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택 “백기완과 함께 재야 활동…민추협 참여로 본격 정치” [時代散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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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택 “백기완과 함께 재야 활동…민추협 참여로 본격 정치” [時代散策]
  • 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 승인 2024.04.25 23:2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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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택 전 국회의원
“국본 발족, 6‧10 항쟁…민주대장정 주역은 YS”
“경선 파행만 없었어도 장경우가 이인제 이겼다”
“최형우 쓰러지지 않았다면…대선후보 됐을 것”
“2007년 박근혜 도와달라는 말에 약속 지켰다”
“박근혜, MB에 공천 약속 받아냈지만 배신당해”
“18대 총선서 친박연대 만들었지만…나는 낙선”
“대한노인회 출마, 정상화 시급…바로 세울 것”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이규택 전 국회의원은 지난 17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이 민주대장정 현대사부터 친박연대를 구성하기까지 되짚어 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규택 전 국회의원은 지난 17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이 민주대장정 현대사부터 친박연대를 구성하기까지 되짚어 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을 모아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시대산책 |이규택 편 

  • 언론통폐합 동양방송 강제 KBS 편입 사건
  • 부천권인숙성고문사건 폭로 백기완과 학생들
  • 향린교회 국본 출범, 6‧10 준비대회 성공회서 
  • 민주당 DJ vs 이기택 분당 원인 경기지사 경선
  • 정치 자금 조달, 현역 의원들의 식당 개업 바람
  • YS 만나 분당선 여주 연결, 통크게 약속 받아
  • 신한국당 경선, 9룡 나섰지만 이회창이 된 이유
  • 박근혜의 ‘살아서 돌아오라’ 대서특필된 사연은 

1942년 경기 여주, 서울대 사범대학, <중앙일보>, TBC, KBS 문화사업부장, 충남대 겸임교수, 민추협 대외협력국장, 통일민주당 대외협력위 부위원장, 14‧15‧16‧17대 국회의원, 민주당 원내부총무, 통합민주당 대변인, 한나라당 원내총무‧최고위원,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석좌교수, 19대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

 

“대한노인회, 정상화하겠다.”

이규택 노인복지청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전 국회의원, 이하 이규택)을 만났다. 양복 위 깃에는 태극기 마크가 붙어 있다. 지난 17일 오후 3시 약속 시간보다 일찍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노인회 선거에 출마해 전국을 누비고 있다. 정치 원로들의 지지를 받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한다.

1942년생이면 만82세다. 움직임이 시원하고, 걸걸한 목소리에 호탕한 웃음이다. 노인 백세 시대가 실감된다. 국회의원 시절 쇄신에 앞장섰다는 평가다. 언론인 출신이다. 당직자로서 촌철살인 논평을 내는 데 탁월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소탈하고 중립적 자세를 견지했다고 전해진다. 꾸밈없는 솔직함이라고 할까. 허세와는 거리가 먼 행동이 몸에 밴 느낌. 

격동의 현대사 증인이다. 시대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기에 앞서 잠깐 여담부터 나눴다. 

- 대한노인회장 선거는 또 누가 뛰나요. 

“현재 2파전이에요.” 

현직 회장과 붙었다.

“이분이 노인복지당을 만들었어요. 그건 괜찮은데 (비례대표 후보)기호 1번이 문제가 있고, 기호2번은 친동생을 추천한 겁니다. 지회장들이 좋아하겠습니까? 현 회장도 국회의원을 역임했어요. 돌아다니다 보면 회원들로부터 국회의원에 대한 욕을 엄청 많이 듣습니다.”

같은 국회의원 출신으로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었다.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일수록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정도를 지키면서 살아야 해요. 대한노인회를 정상화하는 일이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80년대 속으로 


이규택을 비롯한 국본 주관으로 6월 10일 국민대회를 준비한 핵심 간부들이 사복을 입은 경찰들에 의해 체포되고 있다.ⓒ사진제공 : 이규택
이규택을 비롯한 국본 주관으로 6월 10일 국민대회를 준비한 핵심 간부들이 사복을 입은 경찰들에 의해 체포되고 있다.ⓒ사진제공 : 이규택

- 본격적으로 질문에 들어가면요. 

“네.”

-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 가담하게 된 건 DR(상도동계 좌장 김덕룡의 약칭- 편의상 인터뷰 중 열거되는 정치인 등의 직함은 생략하기로 한다) 때문인가요.

“맞아요. 김덕룡 씨와는 40년 지기입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알았어요. 친한 친구 통해 어울리게 됐죠.” 

서울대학교 동문이다. 이규택은 서울대 교육학과, 김덕룡은 사학과를 다녔다. 

“정치 입문을 풀자면 역사가 긴데….”

민추협에 뛰어들면서 그의 정치 인생이 시작됐다. 차근차근 되짚고 싶은 눈치였다. 들려준 얘기를 풀어본다. 

원래 이규택은 <중앙일보>가 겸영하던 동양방송(TBC)에서 사업부장으로 있었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해 말 언론통폐합이 추진된 것이다. TBC를 없애고 KBS에 통합시켰다. 1960년대 설립됐던 민영방송사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었다. 

“저도 그리로(KBS) 끌려갔어요.” 

강제로 이직된 거였다. 이규택은 ‘끌.려.갔.다’고 표현했다. 상실감과 반발감이 동시에 묻어났다. 

KBS는 문화사업부를 만들었다. 이규택이 부장을 맡았다. 사회 분위기는 혼란기였다. 뒤숭숭했다. 

언론탄압은 진행되고 있었다. 앞서는 언론통폐합의 신호탄과도 같았던 언론인 구속 사건이 터졌다. 

“<경향신문> 외신부장을 하던 이경일이라고, 내 친구였는데 그때 잡혀 들어간 겁니다.”

1980년 5‧18 직후였다. 이규택은 이경일과는 고등학교 때부터 죽마고우라고 했다. 

훗날 신문에서는 당시 사건을 가리켜 ‘언론인 대량 해직의 전주곡’이었다고 평했다. 
 

 “광주항쟁에 대한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북한의 통일방안인 ‘고려연방제’를 찬양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6월 9일 <경향신문>기자 9명이 구속됐다. <경향신문> 서동구 조사국장, 이경일 외신부장, 홍수원, 박우정, 표완수, 박성득 기자와 MBC의 노성대 부국장, 오효진 기자, <동아일보> 심송무 기사 등이 ‘남영동’에 불려가 짜인 각본에 따라 진술하도록 강요당했고 이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얼마 후 동아방송의 박종렬 기자도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구속됐다. 허위자백에 의한 이들의 혐의는 이듬해 2월의 고등군법회의 항소심에서 반공법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유언비어 유포 등 계엄포고령 위반 부분은 유죄가 떨어졌다. 이 같은 기자들에 대한 구속 탄압은 앞으로 전국적으로 다가올 언론인 대량 해직의 전주곡이었다.”
-1988년 11월 6일 <한겨레>기사 중


이경일은 2년여간의 옥고를 마치고 풀려났다. 

