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종희 기자]
“수…고…하…십…니…다.”
부자연스럽지만 반가운 듯한 목소리가 창문 틈에서 흘러나왔다.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장충동 자택에 들어서자, 최 전 장관은 첫인사를 그렇게 했다. 5월 25일. 겨울옷을 벗어던진 최 전 장관의 자택 화단에는 봄꽃이 활짝 폈지만, 최 전 장관의 가슴은 아직까지 겨울인 듯싶다. 그는 인터뷰 도중 많은 눈물을 흘렸고, 필자 역시 곳곳에서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의 정치 얘기는 아쉬움의 연속이었다.
1970년 정치에 입문한 이래 수차례 투옥, 민주산악회 결성, 민추협 발족, ‘2.12 선거혁명’, 대통령 직선제 쟁취, 3당 합당, 문민정부 창출에서 차기대권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기까지 한국사의 정치 구도를 바꾸는 큰 흐름 속에는 언제나 ‘최형우’가 있었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997년 대권이라는 야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해 3월 뇌졸중로 쓰러지며 사실상 정치생활을 마감했다.
숱한 영욕의 세월을 몇 시간 만에 풀어내기가 힘들었는지 그는 얼굴로 흘러내리는 울음을 자주 씻었다.
최 전 장관은 일반인들에게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각인돼 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YS의 비서로 활동한 적이 없다. 때문에 ‘YS 측근’이라기보다는‘YS와 정치적 동지’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싶다. 정치적 동지인 만큼 그는 정치적 고비마다 YS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처럼 그가 늘어놓은 이야기 속에는 ‘자기 정치’를 충실히 해 왔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16년 전 뇌졸중 후유증으로 말하는 게 여전히 불편했다. 이날 인터뷰는 최 전 장관 부인인 원영일 여사와 함께 진행됐다. 원 여사가 최 전 장관 옆에서 대신 말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원 여사는 최 전 장관을 '이 양반'이라고 칭했다. 최 전 장관의 건강 상태를 물어보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3선 개헌 반대투장하며 정치입문
-건강 상태는 어떤가요.
"다른 건 괜찮은데 언어가 원활하지 못해서 불편합니다. 많이 좋아졌지만 자기 생각을 빨리 표현할 수 없습니다. 천천히는 좀 가능하지만…. 그런데 지금까지 치료해준 많은 분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돈을 안 받고 치료해준 분들도 많습니다. '국가를 위해 고생했는데 건강을 잃으니까 너무 속상하다'면서 '돈 안 받고 치료해주겠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만약 저희가 돈을 모두 내고 치료를 받았다면 버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쓰러진 지 16년이 됐는데 이 상태로라도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특별히 받고 있는 치료가 있습니까.
"최근 동국대 후배 분이 대체의학을 하시는 분을 저희에게 소개해줬는데 그 분이 '수족이라도 원활히 움직이도록 해보겠다'면서 치료를 해주고 있습니다. 중국 황실 비법이라고 하는데 한약재 40여 가지를 끓여서 정제한 뒤에 발효해서 그것을 온몸에 바릅니다. 그 동안 손발이 굉장히 차가웠는데 지금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그 분께 너무 고맙습니다."
이제 최 전 장관과 함께 기나긴 정치 역사 속으로 떠날 시간인 듯싶다.
-정치 입문 당시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3선 개헌(1969년)이 있기 전에 <4·19, 6·3 범청년민주수호투쟁위원회>를 만들어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앞장섰습니다. 그 때 이기택 전 의원이 회장을 했고 제가 사무총장을 했는데, 그렇게 하다가 3선 개헌이 됐어요. 그 때 '나는 서른여섯에 국회의원이 돼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부인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했더니 ‘어떻해해야 하냐’고 물어봐요. 그래서 '돈이 있어야 한다'고 했지요. 그때부터 집사람이 돈벌이에 나섰어요.”
최형우의 정치 이력을 더듬어 올라가면 1969년 이전이다. 최형우는 동국대 대학시절인 60년대 초 자신의 고향인 울산의 민주당 지구당에서 정부통령 선거운동을 하면서부터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그 후 1963년 11월 6대 총선에서 민주당 울산지구당 위원장인 최영근의 참모로 일했다. 최영근이 최형우의 도움을 받아 6대 선거에서 당선되지만, 7대 선거에서 낙선하게 되자 제일생명보험회사 사장으로 들어갔다.
이에 실망한 최형우는 잠시 정치판을 떠났으나 1969년 4월 박정희의 3선 개헌 저지를 위해 발족한 <4.19, 6.3 범청년민주수호투쟁위원회> 사무총장을 맡아 3선 개헌 반대투쟁을 벌이다, YS와 만났다. 이 대목에서 옆에 있던 원 여사는 당시를 회고했다.
“그래서 나 혼자서 '내가 뭘로 돈을 벌까. 미술 선생 출신인 내가…'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돌아가신 김승목 전 의원의 부인이 무교동에 소금구이 식당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화분 하나를 사서 들렀어요. 그 부인은 부산대 성악과 출신인데 식당을 열었더라고요. '아, 저 분도 남편을 위해 식당을 여는데 나라고 못할 것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고 광화문 원자력 병원 앞에 고바우 갈비집을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무교동에서 하려고 했으나 최 전 장관이 끝까지 반대했어요. '사람이 의리가 있지, 선배가 하고 있는 곳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느냐'라고 했어요. 그렇게 식당을 열어 돈을 벌어서 <4·19, 6·3 동지회> 생활비를 대주고는 했습니다."
-식당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요? 원 여사에게 재차 물었다.
"최 전 장관은 그 때 매일 같이 데모에 참여하며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습니다. 저희 식당 3층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자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저는 너무 급해서 종업원들에게 그 방문에 못을 치라고 시켰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끌기 위해 그 사람들을 붙잡고 얘기를 하고…. 그런 다음에 3층에 올라가서 정보원들에게 '봐라. 이 방은 사용 안 한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정보원들은 돌아갔고 방에 있던 사람들은 밤이 될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렸습니다. 나중에 이 사람들에게 저희 식당 종업원들 '가운'을 입힌 다음에 종업원들로 하여금 한 명씩 데리고 무교동, 서울역 등으로 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장사가 정말 잘 됐습니다. 그래서 그날 번 돈은 전부 나누어서 이 사람들에게 줬습니다."
당시 고바우 갈비집은 소문을 타고 야당 정치인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YS와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물론, 야당 정치인들이 무리를 지어 찾아와서는 직접 자신들이 종업원처럼 수저 등을 놓으며 식사를 했다. 또 정치인들이 아닌 회사 사장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제가 그 때는 날씬하고 예뻤나 봅니다.(웃음) 외상값을 받으려고 사무실에 가면 돈을 주지는 않고 제게 농담을 하고는 했어요. 제가 화가 나서 '당신이 밥을 입으로 먹었지 뭘로 먹었나. 음식 잘 먹은 입으로 왜 그런 식으로 말하나. 돈 안 받아도 좋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요. 나중에는 제가 '최형우 마누라'라는 것을 알더니 그 때부터는 오히려 저희를 도와줬습니다. 멀리서도 일부러 밥 먹으로 오고…."
