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조작 사건을 알리기까지
4‧19혁명부터 거슬러 조명한 역사저널리스트의 회고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김병묵 기자]
민주화를 이룩한 수많은 별들 중
당신도 별이었다.
고생 참 많이 했다.
이 말을 해주고 싶다.
6월 항쟁의 주역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前열린우리당 의장). 그는 감옥 안에서 세계적 특종을 써냈다. 故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조작 사건을 세상 밖으로 알린 장본인이다. 영화 <1987>에서도 투쟁기를 엿볼 수 있다. 언론인이자 재야운동가, 정치인의 삶을 살았다. 그는 현직 이사장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하지만 편의상 이부영이라고 한다.
지난 6일 서울 서대문 작업실. 작심하고 이부영은 역사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 갔다. 4‧19혁명 후 유신 시대 짧았던 대학가의 푸른빛으로, 풍랑을 헤집고 87년 6월 항쟁 속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의 이부영을 만났다.
1. 6‧3세대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광복이 될 때는 그의 나이 3살. 초중고 시절 영등포 당산동에서 자랐다. 당산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거쳐 한국 전쟁이 종전되고 용산 중고를 다닐 무렵이었다. 1960년 4‧19 혁명을 맞았다.
- 원래는 서울대 공대를 가려다 친구가 총에 맞아 숨진 것을 계기로 정치학과로 진로를 변경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기까지 어떤 내적 변화를 거친 건지요.
“50년대는 곤궁하고 배고픈 시절이었어요. 영등포구 당산동 동급생 친구들끼리 책 읽는 동아리 모임이 있었어요. 당시는 농촌 사회였어요. 안양천 내려오는 당산동부터 양평동, 여의도까지 농사를 많이 지었죠. 친구들끼리 농민들의 힘든 노동을 보면서 ‘공과대학 기계과를 가자’, ‘농기계를 개선해서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게 하자’는 생각이었어요. 심훈이나 박계주의 농촌 계몽소설이 굉장히 많은 때였죠. 고등학교 3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났어요. 내 가까운 친구가, 이한수였는데 데모에 나갔다가 총에 맞아 숨지고 말았죠. 굉장한 충격에 빠졌어요. 부끄럽게 하고…. 서울대 기계과를 같이 가자고 약속했던 두 친구는 그대로 입학했지만 나는 (1961년) 서울대 정치학과로 방향을 틀었어요. ‘학생을 막 죽이고 하는 이 정치가 대체 뭐냐’ 새롭게 눈을 뜬 거였죠.”
한 동네에서 별안간 세 명이 서울대에 입학했다. 조그만 마을로서는 발칵 뒤집힐만한 경사였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61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5‧16을 맞기 직전 두세 달 동안을 두고 그는 ‘푸른 빛’으로 기억하는 듯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4‧19의 푸른 분위기를 열심히 맞볼 수 있었죠...”
- 학생운동을 본격적으로 한 건가요?
“학생운동이 조직화된 때는 아니었어요. 본격적으로는 유신 때부터였을 거예요. (사이) 나는 학생운동을 했지만 부끄러움을 많이 탔어요. 뒤에서 책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서 활동했죠. 4‧19혁명이 막 지난 때라 고등학교 때부터 '난다, 긴다하는' 드센 친구들이 많이 몰려왔어요. 우리 동기들 중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엄청 나왔거든요. 정치학과에 마흔두 명이 들어왔는데 열여섯 명이 감옥 생이 될 정도였죠.”
- 그 세대는 비극이었네요.
“6‧3세대라고 하죠. 일종의 학생운동 세례를 받고 학교생활을 시작한 세대.”
64년 6월 3일 대학가에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에 반대한 학생들의 시위로 격렬하게 번져나갔다. 이부영은 군대에 있었다. 충격이었던 게 가자마자 시위가 격화된 것이다. 친구들이 무더기로 감옥에 가는 것을 무력하게 전해들어야했던 것이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그로선 현장에 빠져 있던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너무나 컸다. 제대하면 감옥살이 나온 친구들을 뒷바라지해야지 한다는 생각이었다.
2. 자유언론실천
신문사도 그런 각오로 들어간 듯 보였다. 동아일보는 1968년 입사했다. 6‧3 운동을 경험한 61, 62, 63학번들이 많았다. 동료들끼리는 분위기가 좋았지만 사회적으로는 먹구름이 더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67년 부정 선거를 통해 개헌 가능선인 3분의 2 이상을 얻은 박 정권은 여당의 단독 처리로 3선 개헌을 강행했다. 69년 6차 개헌을 통해 연임 금지 조항을 삭제하고 3선 연임을 허용한 것이다.
“그것이 박 정권이 계획한 영구집권으로 가는 출발선이었어요. 제일 먼저 필요한 게 뭐겠어. 언론계를 장악하는 거였죠.”
- 예를 들면 어떤 방식이었나요.
“연탄 파동이 날 때였어요.”
배경부터 설명에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봉천동, 신림동은 달동네였어요. 미국서 원조 들여온 안남미(베트남쌀) 먹고, 연탄 땔 때죠. 지게를 지고 올라가거든요. 산비탈이다 보니 평지보다 연탄 값이 세배쯤 비싼 거예요. 겨울이 되면 반드시 연탄 파동이 났어요. 공급업자들이 강원도 도계니 이런 데서 연탄을 실어 와야 공장에서 찍잖아요. 의도적으로 내놓지 않는 거예요. 자연히 품귀현상이 일어나 값이 올라가는 거였죠. 평지에선 그래도 어찌어찌 구입하는데, 달동네에선 4~5배나 올라있는 거예요. 제대로 불도 못 때고 밥도 못 먹고…. 젊은 기자들이 돌아다니다 그걸 보면 눈이 뒤집힐 거 아니에요. ‘연탄 품귀, 공급 안 돼’, ‘도대체 무슨 일이냐.’ 기사로 쓴단 말이죠. 그러면 중앙정보부에서 잡아가는 거예요. 민심이 선동되고 폭동이 일어난다는 거죠.”
