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회 척결, YS 없이는 불가능” 이유 있는 답들을 찾아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하나회가 척결됐다.’
박정희 정권 때 성장한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12·12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서울의 봄을 앗아가고 제2의 군부 독재를 이어갔습니다.
그 정점에 있던 하나회는 문민정부 때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를 둘러싸고 여러 물음을 던져볼 수 있겠습니다.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민주화가 됐음에도 왜 하나회를 척결했을까. 그 당시 YS가 아니었어도 하나회 척결이 가능했을까. 하나회가 유지됐다면 지금처럼 민주화가 영속적일 수 있었을까.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김영삼민주센터는 13일 오전 국회 대강당에서 6·10 민주항쟁 기념 강연과 연계해 ‘하나회 척결을 중심으로 보는 YS의 문민통치 체제확립’이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참석한 명사들은 이에 대한 답을 내렸습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YS가 아니었으면 하나회를 척결할 수도 군정이 종식될 수 없었을 거라고 단언했습니다. 6월항쟁의 완성은 하나회 척결을 통해 군정이 종식되면서 비로소 영구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87 체제가 뿌리내릴 수 있던 것도, 50년 만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질 수 있던 것도, 이후 민주정부가 연속적으로 출범할 수 있던 것도, 모두 YS가 하나회를 척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결론입니다.
다시 군부 정권이 들어선 미얀마의 사례처럼 군정을 종식하지 못했을 경우 제아무리 민주주의 체제였다고 한들 바람 앞에 등불처럼 내일을 장담할 수 없게 될 뿐입니다.
일련의 결론을 먼저 언급하면서 우리는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을 차분히 되새김질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
YS는 왜 하나회 척결을?
우선은 YS는 왜 민주화가 됐는데도 군을 종식시키려고 했는가 관련입니다.
“YS는 스스로 문민정부라고 규정했다.”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주제발표 안에서 이 점부터 상기했습니다. 여기에는 실로 엄청난 의미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이 땅에 군부가 다시는 부활하지 못한다. 이를 천명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회 척결은 전광석화와도 같았다”고 규정했습니다.
또, 실제로도 전광석화로 이뤄졌다는 전언입니다.
상도동계 좌장인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겸 민추협 공동이사장은 대통령 자신을 빼놓고는 일련의 군사정치문화 청산을 향한 문민개혁이 언제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몰랐다고 증언했습니다. 금융실명제를 단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보다 더 비장한 각오와 결단으로 하나회 척결을 추진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 하나회 척결 과정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채 보름이 안 된 1993년 3월 8일 오전 7시 30분 YS대통령은 권영해 국방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조찬하는 자리에서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바로 후임 인사에 착수했다.” “김진영 육참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해임조치하고 그 자리에 김동진 연합사 부사령관과 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을 청와대로 불러 간단한 후임 임명 절차를 마친 뒤 각자 부대로 돌아가 그 즉시 취임식을 갖도록 했다. 처음 이야기를 꺼낸 지 4시간 5분 만에 모든 절차를 끝낸, 실로 전광석화와 같은 인사조치였다.” “5월 24일에는 12.12사태와 관련된 고위장성의 예편조치를 단행했다. 이날의 군인사로 문민정부 출범 이후 육군 고위층에 자리잡고 있던 하나회 회원중 3성장군 이상 전원과 소장급 이하도 모두 보직이 변경됐다. 이로써 YS가 대통령에 취임한지 석달 만에 군복을 벗은 장군만 18명이었고, 떨어진 별이 무려 50개에 가까웠다.” |
전광석화로 처리한 이유, 역설적으로 그 같은 단행이 아니었으면 군은 종식될 수 없었다는 분석입니다. 안 그랬으면 군에 의해 역으로 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YS는 봤을 겁니다.
임혁백 교수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군의 후견권력을 인정한 노태우 정부에서 문민통제를 했을 경우 이에 반발할 쿠데타 가능성은 20%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에, 그 가능성은 YS정부 들어와 훨씬 높게 측정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문민정부에서 엄격한 통제를 했을 경우 즉각적으로 군에 의한 반란의 여지는 80%까지 치솟는 것으로 조사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YS가 군정을 종식했기 때문에 현재는 쿠데타 가능성이 0.01%밖에 되지 않게 됐다”는 것이 임 교수의 설명입니다.
이 업적은 세계사로 볼 때도 괄목할 만합니다.
임 교수는 성공한 사례로 “한국의 YS정부 외에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정부, 전후 독일에서 일어난 나치청산, 구 동독 공산당 간부들의 처리, 전후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리” 등을 들었습니다.
반대로 신생 민주주의 아래에서는 군이 후견권력을 자처했을 경우 까딱하면 다시 등장하고 마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분석입니다.
“제3의 민주화 물결이라고 있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시작해서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 제3의 민주화 물결이다. 대부분의 경우 군부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했다. 그러나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 개혁은 성공한 경우가 별로 없다. 이미 민주화가 됐는데 군부에 대한 문민 통제가 꼭 필요한가?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이유는 많은 나라에서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군인들이 후견적 권력을 유지하며 커튼 뒤에서 조종해왔기 때문이다. 그 경우 군은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는 제스처를 보내면서 주시했고, 계속 군부의 뜻과 다르게 정부가 권력을 행사하면 쿠데타는 다시금 등장했다. 태국과 미얀마에서도 그랬으며 여러 나라에서도 후견권력인 군이 그대로 유지된 바 있다.”
과거 청산을 소극적으로 했을 경우 잠재적 쿠데타 가능성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는 지적입니다.
