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조서영 기자]
이 ‘대통령 회고사’는 〈시사오늘〉이 대통령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선사하는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다. 우리의 세 번째 재생은 故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권으로 향하는 발판이 되어줬던 정당,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의 막전막후(幕前幕後)다.
1993.07.04.
92년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민주당 일선에서 물러나 영국에 체류하고 있던 김대중은 1993년 7월 4일 다시 한국 땅을 밟는다. 줄곧 부인해왔지만, 사실상 정계 복귀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후 5시30분 그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그의 눈엔 지지자들과 기자들로 인산인해가 된 공항이 보였다.
“6개월 전 이 공항을 떠날 때는 유배지로 떠나는 심정이었으나 그러한 고통은 이제 없습니다. 남은 인생에 대한 확고한 설계와 희망과 자신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고 동교동 저택으로 돌아온 김대중. 그는 단호한 모습으로 기자들에게 정계 복귀를 부인한다. 그러나 그의 대답에는 어딘가 모호한 구석도 있었다. 다음은 93년 7월 6일자 <한겨레>·<동아일보>·<경향신문> 등을 재구성한 기자간담회 내용이다.
“통일 문제와 아시아의 안보 및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연구소를 설립할 것입니다. 저술과 연구 활동에만 전념하고, 정치에는 일체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정치 재개에 대한 오해는 삼가주십시오.”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실 계획은 있으십니까?”
“국민의 입장에서 못 만날 것도 없지요. 저는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정책이 반드시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협력할 일이 있다면 당연히 협력해 나가야겠지요.”
언중유골(言中有骨), 가시가 있는 말이었다. 당시 김대중은 김영삼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있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에 대한 과도한 견제와 탄압이었다. 문민정부 시절에 경찰, 안기부, 청와대가 연계된 ‘김대중 전담 부서’가 있었다면 사람들은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중략) 저들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나에 대한 동향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중략) 김 대통령은 나를 민주 사회를 완성해 나가는 데 조력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재기를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648페이지 中.
그러나 김영삼의 주장은 다르다. 그는 김대중을 감시한 적이 없으며, 그의 측근을 포함해 어떠한 행적 조사도 없었다고 강하게 부인한다.
김대중씨는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 국민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중략) 김대중씨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내가 그의 부정한 과거를 조사할까봐 두려워서 영국으로 떠난 것이다. 김대중씨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 행적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다가 내가 김대중씨 본인은 물론 그의 측근에 대해서 어떠한 조사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귀국했다. (중략) 나는 지금까지 김대중씨나 정주영씨는 물론이고 그 누구에 대해서도 정치보복을 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下 92페이지 中
나아가 김영삼은 “오히려 김대중이 내 뒷조사를 했다”고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후술(後述)했다.
“김대중은 독재자입니다. 대통령이 된 후 1년 6개월 동안 내 뒷조사를 했어요. 하지만 나온 게 없었지 않습니까. 청문회에 나오라고 하는데 나를 모욕 주려는 자리에 왜 나갑니까. 안 나갔지요. 김대중이 내 뒷조사를 했던 건 용서합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김대중의 뒷조사를 했다면 아마 (비리가) 많이 나왔을 겁니다. 나는 안 했습니다. 김대중이 무서워서 영국으로 도망쳤지요. 그리고는 6개월 만에 돌아와서는 정계은퇴를 번복한 것인데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사오늘> 단독인터뷰(2009)
다시 1993년 7월 4일, 동교동에 위치한 김대중의 저택으로 돌아오자. 기자들은 막 귀국한 김대중에게 민주당 내부 사정을 물었다.
“민주당에도 개입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국민들에게 ‘야당 부재’라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 지도부가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당원으로서 책임이자 의무지요.”
그러나 짐짓 평온해 보이는 김대중의 심중에도, 민주당 내부에도 새로운 바람은 불어오고 있었다.
1995.04.~1995.05.13
당권을 잡고 있던 이기택과 대권 잠룡(潛龍) 김대중의 사이는 점점 더 벌어졌다. 둘의 기 싸움은 4월의 어느 날, 6월 지방선거 공천을 두고 심화된다. 이기택은 경기도지사 후보로 장경우를 내세웠지만, 김대중은 이종찬 고문을 점찍어두고 있었다.