“어느 날 이 친구가 사무실(KBS)을 찾아온 거예요. 안암동 고대 앞에 한약방을 차렸더라고요.”

- 면허증이 없어도 차릴 수가 있는 건가요. (의아해 물었다)

“한의사를 채용한 거죠. 한약도 팔았는데 저도 많이 도와줬지요. 그곳이 소위 말해 재야의 아지트가 된 겁니다. 백기완‧계훈제, 이부영‧박계동 이런 분들의 집합소가 된 것이죠.”

- 한약방 이름은 뭐였나요.

“잊어버렸어요.”

생각이 잘 안 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이규택 전 국회의원은 지난 17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이 민주대장정 현대사부터 친박연대를 구성하기까지 되짚어 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규택 전 국회의원은 지난 17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이 민주대장정 현대사부터 친박연대를 구성하기까지 되짚어 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저녁이 되면 속된 말로 내가 물주가 된 거예요. 월급쟁이니까(웃음).”

- 그때는 결혼을 했을 때인가요.

“아. 결혼했죠.”

- 부인께서 뭐라고 안 하던가요. 

“집사람은 잘 모르죠.”

- 그래도 돈이 나가지 않습니까. 

“소주하고 돼지갈비니까.” 

으레 만나면 모이는 식당은 돼지갈비 집이었다. 

“보통 예닐곱 명이 모였어요. 어디서든 군부에서 필요하면 도청을 할 때잖소. 하루는 보안사에서 찾아왔어요. 경고를 하는 거예요.”

보안사 : 당신. 고대 앞 한약방 가지?
이규택 : 그렇소. 근데 왜요?
보안사 : 거기 가면 안 돼! 위에서 알면 회사에서 잘리는 거야. 그들은 반체제 인사들이라고. 

백기완 선생 등을 가리키며 겁박해 왔다. 

- 어떻게 했습니까. 

“친구들에 지인들이니까 계속 만났죠.”

퉁퉁하니 수더분하게 답했다. 

이규택은 민언련(민주언론운동협의회)에 가담해 해직기자들과도 어울렸다. 1984년 12월 19일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이부영‧성유보 등이 주축이 돼 만들었다. 민언련은 <말>지와 <한겨레> 창간을 주도했다.  

이규택은 차츰 백기완 선생과 가까워졌다. 자연스레 보좌하는 일을 맡았다. 어느 틈에 KBS 사장까지 알게 됐다. 

KBS 사장 : 당신 말이야. 
이규택 : 네. 
KBS 사장 : 그 사람 또 만나면 파면시키겠어.

“불러서는 그 말을 하길래 시말서를 쓰고 나왔죠.”

머리를 긁적였다.  

- 그래서 안 만났습니까.

“사람 의리가 또 그렇지 않잖아요. 모임에는 나갔지요.”

결국 감사를 받게 됐다. 이규택은 저항의 표시로 고려병원에 두 달간 입원했다. 얼마 안 가 직원들이 찾아왔다. 

직원들 : 부장님 때문에 우리가 다치겠습니다. 

“어떡해요. 별수 없이 사표를 냈지요. 해직을 당한 겁니다.”

너털웃음을 지었다. 

- 몇 년도에 그만두게 된 건가요. 

“1984년쯤일 겁니다.”
 

6·10 민주항쟁을 준비하다 구속됐던 인사들이 오랜만에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은 위 왼쪽부터 진관스님, 송석찬, 이규택, 금명권, 오충일, 지선스님, 박종기 신부, 아래 왼쪽부터 김병오, 양순직, 김명윤, 계훈제, 박형규, 제정구의 모습이다.ⓒ사진제공 : 이규택
6·10 민주항쟁을 준비하다 구속됐던 인사들이 오랜만에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은 위 왼쪽부터 진관스님, 송석찬, 이규택, 금명권, 오충일, 지선스님, 박종기 신부, 아래 왼쪽부터 김병오, 양순직, 김명윤, 계훈제, 박형규, 제정구의 모습이다.ⓒ사진제공 : 이규택

-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굳이 재야 활동을 강행했던 이유가 뭔가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전두환 정권에 대해 불만이 가득 찰 때였어요. 방송통합에 대한 불만도 컸어요. 멀쩡한 TBC를 KBS와 통합해 놓으니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인 겁니다. 여긴 완전히 관료조직인 거예요. 이사들한테 쩔쩔 매야 하고, 고위 임원은 아예 만나지도 못했어요. 광주사태도 났잖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을 언론에서는 다 알았어요. 죄 없는 내 친구(이경일)마저 억울하게 투옥됐으니 눈 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잖아요.”

돌이켜도 생생한 듯 울분이 느껴졌다. 이규택은 해직된 후 처음엔 백기완을 수행했다. 당시 백기완은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을 거쳐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었다. 

“한 2년간 모셨는데 부천 권인숙 성고문 사건이 터진 겁니다.”

1986년 노동운동가였던 권인숙(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부천 경찰서에 끌려가 성고문을 당한 것에 맞서 담당 형사 등을 고소하고 진실 규명에 나섰다. 

“그때 권 씨를 도와 처음으로 사회에 폭로한 분이 백기완 선생이었습니다. 그 시절 내게는 자동차가 있었어요. 백 선생을 모시고 도망을 다녔습니다. 그 양반 집이 불광동 기자촌이었는데 제일 처음 어디로 피신했냐면 여주(이규택 고향)에 있는 신륵사라는 절이었어요. 스님이 있었는데 나중에 안 거지만 박헌영 선생 아들인 원광스님이었습니다. 이분이 돈도 주고 백기완 선생이 좋아하는 개고기도 대줬지요(웃음). 본인(원광스님)은 안 먹었지만요.” 

개고기라는 말에 생각난 것이 있었다. 

- 여담인데요. 상도동계 분들도 개고기를 한때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들 머리가 하얘졌다면서…

“아, 그래요?”

잠시 웃음이 오갔다. 

“이후 보름 동안 숨어 있다가 들통이 나서 (강원도) 양양으로 갔어요. 백 선생은 모자 쓰고 두루마리 입고, 나는 양복 입고 운전하고 다녔지요.”

검정 두루마리는 백기완의 트레이드마크다.  

- 두루마리 입고 모자 쓰면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요?

“시골 면 소재지 위주로 다니는 거니까요. 돌아다닐 때는 내 아들도 같이 다니고는 했어요. 남들이 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손자가 장에 가는 모습인 거죠(웃음).”