“필리핀의 아키노, 라모스, 에스트라 정부, 아르헨티타 알퐁신 정부 등이 그 예에 속한다. 필리핀 경우, 민선 아키노 정부에서부터 라모스 정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권위원회, 정치범 위원회, 실종자진상조사위원회, 테러방지법, 범죄통제법, 국가전복방지법 등이 제정됐으나 간헐적인 쿠데타 시도를 막지 못했다.”
군의 재등장 가능성은 먼 나라 얘기가 아닙니다.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의 발언을 통해서도 이 점은 증언되고 있습니다. 이날 잠시 단상 위로 올라와 인사말을 전해준 김 회장은 다음과 같이 소회했습니다.
# 김봉조 “군, 문민정부 벼르는 분위기였다” “문민정부 탄생 3일만인가. 국회에서 국방위원들이 있었고 군 수뇌부도 여럿 보였다. 내가 옆에 있는 줄 모르고 자기들끼리 벼르듯 문민정부 잘하나 지켜보겠다는 취지로 말해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
때문에, 전광석화처럼 하나회를 척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임 교수는 이 점에 주목하며 “YS의 군부통제 개혁이 중요한 이유”라고 꼽았습니다.
“하나회 척결이 한국민주주의를 공부하는 데 있어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것은 군을 압박할 경우 쿠데타 가능성이 80%까지 올라갈 수 있었음에도 대단한 용기와 기획, 결단력으로 전광석화처럼 이뤄냈다는 데 있다. 나는 YS의 어떤 업적 중에서도 하나회 척결을 가장 위대하다고 평한다.”
YS 아니면 어려웠을까?
다음으로, YS가 아니었다면 하나회가 척결될 수 있느냐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날 발언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불가능하다며 입을 모았습니다.
이구동성…“YS 아니었으면 어려웠다”
임혁백 교수
“YS 대통령은 문민정부로 못박았다. 역사적 소명과 사명이 뭐냐. 군부 통치체제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그는 탈군부화를 통한 문민화를 선언했다. 문민정부라고 작명했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YS 대통령처럼 어지간히 간이 큰 사람이 아니면 할 수가 없던 것이다. 칠레나 남미 경우는 총에 맞아 죽기도 하지 않나.”
권노갑 민추협 공동이사장
“지금도 많은 사람이 하나회 척결은 결정하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결단력을 가진 김영삼 대통령이 아니면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후학인 우리도 다시는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는 불행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키고 후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역사의 사명을 다해 나가야 하겠다.”
김덕룡 민추협 공동이사장
“지도자란 그 공동체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위험을 제거해주는 사람이다. 30여 년에 걸친 군사정치문화를 뿌리에서부터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 정치 상황에서 반드시 넘어가야 할 시대적 과제였다. 이를 YS 대통령이 해낸 것이다. 뒷날 군이 그렇게 기피하던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노무현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YS 대통령의 군정종식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김무성 민추협 공동회장
“YS대통령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과감한 의지와 결단이었다. 하나회 척결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잘못하면 어렵게 달성한 민주화가 무너질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YS대통령께서는 강한 의지와 과감한 결단력, 실천 방식으로 단번에 역사적 과업을 완료했고 이것이 갖는 의미는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매우 지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주정부 가능했을까?
더불어 이는 ‘하나회가 유지됐다면 지금처럼 민주화가 영속적일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정대철 헌정회장은 “YS 대통령의 하나회 척결이 없었다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들어설 수 없었을 것”이라며 “YS 대통령 대단한 업적 중 무엇보다도 잘한 것이 하나회의 척결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석현 민추협 공동회장은 “YS대통령의 하나회 척결은 군인이 정치하는 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문민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시발점이 됐다”며 “그것은 수직적 정권교체의 한계를 뚫고 국민이 부여한 정통성 있는 권력을 명실공히 굳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육군 현역 간부 당시 군 부재자 투표 부정에 대해 양심선언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이지문 연세대 연구교수는 결론적으로 하나회가 척결되면서 군도 문민화로 거듭날 수 있게 됐다는 데 의의를 뒀습니다.
이 교수는 “YS가 당선된 1992년 대선 때부터 영외투표가 이뤄져 군 부재자투표 관련 부정선거 시비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며 “YS가 하나회 척결을 할 수 있었던 자신감 중 하나는 군에 빚진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가늠했습니다.
한편, 이날 김덕룡 이사장 등 주요 민추협 인사들은 윤석열 정부와 여당이 올해로 36주년이 되는 6·10 민주항쟁기념식에 불참한 것에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앞서 정부는 기념식을 주관하는 민주화운기념사업회가 윤석열 대통령 퇴진 구호를 내건 단체를 후원해 도마에 오른 것을 이유로 유감을 표하며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바 있습니다.
정파를 떠나 통합을 강조해온 민추협 인사들은 일부 정치적 논란이 있더라도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6·10 민주항쟁 기념식을 불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일침을 가했습니다.
이번 행사는 문민정부 출범 30주년을 기념해 △3월 ‘민주화 30년 문민정부 30년 조명’ △4월 ‘문민정부로 가는 민주화 대장정’ △5월 ‘금융실명제를 중심으로 본 문민정부의 부패없는 투명한 나라건설’에 이어 네 번째 열렸습니다.
사회는 조찬옥 민추협 사무총장이 맡아 진행했으며, 김장곤‧송석찬ㆍ김선동 전 의원 등 100여명 인사가 함께했습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또한 친일세력도 척결해야 할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