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균환 “민추협 정치 단체로 인식돼 저평가 받는 것” [민추협 되짚기⑰]
스크롤 이동 상태바
정균환 “민추협 정치 단체로 인식돼 저평가 받는 것” [민추협 되짚기⑰]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4.08.05 09:27
  • 댓글 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균환 민추협 공동회장(동교동계)
“군사 독재 끊는데 결정적 역할한 게 민추협”
“민추협 시절, 교편생활한 부인이 생계 책임”
“민주의 민자만 꺼내도 남산으로 끌려들어가”
“16대 총선 앞두고 386운동권 정치권 영입”
“군부서 학생데모 조장, 자칫 먹잇감 됐을 것”
“DJ 반대했으면 후농 권한대행 못 맡았을 것”
“김대중 김영삼 같이 했기에… 신민당 성공”
“DJ 통일민주당 깬 것은 노선 차이였다고 봐”
“박근혜 영입하려 만나자 통일부 장관 원해” 
“김원기 등 열린우리당 제안해 왔지만 거절”
“盧 6‧15 남북 정상회담 자료 공개, 큰 잘못”
“DJ에 내각제 지켜져야 한다며 분권형 제안”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정균환 민주화추진협의회 신임 회장이 민추협이야말로 군부 독재 정권의 사슬을 끊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단체라고 소회하고 있다.ⓒ시사오늘
정균환 민주화추진협의회 신임 회장이 민추협이야말로 군부 독재 정권의 사슬을 끊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단체라고 소회하고 있다.ⓒ시사오늘

“박정희 18년, 전두환 7년 독재를 끊어내는데 결정적으로 역할을 한 단체가 김대중 김영삼 두 분이 만든 정치결사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였습니다. 민추협 회장을 맡은 지금이 최고의 순간입니다.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자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도동계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 더불어 민추협 공동회장을 맡게 된 동교동계 정균환 신임 회장(이하 정균환)의 강조점이다. 

지난달 8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이석현 전 회장에 이어 바통을 넘겨받은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이로써 사단법인 민추협은 권노갑 김덕룡 공동이사장, 정균환 김무성 공동회장 체제로 새로 개편하게 됐다.   

정균환은 포스트 DJ(김대중)로 주목받아온 인물 중 한 명이다. 국민의정부 시절 정통 민주 진영의 정계개편을 주도했다. 내무통으로서 DJ의 전폭적 신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통일사회당서 민추협으로 


- 정치 입문을 찾아보니 통일사회당부터 시작했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젊은시절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았어요.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김철 선생(통일사회당 대표)을 중심으로 전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참여했지요.”

1943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재학 중 통일사회당에 입당했다. 

 - 유성환 전 의원도 생전 인터뷰 때 사회당에서부터 정치를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분도 처음엔 사회주의를 지향한 분이었을걸요. 국회에서 발언한 것이 문제가 돼 감옥도 갔지요.”

5공화국 피해자인 ‘통일 국시’ 사건의 유성환. 전두환 정권 때 국회 본회의에서 “반공이 국시가 아니라 통일이 국시가 돼야 한다”며 소신 발언을 했다. 신군부에서 문제 삼아 국가보안법 혐의를 씌워 구속하고 의원직을 제명했다. 

- 10대 총선에서 무소속 후보로 고향인 전북 부안-고창군 선거구에 출마했습니다. 당선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출마한 건지요.

“그때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대한민국이 이대로는 안 된다, 바꿔야겠다, 그 중심은 청년들이어야 한다, 젊은 패기로 자신감이 상당했을 때니까요.” 

- 하지만 낙선했는데요, 그러다 민추협은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건가요. 

“원래는 (성균관) 대학원 졸업하고 전주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계획이었어요. 집사람(이옥자)이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는데 전주대 총장이 선배였어요. 시간강사라도 얻으려고 겨울 양복 한 벌을 맞춰 입었지요.”

민추협이 만들어질 무렵이었다. 

“직접 가담해 민주화 운동을 할 것인가, 청년들을 대상으로 의식화 교육을 할 것인가, 고민이 들더라고요. 집사람도 ‘친구 남편들은 전부들 좋은 직장을 다녀 저녁거리 걱정 없이 살고 있다’며 강의를 나가라고 하더군요.”
 

DJ는 처음에 민추협 참여에 소극적이었지만 신민당 승리를 기점으로 민추협에 적극 참여했다. 사진은 1986년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YS가 성명 발표 후 DJ,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DJ는 처음에 민추협 참여에 소극적이었지만 신민당 승리를 기점으로 민추협에 적극 참여했다. 사진은 1986년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YS가 성명 발표 후 DJ,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 어쨌거나 민추협을 택하게 된 거네요?

“정인명 선생이라고 고향 선배가 있었어요.”

자초지종을 설명해 나갔다. 

