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왜 싸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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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왜 싸우는가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3.10.28 1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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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의 탄압에 팔레스타인으로 간 유대인, 영국 지지하에 이스라엘 건국
쫓겨난 팔레스타인인 반발에 강경 대응 반복하는 이스라엘…원한에 원한 쌓여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시사오늘 정세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시사오늘 정세연

2023년 10월 7일(현지시각).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남부에 침투, 수백 명의 민간인을 살해하고 일부는 인질로 잡아 가자지구로 끌고 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전쟁을 공식 선언하며 양측의 무력 충돌이 장기화되고 있다.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서 촉발된 이번 사태에, 미국·영국·독일 등은 “하마스의 테러 행위에는 어떠한 정당성도 적법성도 없으며 규탄 받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면서 “우리는 국가와 국민을 그런 만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노력을 지지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하마스의 무차별적 공격을 규탄한다는 뜻을 전했다.

반대로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지지 메시지를 내놨다. 하마스 배후로 지목된 이란은 물론, 미국과 비교적 가까운 사우디아라비아도 서방과는 목소리를 달리 했다. 이뿐만 아니라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도 현지시각으로 24일 미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이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왜 이들은 단순한 테러를 넘어 ‘전쟁 범죄’에 가까운 행태까지 보이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온정적 시각을 보이고 있는 걸까. 애초에 팔레스타인은 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끔찍한 학살까지 벌였던 걸까. <시사오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죽여야 하는 운명에 맞닥뜨려야 했는지 지난 역사를 돌아봤다.

 

차별 대상에서 기득권 된 유대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사진은 가자지구의 모습. ⓒ연합뉴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사진은 가자지구의 모습. ⓒ연합뉴스

기원전 63년. 하스몬 왕조가 다스리던 유대 왕국은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의 속국이 됐다. 그러나 일신교를 이유로 동화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은 로마와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고, 로마의 세리(稅吏)들이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폭리를 취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유대인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그러던 중 유대 속주의 장관 플로루스가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신전의 보물창고에서 금화를 몰수하고, 항의하는 유대인들을 강경 진압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분노한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로마 세력을 유대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그러나 로마의 반격으로 예루살렘은 함락됐고, 이후 로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계속된 유대에 대한 관용 노선에서 벗어나 강압적 통치를 시작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제2, 제3차 유대-로마 전쟁을 일으켜 대항했지만, 그 결과는 더욱 강한 진압이었다. 세 차례에 걸친 유대인들의 반란 과정에서 로마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예루살렘 이름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꿨으며 이 지역에서 유대교를 믿는 것도 금지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지중해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디아스포라(Diaspora·흩뿌리거나 퍼뜨린다는 뜻의 그리스어 διασπορά에서 유래)라고 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굴하지 않았다. 삶의 터전을 잃었음에도 특유의 근면·성실함과 상업적 노하우를 앞세워 세계 각지에서 성공을 거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경제·금융·산업 분야에서 세계의 ‘보이지 않는 지배자’로 등극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적·경제적 성취는 반유대주의의 씨앗이 됐다.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배척받으며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일찌감치 상공업과 금융업에 종사해왔는데, 기술 발전으로 도시화가 진행되자 예전부터 도시에 자리를 잡고 부를 일군 유대인들이 자연스럽게 ‘기득권’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뒤늦게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유대인들은 ‘이기적이고 사악한’ 사람들로 비칠 수밖에 없었고, 유럽 사회에 반유대주의가 싹트게 된다.

 

포그롬과 드레퓌스 사건


이후 유럽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유대인을 원흉으로 지목하고 희생양으로 삼는 일이 계속됐다. 대표적인 것이 1881년 제정 러시아 제12대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기점으로 벌어진 ‘포그롬(pogrom)’이다. 농노제를 폐지하는 등 개혁 정책을 펼치던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자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한 명이 암살에 관여했다는 헛소문이 퍼졌는데, 이를 믿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200여 개 마을과 도시의 유대인들을 공격한다. 한 번 붙은 불은 순식간에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유대인들은 대학살을 당했다. 이를 포그롬(학살 혹은 파괴를 의미하는 러시아어)이라 한다.