김대중의 구상은 이러했다. ‘서울 조순-경기 이종찬’ 구도로 지방선거에서 수도권을 제패하고, “어느 한 지역이 권력을 독점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역 등권론’을 내세워 호남 및 비(非)영남 지역에서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는 것이다.
김대중은 4월 중순 이기택과 장경우를 각각 집으로 초대해 설득하기까지 했지만, 이기택은 “생각해 보겠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경기지사로 장경우를 밀었다.
1995년 6월 27일에 4대 지방 선거를 동시에 치렀다. 광역지방자치 단체장, 광역지방의회 의원, 기초자치 단체장, 기초자치단체의회 의원을 주민들이 직접 뽑았다. 자연 국민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민주당은 이기택 씨가 이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영국에 있을 때 치러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임되었다. 당시 나는 대통령 선거에서 함께 고생한 이기택 씨를 선출해 줄 것을 당원들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나는 평당원 신분이었지만 민주당 재건에 최대한 힘을 보탰다. 반면 민자당은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와 나의 정치적 입지를 깎아내리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대표의 행보가 이상했다. 민자당의 세대교체론에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리고 번번이 장외로 나가 강경 투쟁을 주도했다. 내가 원내 복귀를 권유했지만 “당원 한 사람의 얘기”라며 일축해버렸다.
이 대표는 6·27 지방 선거 후보에 상식 밖의 후보를 공천하여 빈축을 샀다. (중략)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장 경우 씨를 경기지사 후보로 내세운 것이었다. 4월 하순경 나는 이 대표를 집으로 초대하여 간곡하게 부탁했다.
“경기지사 후보를 이종찬 고문으로 양보해 주시면 큰 은덕을 입은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리하면 이 총재의 차기 당권을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중략) 그러나 그 뒤로도 입장 변화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장경우 씨를 집으로 초대해서 설득했다. (중략) 그러나 장경우 씨도 흔쾌하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654-655페이지 中
그러던 1995년 5월 13일. 당내 갈등이 본격 가시화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지지사 후보를 결정하는 경선대회에서 장경우 측의 ‘돈 봉투 살포’ 여부를 놓고 지지자들 간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다음은 5월 14일자 신문을 토대로 분석한 당시의 갈등 상황이다.
13일 오후 안양 예술문화회관에서 개최한 민주당 경기지사 후보경선 대회. 2차 결선투표를 마친 뒤 갑자기 안동선 후보 측에서 “이건 무효다” “폐회를 선언하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윽고 아수라장이었다. 이규택 선관위원장이 장내 소란을 정리하려고 하자, 안 후보 지지자들은 그를 강제로 단상으로 끌어내리며 폭언과 함께 발길질을 해댔다. 이들은 장 후보 측이 현장에서 돈 봉투를 살포하다 붙잡혔다며 그가 갖고 있었다는 돈 봉투 3개와 대의원 명단 등을 증거물로 공개했다.
“명백한 부정 선거이니 폐회를 선언해야 합니다.”
“증거가 불충분합니다. 저쪽의 흑색선전일 뿐입니다.”
이들은 14일 새벽까지 대치한 끝에 투표함을 중앙당으로 이송, 총재단회의에서 처리키로 하고서야 겨우 해산했다. 이기택의 사람인 장경우와 김대중 사람인 동교동계 출신의 안동선. 둘의 몸싸움으로 격화된 김대중과 이기택의 갈등은 결국 극한으로 치닫고, 이날을 계기로 김대중은 탈당 및 창당을 결심하게 된다.
둘의 갈등 상황은 당시 민주당 소속 의원이자 민주당 깃발을 들고 부산시장 선거에 도전했던 노무현의 회고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1995년 7월 초 김대중 이사장이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공식화했다. 6·27 전국동시 지방자치선거를 치르면서 민주당은 돌이킬 수 없이 분열되었다. 경기도지사 후보로 장경우 씨를 고집한 이기택 대표와 이종찬 씨를 민 동교동계의 갈등으로 경기도지부 대회에서 각목이 난무하는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민주당은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겼지만 경기도지사 선거는 졌다. 선거가 끝나자 김대중 이사장이 창당을 결심했다. 7월 전당대회에서 당으로 복귀하라고 요구한 사람도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민주당 주류가 집단 탈당해 새정치국민회의로 갔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37페이지 中.