- 선동했다는 명목으로 구속시킨 건가요?
“구속은 안 시키죠. 매만 때려서 내보내고 발바닥 때려서 내보던 시절이었죠. 이놈들이 제일 말단, 정의감이 강한 사회부 경찰기자부터 손대는 거예요. ‘누가 갔다 와서 두드려 맞고 나왔다.’ 그러면 소문이 서울시내 기자들한테 쫙 퍼지는 거죠. 제일 젊은 기자들부터 기를 죽여 놓는 거예요.”
- 무슨 명분으로 선동을 한다고 그쪽(박 정권)에서는 그러는 건가요.
“우리가 아무리 사실 보도해도 본인들이 선동이라면 선동인 거예요. ‘어려운 사람들이 연탄을 제대로 못 구한다’고 할 뿐인데, ‘빈민들을 공산주의 사상으로 선동한다’고 하는 거죠. 물가가 인상돼도 신문 제목에 인상이라는 말을 못 써요. ‘상향 조정’ 이런 식으로 써야 돼요. 대학가에 데모가 일어나면 이거 완전 암호해독이야. ‘대학 사태 발생’ 이런 식으로 써야 되죠. DJ가 일본에서 (박 정권에 의해) 납치돼도 ‘모 인사 돌연 귀국’ 이런 식으로 달게 하는 거예요.”
중정 요원들의 검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서히 신문사 편집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거예요. 71년 대선이 있었거든요. 박정희와 DJ(김대중)가 붙을 땐데 동아일보가 주목의 대상이었어요.”
- 왜요?
“동아일보가 대놓고 DJ를 지지했으니까요. 한 번은 장충단 공원에서 둘이 연설을 하는데 누가 더 청중이 많이 모였나로 싸움이 붙은 거예요. 동아일보가 ‘똑같다’고 했단 말이지. 그것 때문에 편집국장이 주영특파원으로 갔어요. 영국서 특파원이 필요한 때도 아닌데 한직으로 내쫓긴 거예요.”
71년 4월 27일 7대 대선을 거머쥔 박 정권은 노골적으로 유신 체제로 진입했다.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72년)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뒤 간접 선거 방식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대상으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72년 12월 23일 유신 헌법에 의한 8대 대통령 직에 오르며 장기집권을 본격화했다.
“이북에서 투표하는 것처럼 99% 나오고 그랬어요. 우리 같은 젊은 기자들 입장에선 앞으로 언론을 계속해야할 지 막막했지요. 기사 써도 관보 같은 것밖에 더 되겠냐. 떠나든지 하자는 심정이었죠. 일본에서 자금이 들어오던 때라, 재벌기업에서 한창 많이 뽑을 때에요. 그리 가기도 하고…. 박 정권에선 유능한 신문기자들을 뽑아 정부 대변인으로 쓰고, 이도 저도 아니면 누구는 유학가고….”
영구집권 움직임에 많이들 자포자기 심정이 된 거였다.
“그때 유정회(유신정우회)란 게 생겼어요. 유정회가 뭔지 알아요?”
- 아 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한 거예요. 요새는 비례대표라고 하는데, 처음 만들어질 땐 유신헌법에 의해서였죠.”
유정회는 대통령이 뽑은 의원들이 설립한 단체였다. 73년 만들어져 80년 해체되기까지 박 정권을 지지하고 대변하는 데 목적을 뒀다.
“명색이 국민을 대표할 국회의원인데 저런 방식으로 뽑다니…. 더 좌절해 언론계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멀어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면, 이부영은 그 반대였다.
“우리가 지켜내 보자. 죽으나 사나 지켜내 보자. 죽을 걸 각오 하고 준비를 했죠.”
본격적인 싸움의 서막이 열린 거였다. 이부영은 74년 3월 동아일보 내 자유언론투쟁위(동아 노조)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정부 수립 후 처음 생긴 언론노조였다.
- 동아 노조에서 자유언론 선언을 실천하게 되잖아요?
“그날이 10월 24일. 유엔 데이였어요. 생소하겠지만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이 유엔 덕분에 나라로 인정받았다고 해서 창립일을 공휴일로 기념했어요. 쉬는 날이니 기자들이 출입처를 갈 일이 없잖아요. 그 틈을 타서 자유언론실천을 발표한 거예요. 말로만 끝내지 않겠다. 실천하겠다.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유신독재에 정면 대항하겠다. 그걸 선언한 거예요.”
- 직접적 계기는 뭐였나요.
“74년 4월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이 발생해요. 무더기로 구속하고 고문하고 감옥에 보내고 사형을 내린 조작 사건. 두 사건에 대해서는 들어봤지요? 벌써 46년 얘기네요.”
민청학련을 중심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박 정권은 국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하려 했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재판에 넘긴다. 또 그 배후로 인혁당을 지목해 일부에 사형을 집행했다. 유신정권 하의 대표적 반인권 사례였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노조는 그간 진행한 몇 번의 자유언론 선언의 수준을 넘어 실천의 영역으로 투쟁을 확장하게 된다.
단 1단도 보도되지 않았던 대학생들의 데모나 시국사건 등이 그때부터 보도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에 대한 국민 지지와 성원은 엄청났지만 눈엣가시로 여긴 박 정권에서는 광고를 끊어내는 것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백지광고 사태였다.
“74년 12월 하순부터 완전히 동아일보 광고가 백판이 돼버린 거죠. 그런데 거기에 조그맣게 ‘동아야 버텨’ 이런 광고가 실린 거예요. 이대생이 ‘동아야 너마저 꺾이면 난 이민 갈 거야’라고 한 거죠. 시민들이 그걸 보고 화약처럼 일어난 거예요. 촛불 혁명 같은 게 일어난 거죠.”