이후락 텃세 이겨내며 8대 선거 통해 첫 금배지
-3선 개헌 반대투쟁을 하다 고초를 겪은 것으로 압니다.
원 여사는 남편 최형우를 대신해 당시에 겪은 얘기를 들려줬다.
"당시 위원장인 이기택 전 의원은 안 잡혀갔는데 그 때 최 전 장관을 비롯해 하승룡 씨 등 다섯 명이 정보부로 끌려가서 1주일 동안 엄청나게 당했습니다. 어느 날 밤 12시에 남산 파출소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이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세 사람의 보호자가 안 왔어요. 그래서 제가 손가락 열 개로 이 세 사람을 보증한다는 도장을 찍었어요. 파출소에서는 이번 일과 관련해서는 제게 함구령을 내렸어요. 만약 제가 얘기를 하면 '고바우 식당 간판을 내려야 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세 사람을 데리고 큰길가에 나왔는데 이 사람들이 모두 퍼져버렸어요.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걸음을 못 걸었습니다. 그래서 남산 지하도에서 통행해지 때까지 두세 시간 기다렸다가 새벽 4시에 통행이 해지돼서야 택시를 잡아서 하나씩 태워 보냈습니다. 그 때부터 <4·19, 6·3 동지회>는 더 강렬하게 활동했어요. 그래도 결국은 박정희가 3선 개헌을 했어요."
-어떻게 고문받았는지 궁금한데요.
"최 전 장관은 그 때 제게 얘기를 안 했어요. 이 양반이 그 때 36세였는데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말을 안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1971년 8대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 식당을 도와줬습니다. 그러다 식당이 좁아서 을지로 2가 100평짜리 식당(가오정)을 얻어서 시작했는데, 1970년 말에 당원들 투표를 통해 울산 지구당 위원장이 됐어요. 그래서 울산에서 활동했습니다. 부인은 1970년 11월에 식당을 정리하고 선거를 도우러 울산에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5월 25일 선거를 치렀는데, 그 선거는 사실 이길 수 없는 선거였습니다. 우리는 고작 차 한 대로 선거운동을 했는데 저쪽(공화당)에서는 차를 13대를 굴렸습니다. 그 때 울산이 12개 면으로 돼 있었는데 각 면에 차 한 대씩을 배정했고 울산시에 한대를 더해 13 대를 사용한 겁니다. 저희 숙부가 저쪽차가 지나가면 그 차 소리가 너무 싫어서 다리 밑에 있다가 올라왔다고 해요."
-그런데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입니까?
"그 앞에 대통령 선거(1971년 7대 선거)를 치르고 한달 만에 총선을 치렀는데 우리가 사는 동에서 김대중(DJ) 지지표가 5표밖에 안 나왔어요. ‘우리 식구만 20명인데 그러면 15표는 어디로 갔는가’라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이것을 이슈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부정선거'라고 문제 삼은 겁니다. 우리 당원들이 울산시청 앞에서 데모를 했습니다. 그렇게 울산이 너무 시끄러우니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울산시장을 희생시켰습니다. 그 일로 시장이 사퇴했어요. 그걸 계기로 우리들은 '부정선거 타도하자'며 똘똘 뭉쳐서 1만6천 표 차이로 이겼습니다.”
-첫 등원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까.
“그렇게 국회의원이 돼서 국회에서 첫 발언을 했는데 공해 문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울산에는 공해가 엄청 심했어요. 그래서 배나무도 안 되고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최 전 장관 발언에 당시 김종필 총리가 '개발도상국이라서 공해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 때 속으로 '김종필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어떻게 그렇게 답변을 하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최형우가 배지를 단 울산 울주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이 정성을 들이던 곳이다. 최형우도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이라는 자서전에서 “내가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공천을 받아 입후보했을 때 가족은 물론 아무도 내가 당선된다고 믿지 않았다”고 말해 예상 밖의 승리였음을 밝혔다. 결국 최형우는 자신의 소망대로 36살에 이후락 텃세로 알려진 울산 울주에서 공화당 후보를 제치고 첫 금배지를 달았다.
-하지만 결국 1972년 발생한 유신 때문에 국회의원을 오래 하지는 못 했습니다.
"국회의원이 된지 1년 3개월만에 유신이 선포되면서 국회가 해산됐습니다. 이미 유신이 선포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친구인 신아일보 정규삼 씨로부터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국회의원으로서 원내 발언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육군보안사령부에) 붙잡혀갔습니다. 거기서 전기고문, 물고문, 통닭구이 세 가지 고문을 했습니다. 누구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캐내기 위한 고문이었습니다. 나중에 내가 '소에 무게 나가라고 물 먹이는 업자들은 다 잡아가는데, 사람 물 먹이는 사람은 안 잡아 가는가'라고 말 한 적이 있어요. 지금도 국회 발언록에 그게 남아 있습니다."
유신이 선포되면서 박정희 정권이 최형우를 잡아간 것은 1972년 7월 28일 국회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유신쿠데타’질문을 했기 때문인데 누가 그 정보를 주었는지 추궁하기 위해서였다. 최형우는 당시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총리인 김종필에게 “최근 항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절대 물너나지 않을 것이다. 드골식 헌법으로 또 한번 개헌을 할 것”이라고 따졌다. 그리고 유신이 선포된지 일주일 후인 1972년 10월 25일 최형우는 사복을 입은 기관원들에 의해 영등포 5관구 헌병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 대목에서 최 전 장관은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
유신 후 무차별적 고문…최형우뿐 아니라 원영일도
-원 여사도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원 여사는 당시를 소상히 기술했다.
"(군사정권이)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내리니까 우리 당원들이 '민주주의는 조종이 울렸다'하고 지역구 사무실 칠판에 써놓고 나왔어요. 그런데 사무실 주변에 누군가가 삐라를 뿌려놨어요. 우리 당원들이 한 게 아니라 (군사정권의) 공작정치였습니다. 우리를 (간첩죄로) 잡아넣으려고 그런 술수를 쓴 것입니다. 이후락 씨가 그런 공작을 한 것입니다. 그 때 저는 둘째 아들을 등에 업고 다니면서 우리 당원들 12명을 이모집 등 친척집으로 나눠서 숨겨줬습니다. 그러다가 애가 폐렴으로 38도가 넘는데도 울산 형사들이 와서 저를 붙들고 갔습니다. 그렇게 끌고 가더니 중부경찰서 유치장에 저를 확 밀어넣었어요. 그래서 바닥에 철퍼덕 쓰러져서 고개를 들었는데 제 오빠도 이종사촌 오빠도, 심완구 시장도, 친구들도 다 거기에 있더라고요. 그 다음날 아침, 수갑을 채워서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 삼일공사(간첩들 다루는 곳)에 데려갔어요."