1995.06.27
노무현과 장경우는 낙선했지만, 어쨌든 결과는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의 승리였다.
다만 김영삼은 여당의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는 “관권 개입 없는 공정한 선거가 치러진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1995년 6월 27일은 5·16 쿠데타 이후 34년 만에 처음으로 4대 지방선거가 실시된 매우 뜻깊은 날이다. (중략) 지방화시대의 개막과 통합선거법의 시험 무대라는 의의와 함께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4대 동시 선거라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었던 6·27 지방선거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무엇보다도 독재정권 하에서 대표적인 부정선거로 지목된 관권 개입 시비가 없었다. (중략) 나는 6월 29일 오전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 “이번 선거는 집권 여당 스스로 금권·관권을 포기하고 깨끗하게 치러진 선거 혁명을 마련한 데 보람을 느낀다”고 평가했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下 89페이지 中
광역단체장의 경우 김영삼의 민자당은 경기·인천과 부산·경남·경북에서, 김대중의 민주당은 전남·전북·광주 그리고 서울에서, 김종필의 자민련은 충남·충북·대전 그리고 강원에서 승리했다. 전국이 영남, 호남, 충청으로 삼분할 된 것이다.
이는 김대중의 ‘지역등권론’이 김종필의 ‘핫바지론’과 맞물려 지역감정을 부추긴 원인이 크다는 분석이다. 당시 김대중의 지역등권론에 대해 비판했던 노무현과 김영삼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김대중 이사장이 지역등권론을 내세워 전라북도에서부터 지원 유세를 시작했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호남이 역사적으로 부당한 차별을 받고 소외당한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이었지만, 부산 시민들은 이것을 지역주의로 이해했다. 이미 3당합당으로 영호남에는 맹목적인 지역대결 정치구도가 이미 강고하게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다. 부산에서는 이 논리로 유권자를 설득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민주당은 다시 ‘김대중당’으로, 노무현은 ‘김대중당 후보’로 인식됐다. 결국 선거에서 졌다. 나는 지역등권론을 반대했다. 선거에서 지역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일단 선거에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35-137페이지中.
6·27 지방자치선거가 시작되자 그는 선거 지원 유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사실상 정계 복귀였지만 김대중씨는 “당원으로서 지방선거에서 후보로 지명된 사람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지원 유세일 뿐 정계 복귀는 아니다”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중략) 6·27 선거에서 나의 단호한 의지 때문에 ‘관권선거’가 사라진 것은 지역감정을 존립기반으로 해온 야당으로서는 사실 호(好)조건이다. 김대중씨는 선거 전면에 나서 이른바 ‘지역등권론’을 제기해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부추겼다. 국민들은 ‘지역 일꾼’ 보다는 야당 ‘대권주자’의 입지 강화를 위해 투표할 것을 강요받았다. 김대중씨의 지역등권론은 자신이 여전히 전라도 지역의 맹주임을 재확인시킴으로써 이를 통해 정계 복귀의 명분을 찾으려는 술수에 불과했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下 93페이지 中
한 마디로 대권 가도를 달리기 위해 지역주의를 부채질한 것이라는 평가다.
한편 김대중은 이때를 정계 복귀의 적기(適期)로 생각했다. ‘김대중당’으로 불리는 민주당의 승리는 곧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국민의 호출이며, 자신은 이미 국민의 추인을 받았다고 본 것이다.
신당 창당 이전까지 나는 민주당의 개혁을 간곡히 요구했다. 당 대표가 경기도지사 선거 등 지방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민주적 공당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체질 개선을 단행하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책 정당으로 탈바꿈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요청을 당 지도부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나는 참다운 야당의 존립을 위해서는 새로운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654-655페이지 中.
1995.07.12.~1995.07.13.