“변호사였는데 이분이 김대중(DJ) 대통령과도 친분이 아주 두터웠어요. 신민당 상무위원을 했는데 야당 내 고창 부안 정읍 이쪽으로는 중추적 역할을 한 분이었지요. 그분이 그러는 거예요.”

정인명 : 야, 네가 선생 하려고 공부했냐? 전부들 몸 바쳐서 민주화 운동하는데 너만 편하게 잘 먹고 잘 살려는 것이냐. 

“그런 얘기까지 듣고 나니 성격상 민추협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죠. 선배로는 정인명 선생이, 동지적 입장에서는 이협 의원(동교동계, 13~16대 역임)이 제일 많은 영향을 줬어요. 이분(이협)이 지금은 아파서 활동을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 이협 의원은 최기선 시장(인천시장 1‧2‧7대 역임)과 굉장히 친했지요. 

“최 시장이 (이협의) 서울 법대 1년 후배일걸요. 최 시장은 나하고도 친했어요. 둘이 더 친했지만.”

- 원래 최 시장이 동교동에 가려다 부인이 말려서 상도동으로 갔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더 잘 아시네(웃음).”

최기선의 부인 최영숙은 김영삼(YS)이 이끌던 연구소의 비서로 재직했다. 당시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하던 이협이 최기선을 소개했다. 서울의 봄 이후 최기선은 이협을 따라 동교동계를 들어가려 했다. 그의 부인은 반대했다. 이협이 동교동에 갔으니 최기선은 상도동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훗날 야권이 단일화해야 하지 않겠냐며 그때를 대비해 노력하려면 이협과 최기선이 양편으로 나뉘어 있는 게 좋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얘기를 전하자, 정균환은 “뿌리까지 아시네” 하면서 옅은 미소를 보내왔다. 

“민추협 얘기는 취재하면서 좀 들은 게 있습니다.” 

얼굴에서 ‘그렇군요’ 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목에 사레가 걸렸는지 느닷없이 기침을 해댔다. 

“어제 술을 많이 먹어서 목이 칼칼합니다.” 

정균환은 양해를 구하며 물병을 들었다. 벌컥벌컥 마셔댔다. 술을 많이 마시냐고 물었다. 그렇다며, 끄덕없어하는 눈치다. 올해 81세, 나이가 무색하게 건장했고 활기차 뵀다.  

 

고난의 동고동락


정균환 민주화추진협의회 신임 회장이 민추협이야말로 군부 독재 정권의 사슬을 끊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단체라고 소회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균환 민주화추진협의회 신임 회장이 민추협이야말로 군부 독재 정권의 사슬을 끊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단체라고 소회하고 있다.ⓒ시사오늘

 

- 민추협을 활동하면서는 생활은 어떻게 꾸려나간 겁니까. 이석현 부의장(19대 후반기)은 오락실을 운영하던 선배(황준규)한테 후원을 받아 가족 생계를 이어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경우는 없었는지요. 

“나는 집사람 없었으면 못 견뎠을 거예요. 아내(이옥자)가 교편생활을 해 끼니를 해결했어요. 자식은 딸만 하나에요. 식구가 많은 집보다는 형편이 좀 나았다고 봐요. 집사람이 살림하랴 애 키우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애가 아프면 어떡할까 싶어 병원이라도 가려고 돈을 요리조리 숨겨 놓았는데 내가 어떻게든 찾아서는 가져가버리니까 더 엄청 힘들어했지요.”

생각하면 미안한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다 다시금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듯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민추협을 결성할 때는 민주의 민자만 꺼내도 남산으로 끌고 가 두드려 패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 있던 때였어요. 이협 의원도 <중앙일보>에서 그만두라고 했어요. 그 뒤 인쇄소 관계된 일을 했지요. 함께 민추협 기관지(민주통신)를 인쇄할 때는 을지로 골목을 돌며 사정사정해야 했어요. 전경이 계속 왔다 갔다 할 때라 첩보 작전이 따로 없었죠. 광화문 사거리가 있는데 저녁께 모여 뿌리고는 했어요.

한번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전두환 관련 행사가 있던 모양이에요. 사람들이 많이 몰리던 러시아워 때였는데 민주통신을 뿌리는 것을 봤는지 나를 잡으러 온 거예요. 확 뿌리치니까 입 막고 목 눌러 숨 못 쉬게 하고, 코에다 손가락 집어넣고는 확 찢어버린다고 해요. 무릎, 팔, 등을 구타한 뒤 강제로 차에 태우고는 건너편 파출소에다 던져버리더라고요. 들어가 보니 이협 의원부터 이미 많은 이들이 잡혀 있는 겁니다.”

울화통이 치미는지 분을 삭였다. “제가 일방적으로 얘기해도 됩니까?” 현실로 돌아온 모습으로 양해를 구해왔다. 

- 네 물론입니다. 