양양에서는 부대 근처 숲으로 향했다. 한참 가니 산속의 절이 나왔다.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데 절 이름을 모르겠더라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차에서 내리니 마중 온 스님이 소나무 가지로 자동차 주변을 꽁꽁 에워쌌다. 다행히 감쪽같이 덮어졌다. 밤이었고 산속은 캄캄했다. 스님은 호롱 불을 들고 다녔다. 그 뒤를 따라 좀 더 올라갔다. 컨테이너하우스가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까만 커튼이 쳐져 있었다. 안쪽에는 20여 명의 학생들이 회합을 갖고 있었다. 여학생들도 보였다. 전국학생회장단이라고 했다. 

“누군지 기억은 안 나요. 전국연합회장이 전남대인가 조선대 학생이었던 것은 같아요.”

어렴풋하게 되삼켰다.

학생들은 그 안에서 라면도 끓여먹고 강의도 들었다고 했다.  

- 어떤 강의였습니까. 

“딴 건 아니고, 라디오 '통일의방송', 그걸 틀더라고요. 강의(통일의방송) 듣고 백기완  선생이 총평하고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근데 상황상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있었어요.(이규택은 인터뷰하는 동안 당시 어떤 광경 때문에 놀랐는지에 대해 설명해 줬지만 해당 내용이 보도될 경우 논란의 소지가 될 것을 우려해 기사화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내가 그래도 삼성그룹에서 만든 TBC에서 밥을 먹고, KBS에 있었던 놈인데 그게 상상이나 됩니까. 도저히 못 있겠더라고요. 밤새 배 아프다는 핑계로 들락날락했어요. 백기완 선생에게는 설사가 나서 못 있겠다, 가야겠다고 했죠.”

- 그 뒤로 백기완 선생하고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후로도 만나긴 했는데 …”

아무래도 예전 같지는 못한 듯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김덕룡 씨가 찾아온 겁니다. 원래부터 자주 만나서 밥도 먹고 대화도 나눴지만 말입니다. 김덕룡 씨가 실장(YS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였거든요. 나한테 백기완 선생 쪽에 있지 말고 정치할 생각이 없냐고 그래요. 민추협의 대외협력국장 자리가 비어있다면서요. 내가 해직 기자들도 잘 알고 재야 담당을 해왔으니까 이쪽으로 와서 정치를 해보라는 거예요. 듣고 보니 괜찮더라고요.”

 

재야에서 민추협으로


이규택은 1987년 6·10 민주항쟁 주도로 구속된 바 있다. 사진은 옥고를 치르던 중 가석방 돼 밖으로 나오고 있다.
이규택은 1987년 6·10 민주항쟁 주도로 구속된 바 있다. 사진은 옥고를 치르던 중 가석방 돼 밖으로 나오고 있다.ⓒ사진제공 : 이규택

1986년경이었다. 민추협은 김영삼‧김대중(YS‧DJ) 공동의장이 주축이 돼 신민당을 간판으로 내세워 천만인 개헌운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 계훈제·문익환 등과 친했으면 동교동계 쪽으로도 갈 수 있었을 텐데요. 상도동 몫으로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덕룡 씨 때문에 그랬죠. 나는 민주산악회(민산)도 나갔던 사람이에요.”

1982년 정치규제에 묶여 있던 YS는 이민우‧김동영‧최형우‧김덕룡 등 야권 인사들을 규합해 매주 산에 올랐다. 단순 산행이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회원들을 규합해 나가면서 사그라지던 민주화 불씨를 되살려나갔다. 민산은 6월항쟁을 주도한 민추협의 산실로 평가되고 있다.
     
- 어떻게 나가게 된 겁니까. 

“KBS에 있을 때였는데 김덕룡 씨를 만나서는 내가 YS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민산에 나오라는 거예요.”

- 이민우 회장일 때 나간 건가요.

“그분은 나중에 들어왔고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더 일찍 활동했어요. 1983년 YS 단식 끝나고 들어갔지요. 창립 멤버는 아니어도 초대 멤버는 될 겁니다.”

어깨를 으쓱했다. 

“KBS 다닐 땐데 매주 목요일 아침 산에를 가는 거예요. 등산한 뒤 먼저 내려가서는 옷 갈아입고 KBS에 출근을 해요. 늦게 온 것처럼 둘러댔지요. 김동영‧최형우 씨도 그때 알게 됐죠.”
 

왼쪽부터 국본 발기인 일동 결의문, 임원명단,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관련 일시와 장소 등이 적힌 소식지의 모습이 보인다.ⓒ사진제공 : 이규택
왼쪽부터 국본 발기인 일동 결의문, 임원명단,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관련 일시와 장소 등이 적힌 소식지의 모습이 보인다.ⓒ사진제공 : 이규택

여기까지 얘기하고, 다시 민추협 얘기로 돌아갔다. 

“암튼 김덕룡 씨가 민추협을 들어오라고 해서 백기완 선생을 찾아갔어요. 간다고 하자, 막 야단치면서 붙잡는 거예요. YS‧DJ는 보수 반동분자라면서요. 그래도 어떡해요. 갈 길을 가야죠. 이후로도 몇 번 봤지만 이쪽으로 오니까 아는 체를 잘 안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13대 대통령 선거 앞두고는 처음엔 백기완 선생을 밀었어요. 나중에서야 YS가 거길 밀면 어떡하느냐. 이쪽으로 오라고 해서 경기도 여주 통일민주당(신민당 후신) 위원장을 맡게 됐지요.”

- 민추협에 있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뭐였나요. (이 말을 물으니, 이규택은 국본 발족과 6‧10 민주항쟁 준비 당시를 떠올렸다)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가 남영동에서 고문치사를 당했잖아요. 천주교 김승훈 신부가 폭로하고, 민추협과 재야인사들이 이래서는 안 된다며 의문사 규탄 대회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주축 세력이 민추협이었는데, 3~4월 비밀 모임을 거쳐 5월 향린교회에서 출범식을 개최했지요.”

1987년 5월 27일 서울 중구 향린교회에서였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YS와 DJ, 함석헌 등이 고문으로 나섰다. 국본 주축 세력인 민추협에서는 최형우‧김동영‧양순직‧김명윤‧박종률‧박영록 등이 대표로 나섰다. 개신교에서는 박형규‧인명진, 천주교 김승훈, 불교계 지선, 민통련 계훈제‧이재오, 여성 대표 이우정, 언론계 송건호, 민가협 박용길 등이 이름을 올렸다. 실무진으로는 성유보‧황인성‧이명준‧김도현을 비롯해 이규택 등이 참여했다. 발기인만 2196명이었다. 