7월 12일 저녁, 김대중과 그의 측근인 동교동계 17명의 의원들은 김대중의 자택으로 모였다. 권노갑·김원기·한광옥·신순범·김근태 부총재, 김상현·정대철·이종찬·이용희 고문, 김태식 사무총장, 신기하 원내총무, 김병오 정책위의장, 김영배·안동선·임채정·박상천 의원과 이해찬 서울시 부시장이었다.
이날 모인 의원들은 동교동계 중에서도 민주당을 떠나 새로운 둥지를 짓자는 ‘신당창당파’가 대다수였다. 이날 김상현을 비롯한 김원기, 정대철, 김근태 등이 이기택을 당에서 축출하고 전당대회를 새로 열자는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이기택에 대한 불신과 회의론이 깊은 김대중은 결국 갈라서기로 마음을 굳힌다.
결국 다음날인 7월 13일,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적인 정계 복귀와 신당 창당을 선언한다. 92년 12월 은퇴 선언 후 2년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정치 재개는 결과적으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은 당권만 생각하고 책임을 지지 않는 ‘나눠먹기 정당’이 됐습니다. 이번 선거에선 구보수 세력들이 민주당을 지지해 줬습니다. 신당은 중산층을 끌어안는 모습으로 개혁할 것입니다.”
1995년 7월 13일, 나는 국회의원 51명의 결의로 정치 재개를 요청받았다. 의원들은 야당을 바로 세우고 김영삼 정권의 실정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를 수용하기로 했다. 일시적인 비난을 받더라도 국민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중략) 그보다 내가 정계 복귀를 결심한 근본적인 이유는 평생 품었던 내 꿈을 실현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민주주의 국가 완성이요, 다른 하나는 민족 통일에 이바지하고자 함이었다. 내 평생의 소원인 두 가지 중에서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653페이지 中.
이기택은 즉각 기자회견을 열고 “참담한 심정”이라고 비난한다. 김원기를 비롯한 조세형, 김근태 등 민주당 내 중재파는 ‘이기택도 물러나고, 김대중도 창당 작업을 멈추라’고 호소했지만, 이미 민주당의 틈새는 끝까지 갈라져 두 조각으로 분리돼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 민주당 의원이던 박석무는 최근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이기택 씨 따라갈 사람 따라가고, 나 따라갈 사람은 따라오라’고 했다”며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 당에 들어오셔서 당 대표도 하고 대통령 후보도 하십시오’라는 이야기를 했지만 고집을 피웠고 당을 쪼갰다”고 회상했다.
1995.07.18.~1995.07.20.
7월 18일 오전. 김대중은 연단 앞에 서서 작성해 온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 성명서를 읽는다. 정계 은퇴 번복에 대한 사과와 앞으로의 다짐이 담긴 출사표였다.
한편 동교동계 장성민 전 의원의 회고록인 <인간 金大中이야기>에 따르면, 성명서를 읽기 사흘 전 김대중은 별안간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넸다고 한다.
“장 동지, 지난번 보고했던 지방선거 승리 요인을 다시 한 번 말해 보세요.”
“예, YS 정부의 사정 정국에 대한 보수의 반발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전부인가?”
“총재님과 JP를 통해서 YS를 견제해 달라는 요구도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제서야 김대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장 동지, 내일 모레 글피 18일에 국민을 향해 정계복귀 선언을 할 생각인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다방면의 사람들을 접촉해 보고하세요. 이제 시간이 없어요.”
그러나 측근들은 은퇴 번복 선언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우려해 학계 교수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렇게 정리된 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지난 40년 동안 많은 시련을 무릅쓰고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평화 통일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이제 그 노력의 완성을 신당을 통해서 이룩하여 국민 여러분께 마지막 봉사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비판이 반드시 국민적 수용과 지지로 변화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너그러운 심정으로 지켜보아 주시고, 저희들이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 때는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국민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편 신당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국민적 여망을 책임 있게 달성하는 정당으로 발전함으로써, 오늘 제 결단의 충정이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이해와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바쳐서 노력하겠다는 점을 아울러 다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7월 20일, DJ 앞으로 마련된 모금액으로 세운 마포 당사(黨舍)까지 이기택 총재에게 넘기고 서둘러 떠난다. 속전속결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민주당에 남길 선택했던 김정길은 “김대중은 이기택과 붙었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며 “그런데 이기택 측의 공작(工作)정치가 겁났던 듯하다. 자기가 안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라고 추측했다.
