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회척결·금융실명제 등 괄목할 개혁 추진한 ‘대통령’ YS
금융실명제, 거래 투명성·조세형평성 높여…정부 세수 확대도
공직자 재산공개, 사회 도덕성 회복하는 선순환 구조 만들어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이 땅은 우리만 살다가 죽을 땅이 아니다. 후손에게 기어코 무엇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의 내일을 위해서 우리는 당장 힘찬 전진을 해야 한다. 내일이면 늦는다.”
- 김영삼 <YS 세계를 보다> 235p
1993년 2월 25일. 군부가 아닌 민간인 출신에 의한 문민정부가 출범한 날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김영삼 정부가 대한민국 사회에 남긴 유산들은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져 있다.
두 명의 YS가 있다. 한 사람은 ‘민주화 투사’ YS다. 김영삼은 26세에 국회에 입문하고 대통령 선출까지 38년의 정치 생활 대부분 시간을 독재에 맞서 싸우는 데 썼다.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했고, 박정희 정권에 대항해 투쟁하다 신민당 총재직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다. 전두환 정권에선 정치규제 전면 해금을 요구하며 23일간의 단식 투쟁에 돌입했고, 이후 발족한 민주산악회, 민주화추진협의회는 신민당 돌풍, 대통령 직선제 쟁취로 이어지는 6월 항쟁의 구심점이 됐다. ‘민주화 거목’으로서 그의 업적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한 사람은 ‘대통령’ YS다. 하나회 척결부터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실명제 및 부동산 실명제 실시, 선거법 개정 등 정치개혁과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까지. 괄목할만한 개혁을 추진했지만, 당시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YS 임기 초엔 그의 정책 발표를 ‘깜짝쇼’라고 폄훼하는 세간의 시선이 있었다. YS가 예고 없이 발표해 밀어붙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문민정부에서 구축된 시스템은 정치·경제·사회 저변의 변화를 일으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토대를 만들었다.
YS는 30대 때부터 세계 속에서 한국의 미래를 고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념의 시대는 끝났고 실리가 주도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상하며 오래전부터 국가 선진화 방안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YS가 추진한 개혁은 어느 날 느닷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단련 끝에 이뤄졌다는 평가다.
김영삼은 36세에 4개월간 미국·영국·서독·인도 등 세계를 둘러보고 온 뒤 “어느 누구에게도 기댈 생각을 말고 우리 스스로가 살길을 찾아야겠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그때 감상을 기록한 책이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다. 최근 <YS 세계를 보다>로 재출간된 이 책에서 YS는 “이를 악물고 일어서서 경제력을 향상시키고 정치의 능력을 길러 공산주의에 이겨나가야 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YS 차남 김현철 동국대 석좌교수는 22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아버지는 30대부터도 세계는 열려있지만 눈앞에 놓인 현실은 냉혹하다는 것, 이상이나 환상만을 좇을 수 없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한국의 미래를 고민해야 하는 점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파악하신 분”이라고 설명했다.
“유럽의 위대한 선조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오늘의 세계 최악이라 할 수 있는 빈곤의 역사를 그대로 넘겨줄 수는 없는 것이다. (중략) 남과 같이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자손에 물려주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지상의 사명이다.”
- 김영삼 지음·이동수 편저, <YS 세계를 보다> 25~26p
책의 편저자인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는 16일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YS가 민주화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잘 알려져서 그렇지, YS만큼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대통령도 드물다. 대통령이 된 뒤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가 요구하는 정책을 밀어붙였다”며 대통령 김영삼을 ‘이념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사회의 부조리를 걷어낸 개혁가’라고 표현했다.
은행 계좌 개설 시 실명을 써야 한다는 것, 공직에 임하려는 자는 재산을 공개해야 한다는 윤리 원칙.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이다. 하지만 이 원칙이 강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문민정부가 밀어붙인 개혁 덕분이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조세형평성과 금전 거래 투명성은 높아졌고, 지하경제는 축소됐으며 정부의 세수도 확대됐다. 공직자 재산 공개는 공직사회 내 도덕성 회복에 기여했다.
취임 3일차 대통령 본인 재산 공개…공직자 윤리법 개정안 통과
‘위로부터의 개혁이 시작될 것’이라고 공언했던 YS는 취임 사흘 만에 본인의 재산을 공개했다. 그는 공직자 재산 공개가 부정부패 척결과 부동산 투기 억제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되리라 전망했다.
