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윤여준 결정 반발해 나온 김윤환 민주국민당 참패
18대 총선 친박계 대거 공천 탈락, 친박·무소속 연대로 생환
새누리당, ‘진박감별’ 논란 끝 패배…유승민 무소속 출마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정당마다 공천 작업이 한창이다. 총선 때마다 반복되는 논란 중 하나가 ‘공천 파동’이다. 단수 공천 혹은 경선이 예정된 후보자와 컷오프된 이들의 희비가 엇갈리며 파열음이 터져 나오는 시기다.
지도부나 공관위 역할은 선거 후보자를 결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탈락한 이들이 당의 결정에 반발하지 않고 납득해 돕도록 하는 것, 그러니까 ‘공천 잡음’을 잘 관리하는 것까지라 할 수 있다. 결과에 납득하지 못한 이가 무소속으로 출마해 표를 갈라먹는 경우는 범사고, 자칫 같은 당 후보의 낙선을 위해 자기 조직을 동원해 타당 후보를 지원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22대 총선도 예외가 되기 어렵다. 이재명 지도부 취임 이후 친명(親明) 대 비명(非明)으로 갈라진 민주당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원칙과상식 의원 등이 탈당한 이후 임종석 전 문재인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한 친명 대 친문(親文) 갈등으로 변한 모양새다. 국민의힘은 김경율 비대위원 마포을 사천 논란, 김성태 전 의원의 친윤 공천 개입설 등으로 논란이 있었다.
우리나라 정당 공천의 역사는 이승만 정부 시기인 3대 총선(1954년)부터다. 공천제가 확립하기 전 1대·2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무소속 당선자만 각각 85명, 126명일 정도였다. 군소정당도 난립했다. 1954년 이후부턴 당 차원의 후보 정리, 선거 지원이 일반화됐다.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시대엔 공천 과정에서 총재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노무현 정부가 취임한 뒤 ‘당정분리’ 필요성이 대두되며 원칙적으로 정부가 당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공천 결정권자 심리 기저에 자기 사람을 심고자 하는 욕망이 깔려있는 법. 이 때문에 현대 와서도 여러 공천 파동이 불거졌다. <시사오늘>은 관련 역사를 살펴봤다.
1971년 ‘진산파동’…유진산, 마감 직전 셀프 ‘전국구 1번’ 등록
권위주의 시대에 공천을 둘러싼 논란으론 ‘진산파동’이 있다. 1971년 5월, 8대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에서 발생했다. 신민당 당수였던 유진산이 5·25 국회의원선거 후보 등록 마감일인 5월 6일, 자신의 원래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갑을 버리고 자신을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처조카사위이자 민주공화당 영등포갑 출마자인 장덕진에게 지역구를 넘겨준 셈이었기에 뒷거래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실제 서울의 경우 여당(공화당)이 19곳 중 1곳을 제외하고 모두 신민당에 패했는데, 이긴 한 곳이 영등포갑이었다.
유진산의 급작스런 결정은 신민당 내 당권 싸움이 불붙는 계기가 됐다. 당시 신민당 주류는 진산계에 속한 김영삼, 이철승 등이었는데, 비주류에 속한 김대중이 7대 대선 이후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김대중은 유진산 당 제명과 자신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을 것을 주장했으나, 진산계가 이를 반대했다. 결국 유진산이 사퇴하고 김홍일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는 것으로 결정났다. 신민당은 진산파동을 해결하느라 선거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 개헌 저지선(69석)을 훌쩍 넘는 89석을 얻었다. 하지만 8대 국회는 이듬해 10월 유신으로 1년 3개월만에 해산했다.
김윤환·이기택·이수성 등 거물, 공천 탈락 반발
민국당, 지역구 1석·전국구 1석 그쳐…대실패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 중진들이 공천 탈락에 반발해 당을 창당한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이회창이 이끌고 있던 한나라당은 윤여준 여의도연구소장을 공천기획단장으로 임명해 대대적 물갈이를 단행했다. 김윤환, 조순, 이기택, 신상우 등 거물들이 공천에서 배제됐다. 이들은 국민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박찬종을 비롯해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에서 탈락한 김상현 등과 힘을 합해 민주국민당을 창당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민국당은 비례대표 득표율 3.7%를 얻었다. 전국구 1명 당선에 그쳐 전국구 2번의 김상현이 낙선했다. 경북 구미에 출마한 김윤환, 부산 연제에 출마한 이기택, 부산 중동의 박찬종, 경북 칠곡의 이수성, 부산 사상의 신상우 모두 2위에 그쳤다. 강원 춘천의 한승수만 2위 후보와 0.59%p 차로 당선됐다. 단순 인지도만으로 거대 양당의 벽을 깨트리기 어렵다는 것이 증명된 도전이었다.
