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권영해와 단둘이서 극비리 진행
기무사령관 등 군 빅포스트부터 교체
군정종식 이루겠다는 신념 끝내 이뤄
철저한 준비, 국민지지 뒷받침돼 성공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역사에 만약은 없다. 그러나 만약 5‧16, 12‧12 쿠데타 때 YS(故김영삼 전 대통령)가 통수권자였다면 어땠을까. 쿠데타가 성공이나 할 수 있었을까? <김영삼 회고록>에 따르면 YS는 탄식했다. 5‧16 당시 내각제 실권자는 장면 국무총리였다. 그러나 그는 5‧16이 났을 때 수녀원으로 숨어버렸다. 12‧12 때도 마찬가지였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대선을 차일피일 미뤘고 결국, 군부에 빌미를 줬다. 국가의 중차대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YS는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30여 년 군사 정권 동안 단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었다. 이런 그였기에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불과 11일 만에 하나회 군 수뇌부를 전광석화처럼 제거할 수 있었다. 하나회 청산 되짚기는 이 시대 필요한 전설과 같은 영웅의 이야기, 그 작은 단편이다. <편집자 주> |
‘하나회 청산 되짚기’ 첫 번째는 YS 생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문민정부에서의 윤무한 전 김영삼대통령 비서실 통치사료담당 비서관과 함께 <김영삼회고록> 집필에 참여한 김동일 전 대통령 정무비서실 행정관의 증언을 중심 삼아 일자별로 이야기를 재구성해봤다. 김 전 행정관(이하 김동일)은 대통령 정무비서실 행정관, 대한석탄공사 상임감사, (사)김영삼민주센터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1998~2001년 기간 YS회고록 집필에 참여했다. 현재는 YS 전문 서적 등을 출판하는 미디어민 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와는 지난 9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만났다.
하나회 척결의 서막
1993년 2월 25일 문민정부가 출범했다. 이날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는 14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며칠 안 돼 측근 김봉조 의원이 청와대를 찾았다.
김봉조 = 오늘 국회 갔더니 하나회 인사들이 가관입니다.
그는 국회에서의 상황을 YS에 전했다. 우연찮게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자기들끼리 쑥덕대고 있는 것을 들었다. “어떻게 하는지 보겠어.” 마치 후견 권력인양 지켜보겠다며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거만을 떨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YS는 이 말 한마디만 했다.
YS = 내가 다 생각이 있어요.
대선후보 시절에도 YS는 ‘대통령이 될 경우 막강한 군부 세력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외신기자들의 질문에 “두고 보자”라고 답한 바 있다.
‘내게 다 생각이 있어.’ 김봉조는 YS가 한 말을 곱씹어 봤지만 선뜻 감이 오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모른 채 대통령 집무실을 나왔다.
쿠데타 주범 하나회
12·12 쿠데타의 주범이자 군내 막강한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는 박정희·전두환 군사 정권 기간 군 내부의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암 덩어리와 같았다. 하나회는 1963년 2월 18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특혜와 비호를 받기 시작한 전두환 중심의 11기생들이 중심이 돼 결성됐다.
서울의봄을 사수하려 했던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이 쓴 <12·12 쿠데타와 나>에 따르면 이들(하나회)은 이전에 있던 군 내 오성회나 칠성회와 같은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닌 정치군인이라는 특정한 목적의식을 갖고 철저한 보안 속에서 커나갔다. 매 기당 10명을 선발했고 36기까지 220여명에 달했다. 피아식별을 위해 ‘형님’이라는 암호를 썼다.
그중 실력파들도 있었겠지만 대체로 능력의 유무보다는 박정희에 대한 숭배와 충성도에 따라 회원 등급을 나눠 특전 등의 더 좋은 보직을 줬다. 하나회라는 존재를 모른 채 책임 완수에만 충실했던 비하나회 출신들은 승진 등에서 제외되기 일쑤였다. 하나회 출신들이 청와대 경호실, 보안사, 수경사, 특전사, 중앙정보부 등 요직들을 차지했다.
‘윤필용 사건’을 계기로 실체가 노출됐지만 그때도 박정희 정권 비호 아래 위기를 모면했다. 군 병폐를 심화시키고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됐다. 결국 서울의봄을 앗아간 12·12 군사반란과 5·18 참사로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YS의 계획
하나회는 또 다른 군사정권의 연장선과도 같던 노태우 정부 때도 후견 권력처럼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 하나회를 YS는 오래도록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문민정부 출범 초 제거 작업에 들어가는데….
