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예컨대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은 것은 투쟁의 산물이었다.
민정당 시절 YS는 내각제 유출 파동, 3‧24 총선 책임론 등 위기를 겪을 때마다 정면 돌파했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1992년 5월 전당대회에서 66% 득표율을 얻어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민주계는 당내 비율이 20%밖에 되지 않았다. 최대 계파는 민정계였다. 80% 쪽수를 갖고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민주계는 사활을 걸었다. 이런 뒷받침이 있었기에 YS가 민정계를 누르고 대권을 잡을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그러기까지 故김태룡 전 국회의원의 역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YS가 노태우 대통령과의 갈등 끝에 분당을 결심했을 때가 있었는데, 당에 남아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설득한 인물이 김 전 의원이었다는 것이다. 훗날에 가서야 YS와는 정치적 결별을 하는 사이가 됐지만 당시는 상도동계로 불렸던 때였다.
YS 민정당 대선후보 선출에 일조
다음은 그의 얘기다.
“YS가 나를 비롯해 측근 30여 명을 자신의 상도동 집 2층으로 불렀어요. ‘깨졌어’ 하더라고. ‘나는 민자당과 같이 안 하겠다. 당을 깨겠다. 군소정당 하겠다’ 선언한 거예요. 모인 사람들도 ‘더는 머물러 있을 필요 없다’ ‘노태우와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 정당을 만들자’ 이구동성으로 동조를 하는 거예요.
하지만 나는 반대했어요.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통합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이제 탈당해 군소정당을 만든다? 어느 국민이 찬성할 수 있겠습니까. 박수받기는커녕 돌팔매질을 가할 겁니다.’ 아주 강경한 얘기들을 한 것이죠. 다시 담판을 지으라, 노태우 입에서 ‘당신이 하시오’ 할 때까지 투쟁하시라, 한 거예요. 또 내가 그랬어요. ‘여기서 나오면 정치 끝입니다. 정권 잡는 것 포기하고 DJ 밑으로 들어가시오.’ 아주 극한 얘기까지 했어요.”
- 김태룡, 2021년 <시사오늘> 인터뷰 중
김 전 의원의 만류에 YS는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이후 김 전 의원은 허주 김윤환을 만나 YS와 노태우가 만날 수 있도록 중재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 끝에 YS가 분당하지 않고 노태우와 만나 담판을 질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평소 그의 뛰어난 현실 인식을 비롯해 설득력과 중재력, 대찬 배짱을 엿볼 수 있는 일화라는 생각이다.
6‧29 선언 앞당긴 숨은 역할
거슬러 1987년 전두환의 6‧29 선언이 나오는 데에도 숨은 역할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김 전 의원은 관련해서도 일화를 들려준 바 있다.
87년 6월항쟁이 고조를 향해가면서 6월 25일 전격적인 영수회담이 이뤄지게 됐다. YS는 전두환과 담판을 지으려 했다. 김 전 의원은 신민당 대변인 자격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YS와 전두환이 회동을 하는 동안 김 전 의원은 바깥에서 김윤환 정무수석과 이종률 대변인 등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계엄령이라는 악수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김 전 의원은 청와대 실무진들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설득을 이어갔다.
“ 심각한 얘기였어요. 전두환이가 사태가 심각해지니까 지금의 미얀마 사태처럼 계엄을 하느냐, 민주화 조치를 해야 하느냐, 이 두 가지 안을 다 준비해둔 채 저울질하고 있던 거예요. 바로 그 시점에 우리가 간 거지. 으름장을 놨어요. 계엄을 확대하고, 철권정치를 강화해 정권을 연장한다면 어마어마한 비극이 올 거라고 했지. 탱크로 진압한다면, 결국 그 탱크가 머리를 돌려 청와대로 향할 것이다, 전두환은 물론 참모들 모두 불행하게 될 거다, 계엄을 포기하고, 민주화 조치를 즉각 단행하라. 모두 듣고만 있더라고. 세 시간 정도 거의 나 혼자만 말을 했지. 신문사 기자 출신인 김윤환 수석은 나한테 동조해주더라고. ‘김태룡 의원 참 대단합니다.’ 그 시절 누구도 그 얘길 못했는데 서슴없이 하더라, 이거야. 전두환 설득에도 공헌한 참모가 김윤환이에요. ‘각하 큰일 납니다. 제2의 부마사태 나면 불행하게 되니 이제는 민주화 조치를 선언해야 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6·29 선언이에요.”
- 김태룡, 2021년 <시사오늘> 인터뷰 중
당시 영수회담을 마친 YS는 기자들에게 “협상 결렬!”이라고 외쳤다. 시민 할 것 없이 전국적 시위대는 다시 거리로 쏟아졌다. 금방이라도 청와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전두환 정권은 며칠 못 가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선후보 발표 아래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6‧29선언이었다. 김 전 의원은 이 과정 속에서 청와대 실무진들을 설득했던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야투 활동…민주 회복 투쟁의 선봉장
그는 엄혹한 시절 골수 야당인으로 사는 길을 주저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YS를 도와 강경투쟁에 동참했다. YS는 온건파인 이철승과 달리 신민당이 선명야당 노선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YS에 동조하는 정치인들은 1977년 4월 야투(야당성투쟁회복동지회)를 결성했다. 이를 동력 삼아 YS는 5‧30 전당대회에서 이철승을 누르고 당수가 될 수 있었다. YS가 총재가 되면서 신민당은 달라졌다. 박정희 정권에 맞서 강경하게 투쟁했다.
김 전 의원은 독재와 싸웠고 세 번의 옥고를 치렀다. 많은 고초를 겪었다. 1934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4‧19 세대다. 학생 시절부터 민주화에 투신했다. 충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거쳐 정계 입문해 27세 충남도내 최연소의 나이로 도의원에 당선됐다. 신민당 돌풍이 불던 1985년 12대 총선에 당선돼 국회에 입성했다. 신민당 대변인과 통일민주당 대변인을 맡았다.
몇 번의 선거에 나갔지만 당선과는 연이 멀어 초선에 그쳤다. 그 점은 아쉬웠을 법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 여정을 돌아보면서 여한이 없다고 했다. 민주투사로 살아온 것에 가장 큰 의의를 뒀다.
“자유, 민주, 민권을 위한 민주회복 투쟁의 선봉장으로 살았소. 6·10 항쟁을 성공시킨 것에 만족하오. 이 시대에 주어진 사명, 역사적 사명을 정치하면서 다했소. 고난의 길, 처참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권력에 굴하지 않고 행동하는 정치인으로 살아온 것에 아무 후회가 없어요.”
- 김태룡, 2021년 <시사오늘> 인터뷰 중
김 전 의원은 지난 22일 오후 3시 30분경 90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졌고, 1남 5녀의 배웅 속에서 24일 발인이 있었다.
고인과 함께 야투 멤버였던 상도동계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은 갑작스러운 동지의 별세 소식에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김 회장은 27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민주화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어른이었다”며 고인을 추억했다. 그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정말 슬프고 아쉽다”며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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