청에 좌중의 박수갈채는 뜨거웠다.
“민주화 투쟁 승리의 역사, 발화점 단식”
다시 돌아와, 그(김무성)는 YS 단식 이후 상도동에 입문했다는 얘기였다.
YS는 5‧18이 있고 3년 후인 1983년 5월 18일 상도동 자택에서 무기한 단식을 선언한 바 있다.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은 이날 인사말에서 YS 단식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YS 발언을 전하는 김덕룡
“YS의 ‘나는 단식투쟁에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안다’로 시작하는 단식 성명은 ‘생명을 건 투쟁만이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다’ ‘구차하게 살기 위해 단식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싸우다 죽기 위해 단식을 끝낸다’는 말로 이어진다.”
민주화를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는 각오, 유언과도 같은 비장함이 서려있음이 엿보였다. 그러나 독재 정권에서는 보도조차 어려웠다. 5‧18을 세상에 알리고 독재 정권을 규탄하는 야당 총재의 단식 기사 대신 지리산 반달곰 이야기가 신문지면의 톱을 장식했다.
사실을 아는 당시 기자들은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이 자리, 대담회에 참석한 이영덕 <조선일보> 기자의 증언.
“우리도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 당시 기자들은 소위 민주화 투쟁을 하는 심정으로 YS 발언을 한 줄이라도 더 쓰려는 자세로 임했다. YS 단식이 있을 때, 이틀인가 보도 자체를 못했다. 나중에서야 ‘야당 정치인의 모종의 식사 문제’라는 이상야릇한, 육하원칙으로 따지면 말도 안 되게 쓸 수밖에 없었다. 5공 정부가 딱 붙잡고 글을 못 쓰게 하니 하루하루 괴로운 나날이었다. 언론은 다 알고 있으니까….”
무기력했던 시대를 돌아보며 목소리가 잠겨왔다.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은 발화점이 돼 이후 많은 것들을 바꿔났다.
“야당이 뿔뿔이 흩어져 있을 때였는데 YS의 단식 하나로 모든 것을 다 극복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강경 재야그룹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미국으로부터도 존재를 인식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 .국민한테 끼친 영향도 어마어마했다.”
김덕룡 이사장 또한 이 점에 주목했다. “단식 투쟁은 대한민국 역사를 바꾸는 첫걸음이었다”며 “1987년 6월 29일까지 군사독재를 상대로 전개한 민주항쟁은 한국 민주정치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장엄했던 국민과 함께한 민주화 투쟁과 승리의 역사”라고 평가했다.
그는 단식 이후 전개된 대장정의 민주사를 파노라마처럼 읊어나갔다.
“‘워싱턴에서 김대중, 서울에서 김영삼’ 이름으로 발표되는 8‧15 공동성명이 나왔다. 1984년 열정적인 민주화투쟁선언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곧 민추협 발족으로 발전했다. 숨 가쁘게 전됐던 민주화투쟁은 반 군사독재, 민주화 기치를 높이 든 신민당 창당, 1985년 2월 12일 선거 혁명, 1985년 11월 15일 민족문제연구소 발족, 1986년 2월 12일 대통령직선제 개헌 1000만인 서명운동 전개, 1987년 1월 박종철 군 죽음을 넘어 6월 10일 국민대회로 이어졌다. 6‧10 민주항쟁을 거쳐 1987년 6월 29일 전두환과 노태우의 6‧29 항복 선언이라는 민주화 투쟁 승리로 꽃 피었다.”
“1000인 개헌서명운동…‘누가 세어보나?’”
김무성 회장은 YS 단식 이후 민추협 창립 일화들을 추억했다.
“단식 1년 후 1984년 5월 18일 민추협을 창립했다. 관철동 수협중앙회 건물을 박종웅 이름으로 무역회사로 위장해 계약했다. 경찰에서 이런 내용을 알고 막아서 싸웠는데 엘리베이터를 꺼버리더라. 집기, 비품을 등에 지고 비상계단 9층으로 지고 올라가서 가져다 놨다. 결국 건물에 입주 못하고 서소문 진흥 빌딩에 계약했다. 또 경찰이 입주 못하게 막아서, YS가 경찰과 대치하는 일이 있었다. 화장실 가면 경찰이 막아섰다. 임기응변으로 생수병을 구해다 드렸다. 사진도 못 찍게 막았다(웃음).”