- 하나회 청산 작업에는 YS와 권영해 국방부 장관만 참여한 겁니까.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도 도움을 줬다고 알려져 있기는 합니다.
“아닙니다. 정승화 전 총장도 통일민주당에 입당한 이후로 여러모로 자문해 줬겠지만 문민정부 출범 후 하나회 청산에 관여한 인물은 YS와 권영해 두 사람이었습니다.”
YS와 권영해, 단둘이서만 극비리로 진행했다는 얘기였다.
# 대선 직후 전후 상황
1992년 12월 19일 대선 직후 YS는 권영해 국방부 차관에게 면담을 제의했다. 김기수 수행실장을 통해서 “좀 보자”고 연락을 했다. 권 차관은 사전 행사가 있었다. “군 행사가 있어서 못 갑니다.” 만남은 일단 불발됐다.
김동일이 후일 듣기론 당시 권영해는 장관할 마음이 없었다. 할 만큼 다 하고 물러날 사람인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YS는 육사 15기 권영해를 국방부 장관으로 내심 낙점해두고 있었다. 관련해 김동일은 회고록 준비 기간에 이를 물은 적이 있다.
김동일 = 권영해 장관은 신뢰할 만한 자질을 갖고 있었습니까?
YS = 사전에 군을 개혁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누구를 초대 국방장관으로 시키느냐는 게 관건이었어요. 둘 중 하나인데 민간인을 시키는 방법이 하나 있고 군 출신을 시키는 두 가지 방법을 생각했지요. 그래도 군이 너무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내부를 잘 아는 군 출신을 시켜 다스리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권영해)은 소장 출신이지만, 어느 누구보다 군을 잘 알아요. 머리도 좋고, 그래서 선택한 거예요.
YS는 이렇듯 ‘권 차관이 하나회 중심의 군을 개혁하는 동시에 군의 동요 없이 국방을 맡아나갈 수 있는 사람(김영삼 회고록)’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정보가 샜는지 YS와 권영해와의 미팅이 불발된 이후부터 그에 대한 온갖 음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권영해 장관에 대한 견제였을까요?
“그것 때문에 권 장관이 엄청 고생했던 것으로 압니다. 이후에도 (하나회 출신들에게) 엄청나게 비난 받았죠. 권 장관에 대한 음해는 YS 가신들을 통해서까지 들어왔어요. 누가 도청을 한 것 같다고도 했죠. 하나회 위력인 거죠.”
한번은 권영해 자택에서조차 수상한 낌새가 발견됐다. 집 문 손잡이를 열려는데 들어가지지가 않았다. 문을 따고 들어갔더니 괴한이 방안으로 침투했다가 창문으로 뛰어내린 흔적이 있었다.
한편으로 취임 전부터 하나회 측에서는 YS 측근들을 상대로 갖은 로비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문민정부 공보처장관을 지낸 오인환은 <김영삼 재평가>에서 “하나회 후원자였던 한 인사는 YS 측근들을 상대로 술도 사주고 돈도 주면서 인사 청탁까지 했다”고 기술했다.
- 줄을 대려는 인사들이 많았던 거군요?
“권영해 장관이 나중에 말해준 것인데, 하나회 내부에서도 노태우 정부 때 잘 나갔던 사람도 있고 약간 밀려난 사람도 있잖습니까. 문민정부로 넘어왔지만 계속해서 권력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까 YS 주변에 충성 맹세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이를 알게 된 YS는 격노했다. 대선 전부터 하나회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말미암아 시일을 더 앞당기게 됐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그런 와중에 대선 직후에 하나회 출신인 최세창 국방장관의 발언 또한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1992년 12월 22일 국방장관이던 최세창은 기자회견을 열어 군은 새 정부와 협력을 잘 해나갈 것이라는 등의 여러 발언을 했다. YS에게는 하나회가 앞으로도 정부를 계속 관리하고 통제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도발과도 같았다.
