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 비판’ 국힘 초선 성명 “대통령에 사과하라”…野 ‘당무개입 노골적’
2016년 총선 패배 책임…청와대·친박계의 ‘비박계 솎아내기’서 비롯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3·8 전당대회를 둘러싸고 나경원 전 의원과 친윤계 그리고 대통령실 간 갈등이 고조된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는 예고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준석 전 대표가 징계되고 국민의힘이 차기 전당대회 논의를 시작할 때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 안철수·김기현 의원은 일찌감치 출마를 선언했고, 나경원·유승민 전 의원은 각각 당심과 민심에 앞서는 주자로 거론됐습니다.
정진석 비대위가 출범하고 한 달여 지난 지난해 10월, 윤 대통령은 나 전 의원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과 기후환경대사로 임명합니다. 일각에서 대통령실의 전당대회 교통정리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나 전 의원은 전당대회 관련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언론에서 당대표 출마 여부를 물을 때 ‘출마 않겠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부위원장직은 비상근 자리”라며 “당적을 내려놔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덧붙였죠.
국민의힘이 전당대회 룰을 ‘당심 100%’로 개정한 가운데,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 전 의원이 국민의힘 지지층 사이에서 선두를 달리는 결과는 계속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5일 나 전 의원이 저출산 대책을 놓고 빚은 대통령실과의 갈등이 현 상황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3일 나 전 의원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과 기후환경대사직에서 해임시켰습니다. 나 전 의원은 ‘친윤’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발언을 이어갔고, 친윤계 장제원 의원은 ‘반윤 우두머리’, ‘제2의 유승민’ 등 발언으로 나 전 의원을 비판했습니다.
지난 17일 나 전 의원은 해임 결정이 “대통령 본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일부 참모들의 왜곡된 보도가 영향을 미쳤다는 취지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요.
같은 날 오후 김대기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나 전 의원 해임은 대통령의 정확한 진상 파악에 따른 결정이다”, “대통령께서 나 전 의원의 그간 처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본인이 잘 알 것”이라며 이례적인 반박을 가했습니다. 현재 나 전 의원 활동은 잠정 중단 상태입니다.
나 전 의원의 전당대회 출마를 둘러싸고 친윤계의 압박 수위도 거세졌습니다. 박수영 의원을 비롯한 초선 의원 48명은 “나 전 의원에게 대통령에 대한 공식 사과를 촉구한다”는 단체 성명서를 냈습니다. 야권은 이를 두고 ‘대통령실의 당무 개입이 노골적’이라며 비판했습니다.
현 상황을 두고 2014년 새누리당 전당대회와 2016년 공천 파동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당시 ‘진박’ ‘친박’ ‘비박’ 등 계파 논란이 난무했습니다. 당은 큰 위기를 맞았고요. 결국 대통령 탄핵과 분당까지 가고 말았지요. 주류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의 인위적인 ‘힘’의 행사는 후에 ‘부작용’을 낳을 위험이 큽니다. <시사오늘>은 몰락의 도화선이 된 권력 다툼을 살펴봤습니다.
새누리당 20대 총선 패배…‘진박감별’ 등 무리한 공천개입서 비롯
2014년 전대 권력다툼…朴 지원 업은 ‘서청원’vs비박계 ‘김무성’
나 전 의원은 장제원 의원과 설전을 벌이던 지난 15일 페이스북에 “제2의 진박감별사가 쥐락펴락하는 당이 과연 총선을 이기고 윤석열 정부를 지킬 수 있겠냐. 2016년의 악몽이 떠오른다”고 말했는데요.
그가 말한 ‘2016년의 악몽’은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공천 파동 끝에 맞은 패배를 말합니다. 당시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을 통해 공천에 영향을 행사했습니다. 이한구 위원장과 친박계는 ‘진박(眞朴) 감별’ 등의 이름으로 비박계를 공천에서 배제하는 등 무리한 개입을 했습니다.