순식간에 격려 광고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신의 부당성을 알리는 내용들이 줄을 이었다.
“그때 생긴 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었요. 그분들이 낸 게 광고전면에 자신들의 의견을 담은 ‘암흑 속의 횃불’이었죠.”
보다 못한 박 정권이 동아일보 사주를 압박해 비밀 협정을 맺고 기자들 해임을 종용했다. 이에 반발하자 75년 3월 폭력배까지 동원해 언론인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동아에서는 134명이, 조선일보에서는 32명이 쫓겨난 것이다. 이부영도 가만있지 않았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를 조직했다. 해직에 맞선 것이다. 훗날 이 투쟁위는 80년대 창간된 <말>지와 <한겨레신문>의 모태가 된다. 초창기 이부영은 투쟁위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출범 3개월 만에 성유보 당시 동아투위 위원장과 함께 체포되고 만다.
- 정권에서 체포 구실로 삼은 것은 무엇이었나요.
“저녁에 막걸리 먹다 보면 이런저런 얘기하다 서울대 서클 했던 활동도 돌아보고 할 거 아니에요. 그런 것까지 어떻게 캐서는 국가보안법, 반공법, 긴급조치로 죄다 엮는 거예요. 김상엽 전 고려대 총장이 쓴 <모택동 사상>부터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에 펴낸 버트람 울프의 <레닌에서 흐루시쵸프까지>라는 책이 있어요. 정치학과 나온 사람들인데 하나씩 갖고 있을 거 아니에요. 합법적으로 발간되는 것들인데 그걸 꼬투리 삼아 뒤집어씌우는 거였죠.”
국가 전복이 목적인 단체를 결성하려 했다는 이유로 잡아들인 일명 청우회 사건이었다. 순간 이부영이 주위를 둘러봤다. 인터뷰가 이뤄지던 사무실 벽면으로 책이 가득했다.
“그 기준으로 이방에 있는 책들을 보면 사회주의 혁명하려 한다며 다 공산주의 서적으로 몰리겠지요.(웃음)”
재판에 넘겨진 이부영은 도합 18년 구형에 9년 선고를 받았다.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무죄로 결론 났지만 억울하게 옥살이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3. 오, 장준하
화제를 돌렸다.
- 투옥되던 해(75년)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접하고 감옥에서 추도제를 지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인연이 있는 건지요.
“우리가 많이 따르던 분이었어요. 장 선생은 계훈제‧백기완 선생, 이런 분들과 백범사상연구소라는 걸 만들었지요. 백범은 남북 협상을 주도한 분이지만 임시정부를 지켜낸 우익인사였어요. 장 선생도 광복군 출신에 백범의 비서였어요. 박정희 입장에서 좌익으로 몰 수만은 없는 그런 묘한 게 있었죠. 한국 사회에서 좌익으로 몰리지 않는 마지노선 같은 분이었어요. 그러면서도 민족자주, 개혁운동 같은 걸 주장한 분이어서 젊고 뜻있는 사람들이 많이 몰렸지요.”
이부영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동아일보 입사 전 장 선생 밑에서 사숙하는 시간을 거쳤다. 아내 손수향 여사도 장 선생을 통해 연을 맺었다. 손 여사는 장 선생의 비서 출신이었다. 73년 두 사람이 결혼하자 장 선생이 대부가 돼줬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 돌연사한 소식에 충격이 컸겠네요.
“75년 8월 20일 경이었을 거예요. 영등포교도소에 있는데 우리 집사람이 면회를 왔어요. 처음엔 말을 못 하고 울기만 하더라고. 왜 그러느냐. 장 선생이 3일 전(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 등산 갔다가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순간 직감을 했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그 시기에 왜 산에 가셨는가.”
추락사로 보도됐지만, 군정에 의한 타살 의혹은 끊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장마에 쓸려 무언의 말을 하듯 장 선생의 유골이 발견됐다. 두개골 함몰을 둘러싸고 타살 가능성이 더욱 짙어졌지만 여전히 의문사로 남아있다.
“교도소 안에서나마 제사상을 차렸어요. 뜻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하며 제를 지낸 거죠.”
4. 75년의 의미
다른 방이었지만, 박원순 서울시장도 같은 교도소에 있었다고 한다. 만 스무 살이 안 되는 미결수들끼리 20~30명씩 모아두는 방이 있는데, 그 틈에 끼어있었다.
“서울대 민주동지회의 정병진도 거기 있었죠. 박원순 경우는 서울대 입학한 지 2~3개월 만에 75년 오둘둘 사건에 연루돼 붙잡혀 온 거더라고요.”
75년 4월 서울대 김상진 열사가 유신체제에 항거해 할복하면서 학생들의 시위는 거세졌다. 5월 22일 긴급조치9호가 발동되면서 추도제를 거행한 학생들을 연행해갔다. 오둘둘 사건이었다.
“요즘도 가끔 봐요. 두 사람을.”
뜸을 들이다
“75년이란 시점을 역사적으로 잘 분석을 해야 돼요.”
방점은 75년에 찍혔다.
“박정희는 정치적으로 74년에서 75년이 위기였어요. 그걸 베트남의 공산화로 벗어난 거예요.”
베트남전이 고착상태로 빠져들자 월남(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은 월맹(북베트남)과 73년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2년 만에 베트남은 공산화되고 만다. 미군이 철수하자 월맹이 다시금 전쟁을 일으켰고, 75년 4월 30일 월맹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박 정권으로서는 호재였다. 독재에 대한 국민적 반발이 거세지면서 위축될 무렵 전해진 월남의 항복은 대한민국이 공산화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박 정권은 국민 불안을 부추겼다. 민주화 시위를 탄압하고 공포 정치를 강화하는데 활용했다. 일부러 수감 중이던 민주화 운동가들을 풀어준 뒤 더 큰 덫을 놓아 조작 사건을 만들었다. 민청학련‧인혁당 사건부터 오둘둘 사건, 언론인 탄압 등이 전개된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었다.