여의도에 새 당사를 얻었다. 1995년 7월 20일, 여의도 대하 빌딩에서 신당 당사 입주식이 있었다. 나는 신당 창당 준비위 상임고문을 맡았다. 나는 이날 입주식에서 참신한 인사들을 대거 영입할 뜻을 내비쳤다. “우리 신당에는 순수한 인사들이 많이 모이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 알게 되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655페이지 中.
다만 김종필은 이 같은 흐름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증언록에 따르면, 그는 김대중의 정계 복귀와 신당 승부수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 무렵 김대중 씨가 정계 복귀를 했다. DJ는 1992년 12월 대선 패배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DJ가 정계를 완전히 떠난 것이라는 전망도 많았지만 나는 그가 어떻게든 다시 돌아올 것으로 예상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의 집념은 그만큼 강하고 끈질겼다. 귀국해 아태재단(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설립, 이사장이 된 DJ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조순 후보를 민주당에 천거·지원해 당선시켰다. 복귀의 수순과 방식도 단계와 논리, 설득을 중시하는 DJ 방식이었다. 선거 때는 “유세 지원은 하지만 복귀는 아니다”고 하더니 선거가 끝나자 “민심은 나를 원하고 있다”고 한발 나아갔고 1995년 7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2년 7개월 만에 은퇴를 번복하고 정치 현장에 되돌아온 것이다. 나는 그때 “DJ가 마지막 승부를 걸고 신당을 창당한 것 같다. 옆에서 누가 말려도 소용이 없다”고 평했다.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김종필 증언록> 215-216 페이지 中.
한편 김영삼은 김대중이 내세운 정계 복귀 명분을 '대권 욕심'으로 일축하며 "본인다운 말 바꾸기이자 거짓말"이라고 비난한다.
지방선거가 끝난 7월 18일 김대중씨는 마침내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했다. 대권 도전의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김대중씨는 “국민은 야당을 지지하는데 야당인 민주당은 지지부진하다”며 신당 창당의 명분을 둘러댔다. 차라리 떳떳하게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말하라”는 여론의 세찬 비난은 그에게 들리지 않았다.
8월 11일 김대중씨는 새정치국민회의 발기인대회를 열고 창당준비위원장이 됐다. 이날도 그는 “국민이 원치 않으면 1997년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없다”며 “대통령에 세 번 떨어졌으면 됐지 네 번 떨어질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9월 5일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에 취임했고, 마침내 1997년 대선에 출마했다. 김대중씨다운 말바꾸기이자 거짓말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下 93-94페이지 中
1995.09.05
1995년 9월 5일. DJ의 새정치국민회의는 서울올림픽공원에서 성대한 창당 대회를 열었다. 김대중은 총재가 됐다. 조세형, 이종찬, 정대철, 김영배, 김근태, 김상현, 권노갑, 한광옥, 신순범 등이 그를 따랐다. 참여한 현직 의원만 53명이었기에 순식간에 제1야당으로 등극했다. 이들은 멈추지 않고 각계 명망가 250명을 영입했다.
다음은 창당 대회를 회고한 김대중의 서술이다.
