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기자)
“간하는 자는 환난의 근원을 막아서 그것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서리가 내리면 얼음 얼 것을 경계하고, 칠기를 쓰면 옥배씀을 막아야 한다.”
고려의 문인 이인로의 <파한집>에 나오는 경계의 글이다. 이인로가 활동하던 시기는 고려 문벌귀족의 권력독점과 전횡으로 국가 질서가 문란해져 무신정변이 터진 때였다. 결국 문벌귀족의 멸시를 참다못한 무신들이 봉기에 고려판 군부독재가 열렸다. 고려 지식인의 암흑시기가 이인로의 삶이었다.
문벌귀족의 몰락은 예견된 참사였다. 고려 건국세력은 왕건을 대표로 하는 북방 호족과 신라 6두품 지식인의 연합체였다. 왕건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후백제와의 치열한 통일전쟁을 거쳐 삼한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통일 군주 왕건의 최대 난관은 취약한 권력기반이었다. 송도 호족 출신 왕건은 20여 년의 세월을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 궁예의 심복으로 지내다 쿠데타로 집권했다. 당시 복지겸과 홍유 등 무장세력과 최응을 대표로 하는 지식인 그룹의 지지를 받아 왕으로 추대됐다.
이른바 왕핵관(왕건 핵심 관련자)은 유금필과 신숭겸, 박술희 정도랄까? 요즘으로 말하면 당내 기반이 취약했다. 왕건은 혼인정책으로 이 난관을 정면돌파하고자 했다. 전국에 널려있는 호족들의 여식들과의 잦은 혼인으로 친왕계 구축에 나섰다. 결국 지나친 외척의 난립은 잦은 반란을 자초했고, 혜종과 경종 단명의 주 원인이 됐다.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태양을 쫓는 법이다. 절대 지존의 장인이 되는 것 만큼 수지 맞는 장사가 없다. 너도나도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외척의 꿈을 이뤘지만 뭔가 아쉬웠다. 저 인간이 일찍 죽으면 권력은 신기루가 된다는 공통된 고민이 생겼다.
권력 하이에나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 우리끼리도 결혼동맹을 맺자는 이해타산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문벌귀족은 이렇게 탄생했다. 무소불우의 권력이 생겼다. 이제 왕은 우리가 선택하면 됐다. 이자겸이 대표적인 외척 국정농단의 주역이다.
이자겸이 권력을 독점하자 왕 씨네도 분을 참지 못했다. 결국 이자겸의 난이 났고, 간신히 진압했지만 국가 기강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척준경이 나서더니 묘청도 들고 일어났다. 김부식의 문벌귀족 연합체는 계속되는 반란을 진압하며 결속력을 강화했지만 암은 온 나라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말기암이 됐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않았다. 아니 권력 아편에 취해 외면했다.
머리만 똑똑한 이들은 가슴이 차가웠다. 힘 있는 무신들을 무시했다. 무식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고려의 무신들은 무식했다. 한자로 된 작전명령서도 읽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서희와 강감찬 장군은 무신이 아닌 문신 출신이다. 무신은 사람취급도 받지 못했다. 차별이 정의가 됐다.
결국 차별의 정의를 견디다 못한 무신들이 칼을 들었다. 문신들이 참살됐다. 이를 방조한 의종도 살해됐다. 군부독재의 대가는 참혹했다. 식자우환이 새로운 정의가 됐다. 문신 티만 내도 멸문지화를 당했다. 물론 무신에게 달라붙은 약삭빠른 문신들은 목숨을 보전받았다. 후일 이들은 고려 멸망의 주역인 권문세력의 한자리를 꿰차게 된다. 권력에 기생한 영민한 기회주의자의 처절한 생존법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무신정권의 역사적 과오는 ‘할 말 못하는 세상’이라는 데 있다. 문제점이 있어도 지적을 못하니 백성은 더 핍박받았다. 대몽항쟁기에도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피신해 40년을 희희낙락했고, 백성들은 몽골군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며 노예가 됐다.
윤리와 규범은 실종됐다. 실종된 정의를 말하면 죽었다. 붓보다 칼이 우선되는 비상식이 지배했다. 목숨 보전에 급급한 문신의 비겁한 침묵이 지배한 사회가 무신집권기다. 비겁한 침묵은 문신과 권력 오너의 이해타협의 결실이다.
사외이사는 오너 견제가 존재 이유다. 견제를 못하면 존재 가치가 없다. 사외이사는 기업의 대주주와 관련없는 외부 인사를 이사회에 참가시켜 경영에 대한 대주주의 전횡을 막기 위한 기업 민주주의다. 미국, 독일 등과 같은 자본주이 선진국은 오래전부터 도입돼 시행 중이다.
미국 상장회사들은 전체 이사진의 70~80%를 비상근인 사외이사로 두고 있다고 하니 사외이사 천국이라고 할 만 하다. 주로 재무나 법무 전문가, 소액주주대표, 전직 대기업 경영자로 구성됐다. 사외이사들은 법률상 상근이사와 동일한 권한과 책임을 가지는 비상근이사다.
우리나라도 IMF 위기 이후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와 투자자의 이익 보호를 목적으로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도입됐다. 사외이사의 생명은 독립성에 있다. 해당 기업의 대주주, 주요 주주, 임직원 및 관계인이 선임되지 못하도록 해 직무수행의 독립성 보장이 우선돼야 한다.
전문성도 간과할 수 없는 항목이다. 전문성이 절대 부족한 인사들이 사외이사가 될 경우 오너의 친위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할 말하는 견제가 아닌 침묵이 미덕인 사외이사는 주주의 이익을 침탈할 수 있다.
글로벌 제약회사 셀트리온은 사외이사제 논란이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올해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명예회장의 고교 동창이 셀트리온헬스케어의 사외이사로 선임돼 독립성 훼손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오너의 고교 동창이 할 말해야 하는 독립성이 생명인 사외이사의 중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앞선다. 또한 현직 언론인 사외이사도 논란의 한 축이다. 과연 현직 언론인으로서 이해상충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냐는 곱지 않은 시선이 존재한다
통상적으로 기업은 언론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정설이다. 과연 현직 언론인이 특정 기업인 셀트리온헬스케어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사이가 되지 않을까라는 의혹이 생긴다. 언제적 이야기를 새삼 다시 거론하냐는 반론이 예상되지만 더 심각한 사실은 논란의 두 사외이사가 아직도 재직 중이라는 데 있다. 서정진 명예회장은 세상의 우려에도 요지부동인 모양이다.
고려 문벌귀족의 몰락, 끼리끼리 뭉치는 중첩된 혼인관계로 똘똘 뭉쳐진 카르텔 문화가 자초한 비극이다. 무신정권은 할 말 못하는 비겁한 지식인의 무덤이 된 폐쇄성이 만든 지옥이다. 셀트리온헬스케어의 지속적인 사외이사 논란이 고려의 몰락과 오버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