“박정희의 권력 게임이라고 할까. 미국의 헨리 키신저가(당시 국가안보보좌관) 베트남에 대한 극비 비밀을 공짜로 줬을 리 없다고 생각해요. 정황상 포드 대통령 선거 자금을 꽤 많이 얻어갔을 거라고 봐요. 박정희는 그런 거래에 능한 사람이라고 보는 거죠. 이듬해 코리아 게이트가 터져요. 한국 사업가 박동선이 미 상하원에 돈을 뿌린 거예요. 그걸 조사한 게 <프레이저 보고서>에요. 외자도입 과정에서의 비자금 조성 방법과 이를 어디에 숨겼는지 등이 나와 있죠.”
5. 80년, 재야 운동으로의 삶
70년대 후반을 거쳐 80년대를 향해 갔다.
- 민주화 운동 기간 다섯 번의 투옥과 열두 번의 구류 과정을 겪었습니다. 너무 암울한 기간이었을 텐데 어떻게 견뎠나요.
“박정희가 죽고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죠. 웬걸 신군부가 들어오면서 더 깜깜해졌단 말이에요. 79년 10‧26 사태 터지고 신군부가 집권하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잡혀갔어요. 정확히는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 할 때였어요. 전두환 정권으로 넘어가기 직전이었죠. 지식인들이 주축이 돼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썼어요. 윤보선 선생 댁에서 외신 기자들을 불렀는데 나 하나만 콕 집어 구속시킨 거죠. 1년 반 징역을 살았는데 순화교육을 시키데요.”
일명 악명 높은 삼청교육 경험이었다. 80년 겨울 대구교도소에서였다. 혹독한 고문과도 같은 교육을 이수 받은 뒤에야 81년 2월 25일 전두환 취임식을 맞아 특별사면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날 마음을 굳혔죠. 이놈들이 있는 한 언론인으로 복귀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젠 내가 그놈들을 끌어내리는 직접투쟁에 나서야겠다.”
70년대가 이부영에게는 언론인으로서의 투쟁기였다면 80년대는 재야인사로서의 불가피한 삶이 주어진 시기였다. 언론인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군사독재는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민주주의나 언론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보다 더 열심히 자기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려고 그 세력도 똘똘 뭉쳐있었어요. 이 군사독재를 물리치지 않고서는 빨갱이로 몰리고, 언론인으로서 살아가기 어렵겠구나. 재야운동으로 들어간 계기가 됐죠.”
84, 85년은 재야 운동사에서도 중요한 해였다.
- 당시 어떤 활동을 했나요?
“민민협(민중민주운동협의회)을 결성했어요. 김승훈 신부, 김동환 목사와 내가 공동대표를 맡았죠. 천주교와 개신교, 재야계에서도 완전 전투적 청년활동가 중심으로만 하자는 게 민민협이었어요. 대중적이지 않다 보니 전두환이 마음먹고 공격하면 방어력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있었죠.”
그래서 만들어진 게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였다. 86년 6월 조직된 민민협이 활동가 중심이었다면, 그해 10월 태동한 국민회의는 장기표‧문익환‧이창복 등 지도자가 결합된 범대중적 단체였다. 두 조직은 이후 더 큰 폭발력을 지닌 단체로 거듭난다. 85년 9월 백기완‧계훈제 선생, 종교계, 문화예술학계, 작가 등이 총출동해 만든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출범시킨 것이다.
“그러기까지 85년 12대 총선이 중요한 기폭제가 됐어요. YS(김영삼)와 DJ(김대중)가 함께한 신민당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직선제 개헌 쟁취를 위해 민통련과 전략적 합의를 할 수 있었던 거죠. 재야와 야당 세력의 전략적 제휴. 그게 굉장히 중요한 기점이 돼줬어요.”
다만 “꼭 지적할 게 있다”며 다음의 말을 이었다.
“민통련을 만들 때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하고 개신교 쪽이 들어오질 않았어요. 명망가 중심보단 활동가 위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근데 그렇게 되면서 김근태(민청련 초대의장)가 고립이 됐단 말이에요. 남영동에서 채가서는 반 죽여 놓은 거예요. 다른 많은 운동가들에게 겁을 주려는 심산이었던 거지….”
회한이 흘렀다.
“(혼잣말처럼) 설득해서 고립이 되게끔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런 일은 없었어야 했어. 설득 못한 게 한이 돼. 그렇게 무서운 거야.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낚아채듯 데려가. 무시무시한 테러를 가해버린다고….”
83년 김근태‧유기홍 등 당시 청년들이 조직한 민청련은 85년 5월 광주 학살 정권 퇴진 운동을 벌이다 대대적 탄압을 받았다. 김근태 초대 의장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마저 받은 것이다. 당시 민청련 사무국장을 맡았던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의원은 지난해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김근태 선배는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는 거름 역할을 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고문 받은 것을 계기로 YS와 DJ부터 재야인사가 모두 참여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87년 6월 항쟁을 앞두고 발족될 수 있던 계기”를 줬다고 한 바 있다.
6. 6월 항쟁 속으로
5‧3 인천 항쟁 이야기를 시작으로 대화는 6월 항쟁을 향해 치달았다. YS와 DJ계가 이끈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86년으로 넘어오면서 재야와 학생운동을 아우르는 개헌을 위한 100만 서명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일부 강경파들은 급진 노선을 주장했다. 과격 시위의 5‧3 인천항쟁을 전개한 것이다.
“김문수가 그 안에 있었어요. 가장 해악을 끼쳤어. 지금은 극우지만 그때는 극좌 입장에서 해악을 끼친 거지.”