서유럽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즈음 프랑스에서는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서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의 상당수는 유럽의 주류 사회에 동화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한 프랑스 사회에는 배타적 국수주의 바람이 몰아쳤고,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 정서도 급속도로 강해져갔다. 이런 배경 속에서 프랑스가 유대인 혈통의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에게 부당하게 스파이 혐의를 씌워 종신유형을 선고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프랑스에는 반유대주의의 광풍이 불어 닥쳤다.

이런 유럽의 분위기는 유대인들에게 공포를 안겼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인권과 평등을 외치며 유대인에게 관대함을 보였던 프랑스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드레퓌스 사건은 엄청난 충격을 줬다. 이 일의 여파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유럽 주류 사회에 동화되더라도 언제 반유대주의의 광풍에 휩쓸릴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열망도 품게 됐다. 마침 이 사건을 취재하던 유대인 기자 테오도르 헤르츨이 독자적인 유대인 국가 건설을 주장하면서 유대인 사회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여기에 19세기 전 세계를 휩쓴 민족주의 열풍이 더해지면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조상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의 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민족주의 운동이 벌어졌다. 이것이 ‘시오니즘(Zionism)’이다. 실제로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를 경험한 유럽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조금씩 이주했다. 1920년경에는 이미 팔레스타인에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이민자 사회가 형성됐던 것으로 알려진다.

 

비극의 시작, 밸푸어 선언


팔레스타인의 공격에서 시작된 전쟁임에도,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연합뉴스
팔레스타인의 공격에서 시작된 전쟁임에도,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예상치 못하게 ‘중동 비극의 씨앗’이 됐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측 동맹국으로 참전하자, 오스만 제국의 적성국이었던 영국이 유대인의 도움을 얻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이 발단이었다. ‘밸푸어 선언’으로 불리는 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본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는 것을 지지하며, 이를 성취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팔레스타인에 존재하는 비 유대인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 또는 타국에서 유대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밸푸어 선언 2년 전인 1915년,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A.H.맥마흔(Henry Macmahon)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싸우면 아랍의 독립을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점이었다. 인구의 90%가 아랍인인 땅에 유대 국가의 건설을 약속한 것만으로도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었는데, 유대인과 아랍인에게 모순되는 두 개의 약속까지 했던 것. 영국은 2002년에야 ‘밸푸어 선언이 명예롭지 못한 결정’이었다며 사과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이중 계약’ 중 어느 쪽을 지킬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들의 선택은 유대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후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한 영국은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허버트 사무엘(Herbert Louis Samuel)을 영국령 팔레스타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했다. 당연히 허버트 사무엘은 유대인을 위한 정책을 폈고, 아랍인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 유럽에서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펴고 있었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동 분쟁을 극화시켰다. 하나는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유대인들의 수를 폭증시켰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 국가 건설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망을 더 크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홀로코스트로 인해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유대인들이 늘어난 결과, 1930년대 후반엔 유대인 인구가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33%까지 증가했다. 한편으로, 차별을 받다 못해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일의 피해자가 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세워야한다는 심리가 더욱 강해졌다. 이처럼 아랍인들과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대인 인구가 폭증하고 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까지 커지다 보니,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갈등은 더더욱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손 떼는 영국과 혼란에 빠진 팔레스타인


참다못한 아랍인들은 1936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1939년까지 계속된 이 반란에 영국은 3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켜 항공기로 마을을 폭격하고 가옥을 철거하는 등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다. 유대인 무장조직인 하가나(Haganah)도 영국의 진압에 가세했다. 이에 3년 동안 팔레스타인인 5000여 명이 사망했고, 1만5000~2만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5600여 명이 투옥됐다.