출범식이 열리던 향린교회에는 150여 명이 모였다. 아침 8시에 시작된 행사는 집행위원장인 오충일 목사 주재 아래 비장하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이규택은 이후 6‧10 민주항쟁 준비에 나섰다. 성공회 서울 대성당에서 개최된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 준비 작업에 뛰어들었다. 경찰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고, 대회가 열리기 전부터 삽시간에 주변을 에워쌌다. 사방이 봉쇄가 됐다.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삼엄한 경비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이규택은 양순직‧김도현‧김명윤‧김병오‧한영애 등과 모여 교회 담을 넘으려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시청 근처 프레스센터 옆 호텔 등을 경유해갔다. 중간에 얼굴이 알려져 있던 김도현은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고 이규택은 회상했다. 
 

“양순직 부총재 등은 6‧10 대회를 주관한 후 서울 중구 정동 성공회 서울대성당에 미리 들어가 있다가 지난 10일 오후 6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진행하고 철야농성을 벌인 뒤 11일 오전 9시 30분쯤  성공회성당을 나와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으로 가려다 경찰에 연행됐었다. 검찰은 구속된 13명 외에도 국민운동본부 핵심간부들에 대해 앞으로 소환조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속자명단 양순직, 계훈제, 박형규, 김명윤, 최형술, 지선, 제정구, 오충일, 김병오, 박용모, 유시춘, 이규택, 금영균, 송석찬”
-1987년 6월 13일 <조선일보>기사 중 


- 민추협의 역사성, 의의는 뭐라고 생각합니까. 

“6‧10 항쟁이 있기까지 민추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내가 그때 느낀 게 민추협이 고생을 참 많이 했다는 거예요. 민통련 등도 있었지만 조직화가 안 됐잖아요. 민추협은 전현직 정치인들이 중심이 돼 조직화를 갖추고 있었어요. 범대중 전선까지 규합해 나갔습니다. 따지고 보면 YS가 민주화를 일으킨 거예요. 신민당 총선 승리부터 모두 YS가 이끌었지요.” 

 

3당 합당 아닌, 민주당 잔류로


6월 10일 국본 참여 인사들이 대한성공회 국민대회 관련해 협의하고 있다. 양순직, 김명윤, 이규택, 박형규, 오충일, 계훈제, 김현수 등의 민주인사들들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사진제공 : 이규택
6월 10일 국본 참여 인사들이 대한성공회 국민대회 관련해 협의하고 있다. 양순직, 김명윤, 이규택, 박형규, 오충일, 계훈제, 김현수 등의 민주인사들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사진제공 : 이규택

- 3당 합당 때는 안 따라갔잖습니까. 그 이유도 궁금하더라고요.

“그 직전 대선(87 대선)이 있었잖습니까. 군부독재라며 노태우 욕하고 선거운동했는데 어떻게 또 갑자기 3당 합당을 할 수 있었겠어요. 양심상 못 갔습니다. 처음에는 최형우 씨도 안 간다고 했어요. 이기택 총재도 조용히 있었고요.”

- 이기택은 갔다가 돌아왔지요.(이기택은 3당 합당 시기 통일민주당 부총재였다. 그는 3당 합당을 반대하다가 찬성 쪽으로 돌아섰다. 통합추진위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노태우를 만난 뒤 생각이 달라졌다. 돌연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갈지자 행보를 보인 것이다. 그의 측근 박관용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훗날 이기택은 3당합당을 따라가지 않은 것을 두고 후회했다’고 전했다. 4‧19세대 주역인 이기택은 대권을 꿈꿨다. YS를 따라갔다면 차기 대권은 그에게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게요. 나중 되니 반대하던 최형우 씨는 YS를 따라가고, 찬성하던 이기택 총재는 안 가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얼른 그쪽으로 갔지요. 꼬마민주당에요.”

이규택은 통일민주당계 잔류파(꼬마민주당)에 몸담았다. 그를 비롯해 이기택‧노무현‧김정길‧장석화‧김광일‧이철‧이부영‧김부겸‧ 조경태‧안희정 등이 속했다. 

- YS가 지구당 위원장까지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3당 합당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득했다고 하던데요. 

“네. 나도 불렀죠. 하지만 거절했어요. 나중엔 김동영‧황명수 씨도 찾아왔고 김덕룡 씨도 왔고요.”

하지만, 마음을 돌이키지는 못했다. 

- YS 입장에서는 말입니다. 1987년 양김 단일화 당시 DJ가 요구한 미창당지구당 수를 전폭 양보했음에도 DJ는 약속을 깨고 평민당을 차려 독자 출마했잖습니까. 88년 총선을 앞두고서도 YS가 DJ 요구인 소선거구제를 들어줬음에도 DJ는 합당 약속을 또 파기해버렸습니다. 누구보다 야권통합을 원했지만 도저히 안 되는 거라고 판단했을 수 있죠. 3당 합당이 아니면 군정종식이 가능했을까 묻고 싶은 것이죠. 

“젊은 패기로는 하루아침에 독재정권과 손잡기가 어려웠어요. 양심상 안 쫓아갔죠.”

기자의 시각에 동의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다. 당시의 심경만 간추려 갈음했다.  

역사는 YS가 3당 합당 후 대권을 잡았기에 문민정부 시대가 개막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하나회를 청산할 수 있었으며 DJ‧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그렇지만 훗날의 평가였다. 당대는 YS의 역사적 결단을 두고 비토 하는 목소리들이 적잖았다. 이규택도 그쪽이었다. 
 

이규택은 3당 합당에 따라가는 대신 잔류하는 쪽을 택했다. 사진은 왼쪽에서부터 노무현, 김종완, 이규택, 양문희, 이기택, 김원기, 이부영, 강창성의 모습이 보인다.ⓒ사진제공 : 이규택
이규택은 3당 합당에 따라가는 대신 잔류하는 쪽을 택했다. 사진은 왼쪽에서부터 노무현, 김종완, 이규택, 양문희, 이기택, 김원기, 이부영, 강창성의 모습이 보인다.ⓒ사진제공 : 이규택

- 14대 총선 때는 민주당(평민당+꼬마민주당) 후보로 여주‧이천에 출마했습니다. 김덕룡과 갈라지게 된 건데 DR이 서운하다고는 하지 않았나요.

“그렇지야 않죠.”

코를 쓱싹 훔치며 말했다. 

- 15대 총선 때는 신한국당에서 정동성 후보를 내보내잖습니까. 반대로 섭섭하고 그런 것은 없었는지도 궁금합니다.

“15대 때 붙었죠.”

이 말만 했다.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다시 물었다. 