- 무슨 말인가요.
“우리는 직선제 개헌을 위해 反전두환 연합 투쟁을 벌이는데, 빨간 깃발을 든 김문수는 인천시내 한복판에서 노동자들 모아놓고 노동해방을 외쳤어요. 불똥은 개헌파들에게 튀었어요.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5‧3 항쟁의 배후로 민통련을 지목했어요. 빨갱이로 몰 구실을 얻은 거죠. 좌경 핵심 세력이라고 두들겨 잡아들였어요.”
대대적 탄압의 단초가 됐다는 지적이었다. 이는 86년 10월 건대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정청래가 건국대 학생회장인가 그랬죠. 학생들이 전국에서 집결했는데 헬리콥터로 최루액 뿌리고 적진을 포격하듯 진압했어요. 공안 사건 중 처음으로 구속된 학생 수만 1400명에 이르렀죠. ‘일망타진했다’며 남영동 일대는 만세를 부르며 유유자적했겠죠.”
하지만 복병이 나타났다. 이부영이었다. 민통련을 지원한 이유로 남영동 대공수사단에 체포되면서 역사는 바뀌게 된다. 감옥 안에서 故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은폐 조작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 당시 긴박했던 순간들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공개적으로는 이돈명 변호사 댁에 숨어 있다가 잡힌 것으로 됐지만 실은 다른 곳이었어요.”
- 어디였나요.
“고영구 변호사란 분의 집에 있다가 잡힌 거였거든요. 근데 이분 처가 위경련이고, 어머니는 고령이고 나 때문에 고 변호사까지 잡혀 들어가면 줄초상 나게 생겼더라고요. 하는 수없이 이 변호사한테 부탁했지요. 무슨 일 있으면 선생님 댁에 있다 잡힌 걸로 하자고 했더니 ‘자네들 마음대로 하게.’ 사람 좋은 영감님이었는데 나 때문에 구속돼가지고…. 그 겨울 엄청 추웠거든요. 고생을 많이 했어요.”
남영동은 이부영을 숨겨준 것을 구실 삼아 이 변호사까지 잡아갔다. 그는 로마 교황청 기구인 천주교 정의평화 한국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남영동으로서는 대어를 잡은 셈이었다. 실제로 이부영을 숨겨줬던 고 변호사로는 자기 대신 이 변이 잡혀가자 죄책감으로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 해 겨울 겨우내 집에 불을 때지 않고 살았대요. 가슴 아픈 얘기죠.”
7. 오묘한 신의 움직임
87년 1월 13일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인 박종철 학생이 남영동으로 끌려가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고통받다 하루 만인 14일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턱 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궤변으로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 당시 영등포 교도소에 있을 때 故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을 알렸는데요, 긴박했던 당시 상황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우리 친구들 사이엔 신의 오묘한 손이 움직였다고들 해요. 거기서 박종철군 고문한 친구들이 내가 있는 감옥에 온 거예요. 그곳은 일반 사동과 달리 담이 쳐져 있는 곳이었어요. 원래는 여자사동이었는데 공간을 비워 나를 가둬둔 거죠. 비밀 보안상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고문한 경찰관 두 명을 그쪽에다 넣은 거예요…. 한 사람은 조한경 경윈데 들어오는 날부터 찬송가만 계속 부르고 있고, 아랫사람인 강진규 경사는 계속 우는 거예요.”
이상하다 여겨 이부영은 교도관들에게 무슨 일이냐, 물었다. 감옥을 많이 드나드니 ‘형형’ 하면서 친해진 교도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박종철 일로 들어온 사람들인데 자기들만 구속돼 억울해 그런다’는 얘기였다. 영등포 보안계장하고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로부터는 ‘고문한 사람이 세 명 더 있는데 두 경찰들이 한 걸로 꼬리를 자르려 해 반항을 하고 있다”는 내막을 전해 들었다. 사람을 고문해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인데 은폐조작까지 하려 한다는 사실에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자세한 사람 이름 등을 추가 취재한 뒤 이를 바깥에 알릴 계획을 세웠다.
“한재동이라고 나하고 아주 가까운 교도관이 있었어요. 비번 날에는 데모하러 나가고 6월항쟁에도 참여하고. 우리와 오랜 세월을 같이하다 보니 (교도관들도) 다 그렇게 돼버렸어. 아주 헌신적인 운동가들이 된 거예요.”
6월 항쟁이 다가올 때까지 이처럼 교도관들마저 민주화를 바라는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누가 실제 고문 가담의 주범인지 등을 알아낸 이부영은 한 씨에게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을 폭로하는 쪽지를 건넸다.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는지는 그의 책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에서 잘 나와 있다.
“나와는 70년대의 서울구치소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던 사이인 한재동을 다른 교도관을 통해 불렀다. 그리고 이른 시일 안에 야간 당직 교대근무로 들어오도록 부탁했다. 이틀 뒤 한재동이 야간에 들어왔다. 그에게 대강의 사태를 이야기하고 심각성을 인식시켰다. 그는 나에게 볼펜심을 건넸고 나는 누런 갱지로 된 교도소 화장지에 전말을 적어 나갔다. “‘우촌(友村) 보게’로 시작되는 김정남에게 보내는 서신은 비둘기(비밀서신)를 통해 전달할 계획이었다. 장기표를 숨겨 줬다는 이유로 도피 생활을 하던 전직 교도관 전병용을 통해 역시 도피 중이던 김정남에게 전해질 것이었다. 그 뒤 추가 취재한 내용이 있어서 다시 한재동을 불렀더니 아직 이전의 비둘기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뒤 한재동이 다시 찾아왔다. 문제의 서신 3통을 동시에 전병용에게 전했는데 전병용이 김정남에게 전달한 뒤 이틀 뒤 체포됐다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서신 내용이 수사기관에 들어갔을 경우를 생각하자 식은땀이 저절로 났다. 서신 내용은 김정남이 정리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됐다. 광주항쟁 7주년 미사가 열린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김승훈 신부가 사제단 성명을 발표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 조작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사태로 전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여 6월에 접어들면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면서 6월 민주항쟁으로 발전했다.” - 이부영의 <다시 저 들판에서>중 일부 수정-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거죠.”