# 취임 이삼일 전
YS는 1993년 2월 25일 취임하기 이삼일 전 하얏트 호텔에서 권영해를 만나 정식으로 국방부 장관직을 제의했다. 문민정부 출범 이삼일 남기고 임박해서 부른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난번 만남이 불발된 이후 여러 곳에서 음해가 흘러들어왔기 때문에 각별한 보안에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YS = 당신이 장관을 해야겠소.
권영해 = 아닙니다. 사성장군들이 있는데 제가 할 수 있겠습니까.
YS =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무직인데 통수권자가 하라고 하면 하는 거지. 당신이 했으면 좋겠어요.
권영해 = 그럼 통수권을 정확히 지켜주면 좋겠습니다.
과거에는 군이나 정계에서의 하나회 출신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국방부 장관이 힘을 쓰지 못했다.
YS = 알겠소. 내가 확실히 통수권한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겠소.
이런 과정을 거쳐 권영해도 장관직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김동일은 전했다.
# 3월 3일 기무사 독대 폐지
3월 3일은 청와대에서 군 주요 지휘관 접견 및 국방장관의 보고가 있는 날이었다. 이필섭·김진영·구창회·서완수·안병호 등 하나회 소속 장군들이 청와대를 찾았다. 이들은 국군통수권 체계 등을 보고하기 위해 YS 앞에 섰다. 기세가 여유 만만했다. YS는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직시했다.
YS = 앞으로는 대통령에게 직보하지 말고 국방장관을 통해 보고하세요.
일순간 군 수뇌부들의 얼굴이 일제히 경직됐다. 정례적으로 있던 대통령과 기무사령관과의 독대 제도를 폐지해버린 것은 그들로서는 꽤 큰 충격이었다. 장군들의 핏기가 가실 만큼 좌중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독대 제도를 기습적으로 폐지한 것 관련 YS는 회고록에서 ‘악명 높은 정치 사찰을 폐지하고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기무사의 개혁을 지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YS는 이와 동시에 대민 정보를 관할하던 기무사 내의 정보처도 폐지했다.
당일 부처 업무 보고의 순서로 국방부를 지목한 YS는 장관의 발언을 다 듣고 난 뒤 훈시를 이어갔다.
YS = 최전선 고지에서 묵묵히 나라를 지키는 일에 진력하는 군인이 신한국 군의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군도 새 시대를 맞아 개혁과 화합을 지향하는 신한국 건설에 적극 동참해 주길 바랍니다.
같은 날 YS는 권영해와 따로 독대했다.(김동일은 이날로 추정했다)
YS = 군 인사는 어떻게 합니까.
권영해 = 수백 명이 이동하므로 정기인사에서 합니다.
YS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때까지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권영해는 알지 못했다.
# 3월 4~7일, 암시의 기간
3월 4일 YS는 군 개혁 일환으로 군사 독재 정치의 대표 상징물인 청와대 주변 안가를 철거했다. 또, 이날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만나 오찬을 하면서 어떤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3월 5일은 육사 제49기 졸업 및 임관식에 참석했다. 오후 2시 YS는 육사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YS = 신임 장교 여러분! 군인의 길은 개인의 영화보다는 국가를 위한 헌신의 길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은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주는 일에 앞장설 것을 다짐합니다.
육사 졸업생들을 치하하기 위해 연설하는 자리였지만 내용을 들어보면 숙군의 서막이 오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원래 원고는 으레 육사 측에서 준비해 보내오던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날 원고는 청와대에서 직접 준비했다.
3월 6일, 국무회의가 있었다. 국방장관도 참석했지만 별도의 개별미팅은 없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오후 늦게 YS는 김기수 실장을 통해 권영해와의 8일 조찬을 약속했다. 그 즈음 6~7일 양일간 집중적으로 문민정부 1기 내각 인사들 관련 각종 투서가 날라 들어오고 있었다. 청와대는 제보 진원지로 자신들의 개혁 프로그램에 반발하는 하나회 중심의 군부 측을 의심했다. 살벌한 기싸움이 보이지 않게 전개되고 있었다.
# 3월 8일, 하나회 수뇌부 전격 교체
3월 8일 날이 밝았다. 월요일 아침 7시 30분 YS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권영해와 마주했다. 테이블에는 쑥국과 밥, 감자튀김, 햄 두 쪽 등이 놓여 있었다. 권영해는 각 부처 장관과의 순회 조찬 중 자기 차례가 온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만일에 대비해 군장성 인사기록 카드를 지참했다.