# 통일민주당 당사 얻을 때
“하루는 YS로부터 통일민주당 당사를 구하라는 밀명이 떨어졌다. 1억5000만 원 정도 예상한다며 구하라고 하더라. 태화관이라는 기독교 재단이 가진 200평짜리 건물을 구두 계약했다. 기관 X들이 못하게 막았다. 도저히 사무실을 못 구해서, 작은 빌딩 하나를 사야겠다고 했다. YS가 ‘돌았냐, 그 돈으로 어떻게 사냐’고 묻기에 4대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하면 된다고 했다. 중림동 당사를 내 이름으로 돈을 보태서 계약했다. 그러던 중 쿠데타 설이 돌았다. 김덕룡 선배 등과 모여서 “실제 나면 잡혀갈 텐데” 라며 걱정했다. 도망갈지를 놓고 논의하는데 김덕룡 선배가 안 된다고 단호히 말했다. ‘우리가 도망가면 주변이 쑥대밭 된다. 차라리 우리가 잡혀가는 게 낫다’고 했다. 그 길로 같이 결의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계약해뒀던 건물의 중도금 낼 시기가 다가왔다. 사업가 아들이었던 나는 당사도 내 이름으로 샀는데, 중도금 냈다가 쿠데타 나면 돈 날아갈까 봐 걱정이 됐다. YS에게 상의를 구했다. 그런데 YS 왈. ‘야. 우리가 언제 돈보고 투쟁했나. 마, 내라’ 이렇게 말하더라(웃음).”
# 평화민주당 분당
“통일민주당사 만들 때 TV 3대, 냉장고 등 집기를 외상으로 샀다.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공동 지불하기로 했다. 동교동에서는 거울 하나 안 들여왔다. 느낌이 이상했다. ‘같이 갈 생각이 없나보다’ 싶었다. YS에게 ‘동교동에서 분당할 것 같다’고 말하니, ‘야, 턱도 없는 소리 마라. 김대중(DJ)은 못 한다' 했다. 하지만 결국 (87년) 10월 29일 동교동이 탈당하고 평화민주당이 창당됐다. 분열함으로써 13대 대선 집권을 못하는 비극이 됐다. 우리라도 양보했어야 하는 후회가 생기는 대목이다.”
대담회 패널로 참석한 노진환 <한국일보> 기자도 통일민주당 당사와 평민당 분당 등 관련 에피소드를 꺼냈다. 그는 YS 기도문을 작성한 기자로 유명하다.
“알고 보니 통일민주당 당사가 우리 집 고모 건물이었다. ‘야. 진환아 큰일 났다. 안기부와 국세청에서 집을 뒤져 다 가져갔다. 김무성이라고 허우대가 멀쩡한 친구가 고향도 부산이라고 해서 계약했는데 알고 보니 통일민주당 당사였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고모가 훗날 YS의 집권을 가장 기뻐했을 것 같다(웃음). 동교동계가 분당해서 나가자 당사 사람들이 미리 들여놨던 DJ 의자에 화풀이를 했다. 나는 ‘분당을 증명할 역사적 유물이 될 텐데 망가트리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김무성 총무국장이 용달을 불러 의자를 우리 집에 갖다 놨더라(웃음).”
그는 YS가 한 언론사의 김일성 사망 오보를 간파한 것 등의 일화와 함께 지도자로서의 안목을 높이 평가했다. 직선제 쟁취의 범국민적 공감을 일으킨 1000인 개헌 서명운동 역시 YS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는 거였다.
이번엔 김무성 회장이 끼어들었다.
“YS가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제안하자, DJ가 ‘1000만 서명을 어떻게 하느냐’며 ‘백만으로 하자’고 하더라.
YS가 그 말에
‘누가 그걸 세보나?’”
또 한 번 박장대소.
이 같은 YS와 DJ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민주화의 양대산맥과도 같았다. 하지만 앞서 언급된 평민당 분당 사태처럼 양김의 권력의지로 인해 일어났다. 87 대선 단일화는 실패했다.
전육 <중앙일보> 기자는 혁명가적 기질의 YS 리더십을 호평하는 한편 단일화 불발 이후 YS가 DJ에 가졌던 감정에 주목했다.
“양김은 말년에 화해했지만 YS는 일생 동안 DJ를 두고 거짓말쟁이라고 미워했다. 내가 느끼기론 그랬다.”