- 정동성은 체육부 장관도 지내고 총재비서실장에 4선이나 했지 않습니까. 의원께서는 명색이 신한국당의 DR과도 친하고, YS와도 잘 아는데 하필 거물이랑 붙여놓을 수 있느냐. 서운한 생각이 안 들었냐는 것이죠. 예전 유성환 전 의원한테 들었는데, 상대 당이라고 해도 잘 아는 정치인이 있으면 일부로 이쪽에서는 약한 후보를 내보낸 적도 있다고 합니다. 정동성은 너무 센 후보가 아니었냐 이거죠. 

“….”

유도 질문하는 것처럼 느꼈는지 긍정도 부정도 안 했다. 이 말로 대신했다.  

“내게도 유혹은 있었죠. 신한국당에서 오라고 말이에요. 지역서 물어봐도 그 당(민주당)으로는 안 된다고들 했고요.”
 
- 그럼에도 두 번 모두 당선되잖습니까. 14대 총선은 3당 합당 여파로 민자당 세가 강했고, 15대 총선도 참 어려운 선거였는데 이겼지요.

“그렇죠. 그때 민주당은 제4정당의 위치였어요. 신한국당, 국민회의, 자민련에 이어 그다음이었지요.”

소선거구제 하에서 약체 정당 후보로 이겼으니 대단한 일이었다. 통합민주당은 불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민주당이 분당되면서 잔류파들이 만든 당이었기 때문에 세가 많이 위축돼 있었다.  

앞서 DJ는 지방선거 때 터진 이기택과의 갈등을 계기로 동교동계와 따로 나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차렸다. 민주당 내 많은 인사들이 국민회의 쪽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규택은 따라가지 않았다. 3당 합당 때 YS를 따라가지 않고 잔류해 꼬마민주당에 있던 것처럼 이번에는 DJ를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에 남았다.

통합민주당은 그렇게 남은 민주당 잔류파와 시민단체 성향의 개혁신당과 합해 1995년 9월 창당한 정당이었다. 이규택은 통합민주당에서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언론에서는 이규택을 이기택 계보라 칭했다.
 

이규택 전 국회의원은 지난 17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이 민주대장정 현대사부터 친박연대를 구성하기까지 되짚어 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규택 전 국회의원은 지난 17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이 민주대장정 현대사부터 친박연대를 구성하기까지 되짚어 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는 민주당 분당 사태의 원인이 됐던 1995년 경기도지사 경선 과정에 대해 좀 더 부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초지총을 풀어갔다. 

“제1회 전국동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에서는 서울 공천은 DJ, 경기도는 이기택 총재 몫으로 정해두고 있었어요. DJ는 서울시장으로 조순 씨를 밀었고, 이기택 총재는 경기도지사로 장경우 씨를 밀었지요. 근데 DJ가 이종찬 씨를 경기지사 후보로 끌어오려고 하는 겁니다.”

DJ는 “서울 조순‧경기도 이종찬이 환상의 카드”라고 봤다.   

“이종찬 씨가 볼 때는 그리되면 이기택 총재와 싸우게 되니 안 한다, 포기하더라고요. DJ가 이번엔 범동교동계인 부천의 안동선 씨를 후보로 내민 겁니다. 내가 경기도당 선거관리위원장을 맡고 있었을 때였어요. 하는 수없이 장경우 vs 안동선, 경선을 붙였지요.”

1995년 5월 13일 안양 예술문화회관에서 경선의 막이 올랐다. 1차 투표에서 모두 과반 미달이라 2차 투표가 진행됐다. 

“선거가 막 끝났을 땐데….” 

- 투표함 개봉도 못하고 난장판이 됐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선거가 끝났는데, 동교동계와 안 후보 측에서 질 것 같으니까 투표함 공개를 못하게 막아선 겁니다.”

그들은 돈봉투 살포 의혹을 제기했다. 이기택이 밀던 장경우 측은 자작극이라고 반박했다. 순식간에 경선은 파행으로 치달았다. 

“투표함 개봉을 못 하게 나를 마구 쥐어 패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국립병원에 보름간 입원까지 했어요.”
 

“산회직전 흥분한 대의원 수십 명이 도지부장격 선관위원장인 이규택 의원을 단상으로 끌어내 ‘폐회를 하든 사과를 해야 할 것 아니냐’며 소동을 피웠으며 일부 대의원들은 이 지부장을 폭행했다.”
- 1995년 5월 14일 <한겨레> 기사 중 


“투표함은 중앙당으로 가 있고, 한 열흘 만에 개봉했는데 역시나 장경우 씨가 이겼더라고요.”

개표 결과 장경우 226표, 안동선 217표였다. 

“우리가 파열음을 겪고 있는 동안 저쪽(신한국당)은 이인제 후보를 내보낸 겁니다. 우리로서는 열흘 이상 준비 기간을 놓친 것이 됐어요. 그러니 되겠어요? 처음부터 잘 준비해 시작하면 됐어요.”

- 그래도 이기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단칼로 자르듯 장담했다. 그는 “처음부터 장경우 씨로 됐으면 이길 수 있었어요”라고 거듭 단언했다.

“장경우 씨도 시흥 국회의원이었고, 기반이 있었어요. 서울서도 조순 씨가 이겼잖습니까. 그때 누가 붙었냐면, 정원식 총리(신한국당 후보)였어요. 제 은사였거든요.” 

입장이 난처했을 법했다. 

“거기는 가지도 못하고 경기도 선거에만 매달렸죠(웃음).” 

- 서울서 조순 후보가 된 데는 박찬종, 정원식으로 표가 갈려 삼파전이었기 때문이었잖아요? 박찬종이 원래 1등으로 달리다가 역전을 당한 거였고요. ‘박찬종 때문에 일부러 약한 정원식을 내보냈다’는 말도 나돌던 때였습니다. 후일담이지만 DR 얘기론 신한국당에서는 원래 이회창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려고 했다고 합니다. 최종 확정하기 위해 만나기로 했는데, 막판에 이회창이 안 나타나 무산됐다고 하더라고요. 부랴부랴 만든 후보가 정원식이었다는 것이죠. 당시를 취재해 보면 YS가 일부러 박찬종을 밀어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요.

“암튼 그 바람(경기지사 갈등)에 DJ가 지방선거 끝나고 두 달 있다가 당을 깨고 나간 거잖아요?”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이규택이 말했다. 동문서답하듯 대화는 이어졌다. 

- DJ도 아쉬운 것이 민주당에 그대로 남아서 당권을 장악했으면 되는데 왜 굳이 나갔냐는 겁니다.(그의 생각이 궁금해 물었다) 

“이기택 총재랑 자꾸 싸우게 되니까 그랬겠죠.”

- 그래도 복당해서 전당대회 열어 투표하면 세력도 훨씬 많으니 되지 않았을까요? 안에 있었다면 이기택 세력도 흡수하게 되는 건데 분당해 나가버리니 그 세력도 놓친 게 된 것이지요. 정치 행위를 왜 그렇게 했냐는 거죠. 