“민추협 얘기만 하면 그때로 돌아가 버리는 것 같습니다. 사무실이 종각 옆에 있었는데 종로나 을지로에서 데모를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난지도가 서울의 중심이 됐습니다마는 그때는 쓰레기 매립장이었습니다. 낮에는 최루탄을 뿌려 대 괴롭히고 깜깜한 밤에는 여러 사람을 잡아다 난지도나 고도속도로 한가운데에 한 명씩 떨구는 겁니다.”

우범 지대라 무서워 오도 가도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정균환은 신체적으로 가장 위험했던 때를 상기했다. 

“태극기를 양쪽에서 꽉 잡고 앞장서는데 전경들이 워커 사이로 최루탄을 따서는 내 발등에 얹는 거예요.”

- 지랄탄 이라고 하지요. 

“최루탄이 아주 독해요. 발등에서 터져 버려요. 발등도 깨지고 속된 말로 X알도 터져버릴 뻔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일반 병원에서는 치료가 안 되고 경찰 병원에서만 치료를 해줬습니다. 걔들한테 치료받는다는 게 용납이 안 돼서 처음엔 안 가고 버텼는데 도저히 낫지를 않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마장동에 있는 경찰병원으로 가서는 겨우 치료해 나은 적이 있었지요.”

 

386 정치권 영입 


- 저희가 6월 항쟁 되짚기도 해보고 민추협 되짚기도 해보면, 학생운동권 분들이 많잖아요. 근데 민주화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운동권보다는 민추협이라는 정치 결사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거든요. 즉 전두환이 항복할 수 있었던 것은 민추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입장입니다. 따지고 보면 전두환이 학생운동한다고 항복을 했겠냐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 평가는 왜 민추협이 민주화를 이룩한 주역임에도 저평가를 받느냐는 겁니다. 학생운동권이 마치 민주화를 이룩한 것처럼 보이나 하는 것에 문제인식을 갖고 있는데요. 어떻게 봅니까. 

“아주 좋은 지적이에요. 냉철하게 생각하면 모든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하려면 정치력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학생들은 젊은 혈기로 앞뒤 가리지 않고 몸을 던져버리지 않습니까? 그걸 빌미로 제2, 제3의 군부가 명분을 갖고 계엄령을 선포해 국민 탄압으로 나간다면 민주화된 세상을 만들기가 어려웠겠지요.”

- 학생운동권이라는 게 그 당시를 보면 인천 5‧3사태도 일부에서 너무 과격한 나머지 사실 실패했다고 보거든요. 

“먹잇감이 된다니까요. 오히려 군부에서 학생들이 데모하게끔 조장을 합니다. 그래놓고 강하게 나가는 거예요. 일반 국민을 설득하는데 유용하게 쓰려고 말입니다.”
 

정균환 민주화추진협의회 신임 회장이 민추협이야말로 군부 독재 정권의 사슬을 끊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단체라고 소회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균환 민주화추진협의회 신임 회장이 민추협이야말로 군부 독재 정권의 사슬을 끊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단체라고 소회하고 있다.ⓒ시사오늘

 

- 그들 내부를 봐도 직선제 쟁취파가 있었겠지만 대한민국을 다 부정해버리고 새롭게 나라를 건설하자는 제헌의회파도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학생운동권이 민주화를 이끌어 가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죠. 근데도 왜 민추협이 저평가를 받고 있냐는 겁니다. 

“민추협을 정치 단체로 인식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정치는 아무리 잘해도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인정받지를 못해요. 국회의원 되려고 저러는 거 아니야? 정치와 그 주체를 불신하다 보니 누구든 욕하고 보는 것이죠.”

- 역사는 승리자의 편이잖습니까. 결국은 YS나 DJ 세력이 학생운동권 세력한테 주류 자리를 다 내주게 된 현 상황 때문에 역사적 평가가 박한 것은 아닐까요. 

“역설적인 것은 학생 운동하는 사람들을 내가 영입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정치권의) 중심이 된 거예요. 가끔 보면 당시 세상을 바꾼 주역들을 폄훼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압니다. 내 앞에서는 하지는 않지 만요.”

- 왜 그런다고 봅니까. 

“우리는 당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정균환은 새정치국민회의 시절 실권자였다. 총재특보단장과 사무총장을 맡았다. 16대 총선에 앞두고 386운동권 출신의 신진들을 대거 영입했다. 전대협 출신의 우상호 이인영 등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DJ와 후농, 동교동계 


- 동교동 내부가 후농(김상현)한테 너무 가혹했다고 평하더라고요. 12대 총선 기간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식의 비방을 많이 했다고 하던데 후농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추협을 출범하기까지 후농의 역할이 어마어마한데 너무 저평가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교동계 분이니까 관련해 들어보고 싶습니다. 