재산 공개 여파로 국회의장이었던 박준규는 부동산 문제로 논란을 빚다가 사의를 표명했고, 몇몇 의원들은 직을 내려놓거나 징계받았다. 이후 공직자 윤리법 개정안이 마련됐으며 국회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대한민국의 정치 문화에 보다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재산 공개 후 진행된 여파, 그 자체다. 권력 핵심부의 재산이 연쇄적으로 공개되면서 그들의 축재에 온 관심이 쏠렸다. (중략)
파행과 진통, 여러 논란을 입법 과정에 수렴하여 새 법률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법이 다시 새로운 파문과 논란을 낳으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공직 사회가 맑아질 수밖에 없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선례가 곧 절차가 된 것이다. 공직자의 재산 공개는 현재도 중요한 검증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 심용환 <리더의 상상력> ‘공직자 재산등록’ 中
정경유착 단절 분기점된 ‘금융실명제’…세수 확대 가능케 해
YS는 대통령에 취임하며 “부정부패는 안으로 나라를 좀먹는 가장 무서운 적”이라며 우선 실행해야 할 개혁으로 ‘부정부패 척결’을 말했다. 그는 부정부패의 원천적 봉쇄,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 단절을 위해선 금융실명제 실시가 불가피하다고 봤다. 수서 비리, 가락동 민자당 연수원 매각 사건 등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도 명분이 됐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전만 해도 가명, 무기명으로 금융거래가 가능했다. 1993년 8월 13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당시 비실명 거래 규모는 약 32조9억 원으로 추산됐다. 총통화의 32%나 되는 막대한 액수였다. 비실명거래를 통한 부정한 자금은 음성적 정치자금, 비자금 조성, 범죄수익 은닉 등 비리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됐다.
하지만 금융실명제는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시도됐지만 무산됐던 정책. 당시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한 정치권의 반대와 ‘경제 여건 악화, 금융시장 동요 위험’ 등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번번이 미뤄졌다. 금융실명제는 정치인과 고위공직자, 대기업 경영인 등을 불편하게 만드는 정책이었다.
실패 경험을 지켜본 바 있는 김영삼은 경제 수석도 모를 정도의 철통 보안 속에 소수 관계자를 중심으로 제도를 준비했다. 1993년 8월 12일 오후 8시, 금융실명제는 ‘대통령 긴급명령’ 형식으로 전격 실시됐다. 김영삼 특유의 과감한 결단력 없이 금융실명제 도입이 불가능했을 거라는 해석이 많다.
김자봉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금융실명제 시행 20년의 성과와 향후 과제> 보고서에서 실명거래 확립으로 세금 부과 누락이 축소돼 과세 대상이 확대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금융실명제는 소득세법, 관세법, 조세범 처벌법, 정치자금법,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부동산실명제법, 예금자보호법 등 실명을 필요로 하는 제반 법률의 유효성을 높였다.
금융실명제를 기반으로 각종 부정부패와 연관돼 정치 불신을 가중하는 요소였던 정치자금도 양성화가 상당 부분 진척됐다. 2015년 KDI국제정책대학원 개발교육연구실이 발간한 <한국의 금융실명제 도입경험>에 따르면 금융실명제 실시에 따라 선거비용과 관련해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실효성을 확보하게 됐으며 “현금 뭉치를 담은 사과박스로 정치자금이 전달하는 경우까지 차단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불법 정치자금의 전달을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라고 진단했다.
이동수 대표는 “공직자 재산공개나 금융실명제는 보수정당의 주요 지지 기반인 기업과 고소득층에게 불리한 이슈였다. 그럼에도 YS는 한국 사회에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과감하게 진행시켰다”며 “정세를 읽지 못하고 이념이라는 프레임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정치인이었다면 하지 못했을 일”이라고 강조했다.
지금도 고액 탈세, 돈세탁, 부동산 투기 등 부정부패 및 비리 사건이 원천 차단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YS는 문제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지 않았다. 해결에 필요한 분기점을 마련했다. 자기 진영만을 위한 정치가 아닌 대의를 위한 정치를 고민했다. 저출생, 고령화, 연금개혁, 교육문제 등 대한민국 앞에 산적해 있는 과제들이 많다. 정책 마련을 통해 변화를 일으킨 문민정부의 선례는 후에도 교훈이 될 것이다.
김현철 교수는 “아버지는 기본적으로 ‘정통 민주주의자’였다. 야당 시절이야 군부 독재 종식에 대한 절박감이 있었기에 불의에 맞서 강하게 대항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대화와 타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과 같은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정치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선 국민 통합, 국민 화합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 현 정치권에도 그런 시대정신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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