“…. 어쨌든 당이 깨지다 보니….”

맞장구치는 대신 자신이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통합민주당이 15대 총선에서 참패한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 당(통합민주당) 소속으로는 서울 강동의 이부영, 동대문 장광근, 경기도에서는 여주에서 당선된 나를 비롯해 이천의 황규선, 시흥의 제정구 정도 밖에 살아남지 못한 겁니다. 또, 강릉의 최욱철, 경북 안동의 권오을, 경남 울산의 권기술 등 지역구에서는 통틀어 9명밖에 당선되지 못했어요. 이십몇 명 나갔는데 이기택‧노무현 등 모두 떨어졌고 참담했지요.”

당 지도부인 이기택은 부산, 김원기는 전북에 출마했지만 모두 YS‧DJ 아성에 밀려 낙선했다. 노무현‧이철‧박계동‧원혜영‧유인태 등 스타성 있는 정치인들도 고배를 마셨다. 목표였던 원내교섭단체를 생각하면 통합민주당으로서는 대패였다. 
 

이규택 전 국회의원은 지난 17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이 민주대장정 현대사부터 친박연대를 구성하기까지 되짚어 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규택 전 국회의원은 지난 17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이 민주대장정 현대사부터 친박연대를 구성하기까지 되짚어 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그런데도 의원께서는 이겼으니 총선의 귀재인 것 같습니다.(추켜세웠다)

“여주군민들이 위대한 거죠. 내가 잘난 게 아니고요(웃음).”

 - 특별한 노하우가 있느냐는 거죠. 

“맨 처음 떨어졌을 땐 피눈물 났죠.”

맨 처음이란 13대 총선 때를 말했다. 이규택은 상대 후보인 정동성과 여주에서만 총 세 번을 겨뤘다. 13대 패한 것을 제외하면 14‧15대 총선 모두 내리 이겼다. 

- 특히 여주는 보수세가 강한 지역인데 말입니다. 비결이 뭔가요.   

“집에 가지 않다시피 할 정도로 지역주민들의 관혼상제를 챙기는데 열심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하루 평균 2.7명이 돌아가셨어요. 어떤 날은 한 분, 어떤 날은 일곱 분…. 매일 상갓집에서 밥 먹고 산소로 모시면 또 거기 가서 밥 먹으면서 장례를 챙겼지요. 주말에는 결혼식 주례를 섰어요. 하루 두 건, 많게는 여섯 건 선적도 있지요.”

- 바닥부터 훑는 게 당선되는 데는 가능성이 제일 높은 거네요. 

“그게 제일 좋은 거죠.” 

- 요즘은 막 낙하산이잖아요. 

“그러니까 실패하는 겁니다. 국민의힘이 더 크게 진 이유도 그런 데 있어요. 용인‧수원‧고양 모두 낙하산이잖아요. 내가 지도부에다 그랬어요. 이러다간 망한다. 근데도 안 통해요. 급기야 그나마 이길 방법은 ‘서울 편입 메가시티’ 만든다고 공언하라, 조언까지 했어요. 하지만 막판 이삼일 전에 나온 거예요. 그땐 너무 늦었죠. 그게 먹혀요? 질 수밖에 없는 선거였어요.”

국민의힘은 108석에 그쳤다. 개헌 저지선이라도 지킨 것에 가슴을 쓸어내릴 처지가 됐다. 이규택은 지난 20대 대선 때 윤석열 대통령 후보를 도왔다. 경기도당 고문으로 있다. 국민의힘이 총선에서 참패한 것에 속상함을 누르지 못하고 이십여 분간 개탄을 쏟아냈다. 지난 얘기는 묻자며 흘려보내달라고 했다. 보수가 참패한 것을 계기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이 나라를 버리기야 하겠느냐”며 위안했다. 

화제를 돌렸다. 

- 관혼상제 다니면서 조의금, 축의금도 꽤 들었겠습니다. 

“많이 들었죠. 아내가 압구정동에서 식당을 운영했어요. 거기서 나온 돈으로 충당했지요.”

간판명은 복조리였다.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돈이 필요하다고 봤다. 민추협 들어갈 즈음부터 부인과 상의해 차린 식당이었다. 장사도 곧잘 돼갔다. 식당은 국회의원 돼서도 이어갔다. 

“지금이야 의원 세비가 1억 원 넘는다고 하던데 그 시절엔 얼마 되지 않았어요. 지역구 사무국장 월급도 내 돈으로 줘야 했어요. 식당을 병행하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한번은 현역 국회의원들 중 식당하는 사람이라는 기사가 크게 난 적도 있어요. 나하고 이해찬 씨 사진이 큼지막하게 나왔죠(웃음).”

- 최형우‧권노갑 등 정치인들도 식당을 열었죠. 

“어쩔 수 없어요. 돈이 없으니까….”

비단 이들 뿐이랴. 정치자금 충당을 위해 부업을 겸하는 정치인들은 꽤 됐다. 
 

“지난 2월 이해찬 의원이 서울 관악구 신림9동세칭 ‘녹두거리’에 곰탕전문점을 연 데 이어 김경재 민주당 종로지구당 위원장도 지난달 14일 마포 민주당사 근처에 초밥 체인점을 개설해 요식업에 뛰어들었다.(중략)

이 의원과 김 씨의 식당업 진출은 ‘직접 벌어 정치자금을 조달함으로써 깨끗한 정치’를 앞장서 실현하는 좋은 본보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들에 앞서 식당업에 진출한 정치인으로는 80년부터 서울 중구 을지로에서 한국관을 운영해온 박광태 의원을 비롯해 권노갑 의원(영등포역사 7층 돈가스 전문점), 이규택 의원(강남구 신사동 복요리 전문점), 이영권 의원(서초동 삼풍백화점 간이스낵코너) 등이 있다.”
-1993년 7월 12일 <한겨레> 기사 중 


이규택은 국회의원 시절 이부영‧유인태‧손학규‧장영달‧신계륜‧박계동 등과 ‘깨끗한 정치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소장파였다. 국민들의 정치 쇄신 요구가 높아지면서 국회에서도 개혁 바람이 불었다. 정치 자금을 직접 벌어 충당하기 또한 그 노력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분당선 여주까지…신한국당行


이규택은 이부영‧유인태‧손학규‧장영달‧신계륜‧박계동 등과 ‘깨끗한 정치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사진은 김수환 추기경, 정주영 회장 등도 깨끗한 정치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사진제공: 이규택
이규택은 이부영‧유인태‧손학규‧장영달‧신계륜‧박계동 등과 ‘깨끗한 정치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사진은 김수환 추기경, 정주영 회장 등도 깨끗한 정치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사진제공: 이규택

- 15대 총선서 어렵게 이겼는데 결국 신한국당으로 갔잖습니까. 그 이유는 뭔가요. 