이러한 다툼은 총선에서 처음 터져 나온 게 아닙니다. 2014년 전당대회에서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계는 서청원 전 의원을 당대표로 전격 지원했지만, 결과적으로 김무성 전 의원이 49.2% 지지를 받아 당선됩니다. 2위인 서청원(36.7%)과 12.5% 차이가 났습니다. 당시 김무성이 차기 대선주자로 불릴 만큼 영향력있는 인물이기도 했고, 대통령의 당무개입이 되려 반감을 불러일으켜 ‘비박계’를 결집시키는 효과를 냈다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이때 시작된 갈등이 2016년 ‘공천 파동’까지 이른 겁니다. 김무성 전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 의중에 반하는 ‘상향식 공천’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친박계의 반발에 부딪쳤습니다. 공천 직인을 거부하며 잠적한 일명 ‘옥새런’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170~180석이 예측됐지만 새누리당은 결과적으로 더불어민주당에게 1석을 더 내주며 패했습니다. 당시 전문가들은 ‘민심이 친박의 전횡을 심판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놨습니다. 16년 만의 여소야대 지형에 국정농단 사건이 덮친 결과는 탄핵 정국이었습니다.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 ‘9룡’의 경쟁…민심·당심 갈려
당심 앞서던 최형우, 정치전면 사라진 뒤 몰락 당내 와해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여당인 신한국당에선 최형우·이인제·이회창·이한동·최병렬·김덕룡·박찬종·이수성·이홍구 등 이른바 9룡이 경쟁했습니다. 당시에도 당심과 민심이 갈렸습니다.
이회창·박찬종·이인제 등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민심에서 앞선 반면, 최형우·김덕룡의 경우 당내 조직기반이 탄탄했지만 지지율은 한 자릿수를 맴돌았습니다. 민정계 대표주자 이한동은 당내 구여권 세력의 지지를 받았지만 대중적 지지도는 약했고요.
1997년은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직하는 등 당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때입니다. 지금처럼 당정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죠.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청와대가 당심에서 앞서던 최형우에게 대권행보 중단 의사를 간접 요구했습니다. 최형우는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문민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거쳐 정동포럼, 21세기 정보화전략연구소 등을 만들며 대권의 꿈을 키웠죠. 이재오·서청원·황명수·김정수·노승우 등을 포함한 ‘온산계’를 형성해 당내 최대 계파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2013년 6월 최형우 전 장관이 <시사오늘>에 내놓은 증언에 따르면, 최형우는 1997년 초 김무성으로부터 쪽지를 받았습니다. ‘(대선) 후보는 나중에 생각해 보고 일단 당의 대표를 맡아서 당을 추스르고 나중에…’라는 식의 내용이 적힌 쪽지였습니다. 최형우가 ‘대통령 뜻인가, 현철이(YS 차남) 생각인가’라고 묻자 김무성은 ‘어른 뜻’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후 뇌졸중으로 쓰러진 최형우는 정치 전면에서 사라집니다. 그가 이끌던 온산계도 와해됩니다. 서청원 등 일부는 이수성 지지로, 다른 일부는 이인제 지지로 선회했습니다. 민주계는 뿔뿔이 흩어지고 신한국당 내부에는 ‘이회창 대세론’이 떠오릅니다.
결과적으로 이인제가 경선 불복 후 탈당해 창당한 국민신당 후보로 15대 대선에 출마하며 보수 진영 표가 분산됐습니다. 김대중이 이회창에 1.53% 차로 신승했죠. 이회창, 이인제는 각각 2위와 3위에 그쳤습니다. 돌이켜보면 지지도 등을 내세워 대권행보를 중단시킨 청와대는 정권 유지에 실패한 겁니다.
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된 현장에는 권력을 가진 자와 주류의 인위적 개입이 있었습니다. 진박감별사와 비박계 김무성이 다툼을 벌인 2016년 총선 이후 새누리당은 분열했고, 당심에서 앞서던 최형우가 사라지고 1997년의 신한국당은 정권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2023년 현재 ‘진박감별사’라는 단어가 다시 정치권에 등장하는 이유는 현 정권의 주류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게끔 해서가 아닐까요. 인위적인 힘의 행사가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던 과거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야간 대립이 날로 심화되는 상황입니다. 정치권에서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의문이 든 적 한 번쯤 있을겁니다. 이들의 선택은 과거 정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학습효과 아닐까요. ‘김자영의 뒷담화’는 현 정치 상황을 75년 간의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를 비춰 해석해봤습니다. <시사오늘>은 다섯번째 주제로 ‘정권의 인위적인 당무개입과 권력 싸움, 몰락의 도화선 되다’를 살펴봤습니다. 다음주 금요일 찾아뵙겠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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