훗날 <동아일보>는 1998년 6월 4일자 신문에 군 개혁 관련 당시 상황을 기획으로 다뤘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비교적 상세히 기술했다.
YS = 장차관 인사도 끝났으니 군인사도 시작해야겠지요. 그런데 군인들은 정권이 바뀌면 사표를 내지 않습니까?
권영해 =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군인들이 사표를 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통수권 차원에서 인사명령에 절대복종하게 돼있습니다만….
YS = 아. 그래요? 그럼 됐구먼. 오늘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바꾸려고 합니다. 후임 육참총장은 서열대로 하는 것이 좋겠지요? 현 총장 다음 서열이 누굽니까.
이렇게 묻는데, 권영해는 너무 놀란 상태였다. YS 회고록에서는 ‘권 장관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듯 커다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쑥국만 두어 숟가락 뜬~(후략)’이라고 적혀 있다.
YS는 조찬을 멈추고 차나 한잔하자며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권영해도 뒤따랐다. YS는 곧장 인사 기록 카드를 검토했다. 이 모두는 두 사람만 가담돼 있는 극비 독대였다.
김동일은 둘이 나눈 대화를 이렇게 기억했다.
YS = (군 인사 관련해) 한 번에 다 바꾸고 싶은데 말이죠.
권영해 = 군 인사 체계가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면 완전히 흔들립니다.
YS =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권영해 = 실질적으로 빅포스트(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부터 우선 교체하시는 것이….
권영해는 인사기록에 적힌 명단들을 서열별로 설명하며 육참본부장 후임으로 육사 17기가 오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그 결과 육군참모총장에 김동진 한미연합사령부사령관(육사 17기)을, 기무사령관에 김도윤 기무사참모총장(육사 22기) 등을 발탁됐다.
YS는 이들의 이름이 적힌 친필 메모를 우선 건네줬다.
YS = 승인을 해줬으니 지금 국방부로 가서 통보를 하세요.
권영해는 메모지를 쥐고서는 오전 9시경 국방부로 돌아갔다. 그런데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국방부 인사국에도 하나회 출신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서로 만들게 되면 극비리 진행되던 것이 발표에 앞서 정보가 누출될 수 있었다. 알려질 수 있었다. 권영해는 비하나회 출신인 인사처 차장을 시켜 인사명령 기안서를 작성토록 했다. 오전 10시 30분경 다시 청와대로 들어갔다. YS로부터 최종재가를 받았다.
다시, YS가 서둘러 말했다.
YS = 김동진 대장과 김도윤 소장에게 직접 전화해 직접 임명하세요. 빨리 취임식하고, 서둘러 김진영 총장과 서완수 사령관과 교체해야 합니다.
YS는 오랜 국방위 경력상 군이 상명하복 조직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자칫 반발해 군대를 끌고 나오려는 상황이 발생한다 해도 인사 명령이 돼 사람이 바뀌어버리면 상명하복에 따라 움직이는 군 특성상 쉽사리 움직일 리 없다고 본 거였다.
YS 말대로 권영해는 오전 11시 10분경 김동진 대장과 김도윤 소장에게 직접 전화해 각각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으로 임명했다고 하달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육군 내 정책통인 김재창 전 합참제1차장도 이날 연합사 부사령관으로 승진 조치했다.
이로써 하나회 핵심 인사였던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육사 17기)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육사 19기)이 새 인물들로 전격 교체됐다. 하나회 청산 작업의 역사적 신호탄이 이제 막 쏘아 올려지고 있었다.
그날 아침 돌아가는 상황을 간파하지 못한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은 자신이 곧 해임될 줄도 모른 채 충남 계룡대 육군본부 연병장 국기게양식에 참석해 “군도 새정부의 신한국건설에 동참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훈시를 두고 있었다.
김 총장은 여느 때와 같이 각 부대 작전 현황 등을 보고받았다. 월요일 참모회의가 끝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비서가 보고하기를 “장관님 전화입니다.” 그 즉시 전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권영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해임됐다는 통보였다.