이렇게 잡혀온 사람들은 역시나 큰 고초를 당했다.
"거기 들어가니까 밤을 새우고 이틀인가 지나고 나서 저를 지키는 대학생이 제가 애기 걱정 때문에 우는 것을 보더니 '사모님 저는 대학교 2학년생인데 비록 여기에 근무하지만 정의감이 있습니다. 저에게 심부름을 시키십시오'하고 말해요. 그래서 제가 '전화가 도청되니 다른 말은 하지 말고 애가 입원했는지만 물어봐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친정엄마가 애를 입원시켰다'고 이 학생이 전해주더라고요. 그 때부터 안심이 되더라고요. 그러다 그 곳에서 제가 숨겨준 당원 12명이 다 잡혀온 것을 봤습니다. 몰래 잠깐 제 방을 나와서 그 사람들 방에 가보니 두들겨맞아서 떡이 있더라고요. '런닝'에 피가 달라붙어 있고 쓰라려 죽는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당원들을 만나 실컷 붙들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그 학생에게 '하나만 더 도와 달라. 아까징끼(머큐로크롬), 소독제 등을 사다달라'고 부탁했더니 사다줬어요. 소독제를 바르면서 달라붙은 런닝을 살살 떼어냈는데 너무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떼어낸 다음에 아까징끼와 가루약 등을 발라주니까 며칠 있다가 상처 부위가 조금 꼬들꼬들해지면서 나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아침만 되면 조서를 쓰라고 하는데 하루 종일 조서를 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쓰라고 했어요. 심완구 전 시장과 제 사촌 오빠, 저 세 사람의 말이 맞아야 하니까 조금만 틀려도 다시 쓰라고 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치료한 게 들켰습니다. 그랬더니 제게 온갖 쌍욕을 다했습니다. '여기가 신민당 당사인줄 아냐, 네가 독립운동가냐'라며 온갖 쌍욕을 다하는데 저는 아무 소리도 안 하고 꾹 참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너무나 울분이 나서 저도 같이 욕했습니다. '너는 니 엄마도 기집도 없느냐. 박정희가 이렇게 하라고 시켰냐. 아니면 이후락이 시키더냐. 네가 지금 과잉 충성하는 것 아니냐. 너 같은 놈 때문에 대한민국이 안 된다'라고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멈칫하더라고요. 제게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시멘트바닥에 담요 하나 가지고 잤는데 각 방마다 칸막이가 있었고 누우면 옆 방 사람이 보였어요. 그런데 큰 소리를 낼 수 없으니까 심완구 시장이 제게 손으로 '빌어라'라고 시늉을 해요. 그러면 저는 '빌기는 뭘 비나. 이놈들 끝까지 해보라고 해라. 내가 이후락과 대통령을 찾아가겠다' 이렇게 했어요."
당시 심완구는 최형우의 조직부장이었다. 심완구는 홍인길과 처남 매부 사이다. 최형우가 상도동 사단의 메카가 되는데 심완구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제가 붙잡혀 온지 12일 정도가 됐는데 여론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어떻게 최형우 부인까지 잡아가나. 이후락 정보부장이 너무 했다'라는 여론이 돌았어요. 이 때 저를 감시하던 그 대학생이 내일 아침에 제가 나갈 것이라는 얘기를 해줬어요. 저는 그래서 '나 혼자?'하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해요. 제가 당원들을 놔두고 혼자 나오려니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당원들이 '사모님이라도 나가서 구명운동을 해야 합니다. 저 사람들이 우리를 보안법 위반으로 몰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평생 정치를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해요.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심완구 전 시장이랑 거기를 나와서 울산으로 갔습니다. 우선 당원들 부인들을 만나려고 하는데 그 때 '술도매'를 하는 박규동 선생을 만나 '아버지 100만원만 주라'고 했어요. 박규동 선생이 최 장관을 아들처럼 생각했는데 그 때 100만 원을 줬습니다. 그 돈으로 쌀을 사서 당원들 집집마다 넣어줬습니다. 그리고 선전부장 하던 이일성 씨 부인이 애를 낳는다고 했는데 하혈로 위기라고 해서 제가 택시를 타고 병원마다 다니면서 피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울산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 타고 올라오는 내내 울었습니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안 됐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30만 선량을 이렇게 하루 아침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끝까지 싸워서 민주화를 일으키겠다는 마음이 강렬해졌습니다. 제가 역촌동 전셋집에 오니 이 양반은 애를 보고 있더라고요."
최 전 장관은 이 대목에서도 펑펑 울었다. 아무래도 고문의 상처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듯하다.
박정희 정권 YS제거 나서자, 최형우 “차라리 감방 보내라”
-많은 탄압을 받았지만 9대(1973년), 10대(1979년) 총선에서도 당선됐습니다.
"9대 선거에서는 한 지역구에서 두 명을 뽑을 때인데, 이후락 씨가 여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풀어줘서 출마할 수 있었습니다. 또 이후락 씨는 내가 당선이 안 되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때 울산 지역에는 야당 대부라 불리는 김재호 박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을 정보부에서 출마시켰습니다. 공화당에서는 김영수 씨가 나왔습니다. 결국은 나와 김영수가 됐습니다. 우리가 표를 더 많이 받았습니다. 그 때 우리 당원들 12명이 잡혀가 있었기 때문에 나와 집사람, 잡혀가지 않은 김상두 조직부장 셋이서 선거를 치렀습니다. 10대 선거에서는 이후락 씨가 직접 출마했어요. 나와 이후락 두 사람이 당선됐습니다. 그 때 이후락 씨가 돈을 많이 썼습니다. 그 바람에 자장면집은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맨날 탕수육 등을 냈습니다. 하지만 저와 가까운 사람들은 '돈 많은 이후락이에게 얻어먹고 표는 최형우에게 주면 되지 않습니까, 표 찍는데 누가 보나요'라고 했어요. 그 때 이후락 씨가 50억을 썼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후락 씨를 이겼습니다. 선거 결과가 나오자 이후락 씨가 벌렁 넘어지면 '내 돈 어디갔나'라고 말했다고 해서 울산이 떠들썩했습니다. 나중에 이후락 씨가 나를 찾아와 '우리 화합하자. 이번 선거 치르면서 민심도 알았고, 최형우 후배 대단한 것 알았다. 같이 잘 지내자'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10대 총선에서 당선된지 얼마 안 돼서 10·26이 터졌는데요.
