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방해 불구, DJ 목포서 의원 당선·YS 신민당 총재 선출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때릴수록 커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살아있는 권력에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으로 존재감이 부각된 이에게 따라붙는 말입니다.
윤석열 정부에선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취임 전 인사청문회에서부터 민주당 의원과의 설전에 밀리지 않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모습으로 ‘때릴수록 커진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정계에 입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지도자 후보에 이름을 올렸고, 국회 본회의, 법사위원회, 국정감사 등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그의 발언 한 마디 한 마디가 언론 헤드라인에 걸렸습니다. 최근 민주당은 한동훈 장관 파면’ 목소리를 키우는 등 그를 공격 타깃으로 삼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추미애·박범계 전 법무부 장관과 갈등을 겪고, 민주당 진영으로부터 공격받으며 대권 주자로 부상했는데요.
한 장관은 윤 대통령과 달리 여당이 아닌 ‘야당’으로부터 공격받으며 화제를 모았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민주당이 168석으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을 주도할 수 있을 만큼의 입법권력을 가진 거대 야당이란 이유 때문이겠죠.
박정희, 김대중 3선 저지 위해 목포서 국무회의 감행
YS, 유신 헌법 개정 요구…‘선명성’ 강조로 총재 당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견제·탄압을 받으며 ‘리더십’을 발휘한 바 있습니다.
7대 총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던 1967년 5월의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돌연 목포에 내려와 국무회의를 개최합니다.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목포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김대중(DJ)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이었죠.
김대중은 6대 국회에서 자유민주당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 지연을 위해 5시간 19분의 필리버스터(소수파가 필요에 따라 의사 진행을 지연시키는 무제한 토론)를 진행해 정치인으로서 주목받은 바 있습니다. 이 외에 국회 본회의·상임위원회 발언대에 오르면 정부 각료를 향해 정책 문제점 등을 조목조목 지적해 의정활동 면에서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김대중을 요주의 인물로 꼽고 벼르고 있었던 듯합니다. 박 대통령은 공화당 김병삼 후보 당선을 돕기 위해 직접 목포로 내려와 지지를 호소하는 등 적극 돕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67년 5월 27일 자 <경향신문>은 당시 상황에 대해 “공화당은 당초 선거 전략의 하나로 ‘말깨나 하고 똑똑한’ 12명 내외의 야당 후보를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해서 낙선시키기로 했는데, 이 중 한 지역구로 신민당의 김대중 의원이 나온 목포가 포함됐다”고 보도했습니다. 실제로 목포의 선거전은 치열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직접 목포로 내려와 여당 후보를 지원했다. 가는 곳마다 김병삼 후보의 공약을 뒷받침했다. 당시 법률로는 대통령은 물론 각료 등 공무원이 선거 지원 연설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군중집회의 연사로 나섰다. 목포역 앞에서는 1만 명을 모아 놓고 지지 연설을 했다. 목포 시민에게 자신이 추천한 김병삼 후보를 밀어 달라고 호소했다. 그를 당선시키는 것이 곧 목포의 개발과 발전을 위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박 대통령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예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었다. 각료들이 줄줄이 목포로 내려왔다. 모든 장관들이 좁은 목포 땅에 모였으니 청와대가 유달산 기슭으로 옮겨 온 셈이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187~188쪽.
정부의 노골적 방해는 되려 김대중의 존재감을 부각했습니다. DJ는 자서전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목포 시민들의 관심은 박 대통령이 김대중을 왜 이리 집요하게 쓰러뜨리려 하느냐로 옮겨갔다. 마침내 시민들은 김대중은 대통령감이라 미리 그 싹을 자르기 위해 저렇듯 광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선거는 대통령 예비 선거 양상으로 전개됐다. 정부 여당도 모든 화력을 쏟아부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김대중은 7대 총선서 56.28% 득표율로 3선을 거머쥐었습니다. 후에 DJ는 7대 대선에서 박정희와 맞붙어 국민에게 유력 대권 주자로 자리매김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정부의 탄압과 동시에 야당 총재로 리더십을 발휘한 경험이 있습니다. 1974년 8월의 일입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유진산의 타계로 전당대회가 치러지게 됐습니다. 김영삼은 즉각 출마 준비에 나섰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을 견제하고 방해했습니다. YS가 신민당 부총재로 있을 때부터 유신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그의 당선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신민당 전당대회 한 달 전, 중앙정보부 6국장 이용택이 YS의 자택을 찾아가 기자회견문 내용이 긴급조치에 위배된다”며 기자회견 중지를 요청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측근 박권흠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결국은 이 사건이 거산을 야당 총재로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선명논쟁이 벌어졌던 것이 당시 야당 환경이었으니까요. 거산의 선언문은 ‘나의 도전은 단순한 당권 도전이 아니라 정권 도전’이라는 내용으로 긴급조치 해제를 요구하는 것이었어요.”
공작은 여러 방면에서 이뤄졌습니다. 당시 정부 고위인사는 YS의 경쟁자였던 고흥문을 찾아가 “각하께서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 의지를 갖고 게시니 꼭 성공하라”며 박정희의 의중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고흥문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청와대는 김의택에게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유진산의 실용노선을 이어받는 김의택을 음양으로 지원했다고 합니다.
김영삼은 후의 회고록에서 “중앙정보부의 방해 공작이 매우 심했다”며 “나를 지원하고자 하는 사람도 정보부의 보복이 두려워 돈을 대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기록했다.
“경선에 개입한 중앙정보부가 YS를 총재로 만드는 1등 공신이었다는 중평도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내용의 출마 선언문을 사전에 입수하는 데 성공, 선언문을 쓴 비서 박권흠을 연행해 갔다. 하지만 YS 즉각 선언문을 복사해 대의원들에게 공개해 버렸다.
유신 체제를 비판 한 후보가 YS밖에 없는 상황에서, 중앙정보부의 그 같은 개입은 YS의 선명성을 극대화시켜 주었다. 그것은 부동층이던 대의원들이 지지 후보를 김영삼으로 점찍는 계기가 되었다. (중략)
개인적으로 대통령 후보 경선 때 불의의 일격을 받고 뒷전으로 밀렸던 김영삼이 4년 만에 당권을 확보하는 재기에 성공했고, 가택 연금 중인 김대중의 몫까지 등에 지고 박정희와 대결하는 국면이 열리게 되었다.
김영삼이 민주화 투쟁을 현장에서 진두지휘하고, 현장에 접근할 수 없는 김대중은 상징적 존재의 입장에서 협조하는 쌍끌이 체제의 시작이었다. 1970년대 박정희에게 도전한 대표적인 야당 인물은 김대중, 장준하, 김영삼 3명이었다.”
- 오인환, <김영삼 재평가> 96~97쪽.
김영삼은 전당대회 1·2차 투표에서 연이어 1위를 차지합니다. 김의택은 대세가 그에게 기울었음을 감지했는지 돌연 후보 사퇴를 선언했습니다. 김영삼은 당 총재가 된 뒤 선명 야당 구축을 통한 대여 투쟁을 선언하게 됩니다.
여야간 대립이 날로 심화되는 상황입니다. 정치권에서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의문이 든 적 한 번쯤 있을겁니다. 이들의 선택은 과거 정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학습효과 아닐까요. ‘김자영의 정치여행’은 현 정치 상황을 75년간의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를 비춰 해석해 봤습니다. 다음주 금요일에 찾아 뵙겠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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