“그때 신한국당 의원 수가 좀 적었어요.”

- 139명이었지요.(신한국당은 제1당 확보했지만 과반에는 못 미쳤다. 이에 외부 의원들 영입에 적극 나서고 있었다)

“김덕룡 같은 친구가 설득한 거죠. 또 어느 날은 서청원 씨도 오더라고요.”

이규택은 최욱철‧황규선과 함께 서청원을 만났다.      

“김덕룡 씨한테만 갈 것처럼 운을 뗐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한국당에 간다는 말을 확실히 언급하지 않을 때였는데 이분(서청원)이 그러는 거예요. 청와대 가서 YS를 만나자는 거예요. 식사를 하자는 겁니다. 거기 가서 여러 얘기를 하면서 결심을 하게 된 거죠.”

- YS가 뭐라고 얘기해서 결심을 한 겁니까. 

“우리는 같은 동지다. 손잡고 하자.”

 - YS는 설득할 때 대단한 힘이 있다고 하던데요. 

“엄청난 선물을 하나 받았죠(웃음).”

- 뭔가요. 

“분당선을 여주까지 연결하는 지하철, 그걸 YS가 해준 거예요. 제 공이지만 YS가 지원해 줘서 가능했던 것이지요. 청와대 갔을 때 우리 셋한테 공약한 것을 물어보대요. 나는 배짱 좋게 분당선을 여주까지 연결해달라고 했어요. 전철을 뚫어달라고 하니, YS가 깜짝 놀라요. 거기에 무슨 지하철이 들어가느냐는 거예요. ‘아니 각하. 프랑스 테제베 아시죠. 저—끝까지 갑니다.’

이석채 경제수석한테 ‘타당성 검토해 봐라.’ 이후에도 서청원 씨부터 다들 도와줬어요. 상임위도 원래 농림수산위였는데 건설교통위로 옮길 수 있도록 배려해 줬고요. 4년 동안 전철 만드는 데 매달렸죠(웃음).”

YS를 만난 3인방은 1996년 5월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통합민주당 대변인이던 이규택의 신한국당행은 정계개편 서막의 조짐과도 같았다. 그 당시 통합민주당은 뿔뿔이 흩어져 갔다. 대선을 앞두고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의 노무현‧김원기‧김정길 등은 자신들이 비판하던 DJ 당에 입당했다. 

- 1997년 15대선 때는 당연히 김덕룡 대표를 도왔겠네요. 

“아. 물론이죠. 그때 9룡(최형우‧김덕룡‧이회창‧박찬종‧이수성‧이인제‧이한동‧최병렬‧이홍구)이 나왔는데 김덕룡 이 친구가 민주화운동에 옥고도 많이 치르고 깨끗하고 멋쟁이 아니요. 친구지만 정치인으로서 지지했어요. 열심히 뛰었죠.”

- 15대 대선을 취재해 보면 아쉬웠던 것이 최형우가 안 쓰러졌다면 이회창 총재한테 대권이 갔을까 싶은 거예요.(최형우는 문민정부에서 2인자로 통했다. 당내 조직도 가장 많았다)

“안 쓰러졌다면 최형우 씨가 됐을 거예요.”

- 설령 쓰러졌다고 해도 이후 민주계끼리 단합했다면 그 안에서 후보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근데 대세는 이회창 씨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어요.”

- 이수성이 서청원과 정발협(정치발전협의회)을 만들고 반이회창 전선을 펼쳤잖아요. 민주계도 단일후보를 만들었다면 좋았다는 거죠. 당시 이회창은 아들 병역 논란이 있어서 좀 힘들다고 봤거든요. 

“그때만 해도 크게 불거지지 않았습니다. 당내에서는 경선에 임했던 박찬종 씨가 의혹을 제기했는데 공격을 받더니 중도 사퇴 후 따로 나갔잖아요.”

- 박찬종은 나중 이인제를 지지했지요. 

“그래도 이미 많이들 이회창 쪽으로 갔을 때예요.”

반이회창 전선은 힘을 받지 못했다. 민주계끼리는 아니어도 김덕룡‧이인제‧이수성‧이한동 등이 모여 ‘누구든 2차 결선투표에서 이회창과 맞붙게 되면 표를 몰아주자’고 입을 모았지만 이회창이 60% 득표하면서 허사로 돌아갔다.

 

선택의 회환 


이규택은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 대선 후보를 도운 것을 계기로 친박계로 불렸다. 당초 MB를 지지하려고 했으나 박 후보가 자신을 만나 직접적으로 도와달라고 청하면서 지지를 결심했다고 한다.ⓒ사진제공: 이규택
이규택은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 대선 후보를 도운 것을 계기로 친박계로 불렸다. 당초 MB를 지지하려고 했으나 박 후보가 자신을 만나 직접적으로 도와달라고 청하면서 지지를 결심했다고 한다.ⓒ사진제공: 이규택

- 또, 궁금한 게 선거는 잘하시는 분이 대선후보 선택은 못하시는 것 같아요.

“….”

- 1997년은 김덕룡, 2002년은 노무현 대신 이회창, 2007년은 이명박 아닌 박근혜를 밀었잖아요. 모두 안 되는 쪽을 지지한 것이지요. 2002년에야 한나라당 원내총무까지 했으니 이회창을 밀었겠지만 사실상 관계로 보면 노무현과 친했잖습니까. 

“더 가깝죠.” 

- 2007년에는 MB(이명박) 아닌 박근혜를 밀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원래는 김덕룡 씨와 함께 MB를 밀었어요. 같이 만나서 밥도 먹었지요. 하루는 김형오 사무총장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박근혜 대표하고 식사 좀 같이 하자는 거예요.”

17대 대선이 있기 일 년 전쯤이었다. 

“할까 말까 하다가 박근혜 대표 집에서 밥을 먹었지요. 유승민 비서실장과 김형오 사무총장이 양옆에 앉아 있대요. 나보러 의리 하면 이규택이라면서 막 들었다 놨다 하는 거예요. 박근혜 대표는 내 손을 꽉 잡고 도와달라고 했고요.”

- MB도 도와달라고 했을 텐데요.

“MB는 직접적으로 도와달라고는 안 했어요. 박 대표는 도와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는데 하는 수 있나요. 알겠습니다. 도와드릴게요, 했지요. 또 하나로는 이분이 당대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지도자로서 어느 정도 믿음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노무현 정부가 4대악법(과거사법, 언론법, 사립학교법, 국가보안법 폐지법)을 강행했지 않습니까. 박 대표가 맞서 싸움을 잘 하더라고요. 나한테는 사립학교법 큰일 났다면서 국가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엄동설한을 이겨내면서 전국을 다녔지요. 어느 날은 박 대표가 투쟁하면서 삼일간이나 끝까지 잠을 안 자고 버티더라고요. 대단했지요. 홍준표는 같은 당에 있으면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찬성하지를 않나….그걸로 나하고 싸우기도 했어요.”