창당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은 의연했다. 창당을 앞두고 각계의 명망 있는 새 인물 250여 명을 영입했다. 당 지도부를 총재단과 지도위원회로 이원화했다. 총재가 당무를 총괄하는 단일 지도 체제였지만 중진들이 당을 이끌어 가도록 했다. 새 당이 탄생했다. 이름은 ‘새정치국민회의’였다. 국민회의란 당명은 비폭력 투쟁으로 인도의 독립을 이끈 초대 총리 자와할랄네루(Jawaharal Nehru), 그가 몸담고 있던 ‘국민회의파’에서 영감을 얻었다. (중략)
1995년 9월 5일, 서울올림픽공원에서 창당 대회가 열렸다.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펜싱경기장에는 1만여 명의 당원과 국내외 참관인이 모였다. 장내의 열기는 터질 듯했고, 당원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쳤다. 나는 총재로 선출되었다. 부총재로는 조세형, 이종찬, 정대철, 김영배 의원과 김근태 전 민주당 부총재, 영입 인사로는 박상규, 신낙균, 유재건 씨가 뽑혔다. 지도위원회 의장에는 김상현 의원, 지도위원으로 권노갑, 한광옥, 신순범, 유준상 의원과 영입 인사인 허재영, 길승흠, 나종일, 정희경 씨 등이 선출되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656페이지 中
호남 주민들과 50명이 넘는 국회의원들, 대학 교수를 비롯해 각계 명망가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화려하게 출발한 국민회의. 그러나 여기 참여하지 않고 민주당에 남아 조용히 자리를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반(反)이기택계 의원들, 김원기를 비롯해 박계동·장을병·제정구·이수인·이미경·김홍신 의원, 노무현·이철·김정길·김원웅·유인태·원혜영·박석무·홍기훈·황의성 전 의원, 김부겸·이강철·안평수·성유보 등은 후에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를 설립하고 잠깐이나마 독자적 길을 모색하게 된다.
김대중은 국민회의에 민주당 출신 의원들을 적극 영입하려고 시도한다. 정대철 등 측근을 은밀하게 보내 “나만 따라오면 공천 문제없다”고 회유하기도 한다. 노무현은 김대중의 국민회의 창당 이후 민주당의 분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민주당에 남은 사람들도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이기택 대표 측과 그의 퇴진을 요구한 ‘구당 모임’이었다. 이철, 제정구, 김정길, 김원기, 조세형, 김근태 등의 ‘구당 모임’은 김대중 이사장을 심하게 비판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다시 당을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기택 대표는 ‘구당 모임’을 ‘DJ 2중대’라고 비난했다. 민주당은 갈등을 어설프게 봉합한 채 1996년 4월 11일 제15대 총선을 치렀다. 참패였다. 민주당에 남은 국회의원들은 거의 다 낙선했다. 국회는 신한국당과 새정치국민회의 양당 체제로 재편되었다.
김원기, 박석무, 홍기훈 의원은 호남 출신이라 원래 남기 어려운 처지였다. 특히 김원기 의원은 따라가면 당 대표나 대표 대행을 맡을 수 있는 위치였다.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같이 남자고 권할 수 없었다. 그런데 스스로 민주당 잔류 기자회견을 했다. 김원기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김정길, 노무현 당신들 얼굴을 보니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는 서울 출마 권유를 뿌리치고 전북 정읍으로 돌아가서 낙선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를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 상의했다. 대통령 선거를 할 때도 대통령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나의 정치 고문이었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37-138 페이지中.
1996.04.11.
그리고 1996년 4월 11일, 김대중의 정계 복귀와 국민회의 창당을 심판하는 총선이 다가온다.
총선 승리, 나아가 대권을 노린 김대중은 이때 대표적 보수 인사인 이종찬계 인사를 영입하는 등 ‘중도보수노선’을 택하면서 “집권을 위해 우경화됐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 같은 비판을 의식한 김대중은 당시 총선에 정동영, 김한길, 정세균, 천정배, 추미애 등 정치 신인들을 대거 영입해 기성 정치인에 싫증을 느낀 부동층까지 흡수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그러나 야권 분열의 책임과 정계 은퇴 번복에 대한 냉담한 시선 때문이었을까. 김대중이 받아든 성적표는 처참했다.
국민회의는 79석을 확보해 개헌저지선인 100석은 물론 제1당에도 등극하지 못했다. 95년 민자당에서 이름을 바꾸고 새출발을 선언한 여당 신한국당은 139석을 차지했다. 여당의 절반이 조금 넘는 부진한 성적이었으며, 야권 열풍이 높은 서울에서도 고작 18석 확보에 그쳤다. 정대철, 조세형, 김덕규, 한광옥, 김병오, 장석화, 박실, 이원형 등 중진 의원들마저 서울에서 대거 낙선했기 때문이다. 야권 표가 국민회의와 민주당으로 갈라져 신한국당만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다.
