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첫 검찰총장 탄핵, ‘176석 여당’ 민자당 반대로 부결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1985년 유태흥 대법원장 탄핵소추안이 부결된 후, 한동안 국회에선 ‘탄핵’ 단어를 볼 수 없었다. 노태우 정권 시절 5공 청산 비협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연기 등을 이유로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언급된 적은 있지만, 실제로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지는 않았다.
헌정사 두 번째 탄핵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에야 현실화됐다. 1993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신임 검찰총장으로 김도언 대검차장을 임명했다. 법조계에선 새 정권의 ‘개혁드라이브’에 보조를 맞출 검찰총장으로 그를 낙점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김도언 대검차장은 PK(부산·경남) 출신으로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의 동래고 1년 후배기도 했다.
“신임 검찰총장에 내정된 김도언 대검차장은 ‘면도칼’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닐 정도로 일처리에 빈틈이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 날카로운 인상에 말수도 적은 편인 그는 특별수사통으로 지난 78년 ‘경북도교육위원회 교원자격증 부정발급사건’을 파헤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동기인 이성조 교육감 등 70여 명을 구속한 일도 있다.
신건 전 법무부차관·전재기 전 법무연수원장과 함께 고시 16회의 선두그룹을 유지했던 그는 신·전 씨가 슬롯머신사건 와중에서 물러나는 바람에 이번에 사실상 경쟁이 없는 상태에서 검찰총장으로 내정된 셈.
대검중수부과장·법무부검찰국장·부산지검장 등 검찰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검찰의 꽃’이라 불리는 서울지검장을 거치지 않은 점과 공개재산액이 37억여 원으로 검찰 1위를 차지한 점 등과 관련해 검찰 내에 뒷말이 없지 않다.
김 내정자는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의 부산 동래고 1년 후배로 청와대의 개혁 의지를 강력하게 뒷받침 할 ‘실세 총장’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1993년 9월 16일 <동아일보> ‘면도칼’ 별명의 수사통…김도언 검찰총장 내정자
김도언 검찰총장은 임기 내 초고난도의 과제를 처리해야 하는 임무를 안고 있었다. 12·12 군사반란의 공소시효가 1994년 12월로 만료되는 만큼, 어떤 식으로든 12·12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적 결론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12·12 사태 관련자에 대한 처벌에 미온적이었다는 점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사태를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면서도 관련자들에 대한 법적 제재보다는 ‘역사의 심판’에 맡기는 것이 옳다는 시각을 드러냈다.
“김영삼 대통령은 13일 12·12 사태의 성격을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인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경재 청와대 공보수석은 이날 오전 12·12 사태에 대한 김 대통령의 입장을 발표, ‘12·12 사태는 김 대통령이 이미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밝혀 사실상 ‘군사반란’임을 천명했다. (중략)
이와 관련,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 수석의 발표는 김 대통령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라며 ‘문민정부의 탄생으로 왜곡된 역사에 대한 청산작업이 시작됐으므로 12·12 사태에 대한 법적 제재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후략)”-1993년 5월 14일 <조선일보> “12·12는 쿠데타적 사건”
김영삼 대통령이 처벌에 미온적이었던 것은 여전히 군부 세력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형사처벌을 강행할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던 데다, 국가 안정을 위해서는 처벌보다 ‘용서와 화해’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검찰 역시 김영삼 대통령의 ‘쿠데타적 사건’이라는 표현을 이 같이 풀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가 ‘12·12 사태’의 성격에 대해 ‘쿠데타적 사건’이라는 입장을 표명한 데 이어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고발이 잇따르고 있어 검찰의 사법적 대응 여부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검찰은 우선 청와대 측이 사건을 규정하면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 사건’이라며 ‘적’이라는 표현을 쓴 데 대해 법률적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 김영삼 대통령이 ‘5·18’ 특별담화문에서 ‘과감하게 용서하고 새롭게 화해하자’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이 사건이 쿠데타라면 명백한 위법행위여서 진상조사는 물론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불가피하다’며 ‘그럴 경우 또 다른 혁명적 상황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사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역사적·정치적 평가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중략)
검찰이 이 사건에 대해 사법처리 유보의 입장을 보이고 있는 데는 단순히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을 하지 말자는 뜻만은 아니다.
이 사건의 사법처리는 그 후 계속해서 이어지는 ‘5·17’, ‘5·18’, 5~6공 탄생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사법대응에 한계가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헌정사에 대혼란마저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후략)”-1993년 5월 15일 <경향신문> ‘12·12’ 사법대응 어떻게
실제로 검찰 수사가 막바지에 이른 1994년 8월에는 ‘수사는 엄정히 하되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으로 사법 처리는 막을 것’이라는 예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이후 계속해서 정치보복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피력해 왔고, 여권 내부의 반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기소까지는 가지 않으리라는 관측이었다.
“(전략) 김영삼 대통령이 고려할 정치적 판단의 주안점들로는 △‘왜곡된 군사정치 문화’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역사적 정의 구현’과 △(특히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구 정치세력에 대한) 정치보복 반대 및 방지라는 양대 요소가 가장 중요할 것이라고 참모들은 말한다. 또 △현재 5~6공 구 여권까지도 포함하는 범여권의 최고지도자인 김 대통령으로서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및 그 지지 세력들의 반발 등 여권 내분을 막아야 할 현실적 필요성도 가벼이 할 수 없는 요인이다.