- 박종철 열사가 도화선이라고 보는 거죠?
“당연하죠.”
- 세계적 특종기사를 써내는데 있어서는 기자 정신이 톡톡히 발휘된 건가요.
“해직기자로서의 투철한 의식이 바탕에 있었죠. 고문 조작 사건을 국민들이 알면 정말 용서 못할 거다, 큰 파장이 올 거라 직감했지요. 하지만 잘 되리란 법이 없잖아요. 수사관들에 의해 역추적되면 난 여기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끌려가겠다, 두렵기도 했죠.”
- 폭로가 성공했다, 안 것은 언제인가요.
“5‧18 7주년 당일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성명 발표를 했지만 처음엔 잠잠했어요. 5월 20일 쯤 신문에 자그맣게 났나. 근데 2~3일 뒤부터 번지기 시작하더니 남영동 대북수사단장이 검찰조사를 받고, 내무장관이 바뀌고, 장세동 안기부장이 바뀌고, 내각이 바뀐 거예요. 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지고 6‧29 선언이 나오면서 전두환‧노태우가 직선제로 바꾸고…. 그 시기 나는 김천교도소로 이감됐어요. 며칠 있다 웬만한 정치범들은 다 석방됐지만 나랑 장기표, 김근태 등 몇 사람은 남겨뒀죠.”
-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짚어본다면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나요.
“60년 4월 혁명이 5‧16으로 무산된 뒤 수많은 민주항쟁이 벌어졌지만 6월 민주항쟁은 군사독재를 끝내는 마무리 항쟁이라는데 의미가 있어요. 눈여겨봐야 할게 세계사적 체제의 전환이 병진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독일 통일, 소련 해체, 공산권 해체, 중국 개방, 노태우 정권 때 진행됐던 남북대화 등 세계사적 변화들이 그 담에 터진 거죠.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것처럼 한국 안에서도 엄청난 변화가 와요.
(87년 13대 대선 후) 노태우의 민정당이 집권당이 됐지만 소수정당이 되고, 김대중당(평민당), 김영삼당(통일민주당), 김종필당(신민주공화당)이 야권을 형성하면서 여소야대 상황이 벌어진 거예요. 양김이 분열한 덕에 대통령이 됐을 뿐 도덕적 명분이 없던 노태우는 삼김과 유연한 협력관계를 가졌어요. 여야가 협력해서 올림픽도 잘 치르고 남북 기본합의서도 만들어 평화 공존하는 쪽으로 가고. 사회주의 나라로 기업들도 진출하고. 엄청난 경제를 이루는데 성공하고…. 여소야대 정국이 국정 운영에 도움을 주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됐죠.”
8. YS와 DJ
일련의 상황이 민정당 내 군부세력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계기도 체제 전환의 흐름과 맞물려 있었다.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되는 과정 등에 힌트를 얻어 북한도 체제 변화가 일어날 거다. 우리도 독일처럼 할 수 있다. 민정당 군부독재계 내부에서 자신감을 얻은 게 아닌가 싶어요. 그 계기로 민자당 3당 통합(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으로 나타났고 보수대통합으로 헤게모니를 쥐게 되죠. 물태우(당시 노태우 별명) 식으로 갔다간 정권을 뺏긴다는 생각에 YS와의 합당을 추진한 거예요. YS는 야권에선 자기가 맏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87체제 이후 88년 13대 총선에서는 DJ정당보다 의석도 줄고 2인자가 된 거예요. 그래서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는 명목으로 통합을 해버린 거예요. 노태우가 거대 민자당을 만들고 DJ를 호남에 가둬버려요. 민정계가 힘을 얻고 91년부터 다시 공안탄압이 시작된 거죠. 강경대 학생이 시위하다 백골단한테 맞아 죽는 일도 생기고….”
나비 효과라고, 이는 이부영이 정계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한때 <한겨레신문> 창간을 지켜보며 언론계 복귀와 재야운동 사이에서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 89년 1월 김근태‧장기표 선생과 함께 전국민족민주운연합(전민련)을 꾸리기도 했다. 그러다 문익환 목사 방북과 현대중공업 파업 사태로 1년간 투옥됐고, 나와 보니 한 곳에서 다시금 공안탄압이 진행되고 있었다.
“원래는 사회민주당 같은 진보정당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YS까지 저쪽으로 가버렸으니 강력한 야당통합이 되지 않으면 힘들다는 생각이었죠. 당시 나는 이기택을 비롯해 김광일‧노무현‧김정길‧박찬종‧장기욱‧홍사덕‧이철 등과 함께 ‘작은 민주당’(3당 합당에 반대해 만들어진 당,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림)에 있었어요. 거의 영남 출신의 당이라 세력 확장이 필요했던 DJ는 이들과 같이하고 싶어 했어요. 내게는 전민련 상임의장을 했다는 위상 때문에 야권통합에 나서 달라 하고…. 거절할 수가 없었죠.”
거국적 합당의 통합민주당이 만들어졌지만 92년 14대 대선에서 YS에 패한 DJ는 정계은퇴 후 영국으로 떠나고 만다.
- 당시 YS와 DJ에 대해 모두 비판적이었죠.
“많은 사람들이 나한테 충고를 하더라고요. 저 사람들하고 어떻게 정치를 하느냐고. 저 사람들에게 당신은 처음부터 X표였다고 말이죠.”
얘기는 두 사람에 대한 88년 일화로 넘어갔다.