“후농을 높이 평가합니다. 누구와도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분이었어요. 그런 큰 정치인이 나오기도 전무후무하고 쉽지 않을 겁니다. 동교동계 내에서도 이해관계에 얽혀 여러 얘기들이 있을 수 있겠죠.”

- 후농 생전에 인터뷰를 했는데 DJ가 사무총장 한 번 안 시켜줬다고 합니다. 민추협과 신민당 출범에 동참한 것 때문에 DJ한테 찍혔다고 보던데요. (후농은 민추협이 결성될 당시 미국 망명 중이던 DJ가 처음에는 동교동계 참여를 반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건 아니죠. 김대중 대통령이 반대했으면 후농이 DJ를 대신해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나중에는 DJ가 공동의장을 맡지 않았나요? 신민당을 만들 때도 김대중 김영삼 두 지도자가 함께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국민적 호응을 적극적으로 얻을 수 있었고 말입니다.” 

- 조윤형 정대철 전 의원과 인터뷰해보면 DJ가 반대해 신민당으로 가지 못하고 민한당으로 출마해 낙선했다고 합니다. DJ가 나중에 미안하다며 사과했다고 하던데요. 애당초 신민당보다 민한당을 권유한 이유는 뭐라고 봅니까. 그 정도로 정세 판단을 못했던 건지가 궁금하더라고요. 

“그 부분은 모릅니다. 못 들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뤄진 일인 듯합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현실 정치인으로 돌아가 가늠해 보면 DJ 입장에서는 어차피 우리(동교동계)가 참여하든 안 하든 군부 독재 정권은 유지가 될 테니 이를 최대한 막는 쪽을 고민하면서 전략적 판단을 내렸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YS와의 결별 


지난 2007년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동교동계를 주축으로 한 김대중 정부 인사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  당시 민주당 부대표로 있던 정균환을 비롯해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김홍일 박지원 박주선 등의 인사들이 참석하고 있다.ⓒ연합뉴스
지난 2007년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동교동계를 주축으로 한 김대중 정부 인사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 당시 민주당 부대표로 있던 정균환을 비롯해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김홍일 박지원 박주선 등의 인사들이 참석하고 있다.ⓒ연합뉴스

- DJ는 87 대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과 분당해 평민당을 차렸습니다. 굳이 갈라서려고 한 게 내부에서는 도저히 YS를 이길 확률이 없다고 봐서인가요. 동교동계 분들과 인터뷰 해 보면 DJ가 경선할 경우 YS를 이기기 힘들었다고 보더라고요. 같은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통일민주당은 YS가 장악하고 있는데 이기기가 쉽지 않았죠.  또 하나는 (투쟁 방식 관련해) YS계는 온건인데, 우리(동교동계)는 타협할 수 없다고 본 것에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충분한 답변은 아니었다. 그러나 투쟁 노선 방식과 관련해 동교동계는 자신들을 강성에 빗대고는 했다. DJ를 수행했던 박광태 전 광주시장도 재작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동교동계가 재야와 함께 거리 투쟁을 더 많이 했다고 이야기하기는 했었다. 그는 “상도동계는 강성 민주세력이 없다. 민주세력 중에서는 조금 온건이었다. 강력한 투쟁은 동교동계에서 많이 했다”고 했다. 

“(양측이 함께 하기에는) 근본적인 노선에서 오는 차이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끝까지 함께 하기 어려웠다.’ 정균환은 그 점을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다만 지금 와서 잘 못 얘기하면 갈등만 유발할 수 있다고 봐요. 민추협은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 두 분이 만들고 동교동계 상도동계가 역할을 해 민주화와 선진화를 이뤄낸 단체입니다. 그런 단체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 민추협 회장을 맡은 겁니다. 두 분 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김영삼 대통령 없이는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 개혁을 성공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을 거예요. YS가 초벌 정리해주고, DJ가 뿌리 내리는 역할을 해줬습니다.

각자 개성이 있으면서 서로 보완재 역할을 했다는 것을 국민께서 인정해 줬기 때문에 나란히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두 대통령이 이끌었던 때야말로 대단한 운이 대한민국에 왔던 시기였죠.”

 - 동교동계가 오히려 강경파처럼 얘기했지만 통치 기간을 보면 DJ가 더 온화한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강경하다고도 얘기하지만 사실은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분 아닙니까. 독재 권력을 무너뜨려야 된다는 원칙은 분명했지만 대통령이 되면서 온화하게 한 것은 철학이 반영됐기 때문인 거죠. 또 그게 우리 국민 모두가 바라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YS가 독재 정권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하나회 군을 해체시켜야 된다는 뜻에서 단호하게 했다면 DJ는 용서를 통해 더 강한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박근혜와의 비화


사진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화기애애하게 만나고 있는 모습이다.ⓒ연합뉴스
사진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화기애애하게 만나고 있는 모습이다.ⓒ연합뉴스

- 예전 한화갑 전 대표(새천년민주당) 얘기 들어보니 DJ가 차기 대통령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봅니까. 

