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전두환 시절에도 영수회담, ‘있었다’ [김자영의 정치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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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전두환 시절에도 영수회담, ‘있었다’ [김자영의 정치여행]
  • 김자영 기자
  • 승인 2024.04.19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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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정부 출범 2년, 與野 극한 대치 지속
여소야대 3년…尹 대통령, 이재명 만날까
박정희, ‘선명야당’ ‘대여투쟁’ YS와 만나
6·29 선언 직전, 전두환·김영삼 영수회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31일  2024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대통령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아 국회의장실에서 열린 국회 의장단, 여야대표, 5부 요인과의 사전 환담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31일 2024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대통령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아 국회의장실에서 열린 국회 의장단, 여야대표, 5부 요인과의 사전 환담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쟁 같았던 4·10 총선은 민주당 압승, 국민의힘 참패로 끝났다. 총선 직후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회동 가능성이 화두에 올랐다. 

지난 2년간 여의도에서 대화와 타협이 사라지고 정치는 실종됐다는 평가가 줄 이었다. 야권에선 틈만 나면 특검·해임건의안·탄핵이란 단어가 오르내렸고, 최후의 보루여야 할 대통령 거부권이 9번 행사됐다. 

극한 대립이 계속된다면 공동체에 산적한 과제들의 해결이 요원하다는 위기감이 도처에 싹트자, 경제·민생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이 이재명 대표를 만나 협치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 2022년 8월 민주당 전당대회 직후부터 윤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최소 8차례 요구했지만 만남이 이뤄지지 않았다. 

국민의힘 비대위가 세워졌다가 무너지고 다시 들어서는 등 내홍이 극심한 시기 대통령실이 “당이 안정되면 가까운 시일 내에 여야 당 대표와 자리 만들겠다”는 말로 만남을 미뤘지만, 2년 넘도록 진전이 없었다.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거대 야당의 발목잡기로 인한 국정운영의 어려움을 토로해왔는데, 남은 3년도 여소야대 난국 해결은 난망하다. 국정 과제 추진을 위해 야당과의 대화와 설득이 필수적인 상황이다. 

대통령은 부인했지만, 지난 2년간 윤 대통령이 야당 대표를 만나지 않은 이유가 이재명 대표 사법리스크 때문 아니냐는 의문이 재차 거론된 바 있다. 정진석 비대위 시절엔 당에서 “대통령이 지금 범죄 피의자와 면담할 건 아니다”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정치와 사법 영역이 분리된 만큼 막힌 정국을 풀어나가기 위해 과거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무도하다는 박정희·전두환 정권도 야당 대표와 대화의 끈을 놓지 않은 점이다. 

1975년 5월 ‘김영삼-박정희’ 간의 영수회담이 진행됐다. ⓒ 김영삼 자서전
1975년 5월 21일 ‘김영삼-박정희’ 간의 영수회담이 진행됐다. ⓒ 김영삼 자서전

1975년 5월 21일, 제1야당 김영삼(YS) 신민당 총재와 박정희 대통령이 영수회담을 가졌고, 1987년 6월 24일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영수회담이 진행됐다. 

박정희·전두환 정부에게 YS의 존재감이, 윤석열 정부에게 있어 이재명 대표 존재감보다 절대 작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눈에 YS가 곱게 보였을 리 만무하다. 

YS는 유신 정권에 대항해 ‘대여투쟁’을 강화하고 ‘선명야당’을 구축한 당사자이며, 1987년 6월 항쟁의 최대 주역이다. 독재 정권 입장에선 정부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국정 운영 방해자로 보였을 것이다. 

박정희는 1972년 유신 선포 후 야당 정치인을 잡아 고문하고,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는 등 장기 집권 의지를 노골화했다. 이때 정보부 개입에도 불구, 최연소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YS는 유신 헌법 철폐를 요구하고 부정부패 색출 규탄 운동을 전개하며 대여 투쟁을 강화했다. 그러던 중 월남 패망, 김일성 중공 방문 등 급박한 국가 안보 문제가 발생했다. 곧바로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됐다. 

김영삼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는 당시 영수회담 자리에서 YS에게 “나 욕심 없다. 집사람은 공산당 총 맞아 죽고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오래 할 생각 없다. 민주주의 하겠다.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주의 하겠단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동아일보> 광고탄압 중지, 투옥됐던 민주화 운동 정치인 일부 석방 등이 이뤄졌다. 다음은 당시 회담과 관련한 기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인지 사태 악화 이후 “난국에 직면해서는 여야가 없다”는 것을 누차 강조해 왔고, 김영삼 총재도 면담을 제의한 이후 “과거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장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해왔던 점으로 보아 이번 면담에서는 국가안보와 경제 난국의 극복을 위한 협조방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됐을 가능성이 크다.

- 1975년 5월 22일 자 <조선일보> ‘야당수의 네 번째 청와대 면담’

박정희는 YS와의 만남을 포함해 대통령 재임 시절 다섯 차례 영수회담을 진행했다. 박순천 민중당 대표(1965년 7월 20일), 유진산 당시 신민당 총재(1970년 8월과 1973년 6월), 이철승 당시 신민당 총재(1977년 5월 27일)와 함께했다.  

여야 영수회담에서 호헌철폐가 결렬된 후 민추협, 통일민주당 등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모여 시청앞에서 6·26 평화대행진을 거행했다. 이후 노태우의 6·29 선언을 불러온 직접적 계기가 됐다.ⓒ김영삼자서전
여야 영수회담에서 호헌철폐가 결렬된 후 민추협, 통일민주당 등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모여 시청앞에서 6·26 평화대행진을 거행했다. ⓒ 김영삼자서전

1987년 전두환과 김영삼의 영수회담은 더 급박한 상황에서 이뤄졌다. 전두환 정권이 4·13 호헌 조치를 선언한 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격렬해진 시위는 1987년 6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대규모 가두집회까지 이른다. 정부가 시위 진압을 위해 군 투입을 고려하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인사들은 정부에 호헌 조치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가열차게 요구했다. 6·10 항쟁 이후로도 열흘 이상 반응이 없었던 전두환 정부였지만, 민주화 요구가 걷잡을 수 없이 들끓자, 야권과 대화를 모색한다.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는 4·19와 부마항쟁을 겪은 세대였다. 전두환 정권은 6월 24일 김영삼과의 영수회담을 갖는다. 5일 뒤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하기 이른다. 

이처럼 국내 정치에는 정부 수장이 난국에 처할 때 야당 대표와 회담을 통해 국정 난맥을 풀어가는 관습이 있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국무회의에서 “국회와 더욱 긴밀하게 협력하고, 민생 안정을 위해 필요한 예산과 법안을 국회에 잘 설명하고 더 많이 소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와의 만남이 이뤄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안일원 <리서치뷰> 대표는 18일 <시사오늘>과 통화에서 “정치는 대화하고 타협하며 결과물을 도출하는 과정”이라며 “지난 2년간 그 과정이 생략돼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았는데, 정부가 이번 총선 민의를 잘 살펴 사법 문제는 사법부에 맡기고 대화 물꼬를 터야 한다”고 전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생각대신 행동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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