“감옥에서 나와 보니 양김 분열 때문에 노동자들이나 학생들이 분신자살을 엄청 많이 한 거예요. 장례식을 치러주는 노제라는 걸 하는데 거기에 양김이 나타났어요. 총선 때라 선거운동을 해야 했던 거죠.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줬어. 이 사람들이 왜 죽었냐. 여러분들이 갈라져서 정권 뺏기는 바람에 못 견뎌서 죽었다. 그때 두 사람을 유심히 봤는데 나에 대한 증오의 눈빛이었어요. 자신들은 배신도 할 수 있고 대통령 출마도 하는 정치 지도잔데, 네가 뭔데 감히 그러냐. 나는 이미 그들이 보기에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다시 말을 이어
“난 그들한테 예스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한 번은 (통합민주당 당시) 회의를 했는데 DJ가 미군 철수를 하면 안 된다고 영원히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즉시 무슨 말씀이냐. 난 동의 못 하겠다 하자 홱 나가버리더라고. 양김이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 대단한 일을 한 건 맞지만 이들이 민주주의자는 아니라고 봐요. 이런 말을 형용모순이라 그러나. 이건 겪어본 사람들만 알아요. 공천 등을 할 때도 당을 아주 독재적 수법으로 움직이거든. 대놓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몇 없었어요. 근데 난 그러질 않았어요. 정치적 운명이 험할 수밖에 없던 거죠.”
보스 정치 시대의 폐단을 지적하는 대목이었다. 95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DJ가 정계은퇴를 번복하며 외국서 돌아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도 이부영은 따라가지 않았다. 그가 14대 국회의원(서울강동갑)이던 때다. 오히려 통합민주당에 잔류해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DJ의 지역등권론을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15대 총선서 재선에 성공한 뒤 ‘노무현‧박계동‧김원기‧이철’ 등과 함께 삼김 정치와 지역주의 정치에 선을 긋는 국민통합추진위원회(통추, 통합민주당내 새로운 정치세력)를 결성할 때도 이부영은 독자노선을 추구했다. 하지만 이들의 정치실험은 오래가지 못했다. 97년 대선에 직면하자 흩어지며 무산되고 말았다. ‘노무현‧ 김원기‧유인태‧원혜영’ 등은 DJP(김대중+김종필)연합의 국민회의로 합류했다. 이부영을 비롯해 제정구‧이철‧박계동‧김원웅 등 왜소해진 잔류파는 고민 끝에 ‘이회창‧조순 연합’(신한국당+통합민주당)의 한나라당으로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 이회창‧조순 연합을 지지했던 건 달리 말하면 그만큼 DJ에 대한 비판이 강했던 건가요.
“DJ가 영국서 망명할 때도 내가 직접 만나러 가고 그랬어요.”
- 망명이요?
“YS와의 대결에서 패하고 칼날을 피해 간 거니 망명인 셈이지. 만날 때도 자기 심중을 보이지 않아 반신반의했죠. 그런데 95년 초 정계 복귀하대요. 87 이후 두 번 출마하면 됐지, 뭘 다시 한다고 그러나. 무슨 명분으로 따를 것인가. DJP연합은 호남과 충정당이잖아요. 지역주의 대표 표방이었죠. 그 사이 통합민주당 대표였던 조순 씨가 돌연 이회창과 만나 합당을 선언하고…. 나로선 고민이 참 많았어요.”
- 결정타는 뭔가요.
“어쨌거나 DJP보다는 이회창‧조순이 새정치에 더 가깝다고 본 거죠.”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겠지만 여러모로 아쉬운 듯했다.
“지금도 스스로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게 그때예요. 이회창‧조순 너머를 봤어야 된 게 아니냐. 그들이 딛고 서있는 기반이 뭔가를 더 깊이 들여다봤어야 했다는 거죠. 거기엔 사실 박정희‧전두환의 떨거지들이 이회창의 깨끗한 이미지를 앞세워 붙어있었거든요.”
- 후회하는 건가요?
“작은민주당 때부터 어떻게든 독자적으로 가자, 이게 내 기조였어요. 차라리 끝까지 어느 쪽에도 가지 않고 통합민주당을 지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어요.”
- 개혁을 주도했다 실패한 것도 아쉬움의 이유겠네요.
“한나라당에 있으면서 원내총무, 부총재, 대선 경선 등에 출마하면서 신주체론이라는 걸 주장했어요.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 순의 노선은 탈냉전(데탕트) 시대와 맞지 않는다, 당을 개혁노선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9. 미완의 과제
하지만 변화 모색이 쉽지 않았다. 당내 민정계 색채가 짙어지면서 개혁노선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 나중에 당을 떠나잖아요? 결심한 직접적 이유는 뭔가요.
“DJ의 6·15 남북정상회담 선언을 내가 지지했다며 노골적으로 나를 비판했어요. 평화공존이 뭐가 나쁘냐. 북한이랑 전쟁하자는 거냐. 맞받아 쳤더니 자기들하고는 체질이 맞지 않으니 떠나라는 거야. 물과 기름처럼 된 거예요. 그때부터 당을 떠날 준비를 한 거죠.”
DJ 국민의 정부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다 당을 떠난 것은 노무현 참여정부 때였다. 2003년 9월 독수리 5형제라 불린 김부겸, 안영근, 김영춘, 이우재 등과 함께 탈당, 이후 집권당 주류파와 함께 열린우리당 창당을 함께하게 된다.
- 처음부터 김부겸 의원 등 다섯 명하고만 탈당 얘기가 된 건지요?
“원희룡에서부터 남경필까지 원래는 한 열대여섯 명의 동의를 얻었어요. 맨 마지막에 남은 게 다섯 명이었지만.”
- 같이 못 떠난 이유는 뭐였다고 보나요.