“그건 모르지만, 2002년 김대중 대통령의 심부름으로 박근혜 당시 미래연합 대표를 우리 쪽으로 영입하고자 자주 만났던 게 접니다.” 

정균환은 국민의정부 기간 여당발 정계개편 준비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국민의힘은 김종필(JP) 자민련과의 합당이 불발되면서 야당인사를 비롯해 각계 인사, 386운동권 신진 그룹 영입에 나섰다. DJ 가신그룹으로서 권노갑과 함께 동교동계의 양갑으로 불렸던 한화갑이 외부인사 영입을 총괄 책임졌다면 정균환은 분야별 영입 실무를 담당했다. 그 과정을 거쳐 새천년민주당이 만들어졌다. 박근혜 영입 또한 이 시기 공을 들였던 일화 중 하나였다. 정균환은 그 시절을 돌이켜 비화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대통령께 그랬어요.”

정균환 : 국내외 정치에 힘이 생기려면 전 국민이 똘똘 뭉쳐야 하는데 그러려면 동서화합밖에 없습니다. 
DJ : ….
정균환 : 박정희 대통령을 용서하는 것으로는 실질적으로 국민 피부에 와닿지가 않습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 하시는 말씀이 ‘박근혜와 같이 정치할 수 있도록 하자’며 결정을 내린 겁니다.”

이후부터 박근혜 영입 시도가 전개됐다. 

“박 대표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신당을 이끌고 있을 땐데, 국회에서 단둘이 자주 만나 ‘같이 합시다’  설득에 들어갔죠. 많은 얘기 끝에 박 대표도 오케이 하더라고요. 근데 뭐라고 제안을 해오냐면 통일부 장관을 달라는 거예요.”

- 어떤 이유로 통일부 장관을 달라고 했습니까. 

“박근혜 대표가 남북문제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박근혜는 국민의정부 당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도 하는 등 한반도 현안에 대한 관심을 피력했다. 통일부 장관직을 희망했던 것으로 보아 남북 현안 문제에 주도적으로 관여해 나가며 장차 대권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했을 거로 짐작되고 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 ‘대통령과 상의해 말씀드리겠다’고 한 뒤 어르신께 보고를 드렸어요. 그랬더니 ‘고민 좀 해보자’고 하세요.”

- 그런데요?

“차일피일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고 만 거예요. 실기해버린 것이죠.”

- 이해가 안 가네요. 

“박재규 같은 인사(박정희 핵심 측근의 동생)한테도 통일부 장관을 시키고 이종찬 같은 우파도 국정원장을, 비서실장도 김중권을 시켰잖아요.”

본인도 DJ가 과감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통일부 장관을 시켰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겁니다. 대통령을 했더라도 저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늘의 박근혜가 아니고 화합의 대통령이 됐을 텐데… 참 안타까워요.”

국민의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에 박근혜를 임명했다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 지형이 크게 달라졌을 터였다. 그 점은 아쉽다고 생각됐다. DJ는 왜 결정을 미룬 것일까. 남북문제에 누구보다 공을 들였던 대통령이었다.

사상 최초로 6‧15 남북 정상회담도 성사시킨 그였다. 다른 어떤 자리보다 통일부 장관직을 중요히 여겼을 수 있다고 가늠됐다. 김대중 정부 당시 초대 통일부 장관은 현대그룹 명예회장인 정주영의 소떼 방북 성사를 도운 관료 출신의 강인덕이 맡았다. 그다음 임동원 정세현 등 코드가 맡는 인사들이 임명됐다. 이날 정균환은 DJ가 왜 고민만 하다 끝낸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답하지 않았다. “박지원 비서실장이 반대한 것이냐” 는 질문에도 특별한 언급을 안 했다. 

 

새천년민주당 잔류한 이유 


정균환 민주화추진협의회 신임 회장이 민추협이야말로 군부 독재 정권의 사슬을 끊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단체라고 소회하고 있다.ⓒ시사오늘
정균환 민주화추진협의회 신임 회장이 민추협이야말로 군부 독재 정권의 사슬을 끊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단체라고 소회하고 있다.ⓒ시사오늘

- 또 하나 궁금한 게 12대 총선 기간 신민당 공천은 왜 못 받은 건가요. 달라고는 안 해봤나요. 

“안 줬어요.”

- 누가 결정한 건가요. 

“김상현 의장(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이었는데 자리 생각 않고 이협 의원과 열심히 도왔어요. (재야 출신의) 이철한테도 (성북갑) 공천을 줬는데 ‘돌아온 사형수’라는 타이틀을 만들어낸 게 이협 의원이었죠.”

- 이철 의원이 우리와 인터뷰할 때는 학생운동권 쪽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기억하더라고요. 