김진영은 하나회 골수 엘리트 중 엘리트로 통했다. 강직한 성품이었다는 평가 속에서 YS도 ‘그 사람 훌륭하다’고 칭찬한 인물이었다. YS와는 같은 경남 거제 출신으로 동향이기도 했다. 청와대 박관용 비서실장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내심 승진을 기대했을 법도 했을 터였다. 별안간의 해임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하나회 핵심이긴 했지만 전두환·노태우 정부에 걸쳐 이미 두 번이나 좌천된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는 문민정부 출범 11일 만에 해임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임기 9개월이 남은 시점이었다. 예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차분히 전역에 임했다는 후문이 들렸다.
11시 20분 경이 됐다. 국방부에서 정식으로 인사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국방부 = 육참총장의 경질은 정부 장·차관급 인사에 이어 대통령의 임명직위에 대한 군통수권 차원에서 이뤄진 조치로….
점심시간이었다. 각 부대의 스피커에서는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이 해임됐다는 라디오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군인들도 깜짝 놀랐다. 김진영은 2분도 채 안 되는 전역사를 읊고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기무사령관인 서완수도 권영해로부터 자신이 보직 해임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하들과 점심을 먹으며 고별식을 가졌다.
이런 과정이 모두 8일 오전에 걸쳐 불과 4시간 만에 단행된 것이었다. YS는 취임 전후 사이가 껄끄러웠다고 알려진 군 장성도 만나가며 격려도 하는 등 잘 지내는 모습을 보인 바 있었다. 그랬기에 군 내부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줄 감히 예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YS가 하나회 장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연막작전을 쓴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 진짜 낌새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걸까요?
“어떤 면에서는 하나회가 약간 방심했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김동일이 상황을 설명해가던 중 질문에 답했다.
- 어떤 면에서입니까.
“권영해 장관이 그러더라고요. 하나회가 약간 자만했다, 그래서 자초했다. 이렇게 얘기도 했었지요. 아무래도 3당합당을 거쳐 문민정부가 출범한 것이니까 하나회로서는 초기에 YS를 두고 ‘우리 대통령이니까’라고 생각했던 측면이 있었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예전의 하나회와 달리 약간은 나이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 3월 9일 임명장 수여
하나회 숙청의 서곡이 울린 다음날인 3월 9일 YS는 청와대에서 김동진 새 육군참모총장과 김재창 연합사 부사령관에 대한 임명장을 수여했다. 김도윤 기무사령관은 소장이었기에 임명장 비대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김동일은 전했다. YS는 임명식을 가지면서 “군대 내 사조직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거듭 강조했다. 저녁에는 영빈관에서 언론사 보도국장 등을 초청해 만찬을 가졌다. 다음날 언론에서는 YS의 다음 발언을 주목해 다뤘다.
YS = 나는 과거 어떤 대통령과도 본질적으로 다른 혁명적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3당합당 과정부터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며 군정종식을 약속했던 지난날의 발언을 지키는 대장정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훗날 YS는 회고록에서 “3월 8일 이날은 1961년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후 지속돼온 군의 정치화, 정치군인에 의한 쿠데타의 망령이 걷히는 출발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하나회 출신인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의 전격 교체는 군과 정치의 고리를 끊고 각자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술회했다.
같은 날 YS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하나회 청산 작업에 모두가 얼얼해하고 있었다. YS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YS = 모두 깜짝 놀랐재?
특유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흘러 넘쳤다. 그제야 얼떨떨해 있던 참석자들 얼굴에도 웃음이 번져갔다.
여유로운 듯한 분위기였지만 안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 쿠데타가 우려됐던 것입니까.
“분위기로는 무시무시했어요. 3·8조치가 발표되고 나서 주변에서도 막 겁이 나서는 YS한테 ‘이래도 되냐’면서 연락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비서들 중에서도 싱숭생숭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우리조차 하나회 자체를 없앤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니까요.”
# 4월 2일 수방·특전사령관 인사
4월 2일 YS는 대통령의 통수권 행사 차원으로 기무사령관과 함께 실세 3사로 통하던 수방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을 전격 교체했다. 하나회였던 안병호 수방사령관(육사 20기)과 김형선 특전사령관(육사 19기)을 보직 해임하고 비하나회 인사인 도일규 한미연합사 부참모장(육사 20기)과 장창규 육군본부동원참모부장을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시켜 각각 인사발령을 내렸다.