“노무현 정부 때니 야에서 여로 간다, 음지에서 양지로 간다… 배신자 소리를 듣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을 테죠. 떠난 우리가 대단히 극단의 선택을 한 거죠.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게 쉬운 일인가.”
- 열린우리당 의장 당시 4대 개혁입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지 않고, 여야 4자 회담 제안 등 현실적 타협을 모색한 행보가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실패 했는데요.
“당시 우리는 국가보안법 폐기를 비롯해 언론법, 사학법, 과거사법 등 4대 개혁입법을 포함해 100대 과제를 설정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거죠. 정동영 의원이 의장을 할 땐데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서 자기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어요. 당 의장이었는데 노인폄하 발언으로 곤욕을 치르자 개혁과제를 버려두고 통일부장관으로 가버렸어요.”
그 뒤를 이부영이 승계했다. 국보법 폐지 문제가 정국을 뒤흔들 때였다.
“2004년 추운 겨울이었어요. 여당 의원 152명 중 초선의원이 108명이었는데 상당수가 강경하게 국보법 폐지를 주장했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롤 모델 돼서 그처럼만 하면 다들 대통령 될 것처럼 착각을 할 때였죠. 정봉주‧정청래‧임종인 등 막무가낸 거라. 오죽하면 108 번뇌라고 했을까. 통제 불능이야. 노무현 대통령은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옳은 건 옳다고 얘기했는데 말이죠. 내가 쭉 당내 중진 의견들 얘기를 들으니 152명 중 68명이 국보법 폐지를 반대하는 거예요. 당시 한나라 당이 133명이었어요. 우리당 68명이랑 뜻을 모으면 200명 넘게 반대하는 거예요. 현실적으로 폐지는 불가능한 거였죠. 그래서 내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보자고 했죠. 절대 강행처리 않겠다. 내 밀 믿어라. 대신 사상의 자유 탄압 폐기 등 반민주 독소조항은 제거하자. 설득했지요.
다행히 합의했는데 천정배‧유시민 등이 완전 폐지 안 하면 안 된대. 나를 배신자로 몰고, 합의안을 다 무산시켰어요. 그러니 되나. 결국 지금까지 국보법은 단 일점일획도 바꾸지 못하고 있어요. 조중동이 열린우리당을 완전히 친북‧종북 프레임에 가둬두고 노무현 정부는 레임덕에 빠지고…. 독소조항만 빼는 것으로 개정됐다면 열린우리당이 정국을 주도하고, 박근혜가 사면초가에 몰렸을 거예요. 근데 그쪽이 아니라 우리가 망해버렸지. 폐족으로 내몰리고. (사이) 개정이 안 된 그 피해를 누가 봤는지 알아요. 박근혜 정부 때 통진당이 본 거예요. 그런데도 정동영‧천정배‧유시민 모두 그 부분에 대해선 사과 한마디 안 하고 있어요. 정치적으로 지혜롭지 못했다, 미숙했다를 인정 안 하고 있죠. 그 뒤 오히려 다들 장관 했다고.”
극단의 정치 폐단으로 인해 설 곳을 잃었던 이부영은 이후 재야로 돌아갔다. 현재는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 최근 4‧15 총선을 거쳐 여당이 180석에 가깝게 대승을 거두고, 야당은 참패했는데요. 정치권에 조언해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평화공존을 못 받아들이는 당은 탈냉전 시대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당이에요. 지난번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전광훈 목사와 집회에 서서 공산당 청와대를 끌어내리자 하대요. 저런 정당에게 나라 운명을 어떻게 맡길 수 있을까, 야당의 패배를 예감했죠. 그래도 난 더불어민주당이 한 150~160석 정도, 미래통합당이 120석 정도 될 줄 알았지. 그런데 비례정당 만들어 의석을 더 확대하는 바람에…. 내가 요즘 이곳저곳서 자주 말하지만 걱정되는 게 있어요. 180석 된 저 민주당이 언제 또 열린우리당병이 도질지 모른다는 거.”
- 학습효과가 있는데 그렇게 될까요.
“이해찬 대표 등은 학습효과를 자꾸 강조하는데, 정치권력 속에서는 언제든지 ‘악습 효과’가 될 수 있어요. 학습효과가 아닌. 180석 얻은 지금이 오히려 위험한 구도임을 민주당은 알아야 해요.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인터뷰 말미. 극단의 프레임으로 미래를 그릴수록 대중이 쫓아가지 않음을, 여야나 언론이든 직시해야 한다는 말이 여운을 남겼다. 한나라당 일 때도 열린우리당 일 때도 번번이 극단의 벽에 부딪쳐 개혁 과제를 완수하지 못했던 그의 정치인생과 오버랩됐다. 서너 시간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장장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논픽션 근대소설과도 같은, 한 사람의 이야기에 담긴 시대적 배경과 의미와 고민이 뒤섞여 나오는 속에서 드는 생각이었다. 왜 그런지 몰라도 그의 시대사는 청순했고 치유받는 느낌이었다. 요즘 김종인‧장기표‧정대철 등 80에 가까운 원로들이 정치권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4‧50대 기수론도 부상하지만 원로 정치 시대가 새롭게 개막되는 분위기다. 정치권을 떠난 이부영, 그도 볼 수 있을까?
p.s.
요약하면 이번 87년 6·10항쟁 되짚기 여덟 번째는 결정적 도화선이 돼줬던 故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조작 사건을 세상에 알린 한 특종기자의 투쟁기다. YS(김영삼)와 12대 총선의 재발견(정세운)을 모티브로 민주항쟁의 결집체 역량(김민석), 전대협의 방향 전환(함운경), 비폭력 평화 운동(김현), 4‧13 호헌조치가 결정타(유기홍), 진화하지 못한 586의 명암(明暗)(이현종), 천주교계의 국본 참여(이명준)에 이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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