"그 전에 회유가 있었습니다. 유기정 의원(삼화인쇄소)을 통해 차지철이 야당 의원들을 포섭했습니다. 유 의원이 돈을 한 보따리 싸가지고 왔는데 회유가 안 되니까 이후락 씨가 직접 찾아왔어요. 이후락 씨가 '자네 말이야 박 대통령 성질을 알아야 해.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라면서 회유를 했어요. 그 때 내가 '선배님, 저 하나 어떻게 한다고 상도동(YS계)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 제발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했어요. 그 때 그 쪽에서 가져온 돈 5억 원은 정말 컸습니다. 하지만 나는 '서대문 형무소에 가겠습니다. 그 대신 돈은 안 받겠습니다'라고 했어요. 내가 요지부동이니 이후락 씨가 '최형우, 당신 같은 사람 10명만 있으면 통일될거야'라고 했어요. 그 때 나는 부인한테 솜바지와 저고리를 준비하라고 했어요. 감옥갈 생각을 했는데, 일주일 후 어느 날 새벽에 미국에서 서상록 씨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부인이 받았는데, '어이, 형수 미국에 난리났다. 박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때 부인이 깜짝 놀라서 '어휴, 서 선생 무슨 소리야. 우리 전화 도청되니 그런 말 하면 큰일난다'며 전화를 끊었어요. 그런데 또 전화가 왔어요. 미국 방송에 나왔다는 거예요. 미국에서 먼저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새벽 6시 30분인가 7시에 처음으로 방송이 나왔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날 새벽에 상도동으로 갔습니다. 10·26이 터진 바람에 형무소에 안 갔습니다."
유신말기인 1979년 정국은 격동의 해였다. 그해 5월 당수로 복귀한 김영삼은 박정희와 정면대결을 선언했고, 박정희 정권은 'YS 제거’를 위한 융단폭격을 가했다. 그해 발생한 YH사태를 계기로 문부식 김덕룡 등은 구속됐고, 서석재 문정수 등은 수배가 내려졌다. 이어 김영삼은 총재직과 의원직을 잃었다.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는 마지막 남은 최형우에게 “이제 다 끝났다. 당기위원장과 정무위원직을 사퇴하는 것만이 난국을 수습하는 길”이라고 회유했다.
하지만 최형우는 “당직을 사퇴할 수 없다. 정치를 그만두게 하고 교도소로 보내라”며 맞섰다. 그러다가 10?26이 터졌다.
"박 대통령이 죽으니까 우리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정치판이 어떻게 될까 걱정이 됐어요. 그 때 매일 상도동 YS집으로 갔는데 그 때는 아무도 못 들어갔지만 나는 집 뒤로 담을 넘어다녔습니다. 그 당시에는 서울의 봄이 온다고 난리였어요.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고 난리였는데 전두환이 대통령이 됐습니다."
5공 최형우에 입각건의, 보따리 장사하며 거절
-전두환 정권으로부터도 장관 제의를 받는 등 회유를 받았지만 이를 거절해 고초를 겪은 것으로 아는데요.
"그 때 정무장관이 정재철 의원이었는데 그 분이 매일 회유를 했습니다. 그러나 거절했어요. 그래서 정보부에 잡혀갔습니다. 그 때 코 수술을 해서 피가 아직 나고 있었는데도 그냥 데리고 가더라고요. 그 때 김동영 김수한 정의형 고흥문 등 6~7명이 붙들려 갔습니다. 정보부에서 하루는 가택수색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그러나 가져갈 게 없으니 장지연 씨 글씨하고 다른 그림 등 작품 3점을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게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다 돌려줬습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얼마나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노신영 씨가 안기부장으로 왔을 때인데, 하루는 검은 차가 와서는 제 부인에게 같이 가자고 해요. 부인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자기들도 모른다고 해요. 그렇게 부인을 데리고 갔는데 그게 '안가'였어요. 도착하니 노신영 씨가 현관에 서 있더라고요. 방에 들어가니 점심을 잘 차려놨는데 저한테 상공부장관이나 건설부장관을 줄 수 있다고 했답니다. '국가를 위해서 꼭 야당만이 갈 길이 아니다. 전두환이 바로 가도록 하는 것도 애국이다' 그렇게 얘기했답니다. 그때 부인이 '그건 그렇지 않다. 만약 최형우가 장관이 되면 돌팔매를 맞아 죽는다. 우리를 3천3백만 원 받은 부정축재자로 대문짝만하게 신문에 나게 해놓지 않았느냐.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창피해서 학교를 안 갔다. 그런데 부정축재가가 장관이 되면 국민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국민들이 정부를 믿겠는가'라고 했답니다."
1983년 가을 김영삼이 23일 간의 단식투쟁으로 민주화 세력이 다시 뭉치기 시작하자, 전두환 정권은 상도동계를 무너뜨리려는 공작을 펼쳤다. 타깃이 된 사람은 최형우였다. 전두환 정권과 손잡고 장관직을 맡아보라는 입각 권유였다. 최형우를 설득하는데 당시 관계기관이 총동원되다시피 했다.
안기부 현홍주가 접촉을 시도, 여의치 않자 동국대 동창이며 민정당 의원인 정재철이 나섰다. 그래도 소득이 없자 노신영 안기부장이 직접 나섰다. 최형우가 설득이 되지 않자 부인인 원영일 회유에 나섰다. 회유가 얼마나 집요했는지 당시 정가에서는 ‘최형우도 마침내 정부 쪽으로 돌아섰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게 전두환 정권의 회유를 거절한 뒤에는 어떻게 생활했습니까. 말을 원 여사가 받았다.
"제가 보따리 장사를 했습니다. 당장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여자 속옷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각 신문사 기자들이 파면을 당했어요. 각 신문사마다 대여섯 명씩 잘렸을 때인데 그 기자들이 저한테 '우리 마누라도 데리고 하십시오. 우리 애들 밥도 못 먹습니다'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같이 하자. 우리가 창피하게 생각하지 말고 떳떳하게 살자'고 했어요. 우리는 아침에 사무실에 나와서 설명을 듣고 속옷을 팔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때 탁경명(전 중앙일보 부국장) 씨도 잘렸는데 집에 있으니 미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같이 일하면 안 되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같이 하자. 이것도 일종의 시위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얘기해서 탁경명 씨가 관리부장으로 왔는데 아침마다 탁경명 씨가 속옷을 들고 장단점을 설명하는데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니 소름이 끼쳤습니다. '저 사람이 저런 걸 해서 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탁 부장은 이거 안 했으면 좋겠다. 속상하다.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면서 '이 일은 여자들이 할테니 당신은 그냥 등산이나 하고 놀아라. 놀아도 입에 풀칠은 하지 않는가'라고 했어요. 그 때부터 탁경명 씨가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정치 규제가 풀리고 1985년 12대 총선에서 출마했는데, 의외로 낙선을 했습니다.
