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개혁, '말잔치' 되풀이 안된다
혁신은 민간에…정부는 풍토조성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이병도 주필)
그동안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에 ‘분배’는 있어도 ‘성장’은 없다는 우려가 상당히 컸다. 정권의 정치적 칼러 때문일 것이란 지적도 물론 받았다. 그렇지만, 문 정부도 최근 '성장'을 본격적으로 들고 나왔다. 그것도 '혁신성장'이란 구호다. 현재의 한국경제-. 그 현장의 이상과 현실은 어떠한가? 실태와 과제는 무엇인가 ? 성장과 분배의 갈등구조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이를 집중 조명한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청와대에서 현 정부 들어 처음으로 ‘혁신성장 전략회의’를 주재했다. 경제ㆍ사회 부총리가 주제 발표에 나서고, 청와대 참모진과 각 부처 장ㆍ차관, 여당 지도부 등 당·정·청 핵심 인사 120명이 참석한 대규모 행사였다. 앞서 출범한 4차 산업혁명위원회가 혁신성장을 강조한 선언적 자리였다면, 이번에는 혁신성장 정책들을 구체화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가 발로된 현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7월 현 정부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밝힐 때만 해도 경제정책은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분배'에 방점이 찍혀 있었지만, 문 대통령이 혁신성장을 부각시키면서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이뤄보려는 구체적 노력을 시도하려는 형국이다. 정부가 이번 회의에서 초연결 지능화, 스마트공장, 스마트팜, 핀테크, 재생에너지의 혁신성장 5대 프로젝트을 실질 선도사업으로 선정, 가시적 성과를 추진키로 했다는 발표내용도 그렇다.
‘혁신성장’은 당초 ‘소득 주도 성장’ ‘일자리 중심 경제’ ‘공정경제’ 등과 함께 문재인 정부가 내건 경제정책 4대 전략중 하나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 경제정책의 기조는 '분배'에 역점을 둔 이른바 '공정경제'나 양극화 해소 등에 집중됐다. 법인세와 부자소득세 인상안이 나왔고, 격렬한 논란에도 불구, 막대한 공무원 증원 예산안이 제출됐다. 또한 최저임금을 16% 이상 높였고, 근로시간 단축도 가시권에 넣었다. 이에 반해, 뚜렷한 잠재력 하락조짐에도 경제성장을 자극하고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릴 정책은 눈에 띄지 않았다. '분배' 역점에 비해 성장 부분은 구석으로 밀린 느낌을 줬다. 이번 회의도 정부가 ‘급한 불 끄기’ 차원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평판이 나올 정도다.
혁신성장은 과학기술, 산업, 사회제도, 교육 개혁을 전방위적으로 추진, 미래의 먹거리를 찾겠다는 국가전략이다. 현 정부의 기존 전략들이 자유시장 경제질서에 치중한 기존 경제정책의 방향을 트는 진보적 전략이었다면, 혁신성장 또한 우리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불가결한 전략임에는 틀림없다. 이번 회의에서 각 부처별로 그럴듯한 청사진이 제시된 것도 그런 연유로, 과기부의 ‘초연결 지능화 혁신방안’이나 중소기업벤처부의 ‘스마트공장 보급 및 확산’ 등이 대표적이다.
지금 세계는 4차 산업혁명의 급속한 기술 변화에 맞춰 혁신 중심의 경제 구조로 전환하고 있다. 미국의 신혁신 전략,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일본의 초스마트화 전략 등 구호는 다르지만 본질은 모두 혁신성장에 있다. 이런 세계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한다면 우리만 낙오될 게 뻔하다. 특히, 철강·화학업종 등 우리 경제를 견인해 왔던 주력 산업들은 요즘 침체기를 맞고 있다. 최근 반도체 호황으로 그나마 버티고 있지만, 언제까지 반도체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일이다. 반도체 이후의 성장 동력을 발굴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할 수 있을 정도다.