김대중은 ‘비례대표 14번’으로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배수의 진’ 작전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불과 1%포인트 가량의 득표율 미달로 13번까지만 당선된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 김대중은 ‘기대보다 좋지 않았지만 민심은 떠나지 않았다’는 자체 평가를 내리고 있다.
1996년 4월 11일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선거 결과는 신한국당이 지역구 121석, 전국구 18석을 얻어 139석을 차지했다. 우리 국민회의는 지역구 66석과 전국구 13석을 합쳐 79석을 확보했다. 자민련은 지역구 41석, 전국구 9석으로 50석을 얻었다. 4·11 총선의 결과는 기대보다 좋지 않았다. 그러나 곳곳에서 초접전을 벌였다. 58개 지역에서 3000표 차 미만으로 당락이 갈렸다. 민심이 떠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658페이지 中
반면 제1당을 차지한 신한국당의 성과에 대해 김영삼은 ‘국민이 김영삼과 신한국당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자축한다. 동시에 김대중이 선거 기치로 내세웠던 내각제 개헌 및 호남지역 등권론을 비판하며, 김대중 은퇴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극에 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4·11 총선 결과 참신하고 개혁적인 신인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이들에 의해 야당의 중진 의원들은 대거 탈락했다. 김대중 씨는 선거 기간 내내 주로 호남지역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지원 유세를 하면서, 집권당의 내각제 개헌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했다. 김대중씨는 “내각제 개헌 저지를 위해 개헌 저지선인 100석을 만들어 달라”고 외쳐댔으나, 그가 이끄는 국민회의 득표율은 25.3%로 1988년 총선 이래 최하의 득표율이었다.
김대중씨는 자신의 명분 없는 정계 복귀를 위해 국민회의를 만들어 야당인 민주당을 분열시켰고, 국민들은 그에 대한 염증을 드러낸 것이다. 4월 13일자 동아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 김대중씨 향후 거취에 대해 “은퇴해야 한다”는 응답이 61.1%로 나타났고, “은퇴 불필요”는 26.7%에 불과했다. 다만 전라도 출신 응답자의 53.4%가 김대중씨 은퇴에 거부감을 나타낸 것이 그에게는 위안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4·11 총선을 통해 나타난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낡은 정치의 틀을 깨라는 것이었고, 나 역시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국민들의 요구와 나의 바람이 어우러져 신한국당은 총선에서 승리한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下 197-204페이지 中
김대중은 애써 얼굴에서 실망감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12일 새벽 측근들에게 전화해 전체 회의를 열고 하루빨리 당을 정상 체제로 돌려야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눈은 더 먼 미래, 1997년 대선을 향하고 있었다.
1996.05~1997.12.18.
신한국당은 과반수 의석을 만들기 위해 야당 소속과 무소속 의원들을 대거 당에 입당시킨다. 민주당의 이규택, 황규선, 최욱철과 자민련의 유종수, 황학수 등이 신한국당에 입당한 것이다. 이러한 ‘의원 빼가기’로 신한국당은 157석까지 의석이 늘어났으며, 자민련은 46석으로 줄어들었다. 야당으로써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지위가 위태로워지자, 대권을 염두에 둔 김대중은 김종필과 일종의 연합 전선을 맺게 된다. 이것이 한국 정치사에서 손꼽히는 단일화인 ‘DJP연합’이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김대중과 김종필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두 사람 모두 신한국당의 ‘몰염치한 정치’로 시작된 자연스런 공조였다고 설명한다.
선거가 끝나자 신한국당은 무소속 당선자들을 입당시켜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이러한 횡포에 우리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강력 반발했다. 국회는 원 구성도 못한 채 표류했다. 여당은 자민련 의원들까지 접촉하며 정치판 자체를 흔들었다. 자민련 소속 단체장들을 신한국당에 입당시켰다. 자민련은 당 존립 자체까지 위협받을 정도였다. 이에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자연스럽게 공조 체제를 유지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658페이지中.