“아니에요. 선거를 김상현 의장을 비롯해 민추협 주도로 했는걸요.”

- 정치를 하면서 승승장구해왔습니다만, 계속 잘 되려면 16대 총선 때 열린우리당으로 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랬다면 국회의장은 했을 거라는 얘기가 있는데 말입니다.
 
“국회의장 정도는 하고 배지도 더 달았겠죠.”

본인도 수긍했다. 

“사실 이 얘긴 이번에 처음 털어놓는데….”

몸을 앞으로 숙이며 얘기한 내용인즉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을 돌이켜 김원기(열린우리당 초대 대표, 6선) 정대철 모두 정균환을 영입하고자 했다는 후일담이었다. 
 
하루는 김원기로부터 연락이 와 저녁 약속을 잡았는데, 정대철로부터도 만나자는 요청이 왔다. 롯데호텔 38층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커피숍에서 차 한 잔을 했다. 결론은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하자”는 제안이었다. 김원기와의 저녁 약속 시간이 다다랐고 이를 알게 된 정대철도 합류를 희망해 이번엔 셋이서 식사를 하게 됐다. 김원기 역시 “노무현 대통령과 당을 만들어 정치를 같이 하자”고 설득해왔다. 

“모두들 그 말을 하고자 나를 만난 겁니다.”

- 그래서 뭐라고 답했습니까. 

“단호하게 거절했어요.”

- 왜 그랬습니까.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전 세계 대통령들과 정상회담을 할 텐데 전 정부의 (6‧15) 남북정상회담한 것을 잉크도 마르기 전에 국내법으로 처리하고 국면 돌파에 악용하려 한 점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 원수로서 절대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국제적 망신이자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이었어요. 대한민국에 도움이 안 될뿐더러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불법 대북 송금 특검이 다뤄졌던 것은 참여정부 때였다. DJ 비서실장이었던 박지원 등은 이 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 하나, 자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당을 깨고 새로 당을 만드는 대통령이 어디 있습니까. 전 세계에 그런 대통령은 없습니다. 구(舊)당 사람들을 구태 세력으로 몰아 새로 당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새천년민주당 창당 때 중심이었던 내가 어떻게 그 길에 동의해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분통이 터지는지 톤이 계속 높아졌다. 그 당시 핏대를 높이며 단칼에 거절했을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정균환이 요지부동한 모습을 보이자, 김원기 정대철은 “청와대 밖에서 따로 노무현 대통령과 얘기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까지 했다. 정균환은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로 표적이 됐다고 하는데….

“그 뒤로 엄청나게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총선에서) 정균환을 떨어뜨리기 위한 TF팀까지 만들어졌고, 권력기관들이 총동원되다시피 된 겁니다.”

13대 총선부터 전북 고창에 출마해 내리 4선을 역임했고, 16대 국회 때는 초대 원내사령탑으로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17대 총선부터 낙선의 고배가 이어졌다. 열린우리당이 아닌 새천년민주당에 잔류하면서 생긴 여파였다. 잠룡의 꿈을 접고 정치적 부침을 겪어야 했다.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4당 원내총무(원내대표) 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새천년민주당 원내총무 정균환을 비롯해 한나라당 홍사덕 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 자민련 김학원 등이 참석하고 있다.ⓒ연합뉴스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4당 원내총무(원내대표) 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새천년민주당 원내총무 정균환을 비롯해 한나라당 홍사덕 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 자민련 김학원 등이 참석하고 있다.ⓒ연합뉴스

- 새천년민주당은 호남에 정치적 기반을 둔 정당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소수 세력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당을 전국정당화하려면 대북 송금 특검을 통해 전임 대통령인 DJ와 차별화하고 정계개편을 통해 새롭게 출발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김대중’을 죽여야 전국 정당이 됩니까? 정상회담은 몇십 년 이상 절대 공개 않고 금고에 놔두었다 역사물로 써먹는 겁니다.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잉크도 마르기 전에 까 보여야 전국정당이 되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 아무튼 아쉽습니다. 열린우리당에 합류했다면 정치적 미래가 보장됐을 텐데 말입니다.

“여러 사람들도 그 얘기를 합디다. 눈 감고 합류하면 좋지 않았겠냐. 중심이 됐을 텐데 하면서요. ‘총무님 모시고 가야 한다’는 의원들도 많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울면서 전화도 해왔어요. 그 뒤로 시련을 많이 겪으면서 나도 사람인데 되돌아볼 거 아닙니까. 곱씹어 생각해 봐도 결론은 같아요. 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나는 그 길을 다시 걸을 것입니다.”

-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원칙이 아니니까요. 내가 정치를 오래 하다 보니 두 가지 유형이 있어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실리를 추구하는 현실 정치인, 나 같이 그렇게 생각하면서(소신을 지키면서) 사는 정치인 두 부류가 있더라고요. 어느 경우든 비난하고 싶어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 정치인이 자기의 뜻을 펼치려면 주류에 있어야 한다, 예전 YS가 장경우 의원을 설득할 때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맞는 얘기 같더라고요.