공천 배제된 親朴, 친박연대·무소속 출마로 생환
민국당과 같은 실패 사례가 있는가 하면 18대 총선 ‘친박 무소속 연대’ ‘친박연대’는 반대로 성공한 경우다. 선거 약 한 달 전 한나라당 영남권 공천 발표에서 김무성을 포함, 친박계가 대거 탈락한 결과가 나타났다. ‘공천 학살’ ‘정적 죽이기’ 등 반발이 일었다. 하지만 공천 탈락자 다수가 탈당 후 대거 친박연대·무소속으로 출마해 재기에 성공했다.
“친박 학살이다.” 50%가 넘는 자파 의원들이 탈락한 영남권 공천 결과가 발표되자 박근혜 전 대표계 의원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친박계 의원들은 13일 저녁 공천 결과가 발표되자 ‘쇼크’ 상태에 빠졌다. 박 전 대표는 핵심 측근인 유정복 의원의 보고를 받고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며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는 전언이다.
친박계 의원들은 특히 박근혜 경선캠프의 좌장격이었던 김무성 최고위원의 탈락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한 친박계 의원은 “김무성이 탈락한 게 맞느냐”며 공천 결과를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 2008년 3월 13일 자 <경향신문> ‘친朴 “학살이다” 공황상태…김무성 무소속 출사표’
서청원 등 다수 친박계 인사들은 한나라당을 탈당해 ‘친박연대’로 모였다. 지역구에서 홍사덕(대구 서구), 조원진(대구 달서병), 홍장표(경기 안산상록을), 김일윤(경북 경주), 박대해(부산 연제), 박종근(달서갑) 6명, 비례대표로 8명이 당선돼 14석을 확보했다.
친박연대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른바 ‘친박 무소속 연대’도 10명 이상 당선자를 내며 선전했다. 김무성은 부산 남을에서 49.7% 득표율로 당선됐으며, 이외 대구·부산·경북·경남 등 영남권에서 친박 무소속 연대가 돌풍을 일으켰다.
18대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자가 무려 25명이나 당선되는 이변이 연출됐다. (중략) 이번 무소속 돌풍은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의 공천에서 두 당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영남과 호남에서 유력후보들이 대거 탈락한 게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중론이다.
우선 68석이 걸린 영남권의 경우 부산 5명, 경북 5명, 울산.경남 각 1명 등 모두 12명이 당선, 당선율 17.6%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 것. 한나라당 공천에서 낙천한 `친박 무소속 연대'가 박근혜 전 대표의 동정론을 등에 업고 바람몰이를 주도했다.
- 2008년 4월 10일 자 <연합뉴스> ‘<‘무소속 돌풍’…역대 최다 25명 당선>’
180석 전망한 새누리당, ‘진박감별’ 논란 끝 참패
非朴 유승민, 공천 배제…김무성, 공천 의결 거부
비교적 최근 벌어진 공천 파동 사례로 20대 총선 당시 새누리당 내에서 있었던 ‘진박 감별’ 논란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상황은 새누리당에 우호적이었다.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하며 위기를 겪었지만, 여당에선 180석 이상 획득할 가능성이 거론되는 등 낙관적 전망이 이어졌다.
지나친 낙관 탓이었을까. 새누리당은 친박 대 비박으로 나뉘어 격한 계파 싸움을 벌였다. 친박계 의원들과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진박(眞朴) 감별’ 등의 이름으로 비박계를 공천에서 배제하는 등 무리한 개입을 한 것이다.
배제된 이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특히 비박계였던 유승민·이재오 등은 새누리당을 탈당해 무소속 출마한다.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공천 의결을 거부하고 부산으로 내려가며 옥새 투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여당의 볼썽사나운 행태에 실망한 중도 보수 유권자 다수가 새누리당에 돌아서는 결과가 나타났다. 새누리당은 결국 원내 2당이라는, 전망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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