김동일은 수방·특전사령관 인사 관련해 YS와 권영해가 3·8조치 때 이미 결정하고 발표만 일단 유보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 후에 논의해 4월 2일 단행한 것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언론에서는 4·2 조치에 대해 “지난 3월 8일 육군참모총장 및 기무사령관의 경질에 이어 군내 하나회 중심의 정치군인을 배제하고, 오는 6월 군 정기인사에 앞서 그동안 정치색을 강하게 띠어온 수도권 핵심부대 사령관을 전격 경질한 것으로 본다”고 보도했다.
# 4월 4일, 괴문서 소동
4월 4일 일요일, 장교들이 모여 사는 용산 소재 군인 아파트 주변에는 ‘육사 하나회 회원’이라는 제목의 괴문서가 살포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총10장의 문서에는 육사20기 중장급부터 36기 중령급까지 하나회로 지목된 142명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괴문서는 대량으로 복사돼 국방부와 육군본부 등에도 나돌았고, 명단의 신빙성을 두고서는 육군 전체가 술렁거렸다.
후에 육군교육사령부 소속 백승도 대령이 자신이 단독으로 명단을 작성해 살포했다고 자수했다. 백 대령은 91년 군인아파트에 살 당시 누군가가 출입문을 통해 넣어준 명단을 보관하고 있다가 이번에 군내부 갈등의 악순환을 척결하고 4월 정기 인사시 하나회 특혜를 배제하기 위해 살포했다고 밝혔다.
명단에 대한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조사 결과 105명이 하나회 회원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괴문서는 나중 군부 개편의 촉발로 이어졌다. 100일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많은 장교들이 정리되는 계기가 됐다.
- 회고록을 준비하면서 YS와 인터뷰할 당시 괴문서 관련해서는 못 들었나요.
“당시 기록물을 찾아보니까 문서가 100% 정확했던 것은 아니고 기억에는 30% 정도가 틀렸다고 그래요. 돌이켜 보면, 강력한 힘이 김영삼-권영해 라인으로 몰려들자 줄을 서기 위해 서로 간에 고발자가 되거나 증언자가 됐던 것도 같아요. 괴문서가 외부에서는 뉴스거리가 될는지 몰라도 YS한테는 그다지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으로 알아요. 하나회 주요 명단이야 YS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고, 대신에 큰 그림 위주로 관심을 가졌지요.”
# 4월 15 육군 중·소장급 인사
4월 15일 육군은 육군참모차장과 8군단장을 교육사령관으로, 9군단장을 합참전략기획본부장 등으로 임명하는 중·소장급 보직인사를 단행했다. YS가 직접 임명장을 준 것은 아니었다. 보직 인사와 더불어 12명이 승진됐다. 비육사 출신의 진출이 두드러진 대신 하나회 출신 중에서는 한 명만이 진급해 대조를 이뤘다고 당시 언론에서는 언급했다.
# 5·24 숙군 계급장 사건
5월 24일 YS는 문민대통령으로서 12·12사태 관련 고위 장성들을 해임하는 이른바 5·24 숙군을 단행했다. YS는 군 최고 서열인 이필섭 합참의장과 김진선 2군사령관, 안병호 2군부사령관 및 박종규 56사단장 등을 전역시키고 후임 합참의장에 이양호 공군 참모총장을 임명했다.
또, 김홍열 해참총장(중장진급), 조근해 공참총장(대장 진급), 박세환 2군사령관(대장진급), 박광영 교육사령관(중장) 등에 대한 인사를 조치했다.
합참의장 경우 비육군에서 된 것은 건국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YS는 이를 통해 군의 정치개입을 원천 봉쇄하고 육군 위주의 국방체계를 육해공의 균형적인 견제 체제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표명했다.
5·24 군 인사도 3·8, 4·15 등과 마찬가지로 전격적이고도 예상을 뛰어넘어 이뤄진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대통령이 직접 계급장을 달아줘야 했는데 식이 시작할 시간이 다 됐는데도 미리 준비되지 않아 현장 국방부 간부들이 달고 있는 계급장을 우선 빌려 신고식 때 별을 달아주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날의 군 인사로 문민정부 출범 이후 육군 고위층에 자리하고 있던 하나회 회원 중 3성 장군 이상 전원과 소장급 일부가 군복을 벗었고 소장 이하도 모두 한직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내가 취임한 지 석 달 만에 군복을 벗은 장군만 18명이었고, 떨어진 별만 무려 40개에 달했다. 이로써 나는 박정희 정권 이후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군사독재 체제의 핵심 지배 세력이었던 하나회를 완전히 해체했고 민주주의 공고화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군부에 대한 문민적 통제를 완벽하게 확보했다. 우리 군대도 비로소 정권의 군대에서 국민의 군대로 자리매김 됐다.”