“힘이 있어야 정치 개혁도 할 수 있겠죠. 동의합니다.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이 주류가 되고 중심이 돼야 한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을 가져버리니까 밀리더라고요. 그걸 내가 경험을 했어요.”

- 후회 같은 것은 없냐는 겁니다. 

“없어요. 한 번 더 국회의원 배지 달면 뭐 합니까. 의장하면 뭐 합니까. 16대 여소야대 국회에서 운영위원장을 했고,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 원내총무를 두 번이나 연임한 사람은 나뿐이에요” 

 

DJ와 정균환 


1998년 3월 국민의정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균환 새정치국민회의 신임 사무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연합뉴스
1998년 3월 국민의정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균환 새정치국민회의 신임 사무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연합뉴스

- 동교동계 본류가 아닌데 DJ한테 넘치는 사랑을 받은 이유는 뭘까요. 

“본류가 뭡니까.”

조금은 격양된 모습으로 반문해왔다. 

- 아무래도….

“김대중 대통령과 뜻이 같고 철학이 같은 사람들이 본류입니다.”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안다는 듯 일축하며 냉큼 자신이 말하고 싶은 내용으로 방향을 틀어 답해나갔다. 

 “나는 참 능력 이상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야당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여당 총재특보단장 등을 할 때는) 5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 말하는 입가에는 어느 틈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끝을 흐리기도 했다. 

“대통령께는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더 잘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있을 뿐이죠.”  

- 한화갑 대표는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DJ가 없으니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더라, 알고 보니 DJ의 정치적 기생충이었다고 말입니다. (한화갑은 지난 2020년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DJ는 자기 철학을 정립한 분이다. 자아가 강한 정치 지도자였다. DJ 생각은 무오류다. 옳은 생각을 하니까 무조건 따른다. 우리 비서실 생각이 그랬다”며 “내가 정치적 기생충이란 말을 쓴다. 솔직히 나는 DJ의 기생충이었다. 모체가 없으면 영양분이 없다”고 한 바 있다. 정치적으로 그만큼 추종하고 의지를 했다는 말일 것이다)

“나도 똑같은 생각이에요. 그분(한화갑)은 비서 출신이고 나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 김대중 대통령의 힘을 믿고 역할을 한 것이었죠.”

 

내각제 무산, 왜 


정균환 민주화추진협의회 신임 회장이 민추협이야말로 군부 독재 정권의 사슬을 끊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단체라고 소회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균환 민주화추진협의회 신임 회장이 민추협이야말로 군부 독재 정권의 사슬을 끊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단체라고 소회하고 있다.ⓒ시사오늘

 

- 이후 정치 행보를 보면 국민의당 시절엔 안철수 대표를 지지했고, 20대 대선 때는 민주당에 복당해 이재명 대표를 지지했습니다. 지금은 탈당해 새로운미래에 합류했는데 왜 그런 것인지요. 

“아까 얘기한 맥락에서 풀어보면 답이 나올 겁니다.”

정균환은 새천년민주당에 잔류한 것을 ‘옳은 길’에 빗댄 바 있다. 

“민주당에서는 그런 정치가 실종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이낙연 대표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힘은 없지만 옳은 정치를 실현시킬 적임자라 믿고 있습니다. 그런 원칙과 확신이 있으니 (합류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겁니다. 안 그러면 왜 올려줍니까. 나는 함부로 이름을 거는 사람이 아닙니다.”

- 마지막으로 질문하면요. 87년 체제를 잘 만들었는데 한계가 뚜렷하다고 하잖아요. 

“권력구조를 바꿔야죠.”

- 어떻게 바꾸는 게 좋다고 봅니까. 

“분권형 대통령제로 바꿔야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내각제를 싫어해요.”

- 왜 싫어한다고 봅니까. 

“독재 정권의 연장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죠. 남북 관계가 대립하고 있기에 내각제로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볼 겁니다. 통치력에 대한 염려가 있는 것이지요. 직선제를 쟁취한 만큼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고 싶다는 마음이 잔존해 있다고 보여요.”

- 국민의정부는 내각제 개헌 약속을 고리로 DJP연합이 성사돼 출범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무산됐는데 왜 그랬다고 보나요. 

“현실에 부닥친 이유가 크죠. 국민이 원치 않는 데다 여소야대 국면이라 돌파해나가기 어려운 구조였어요. 약속은 지켜야 하잖아요. 내가 김대중 대통령한테 건의한 적이 있어요.”