"그 때 선거를 앞두고 여러 사람들에게 공천을 줬어요. 그러면서 '구두 벗고 운동화 신고 하루 100리씩 걸어라. 그러면 된다' 이렇게 격려했어요. 계속해서 지원 유세를 다녔어요. 그래서 제 지역구를 돌볼 틈이 없었어요. 그 때는 YS는 가택연금 상태였기에 제가 나서야 했을 때입니다. 또 자기가 공천 준 사람들은 다 당선시켜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공천을 받은 문정수가 '선거를 한 달 남겨놓고 공천을 주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항의하길래 '니 무슨 소리하나, 한 달 아니라 열흘이라도 민심은 우리에게 있다'면서 소리쳤어요."
-선거 결과 문정수 등 상도동계 대부분은 당선됐지만 정작 본인은 떨어졌는데요. 이유가 뭡니까.
"전두환이 '최형우는 국회의원 시키면 절대로 안 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군인들이 전부 대리투표를 했어요. 투표 당일 어느 투표소에 이상한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발로 차니까 그 안에서 막 찍어대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을 잡아서 울산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당선되지 못했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당사에서 부정선거 규탄 집회가 있었고 소송을 했는데 그 바람에 코리아나 호텔에서 군인들로부터 테러를 당해서 죽을 뻔 했습니다. 그 때 제가 대의원 투표를 통해 원외 부총재를 했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서 멱살을 잡고 난리를 쳤고…. 결국에는 소송이 유야무야 돼버렸습니다."
상도동계에서 확실한 당선권으로 여겼던 울산의 최형우는 민한당의 심완구와 정재원에게 각각 밀려 고배를 마셨다.
3당 합당은 고육지책…민주세력 간 합당은 불가능
-13대(1988년) 총선 때는 울산이 아닌 부산으로 지역구를 옮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때 YS와 의논했습니다. 이제는 부산에서 바람을 일으켜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YS도 '부산으로 가서 바람을 일으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역구를 심완구 씨에게 주고 부산 동래구로 갔습니다. 동래구는 박관용 씨가 민한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곳인데, 내가 온다고 하니 껄끄러워 했습니다. 13대 때는 소선구제로 바뀌면서 동래구가 갑·을로 나뉘었습니다. 박관용 씨는 동래중학교 출신인데 그 중학교가 있는 갑 지역에 출마했고 저는 을 지역에 출마해서 선거를 치러 당선됐습니다."
최 전 장관은 1987년 대선에서 YS와 DJ가 분열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양 진영의 화합을 위해 애썼다. 그러나 실패로 끝났다. 특히, 최 전 장관이 YS의 통일민주당과 DJ의 평화민주당이 합당하는 것에 대한 합의를 이뤄냈지만 정작 합의서에 서명을 하는 날 동교동계가 아닌 깡패들이 나타나서 결국 결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원 여사는 "합당 서명하려고 할 때 서교호텔에 깡패들이 와서 결렬됐다"고만 전했다.
-그 당시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의 합당이 정말 어려웠나요?
"어려웠다고 봅니다. 결국에는 대선 후보 문제였습니다. DJ는 1987년 대선 이후에도 '4자 필승론'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봅니다. YS와 같이 대통령 후보로 나가자는 것이죠.그래야 자신이 당선된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3당 합당 당시에도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3당 합당은 고육지책입니다. YS가 아무리 설득해도 DJ가 말을 안 들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두 사람이 아침에 대화해서 합의해도 DJ가 저녁 때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YS는 'DJ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못 믿는다'고 했어요. 그런 와중에 3당 합당이 나왔는데 YS가 결단을 내린 거죠. 1987년 대선처럼 4자가 나오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죠. 3당 합당에 대해 YS가 얼마나 고심을 했겠습니까. 그래도 범을 잡으려면 범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YS가 안 하면 DJ와 하려고 짜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YS가 그거 빨리 '캐치'하고 먼저 선언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반대했습니다. YS가 사전에 불러서 상세하게 얘기를 했어야 했는데, 혹시 말이 샐까봐 혼자만 알고 아무런 말을 안 했기 때문에 화가 났죠."
3당 합당이 선언될 당시 부인인 원 여사는 미국에 있었다. 큰 아들이 아버지 몰래 유학시험을 봐서 합격한 바람에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미국에 있는데 상도동 사모님(손명순 여사)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손 여사는 울면서 '3당 합당한다는 뉴스가 방송에 나왔다'면서 빨리 귀국할 것을 부탁했다. 원 여사는 당시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상도동 사모님 전화를 받고 집에 전화를 했더니 이 양반이 어디로 갔는지 비서들도 모르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상도동 어른(YS)이 직접 제게 전화를 해서는 '이미 3당 합당을 결정했는데 나 혼자 가서는 일을 할 수 없다. 최형우가 안 들어오면 나도 할 수 없다. 부인이 들어와서 직접 설득을 하라'고 해요. 그래서 귀국해서 수소문을 했더니 강원도로 갔다고 해요. 제가 강원도로 찾아가 '상도동과 결별하든지 혼자 싸워 나가든지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파악해도 혼자 남아 싸워봤자 아무 것도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게 정치를 그만두라는 뜻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그 동안 너무나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정치를 안 한다고 각서를 쓰라'고 했어요. YS와 함께 하지 않으려면 명분이 있어야 했는데 그 명분으로 정치를 안 한다는 것을 내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양반은 3일 간 고민을 했어요. 상도동에서는 계속 전화가 오고…. 그러다 일단은 서울에 가서 상세히 알아보자고 결정했고 상도동을 찾았는데 YS가 이 양반을 붙들고 '너 없으면 안 된다. 그럼 내가 다시 물리까'라면서 설득을 했어요. YS가 막판에는 '니, 진짜 내 놔두고 그럴끼가'라고 했어요. 그 말에 이 양반은 마음이 약해졌죠."
민산 통해 군정종식 이뤄…제도적 민주화 밑거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에 들어간 최형우는 ‘YS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후보 YS'를 얻어내기까지 정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 때가 정무장관이었는데 박철언 김영일 등 노태우 대통령 직계 인사와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나중에 그 쪽에서 감동을 받아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최 장관이 말하는 방향이 맞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그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하루는 박태준, 하루는 박철언, 하루는 김영삼, 이런 식으로 왔다 갔다 했습니다. 박철언 전 의원을 만나서 '역사가 거꾸로 가서는 안 되지 않나. 박 의원, 이번에 YS가 대통령을 하고 난 다음에 당신이 대통령 하려고 하면 내가 꼭 밀어줄게' 이렇게 얘기했는데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그리고 내가 노 전 대통령에게는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십시오. 그게 순리입니다. YS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거나 나중에 보호 못 받을 것이라고는 걱정마라. 그건 내가 육탄으로 보호하겠습니다. 그러니 대의를 따라서 김영삼에게 후보를 주세요' 이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이 '부럽다. 전두환에게는 장세동이 있고 김영삼에게는 최형우가 있는데 자기는 그렇게 해줄 사람이 없다'고 탄식했다고 해요. 그때 노태우 대통령이 내 손을 잡고 '최 의원만 믿는다'고 했고 그래서 의형제까지 맺었어요."