3년에 걸친 팔레스타인인들의 반란은 영국을 놀라게 했다. 본래 팔레스타인인은 하나의 민족이 아닌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을 의미했다. 결속력이 강한 집단이 아니었다. 그런 팔레스타인인들이 뭉쳐 3년 동안이나 반란을 지속했다는 건 영국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결국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유대인 이민 금지라는 팔레스타인 측 요구사항을 수용했다.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반발했다. 유대인들은 영국을 향해 테러를 가했다. 1946년에는 영국의 행정·군사본부가 있던 킹 데이비드 호텔을 폭탄 테러해 91명을 숨지게 했다. 이처럼 형편이 걷잡을 수 없게 돌아가자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손을 떼고 유엔에 권한을 위임한다. 이에 유엔은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 181호를 채택했다. 유대인과 아랍인을 분리하고 각자의 독립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결의안의 내용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인구의 67%는 아랍인들이었고, 이들이 팔레스타인 전역의 93%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 결의안은 전체 인구의 33%에 불과한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를 분할하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아랍인들은 반대했지만, 유대인들은 결의안을 유대 국가 건설에 대한 일종의 ‘국제적 승인’으로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시온주의 준군사조직들은 향후 탄생할 국가의 영토 확장 작업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500개 이상의 팔레스타인 마을과 도시들이 파괴되고, 1만5000여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다. 또 75만여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터전을 잃고 난민으로 전락했다. 1948년 4월 9일에는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11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스라엘 건국과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의 원인을 영국에서 찾는 분석이 많다. ⓒ연합뉴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의 원인을 영국에서 찾는 분석이 많다. ⓒ연합뉴스

사전 작업을 끝낸 유대인들은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근거해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한다. 이에 아랍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우리 땅을 주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이 제1차 중동전쟁이다.

아랍연맹과 이스라엘이 맞붙은 이 전쟁은 이스라엘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나 아랍연맹 사이의 심각한 파벌 다툼과 혼란스러운 지휘체계는 이스라엘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면적의 약 78%를 차지하게 된다. 기존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70만여 명의 아랍인들은 졸지에 난민이 돼 가자지구·서안지구로 향하거나 주변 이슬람 국가로 망명해야 했다.

이어진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시리아 골란고원, 이집트 시나이반도 등 팔레스타인 나머지 지역마저 점령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서안지구 등을 자국 영토로 만들기 위해 대규모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러자 주거지에서 쫓겨나 난민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아랍인들은 강력한 저항에 나섰고, 이런 배경에서 결성된 것이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다.

PLO는 자치정부 수립을 목표로 계속 이스라엘과 무력 투쟁을 벌였다. 특히 1969년 PLO 의장으로 선출된 야세르 아라파트는 항공기 납치, 뮌헨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살해, 자살폭탄테러 등 서방국가에 대한 무차별 테러를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이끌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나치게 강경한 방식은 국제사회의 비판 대상이 됐고, 아라파트는 PLO를 인정받는 대신 이스라엘 이외의 국제 테러에 개입하지 않는 온건 노선으로 돌아서게 된다.

 

계속되는 싸움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반목을 계속했지만, 아라파트의 온건 노선은 평화의 씨앗을 남겼다. 1988년 아라파트는 독립을 선언하면서 ‘2국가 공존 방식’의 국가 건설에 착수했다.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독립운동 세력이 동참했고, 세계적인 지지와 승인도 이어졌다. 이스라엘에서도 계속되는 전쟁에 진절머리를 내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1992년 이스라엘 총선에서는 ‘온건파’ 이츠하크 라빈을 당수로 하는 노동당이 승리, 권력을 잡게 된다.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은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중재로 오슬로 협정을 체결했다. 오슬로 협정에는 엄청난 상징성이 있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 협정으로 팔레스타인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영토로 하는 자치정부를 구성했다. 중동에서의 평화 무드를 만든 오슬로 협정으로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는 1994년 12월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고 얼마 되지 않은 1995년 11월 4일, 라빈 총리는 유대인 극단주의자의 손에 암살됐다. 팔레스타인에서도 1988년 아라파트의 독립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던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자살폭탄 테러를 벌이는 일이 벌어졌다. ‘약속의 땅’을 무도한 팔레스타인에게 조금도 내줄 수 없다는 이스라엘의 극단파와, ‘침략자’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는 하마스의 대립은 평화 협상의 판을 깼다.

양측 강경파의 적대적 활동은 서로에 대한 감정의 골을 깊게 했고, ‘더 강하게’ 상대를 응징하겠다는 극단파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힘을 얻은 극단파는 더 강경한 대응으로 상대를 공격하고, 갈등은 더 깊어져갔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과연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중동의 평화가 ‘분노와 응징’이 아닌 ‘용서와 타협’에 있는 건 분명하지만, 원한에 원한이 더해진 양자의 갈등을 해결하는 건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대통령실 출입)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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