정균환 : 내각제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DJ :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정균환 : 직접적으로 내각제를 추진하긴 어려우니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하고 총리는 국회에서 뽑는 프랑스식 분권형 대통령제로 전환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던 정균환은 소책자를 만들면서까지 대안을 만드는 데 주력했지만 성공시키지는 못했다. 이후 16대 대선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 공약에 분권형제 추진을 도입하겠다고 넣었지만 이 또한 무산됐다. 결과적으로 “내가 역부족이었던 거죠” 이 말로 대신했다. 

- 김무성 전 대표(새누리당)는 ‘개헌은 대통령 결단에 달렸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결단의 문제 아닐까요. 

“막상 쉽지 않아요. 요즘 봐도 여소야대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그거(개헌) 한다고 하겠어요?”

- 개헌은 야권에서도 원하는 것이니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요. 

“한 예를 들게요. 국회운영위원장 할 때 말입니다. 밤낮없이 여야 의원들 만나 설득하러 다녔어요. 너무 피곤해 대상포진이 걸리기까지 했지요. 국민의정부 개혁을 뒷받침하고자 몸 던져 헌신하고 바쳤어요. 하지만 진영 정치에서는 아무리 좋은 안을 내놔도 상대 당이 반대해버리면 그만이에요.”

맞는 말이었다. 오히려 정치권은 갈수록 극심한 냉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는 민추협의 발전방향을 담론으로 좀 더 대화를 이어갔다. 단체의 앞날과 관련해 긍정적 모색을 하고 있었다. 원로라는 말이 무색하게 시종일관 건강한 기백이 넘쳤던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으로 과거 민추협의 여정 또한 거칠 것 없이 대차게 달려왔으리라.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7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오길선 2024-11-20 10:48:28
그리고 dj가 박근혜를 지지한다는건 개인적용서는 가능하지만 당도 다르고 정치적 행보도 다릅니다 정치적으로 지지는 현실적으로 어렵지않을까요 사성적으론 대척점에 있잖습니까 대북정책이라든지 dj는 71년대선서부터 신민당에서부터 4대국안전보장론을 주장하며 대북포용정책을 주장했는데 박근혜는 대북정책이 개성공단폐쇄등 다르잖습니까 경제관도 dj는 사회안전망이나 전교조민주노총합법화로 다르구요 dj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다는건 좀 현실성이 부족해보입니다만... 마치 지금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합당하는것과 비슷한데 지지층들의 성격도 다르구요 둘다 존중하는것이지 dj박근혜가 사상행보가 같다는건 좀 아닌것같습니다

오길선 2024-11-20 10:34:41
DJ가 더 온화한 스타일이었던 것이 아니라 집권상황의 차이라고봅니다 ys가 민주개혁을 한상황에서 dj가 또 전노구속이나 하나회청산을 할수는없는거 아니겠습니까 또 ys도 개인감정에서 하나회청산이나 전노구속을 한것이아니지않겠습니까 민주주의적측면이구여이런것이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오길선 2024-11-20 10:31:32
Dj도 집권하고 나서 여성부를 만들었고 전교조와 민주노총을 합법화했고 의문사진상규명 위원회설치하고 민주유공자포상하고 제주4.3특별법만들고 4.3명예회복시키는 5.18망월동묘지를 국립묘지로 승격하고 국가인권위원회 설치하고 하는등 박정희전두환노태우와 무조건화해한건아닙니다 dj는 원칙에 있어서는 민주주의적으로 타협안했습니다

오길선 2024-11-20 10:25:16
평화민주당을 창당할때도 dj가 서민과 중산층을표방하며 ys와 정책과 노선이 다르다고주장했고 당시 전라도와 재야세력이 지지했지요 문익환 예춘호 김근태 이우정 박영숙 이해찬 임채정 장영달 등 재야진보그룹이 지지했고 박정희시절부터 탄압받은 전라도분들이 지지했어요 이런면에서 강경하다는 뜻이 아닐지요.

오길선 2024-11-20 10:22:35
그런것이지 ys라고 무조건무섭게보복정치하고 dj는 그렇지않고 세종대왕처럼 성인군자로 용서화합하고 그런것이아닙니다 1990년 3당합당도 민정계와 합당이고 그것과 유사한것이 1997년 djp연합아닙니까 진보보수연합으로 보아야지 ys도 민정계 김윤환등과는 친했습니다 집권시기나 상황의 문제이고 또 dj는 주로 1972.10.17유신부터 재야에서 주로활동했고 ys는 국회에서 활동했습니다 온건한의회민주주의자였지 무슨 폭력혁명주의자는 아닙니다 투쟁방식은 강경했지만 북한관은 전통야당 신익희조병옥을 이어받아 보수적이었고 간첩에 어머니가 죽었고 기독교인이어서 군정도 그의 사상을 의심하지못한반면 dj는 4대국안전보장등 진보적통일관을 가졌지요. 또 경제관도 딱히 ys는 사회과학적 처방이 없던반면 dj는 대중경제론등 상대적 진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