YS는 통일민주당 미창당 지구당수를 양보해서라도 DJ와 단일화를 하려 했다. DJ도 약속했지만, 이를 깼다. 그런 것 등에서 오는 앙금을 유추하고 한 듯했다.
“출입처가 동교동으로 바뀌면서 DJ를 만나 물었다. ‘YS는 당신이 거짓말 한다고 한다.’ DJ는 ‘난 거짓말 한 적 없다. 다만 약속을 못 지켰을 뿐이다’ 하더라. 또 DJ는 ‘YS는 굉장히 어려운 일을 쉽게 이야기한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다’ 라고도 했다. 그 답변을 듣고 두 사람의 단적인 차이를 느꼈다. YS가 DJ에게 늘 속았다고 말한 게 미움의 원천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보편의지 실천한 지도자”
그럼에도 YS와 DJ는 민주화 대장정과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정부를 거치면서 서로를 빼고 논할 수 없는 동질성을 갖고 있다는 평가다.
이날 강연한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이 점을 강조하며 오늘날 보편의지를 갖춘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점에 무게감을 더했다.
“김영삼의 민주화운동은 김대중과 분리할 수 없고 김대중은 김영삼과 분리할 수 없다. 정치 핵심 중 핵심인 연합적 경쟁의 정치와 경쟁적 연합의 정치를 이뤘다. 제2의 건국으로 나아간 두 지도자는 시대의 문제를 동일하게 파악하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권력의지는 갈라지겠지만, 정권의 성격도 유사하다. 보편의지에 있어서 분리된 적이 없었다.”
국민을 위한 민주화, 통합을 실천하는 보편의지가 있었기에 YS는 문민정부를 출범하면서도 일관된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진영을 위한 정치, 이념과 세대로 갈라진 요즘의 극단적 정치 모습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YS는 하나회를 전격 해체해 정치군부와 정치쿠데타의 가능성을 완전히 뿌리 뽑았다. 강력한 이념적(극우), 정치적(군부), 지역적(TK) 비토세력을 완벽하게 제거해 DJ가 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수 있도록 토대를 제공했다. 5.18 특별법 제정, 12·12쿠데타 단죄와 하나회 척결, 전두환·노태우 처벌, 김대중비자금 수사중단으로 인한 호남포용과 민심수용 사이의 균형적 해석은 쉽지 않은 문제다. 오늘날의 진영대결, 수도권-비수도권, 빈부격차와 양극화, 세대, 젠더문제를 둘러싼 세계 최고 수준의 갈등국가로 자리매김 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대화와 타협, 약속과 합의의 확대로 인한 갈등의제 해소의 업적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 박명림 교수의 강연 자료 중-
박 교수는 이런 YS였기에 “해외 사례와 달리 쿠데타 가능성을 영원히 종식시킬 수 있던 것”이라고 극찬했다.
5·18 취재 이력의 김충근 <동아일보> 기자도 “문민정부를 만들어진 것은 YS의 목숨 건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호평했다.
그는 김영삼-김일성 남북정상회담 성사 내막에 대해서도 “YS의 결단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라며 “임기 중 김일성과의 실제 회담이 이뤄졌다면 북한이 핵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YS는 김일성한테 전갈을 보내면서 인민을 죽이면서까지 핵을 만들어 뭐 할 거냐. 개방하면 미국, 일본과의 수교를 보장해 준다는 말로 명쾌하게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김일성이 사망하는 바람에 회담은 이뤄지지 못했다”며 “YS의 결단에 대해 전해들은 중국 측은 그에게 거인이라는 칭호를 보내주기도 했다”고 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민주화의 초석을 이룬 YS에 대해 국제적 비교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제언이 보태져 눈길을 끌었다.
박명림 교수가 강연 말미에 한 말이었다.
그의 제안에 귀가 쫑긋해졌다는 한 행사 관계자는 “이제껏 국제학회 주제로 YS가 다뤄진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며 “기회가 되면 꼭 추진해보고 싶은 기획”이라고 말했다.
이각범 문민정부 30주년 행사 준비위원장인 이각범 카이스트 명예교수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해 추진했던 정치개혁이나 지방자치제실시, 정보화 등 YS 주요 업적에 대해 차례대로 조명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으로도 행사는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이 함께한다. 이번 세미나 사회는 조찬옥 민추협 사무총장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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