- YS 회고록 중-
# 10월 1~2일 YS 신한국군 선언과 권영해 담화
10월 1일 YS는 45주년 국군의 날을 맞아 계룡대에서 거행된 행사에 참석해 ‘신한국군의 원년’임을 선포했다. YS는 이날 국군의날을 치사하며 “올해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군대, 새시대 새로운 국군으로 도약하는 첫해가 될 것”이라며 “군개혁을 단행해 문(文)은 문답게, 무(武)는 무답게 각기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고 천명했다.
다음날인 2일 권영해는 건군 45주년을 맞아 국방부 장관으로서는 처음 ‘군의 정치 불개입 선언’을 담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이제 우리는 군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났던 과거를 반성하고 국민에게 충직한 군대로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국민은 과거처럼 군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 이듬해 4월 16일 하나회 종지부
1994년 4월 16일 단행된 군정기 인사에서 YS는 표순배 중장, 김재창 대장 등 하나회 인사들을 보직 해임했다. 김상준·이택형 등 중장급 이상 하나회 장성 10명도 모두 전역 조치를 밟게 했다.
이로써 YS는 군의 사조직 근절을 목표로 한 하나회 제거 의지를 일괄처리로 마무리했다. YS는 4월 18일 청와대에서 군장성들의 보직 및 진급신고를 받으면서 “오늘은 군의 사조직 문제가 말끔히 마무리되고 새롭게 태어난 날”이라며 하나회 숙정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외국의 많은 사례에서 보듯이 군사독재정권에서 민주정부로 이행하는 나라의 경우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민주화를 시도했음에도 민간정부가 군부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군부의 정치개입에 지속적으로 시달려온 남미 여러 나라들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의 경우 1993년 7월 이충석 합참작전부장의 합참 회식 발언 사건이나 1994년 10월 오형근 3사 교장의 이임식 연설 사건 등 간헐적인 저항은 있었으나 민주화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으며 이 땅에서 군사쿠데타의 망령은 사라지게 됐다.”
- YS 회고록 중-
YS가 회고록에서 기술했듯 하나회 청산은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민주화가 일어나도 군이 청산되지 않을 경우 필리핀 등의 예처럼 간헐적인 쿠데타 시도를 막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미얀마 경우도 후견 권력을 자처한 군이 다시 쿠데타를 시도해 정권을 접수하고 마는 비극적인 일이 되풀이되고 말았다. 반면에 YS는 이땅에 군정을 완전히 종식시킴으로써 민주주의에 의한 문민통치체제를 확고히 확립할 수 있었다.
성공 요인의 결정타
- 하나회 청산이 성공할 수 있던 결정적 요인은 뭐라고 봅니까.
“첫 번째는 문민시대를 열겠다는 YS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YS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에 걸쳐 군대 내 사조직이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없애야 한다는 확실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죠. 87년 대선 때도 통일민주당 공약이 군정종식이었잖아요. 92년이 되면서는 신한국당 창조로 슬로건이 변화했었지요. 역대 대선에서 봐도 가장 대안적인 슬로건이라고 평가할만하다고 봅니다. 당시는 중간에 냉전이 붕괴되고 동구권이 몰락하는 등 완전히 급변하는 시대였잖아요. YS는 87전후 야권 단일화를 위해 노력을 많이 들였지만 DJ(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열로 양김이 또 대결했다가는 정권교체가 무망하기 때문에 3당합당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라도 문민정부 시대를 열어 자신의 소명인 군정종식의 과업을 달성하려고 한 거였지요.”
- 군 수뇌부가 YS의 성격을 알았다면 하나회 청산 계획을 정말로 몰랐을까 싶습니다. JP(故김종필 전 총리)만 해도 그의 회고록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5·16 당시 정치인들을 만나 공화당에 합류해 협조하라고 했더니 다들 수긍했는데 YS는 ‘쿠데타 세력한테 무슨 협조냐’며 버럭하면서 거절했다고 말입니다. 호통을 치며 쏘아보는 YS 기백과 눈빛에 당시 정보부장이던 JP 마저도 움찔했다고 하더라고요. 평생을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정의를 좇은 행보가 하나회 청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고 생각되는데 이런 성정을 군 수뇌부에서 진짜 몰랐을까 싶은 것이죠.