홍준표에 대해서는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지나가듯 말했다.

“4대악법 투쟁 때를 겪었던 나로서는 박 대표에 대한 신뢰감이 생겼던 것이죠. 그런 연유로도 식당서 만났을 때 도와드리겠다고 하자, 양옆(김형오‧유승민)에서는 남아일언중천금이다, 의리를 지키라면서 막 난리에요. 나중 보니 김형오 씨가 MB한테 가 있대요. 허참….”

기가 차다는 표정이다. 황당해하는 심정이 읽혔다. 
 

18대 총선에서 공천에서 배제된 친박계 의원들은 친박연대를 결성했다. 이규택은 서청원, 홍사덕 등과 함께 친박연대 결성을 결의하고 당 창당에 나섰다고 한다.ⓒ사진제공 : 이규택
18대 총선에서 공천에서 배제된 친박계 의원들은 친박연대를 결성했다. 이규택은 서청원, 홍사덕 등과 함께 친박연대 결성을 결의하고 당 창당에 나섰다고 한다.ⓒ사진제공 : 이규택

- 어쨌거나 그 뒤로는 잘 안 풀렸습니다. 

“….”

MB가 당선되고 난 뒤 2008년 총선서는 친박계 살생부 명단에도 올랐다. 친박계에서는 공천 학살이라며 반발했다. 

- 낙담이 컸겠습니다.     

“그랬지요. 하루는 박근혜 대표가 만나자고 해요. 식당에서 만났더니 이분이 그러는 거예요. 진작부터 우려돼 MB한테 친박계 공천을 신신당부하듯 부탁했다는 거예요. MB도 걱정 말라며 약속했다는 겁니다. 나중 보니 하나도 지켜지지 않은 것이죠.”

박근혜도 배신감을 강하게 느꼈다고 한다. 

“박 대표가 그 말을 하면서 ‘살아서 돌아오라’고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이겠어어요. 탈당해서 출마하라는 말 아니겠어요? 밖으로 나갔더니 기자들이 달려와서는 박 대표가 뭐라고 했느냐며 묻더라고요. ‘살아서 돌아오라고 했다’고 하자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됐지요(웃음).” 

고심 끝에 2008년 3월 서청원‧홍사덕 등과 함께 친박연대 결성을 결의했다. 이규택이 주도해 만든 당이었다. 

“YS가 사람 성을 딴 당이 어디 있느냐며 막 혼냈지요.”

버럭 하던 때의 모습이 선한지 웃음을 보였다. 22대 총선에서는 한 발 나가 조국 혁신당까지 생겼다. 

이규택 전 국회의원은 지난 17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이 민주대장정 현대사부터 친박연대를 구성하기까지 되짚어 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규택 전 국회의원은 지난 17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이 민주대장정 현대사부터 친박연대를 구성하기까지 되짚어 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친박연대는 18대 총선 당시 ‘저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다’는 박근혜의 발언을 광고문구로 인용해 적극 활용했다. 창당한지 한 달도 안 됐지만 14명이나 당선됐다. 정작 이규택은 5선의 고지를 넘지 못했다. 막판에 MB가 여주‧이천을 다녀간 것이 역전을 당하게 된 결정타가 됐다고 했다. 선거구 획정상 여주‧이천이 합쳐 있던 때였다. 

“다 이기고 있었는데…MB가 4‧13 총선을 며칠 앞두고 근처에 위치한 선친 산소를 찾은 겁니다.”

현직 대통령의 한나라당 후보 지원 유세로 읽힐 만했다.

“상대후보가 저한테 지고 있으니까 MB한테 SOS를 청한 겁니다. 앞서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떨어진 거예요. 지금도 그 점은 (MB한테) 서운하더라고요.”

MB가 구태여 여주‧이천까지 방문하지만 않았더라도 질 수 없었다면서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 일임에도 쓰디쓴 심정이 여실했다. 이후는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19대 총선은 여주가 이천과 독립하고 가평‧양평과 붙으면서 정병국에 공천이 밀려 나가지도 못했다. 

- 박근혜 비대위 체제였는데도 공천을 못 받은 거네요. 

“줄 것처럼 했는데…”

은연중 섭섭함을 내비쳤다. 

“내가 판단을 잘 못한 것이 많아요.” 

선택을 잘못했던 것이 아니냐고 했던 앞선 기자의 말을 떠올리며 담담히 수긍했다.  

- 돌아보면 정치란 무엇입니까.(회환을 느끼는 그를 깨우듯 이 점을 환기했다) 

“존F. 케네디 대통령이 쓴 <용기 있는 사람들>이란 책이 있어요. 정치꾼과 정치가를 구별하고 있지요. 정치꾼은 개인의 이익을 먼저 따져요. 정치가는 자신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죠. 그래도 나는 정치가로 살려고 무던히 애를 써왔던 것 같아요. 어느 날은 대여 투쟁하다,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요. 소신을 굽히지 않았죠.”

‘옳게 살았다.’ 자부심만큼은 큰 듯했다. 목소리에 다시금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는 대한노인회 선거와 관련해 좀 더 얘기를 나눴다. 천만 노인 시대다. 이규택은 노인복지청 숙원사업을 해결할 적임자 어필에 주력하고 있다. 과거 홍문표 의원이 131만여 명의 노인들이 서명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한 바 있지만 현실화되지 못하고 표류 상태에 있다.

이규택은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을 역임하던 시절부터 ‘100세 시대, 지금부터 준비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서 회원들의 30년 숙원사업을 이뤄낸 바 있다. 저력을 바탕으로 대한노인회 300만 회원의 숙원인 복지청을 세우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예산낭비 없이 전국의 노인 회원들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노인복지 증진에 전념할 계획이라고 했다. 특히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귀감이 되는 대한노인회장으로서의 올바른 상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엿보였다. 

“저는 우리 회원들만 보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말썽 많아 지탄받는 회장이 아닌, 회원들로부터 존경받는 일꾼이 되겠습니다. 대한노인회를 정상화시키겠습니다.”    

선거는 오는 8월부터 두 달간 실시된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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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K 2024-05-03 16:52:00
와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봐버렸어요.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루어내신 어르신들의 혜안을 믿습니다. 이규택을 한 번 믿어보겠습니다.

강민구 2024-04-27 11:57:58
대한노인회장은 깨끗한 인물 이규택!

김선희 2024-04-27 00:57:39
멋져요 역사 소설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