-하지만 YS 집권후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부분은 노 전 대통령에게 항상 미안합니다. 결국은 노 전 대통령이 감옥에 갔는데 솔직히 그건 역사적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그쪽에서는 내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막으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다가 하다가 결국은 안 된 것입니다. 지금도 정무장관들 모임을 갖는데 박철언 전 의원이 '슬롯머신' 사건 때문에 한 동안 안 나왔다가 왔는데, 나왔을 때 모임 장소에서 한참 내려와서는 저희가 탄 차 문을 직접 열어주면서 예의를 갖추더라고요. '우리나라에 이런 대정객이 없다'면서…. 그래서 옆에 있던 부인이 '최 전 장관이 쓰러지기 전에 그 문제 때문에 정말 고심하고 마음에 부담 가졌다. 그러나 역사적 문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 점을 노 전 대통령에게 꼭 전해달라. 직접 만나 얘기도 못 하니까'하고 말했더니 박 전 의원이 '충분히 이해한다'고 답했습니다."
이야기를 1997년 3월로 돌렸다. 그해 3월 뇌졸중으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최 전 장관이 대통령이 됐거나 최소한 이회창이 여당 후보가 안 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아직 정치권에서 들린다. 이에 대해 들어봤다.
"YS가 '절대로 돈에 연연하지 마라'고 했어요. 사실 상도동 어른은 돈에는 정말 초연한 분이었는데 나한테도 '그래야 한다'고 했어요. 솔직히 '나를 밀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민정계가 어른을 둘러싸고 있었고 우리 쪽 민주계에서도 소위 '청와대 7인방'이라고 불린 이원종 김무성 강삼재 등이 '과연 최형우가 후보가 되면 민정계가 따라올 것인가'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민정계 김윤환과 얘기가 됐습니다. 김윤환 의원이 'YS에게만 받아만 내라. 그러면 우리가 밀게'라고 했어요."
19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전을 앞두고 최형우 이인제 이한동 최병렬 김덕룡 이회창 박찬종 이수성 이홍구 등 이른바 ‘9룡’을 형성하며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들 중 최형우는 당 내 자파 대의원 중 3분의 2 이상 지지를 이끌어내며 가장 앞서 나갔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YS가 최형우의 대선출마를 주저앉히려고 한다. 이를 위해 이원종 정무수석이 최형우를 만나 담판을 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때문에 가장 주목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형우는 힘들다’는 얘기가 회자됐다. 필자는 ‘부산에서 YS 쪽지를 받고 힘들어했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하자, 원 여사가 말을 받아 상세히 설명했다.
"그 때 이 양반이 북경대학 강의를 했었는데 북경대학이 부산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었어요. 그래서 북경대학 교수들이 부산에 내려와서 저녁에 회식을 하는데 여기에 이 양반도 참석했어요. 회식 중에 김무성 의원이 급한 일이라고 쪽지를 전해줬는데 그 쪽지를 보더니 안색이 안 좋아졌다고 합니다. 당시 수행비서에 따르면, 최 전 장관이 내려와 화장실에 갔는데 한참이 지나도 안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비서가 들어가보니 이 양반이 화장실에 서 있는데 아주 안색이 안 좋더라고 해요. 그 쪽지에 '후보는 나중에 생각해 보고 일단 당의 대표를 맡아서 당을 추스리고 나중에 어떻게…'라는 식으로 적혀 있었나 봐요. 이 양반은 김무성 의원에게 '이게 대통령 뜻인가. 현철이 생각인가'하고 물었대요. 그러니 김무성 의원이 어떻게 대답을 했겠습니까. 그냥 어른 뜻이라고 했겠지요. 어른 뜻이라고 하니, 그 때부터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일이면 자기를 불러서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너무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 여사는 최 전 장관이 뇌졸중로 쓰러지기 전까지의 일들을 소상히 전했다.
"그날 저녁에 고향에 올라갔습니다. 이 양반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고향에 가는데, 고향에서 팔이 저리고 해서 밤새도록 주무르고 했습니다. 그렇게 날이 새고 그 다음날 국회에서 법안 통과가 있어서 서울로 올라간 뒤에 집에 밤 12시가 넘어서 왔는데 기자들이 집에 진을 치고 있었어요. 하지만 너무 안색이 안 좋아서 제가 '빨리 기자들 보내고 쉬어야 한다. 큰일 난다'고 했고 그래서 이 양반이 기자들에게 '내가 너무 몸이 안 좋다. 쉬어야 겠다'고 말한 뒤 밤에 들어가서 쉬었는데 제가 걱정이 돼서 지압하는 사람을 불러서 주무르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김덕룡 서석재 두 분과 조찬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저는 7시에 비행기로 대구에 갔습니다. 그러다 9시가 되니까 제게 전화가 왔어요. 최 장관이 쓰러졌다고…. 서울대 병원으로 가니 의식은 있는데 입에 뭘 물려놓고 있더라고요. 너무 입을 꽉 다무니까…. 그 때 쓰러지기 직전에 테이블에 있는 컵을 잡으려다가 못 잡고 쏟은 다음에 벽에 기대었다고 해요. 김덕룡 서석재 두 분이 막 주무르고 했는데 옆으로 쓰러졌다고 해요. 이미 그 전날부터 뇌졸중이 온 것 같습니다."
당시가 폭풍처럼 다가오는 듯싶다. 최 전 장관은 소리 내 울었고, 원 여사의 말은 빨라졌다.
"이 양반과 YS가 정말 힘들게 정치적 역경을 헤쳐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중대한 결정을 하는데 본인을 불러야 하는데 안 그래서 화가 났고 또, 이건 누구 장난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이 올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지적 관계가 아닙니까. 동지들끼리는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게 잘못된 겁니까?"
“뇌졸중으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대권도전 했을 것”
그러면서 당시 최 전 장관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대선에 도전했을 것임을 비쳤다.
"만약 어른이 못 도와줄 경우에는 투표를 통해서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130여 명의 의원들을 관리했습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어른이 흔들리니까…."