김대중의 국민회의는 기대에 못 미치는 79석을 얻는 데 그쳤고, DJ 자신도 전국구에서 고배를 들었다. 세간에서는 이때를 ‘신 3김 정국 체제’라고도 했다. 집권 신한국당은 수도권에서 선전했지만 과반수에 미달(139석)했다. 신한국당은 과반수(150석)를 채우기 위해 야당과 무소속 의원들 빼가기에 나섰는데 나는 “선거 민의를 무시하는 이런 행태는 아무리 혹독한 정권에서도 없었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1996년 DJ 쪽에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 “내년 대선에서도 야당 공조로 정권 교체를 이뤄내자”고 요청해 왔다. 10월 김대중 총재는 주간지 인터뷰에서 “1997년 정권 교체를 위해 야권 후보 단일화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내각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나를 향한 구애의 손짓이었다. 나는 김용환 사무총장을 은밀히 불러 국민회의 쪽과의 접촉 창구를 맡겼다. 11월 1일 밤 김대중 총재의 서울 목동 처제 집에서 DJ와 김용환 총장이 만났다. 그때부터 1년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는 DJP 대선 공조 협상이 시작됐다.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김종필 증언록> 217-219페이지中.
결국 김대중은 DJP연합으로 만들어진 호남·충청의 강한 ‘반(反)영남’ 지지기반에 힘입어, 1997년 5월 전당대회에서 국민회의를 대표하는 15대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이어서 10월 김종필과 ‘의원내각제 개헌 추진’ 조건으로 자민련-국민회의 연합후보로도 공천된다.
그리고 1997년 12월 18일. ‘4수생’ 김대중은 40.3%의 표를 얻어 2위를 기록한 이회창 후보와 겨우 1.6%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민주당을 양분으로 탄생한 국민회의… “지금은 경계해야 할 창당 방식”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권 가도(街道) 아래엔 민주당의 분열을 양분(養分)으로 섭취해 탄생한 새정치국민회의가 있었다.
당시 DJ의 국민회의에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 잔류를 택했던 한 의원은 기자와 만나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그 당시 DJ의 대권만을 위한 정치를 미워했었지요. 지금은 세월이 흐르니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어요. 우리에겐 여당에서 야당으로의 수평적 대권교체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이해해도, 그 과정은 결코 옳았다고 볼 수 없어요.”
누군가에겐 분열의 상처를, 누군가에겐 정권 교체의 기쁨을 안겼던 새정치국민회의의 창당. 이를 지금 시점에서 어떻게 봐야 할까.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이날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국민회의 창당으로 대권을 얻었던 사례는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라는 큰 인물과 이념 위주의 정당 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문제가 있을 때마다 분당과 창당을 반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옛날 정치’식 해결 방안”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강 대표는 “이젠 인물 위주의 이합집산 정당, 이념과 지역 위주의 정당이 아닌 이슈를 기반으로 하는 ‘포괄 정당’으로 전환해야 할 시대”라며 “특히 포괄 정당으로 향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 지금의 한국당 지도부에 가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회고록은 타인의 시점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 직접 기술한 자신만의 이야기다. 개인의 주관적 감정과 감각이 주를 이루고, 때로는 회한 섞인 자아 성찰적 고백도 들려주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고록에 담긴 개인의 기억과 경험은 이처럼 분명하고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따라서 우리는 회고록을 통해 미시적 차원에서 사건과 인물을 이해함과 동시에, 거시적 차원에서 그의 욕망과 한계가 시대에 투사된 방식을 알 필요가 있다.
정치인 김대중은 숱한 장애물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다. 동시에 분당과 창당을 거듭하며 야권의 분열을 가져왔지만, 선거를 통해 야권을 여권으로 정당하게 만든 수평적 정권교체의 중심이기도 했다.
‘김대중-김영삼 뒷조사’ 여부 논란뿐만 아니라, 객관적 수치가 나온 1995년 지방선거와 1996년 총선을 두고도 회고록엔 서로 다른 해석이 존재했다. 마찬가지로 김대중이라는 인물에 대해 김종필, 김영삼, 노무현의 평가는 엇갈렸다.
이제, 회고록을 토대로 한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남겨진 자인 우리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지난 10일 서거하신 이희호 여사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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