“JP는 YS를 잘 아는 사람이죠. 그런데 다른 군 수뇌부에서는 사실상 YS를 잘 몰랐기 때문에 노태우 전 대통령도 3당합당을 선뜻 한 것이고, 하나회에서도 YS가 그 정도로 사생결단을 과연 할까,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겠죠. 지나고 나서는 그때 YS가 한 것을 두고 깜짝 쇼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되게 많았어요. YS 퇴임할 적에 비난하는 책들을 보면 말이죠. 모르고들 폄하한 거죠.”
- <잃어버린 5년>(<동아일보>특별 취재팀)처럼 말이죠?
“암튼 기존의 주류 엘리트를 몰아내고 자기 인맥 중심의 멤버로 채웠다 이런 식으로까지 모든 정치를 권력의 게임으로 보면서 YS를 그 프레임 안에 꿰맞추려 한 거죠.”
- 하나회 청산 성공의 다른 또 요인은 뭐라고 봅니까.
“두 번째는 YS 의지도 있었지만 진짜 준비가 잘 됐잖아요. 문민정부가 출범했는데 하필 그 리더가 군에 대해 정통해 있는 분이었던 거죠. YS는 1954년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줄곧 국회 국방분과위원회에서 활동했어요. 군사정권과 싸워오면서 반대파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들은 정보도 많았지요. 정승화 전 육참총장이 통일민주당에 온 것 역시 YS를 신뢰할 만한 분이라고 여겼기 때문 아니겠어요. 군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었기에 극비리에 전광석화처럼 하나회 청산을 진행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때도 군 세력이 워낙에 막강했기 때문에 분위기가 일순간 스산해질 때가 많았거든요. YS는 일련의 모든 상황을 감안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 3월 8일까지 측근조차 알 수 없게 군 개혁과 관련해 한마디도 하지 않은 분이었어요. 사실상 수십 년간 준비된 군정종식의 가장 제일의 적임자, 리더였던 것이죠.”
김동일은 다음으로 세 번째를 열거했다.
“세 번째는 YS가 강조한 말이 있어요. 반대 세력을 압도할 힘이 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아마도 일반 정치인이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중간에 또 뒤집혔을 수도 있겠고요. 지금이야 맨날 피상적으로 국민의 힘 그러는데, 그때는 문민정부를 선택한 국민의 의지와 힘이 정말로 크게 뒷받침되고 있었을 때였어요. 제아무리 하나회라 해도 문민정부를 지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반발할 수 있었겠어요.”
YS도 회고록에서 이 점을 피력했다.
“내 주변에는 질풍노도와 같은 군부 숙정에 대해 크게 염려했지만 나는 군 개혁이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전격적으로 단행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모든 개혁에는 필연적으로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며 특히 군대 내에서 특수한 사조직으로 똘똘 뭉쳐 있는 하나회의 경우 언제라도 세력을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전격적으로 숙정을 단행하는 길만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또한, 이런 전격 전술은 반대 세력을 압도할 만한 힘이 있을 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문민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압도적이고 군부의 정치 개입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이 폭넓게 확산되는 시점을 하나회 제거의 시점으로 선택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 YS 회고록 중-
- YS 업적으로는 크게 87 민주화의 최대 주역, 금융실명제, 하나회 청산 등이 꼽히고 있습니다. 문민정부 성과로 본다면 어느 것을 가장 높이 삽니까.
“하나회 청산을 꼽고 싶습니다. YS를 보면 군정을 종식하고 민주주의 국가를 완성해 내는 것을 일생일대의 소명이라고 여겼던 분이거든요. YS께 대통령 취임식 때의 소감이 어땠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도 제일 먼저 ‘우리나라 군대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사회가 됐는데 이것은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하나회 숙정을 반드시 해결하고 말 것이다’는 다짐을 속으로 가장 많이 했다고 하더라고요. 김영삼 대통령이라는, 어떻게 보면 진짜 불세출의 리더가 나온 것은 대한민국으로서는 큰 행운이었다고 봅니다.”
이상 하나회 청산 되짚기, YS 회고록 참여자 김동일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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