원 여사는 최 전 장관이 받은 뇌 수술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최 전 장관이 쓰러진 다음에 지인들의 소개로 뇌 사진을 독일 마인쯔 대학 병원에 보냈더니 그 쪽에서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서울대 병원에서는 못 가게 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큰일날 수 있다고요. 그래도 제가 책임진다면서 갔습니다. 마인쯔 대학 병원에서 이 양반이 검사를 받고 있는 도중에 한국인 간호사가 쫓아 나와서는 '사모님 너무 잘못됐습니다. 아까운 분을 왜 이렇게 했나요. 목 쪽 경동맥이 막혔을 때는 고여있는 피를 빼고 플라스틱 관을 끼우면 뇌경색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했나요. 왜 여기가 찢어졌는데 왜 뇌수술을 했나요. 머리 안은 멀쩡한데…'라고 해요. 제가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습니다. 마인쯔 대학 병원에서 최 전 장관에 대한 마지막 '디스커션'을 했는데 어느 한 명이 단독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여러 의사들의 의견을 종합해 '혈관 박리로 그 사이로 피가 고였다'고 결정했습니다. 제가 '어떤 경우에 경동맥이 찢어질 수 있나'라고 묻자 '고속도로에서 급정거를 하거나 교통사고가 났을 때, 남자들이 골프를 칠 때 억지로 용을 쓸 때, 둔기로 두들겨 맞았을 때 경동맥 파열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해요. 그런데 이 양반은 교통사고가 난 적도 없고 골프를 친 일도 없잖아요. 그러고 보니 정보부에 12번 끌려가서 두들겨 맞은 게 원인이구나하는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일각에서는 원 여사에게 서울대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서울대 병원 의사들도 자기들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수술을 할 때는 뇌압이 이미 올라가서 뇌사가 될까봐 그렇게 했다고 해요. 사실 소송할 수 있는 시효가 5년인데 그 동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매일 기도를 했습니다. 결론은 참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국가와 민족을 위하다가 이렇게 됐는데 '마음을 비우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소송을 하면 서울대 병원은 문을 닫게 생겼잖아요. 그런데 이 양반은 병이 나서도 국민들에게 기여했습니다. 목 쪽 경동맥이 찢어져도 뇌졸중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됐어요. 그래서 요즘 종합검진할 때는 목 경동맥도 검사하잖아요."
그의 숨 가쁜 정치 얘기는 뒤로 하고 민주산악회에 대해 물어봤다.
-민산이 처음 만들어진 동기가 무엇입니까.
"정치규제에 묶여있을 때 너무 답답했어요. 그런데 우리 동네인 망원동 사람들이 산악회를 했는데, 최영오 사장이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 때 형사들도 우리에게는 우호적이었습니다. 담배 살 돈이 없어서 그 사람들에게 빌려서 피고 했어요. 그리고 제 부인은 광화문에서 12평짜리 음식백화점을 했는데 아무튼 산악회에 다녀오더니 가슴이 막 뛰고 기운이 솟더라고요. 그래서 김동영 장관에게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산악회를 만들자. 우리가 등산하는데 뭐라고 하겠나' 그래서 처음에 일곱 사람이 등산을 했습니다. 산에 가서는 절대 얘기를 안 했습니다. 형사들이 따라오니까요. 그냥 '대한민국 만세' 그것만 불렀어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아는 사람들끼리 연락이 돼서 20~30명 모였을 때 상도동 어른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른도 좋아했어요. 그런데 산에서는 암호로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모이는 것도 처음에는 김동영 장관 집에서 시작했지만 조금 지나서는 각 산 어느 지점에 모였고 그러다 50여 명 정도 모이게 됐을 때 상도동 어른이 참여했습니다."
최형우, 민산 3대회장 맡으며 회원 200만 명으로 불어
-민산 규모가 200만까지 확대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민주화에 대한 열망입니다. 군정종식과 민주화였습니다.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민주화, 군정종식을 위해 자기 돈 써 가면서 피나도록 했습니다. 그건 국민들이 알아줘야 합니다. YS 개인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건 절대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안 했습니다. YS가 대통령이 되면 군정종식을 하고 민주화를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6·29 전까지는 우리가 얼마나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까지는 독립운동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민산은 5공 시절 김영삼이 정치 규제에 묶여 있을 때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인 조직이었다. 하지만 3당 통합 후 청와대와 민정계의 견제로 30여 개 밖에 안되는 초라한 조직으로 전락해 있었다. 1992년 6월 16일 최형우는 이민우 김명륜의 뒤를 이어 3대 민산 회장을 맡았다.
최형우는 회장에 취임한 후 조직 보강에 착수했다. 최형우의 야심찬 계획에 힘입어 2개월여 만에 30개 지부가 300여 개 지부로 늘어났고, 회원도 200만 명에 달했다.
-민산이 그렇게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는데 YS는 집권 직후 민산 해체를 지시합니다. 서운하지 않았습니까.
"YS가 대통령이 되고 난 직후에 저희 부부와 김수한 부부, 김명륜 부부 등 원로들을 초청해 저녁식사를 했어요. 그 때 제 부인이 대통령께 겁도 없이 부탁을 했습니다. 민산을 국민운동본부나 환경보호단체로 만들자고…. 그리고 '이 조직을 절대 해체해서는 안 된다. 이 사람들을 활용해야 한다'고도 했어요. 그랬더니 현철 씨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고 대통령도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지 닷새 만에 저를 불러서 민산을 해체하라고 하니 암담했지요. 서울지부에 다 모아놓고 그 뜻을 누누이 설명했지만 회원들이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해체에 대해 설명했지만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YS가 민산 회원들은 청와대에 초청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민정계가 어른한테 절대 개인 사조직을 가지면 안 된다면서 해체하라고 했다고 해요. 기득권 세력들이 그 말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원 여사는 YS가 민산 회원들을 청와대에 초청하지 않은 것에 섭섭한 나머지 그 부인들이라도 초청해야 한다고 손명순 여사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제가 손 여사에게 제안을 했더니 '초청하세요'라고 했어요. 손 여사가 제 얘기를 듣더니 '당신 말이 맞다'면서 그렇게 했어요. 손 여사가 과감할 때는 과감합니다. 야당 기질이 YS보다 더 많습니다. 저와 뜻이 잘 맞았습니다. 최 전 장관이 손 여사에게 '무공해 부인'이라는 별명을 붙였어요. 정말 순수하고 욕심이 없다고…. 손 여사는 정말 사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92년 대선을 앞두고 민산 활동은 어떠했나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성공한 것은 새마을운동 때문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걸 밑바탕으로 바르게살기운동 등을 이끌었잖아요. 그런데 이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전부 여당권에 있는 사람들이어서 우리에게 협조를 반밖에 안 했습니다. 그래서 YS가 후보가 된 이후에는 우리가 각 지방에 내려가서 이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자신들과 관계된 자생 조직들을 모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들의 힘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민산 조직을 앞장세우지 않고 그 사람들을 앞세웠습니다. 그런 방법을 제 부인이 제안했습니다. 때문에 민산은 앞장서지 못하고 뒤에서 일했습니다. 민산 회원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참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YS가 집권한 이후에 생색은 그 사람들이 내고 민산은 뒷전이었습니다. 일은 민산이 다 했는데…. 그래서 제가 민산에 대해 마음의 짐을 갖게 됐습니다."
최 전 장관은 YS가 정권 재창출을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민산 해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그럴 수도 있다"고 수긍했다.