김 대통령 자신은 12·12 사태에 관해 이미 작년 5월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 사건’이라는 규정을 한 바 있다. 그는 그러나 대선 때부터 취임 이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정치보복 금지’를 주장해왔고, 작년 5월의 12·12 성격 규정 때도 ‘사법적 처리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청와대 관계자들의 말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김 대통령은 적어도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실제 처벌은 어떻게든 막으리라는 데는 거의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가령,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한 극단인 ‘유죄판결 및 형 확정’의 경우라 하더라도 김 대통령은 헌법에 따라 특사 등 은전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검찰이 설사 12·12 관련자들에 대해 ‘위법혐의’ 결론을 내리더라도 기소하도록 끝까지 내버려두지도 않으리라는 관측이 유력한 것이 청와대 분위기다. 기소는 곧 전-노 두 전직 대통령들을 법정에 이끌어내는 것인데, 검찰은 이들의 소환조사마저도 피하기 위해 서면조사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략)”-1994년 8월 13일 <조선일보> ‘쿠데타적 사건’ 통치권적 “고려”
결국 검찰은 1994년 10월 26일, ‘12·12는 군사반란’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도 12·12 사태를 사전 모의했거나 적극 가담한 34명에 대해 기소유예하고, 사후에 가담하거나 혐의사실이 가벼운 4명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12·12 사태 고소·고발사건을 수사해 온 서울지검은 29일 이 사건을 당시 신군부세력이 치밀한 사전계획에 따라 군권을 탈취한 군사반란행위로 결론지었다.
조준웅 서울지검 1차장은 이날 최종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12·12 사태 가담자들의 군사반란행위는 인정되나 그동안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 등을 참작, 전원 불기소처분키로 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피고소·고발인 38명 중 12·12 사태를 사전 모의했거나 적극 가담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모두 34명에 대해 기소유예하고 사후에 가담하거나 혐의사실이 가벼운 당시 정호용 50사단장과 83년 사망한 백운택 71방위사단장 등 4명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중략)
검찰의 이번 결정으로 10·26 사건 이후 신군부세력 등장의 계기가 됐던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가 법적으로는 유죄가 인정됐지만 사법적 처벌은 유보되는 선에서 끝나게 됐다. (후략)”-1994년 10월 30일 <경향신문> 12·12는 군사반란
당연히 야권은 거세게 반발했다. 심지어 민주당 내에서는 ‘김영삼 정권이 쿠데타를 용인했다’거나 ‘건국 직후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이승만 정권에 버금간다’는 비판까지 터져 나왔다.
“(전략)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은 12·12 쿠데타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유예 방침이 전해지자 즉각 ‘법 적용의 형평성을 포기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반박하며 정치쟁점화하고 나섰다.
민주당의 박지원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통해 ‘김영삼 정권은 12·12를 쿠데타로 규정하며 동시에 쿠데타를 용인하는 정권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비난하며 기소유예 방침의 철회를 촉구.
특히 강창성 의원은 ‘검찰의 처사는 건국 직후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이승만 정권에 버금가는 역사적 과오이자 직무유기’라고 주장.
조순형 의원은 ‘두 전직 대통령이 국가발전에 기여했는지는 사법부가 판단할 일’이라며 ‘현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할 수도 있는데 검찰이 국가발전 기여를 이유로 기소유예하려는 것은 월권’이라고 지적했고, 율사 출신인 신기하 원내총무는 “적어도 불구속기소는 해야 한다”고 주장. 또 나병선 의원은 ‘차라리 그렇게 할 바에야 처음부터 수사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했고, 장기욱 의원은 ‘죄 지은 사람이 국가발전에 기여했다는 논리는 모순’이라고 강조. (후략)”-1994년 10월 27일 <경향신문> 野 “쿠데타에 면죄부” 반발
결국 민주당은 검찰이 12·12 관련자 기소 유예 결정을 취소하지 않을 경우 김도언 검찰총장을 탄핵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1994년 12월 16일, 민주당이 검찰총장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헌정 사상 두 번째 고위공직자 탄핵이자 첫 번째 검찰총장 탄핵이 현실화된다.
물론 탄핵안은 부결됐다.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은 176명의 국회의원을 가진 초거대여당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통과는 어려웠다. 국회가 헌정 사상 처음으로 검찰권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는 점에 의의를 둘 뿐이었다.
“19일 열린 임시국회 본회의에서는 12·12 관련자의 기소유예조치와 관련해 민주당 조홍규 의원 등 야당 의원들이 제출한 김도언 검찰총장에 대한 탄핵소추의 건이 부결됨으로써 12·12 정국을 마감.
무기명 비밀투표로 실시된 김 총장에 대한 탄핵소추 가부 투표는 재적의원 249명 중 가 88명, 부 158명, 기권 1명, 무효 2명으로 부결됐으며 민주당 장기욱 의원의 ‘선 법사위 심의, 후 탄핵소추의결’ 제안도 역시 부결.
표결에 앞서 조 의원은 제안 설명을 통해 ‘죄는 있고 벌은 없다’는 취지로 검찰과 정부 측을 통렬히 비난했으나 민자당 의원들은 반대 토론은커녕 일절 대응마저 하지 않아 맥빠진 분위기를 연출.”-1994년 12월 20일 <경향신문> 12·12 정국 완전 마감
한편 김도언 검찰총장은 임기를 마친 후 퇴임한 지 나흘 만에 여당인 민주자유당 부산 금정을 지구당 조직책으로 임명됐고,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부산 금정구을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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