-YS와의 산행 중에 있었던 일화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산에 올라가서 식사를 하면 각자가 반찬을 내놓는데 그러면 '뷔페'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YS가 식사를 하는데 혼자서만 먹고 옆 사람들에게 먹어보라는 말을 안 합니다. 그래서 내가 '총재님, 옆에 사람들에게도 먹어보라고 하소'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YS가 그냥 '허~허~허'하고 웃어요. 그 다음 번 산행에 YS가 무슨 불고기 해 와가지고는 '내가 최형우에게 한 방 먹었다'면서 나눠먹으라고 합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원 여사는 “그런데 이 사람은 윗사람에게는 할 소리는 하지만 아래 사람에게는 그렇게 못한다. 아래 사람들에게 다 나눠준다. 나는 애 돌도 못 치렀다. 민산 행사에 돌 자금도 다 썼다. 세비 받아본 적도 없다. 제가 부업해서 살았다. 돈이 생기면 내가 못 보게 고무줄로 묶어서 신발 속에 감추고 들어올 정도다. 10원 한 장도 안 줬다. '이건 공금'이라면서…"라고 거들었다.
최 전 장관은 돈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동지들을 불러서 나눠준 것으로 유명하다. 또 "돈은 돌아야 돈이다. 순환이 돼야 한다. 기업하는 사람들도 환원해야 한다"고 자주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생각이 반영된 일화도 들을 수 있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서울대 병원에서 암 환자가 점점 느는데 암 연구센터가 없다면서 박재갑 교수를 최 전 장관에게 보내 부탁을 했어요. '우리 대학병원에 암센터가 없는데 국가 예산을 뺄 수가 없으니 도와줄 수 없느냐'면서요. 최 전 장관이 '얼마가 드느냐'고 물으니 '한 3백억 원이 든다'고 했어요다. 이 양반으로서도 너무 큰 숙제여서 '한번 연구해보자'고 말한 뒤에 LG 구본무 회장을 찾아가 부탁을 했는데, 구본무 회장이 회장직을 맡은 지 얼마 안 된 상황이라서 '좀 정리가 된 다음에 한번 해 보겠다'고 말했다고 해요. 하지만 이 양반은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해서 삼성 이건희 회장을 찾아가 '문민정부는 절대로 정치자금은 받지 않는다. 그것이 정치철학이다. 그런데 삼성이 할 일이 있다. 사회 환원을 해야 한다. 서울대 병원에 암센터를 세워줬으면 좋겠다. 만약 삼성이 삼성의료원에 암센터를 먼저 세우면 국민들 눈에도 별로 보기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서울대 병원에 먼저 암센터를 세워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건희 회장이 이 양반한테 '그렇게 경영마인드가 있는지 몰랐다. 깜짝 놀랐다'면서 '기꺼이 하겠다'고 했어요. 최 전 장관은 솔직히 액수가 너무 커서 미안해했는데 이 회장이 기꺼이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대 병원은 3백억 원을 가지고 어떻게 할지를 몰라 했는데 그래서 삼성건설이 직접 나서서 건물을 지어줬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 이건희 회장 흉상을 하나 세워줬고, 이 사람이 공로자라고 해서 연구실 이름 하나를 '온산 홀'이라고 했습니다."
YS 퇴임 후, 최형우 자택 방문해 “자네 말이 맞더라”
-그런데 과거 원 여사와 관련해 '명동 큰손'이라는 소문이 난 적이 있었는데요.
"비자금을 갖고 있고 제가 '명동 큰손'이라는 소문이 났다. 그런데 솔직히 누구 말대로 단돈 1억 원이라도 비자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하도 황당해서 그 때 기자회견 한다고 했습니다. 기자회견 할 테니 나한테 돈 빌리러 오라고 말하려고 했어요. 사실 그 때 이 양반이 대통령 후보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는데 제가 갖고 있는 밑천이 3억이었는데 야금야금 이 양반이 다 빼갔습니다. 마지막에 1억 남은 건 안경률 씨가 관리하면서 130명 의원들 지역구 행사 등에 다 썼습니다. 그러다가 이 양반이 열흘 만에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한 번은 부르도자(중장비) 사업을 했습니다. 그 분야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포크레인'과 '쇼벨'을 샀습니다. 이걸 이용하면 애들 공부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요. 한 대는 돈을 주고 사고 다른 하나는 외상으로 샀습니다. 제가 전국의 공사판은 다 돌아다녔습니다. 이 양반이 정치인이고 하니까 겉으로 보면 뭔가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질문을 최 전 장관에게 돌렸다.
-민산 운영과 관련한 자금은 어떻게 조달했나요.
"그 때 당으로부터 돈 십 원도 못 받아서 저희가 기업하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습니다. 그리고 각 지방에 있는 민주산악회 회원들은 전부 자기 돈 쓰면서 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92년 대선 당시에 YS에게 3천억 원을 줬다고 하는데요.
"YS가 후보 되고 3천억 준 것은 YS 개인에게 준 게 아닙니다. 줬더라도 당에다 줬겠지요.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 3천억 원을 줬다는 게 말이 됩니까?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산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민주산악회는 민주화의 원동력이었으며 제도적 민주화를 이룬 밑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민산이 그냥 허술하게 운영된 게 아닙니다. 정말 조직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냥 가입만 하면 회원이 되는 게 아니라 철저히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런 교육을 통해 '우리도 민주화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우리는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YS계가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DJ의 경우는 무슨 센터니 도서관이니 해서 뭐 남아있는데 YS의 경우는 아무 것도 없으니까 안 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YS 시절에 부동산실명제, 금융실명제 등을 안 했다면 비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걸 해도 비리가 생기는 판인데…. 만약 금융실명제나 부동산실명제를 안 했다면 부정한 돈을 절대 못 찾아냅니다. 금융실명제는 목숨을 걸고 한 것입니다. 기득권 세력들이 죽도록 막았지만 시행했습니다. 문민정부는 민주화 세력들이 피땀 흘려가며 수립했고 이것을 발판으로 금융실명제 등 '제도적 민주화'를 확립했습니다.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이 세 개만 해도 역사를 바꾼 업적 아닌가요. 그런데 왜 이걸 평가를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만날 IMF를 가지고 욕하는데 그건 이미 그 전 정권의 잘못으로 오게 된 게 아닙니까. 정말 우리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민주화 세력의 진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날 원 여사는 YS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1998년 10월 어느 날 최 전 장관 집으로 찾아온 얘기를 들려줬다. 그렇게 인터뷰는 마무리됐다.
"YS와 최 장관이 붙들어 안고 서로 울었습니다. 그 때 제가 좀 싫은 소리를 했어요. 그랬더니 어른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할 말이 없다. 청와대가 참 희한한 곳이다. 나는 국수 먹으면서 정말 잘하려고 했는데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어두워지고 판단도 어두워지더라'고 해요.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다 잘 된다고 하던데 최형우만 청와대에 들어와서 소리를 지르면서 안 된다고 해서 내가 좀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내놓고 보니 최형우 말이 맞더라'고 했어요. 그 말씀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는 또 "옛날에는 지금처럼 니편 내편 갈라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