정부 실상과 문제점
그렇지만, 이번 정부의 '혁신성장'회의는 거창한 모양새와 달리 시늉뿐인 행사라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혁신성장은 말로 되는 게 아니다. 정부 정책이 말 잔치로 끝나서도 안될 일이다. 현 정부의 그간 정책집행 실태가 그런 우려들을 추정케 한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같은 분배정책에 속도를 내느라 시간을 흘려 보낸 책임이 있다. 6개월이 지나도록 '성장'을 위한 규제개혁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그런 추진력으로는 경제규모 세계 11위인 한국이 정부규제 유연성 순위에서 95위라는 부끄러운 성적표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을 개선키 어렵다.
특히 이번 대규모 혁신성장 회의에서 의료 교육 관광 등 일자리 창출 여력이 큰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을 위한 규제완화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한국은 규제가 많아 ‘안 돼 공화국’이라고 한다”고 말한 것은 개혁 의지를 강조하려는 것이겠지만, 현재 대표적 사례가 되고 있는 복합쇼핑몰 규제 하나 건드리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 외에도, 정부의 혁신성장 의지와 실력이 의심스러워지는 일은 잇따른다. 지난 달 발표하려 했던 ‘서비스산업 혁신전략’은 의사 수 확대 방안과 원격의료 사업 등 핵심 대책을 둘러싼 이해 갈등으로 발표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금융위는 인터넷은행 등 핀테크 육성에 적극적이지만, 민주당 반대로 ‘은산분리 완화’가 헛돌고 있다. 심지어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선언과 관련, 청와대 내부에서 마저 국정철학과 맞지 않는다며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가 열린 자세로 기업을 대하고 규제 완화에 힘써달라는 현장의 목소리를 적극 수용해야 함에도, 정부 전체의 실상은 이렇다. 정작 청와대와 정권 핵심부 마저 혁신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부터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성장률 수정전망과 함께 내놓은 서민생활 개선과 저출산·고령화 대책 등 중·장기 비전까지도 '말 잔치'로 느껴지기도 한다. 따라서, 앞으로 정부는 중산층과 서민층 등 대다수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목표와 수단을 보다 선명하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정부의 경제회복 약속이 밑바닥까지 온기가 미치도록 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제가 잘못되는 것은 나라경제를 총괄하는 정부 경제팀에 1차적인 책임이 있겠지만, 올바른 경제대책을 정부가 수용못하거나 왜곡시킨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정책실패 '서비스 산업'
그런 측면에서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 방치되고 있는 서비스 산업 현장실태를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서비스산업의 경우 고(高)부가 일자리 창출, 4차 산업혁명 등을 위해선 혁신이 시급한 상태지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하나도 되는 게 없다'는 탄식들이 나왔다. 서비스 수지 적자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아직도 OECD 최하위 수준이다. 역대 정부마다 ‘서비스산업 육성’을 외쳤지만 실상은 이렇게 참담하다.
의료·법률·관광·통신·운송·금융 등 선진국에서 잘나가는 서비스업 일수록 한국에선 네거티브 규제가 아니라 하나하나 허용 대상을 열거하는 방식의 ‘포지티브’ 규제를 하고 있다. 인허가 등 진입장벽이 널려있고, 칸막이 규제가 너무 많아 사방이 꽉 막힌 상태로 보인다. 그런데도 왜 정부의 규제혁신 시도는 맥을 못추는가. 국가마다 유망 분야로 꼽는 보건의료 혁신이 한국에선 의사협회, 약사협회 등 이익단체 주장 앞에서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법률서비스 혁신도 마찬가지로 변호사협회가 반대하면 끝이다. 또한 ‘한국판 우버’도 택시조합 저항에, 제4 이동통신은 기존 통신사업자 반발에 좌절됐다.
더 심각한 건 소관부처 관료가 이익집단에 포획당하고, 정치는 표를 의식하면서 ‘청부입법’에 앞장서는 현실 부문이다. 업종·직역 이기주의가 부처와 국회를 점령했다. 팽배한 평등주의 앞에서 차별화를 시도했다간 세무조사를 불러오기 십상인 게 한국 서비스산업의 현주소다. 이와관련, OECD 마저도 한국 보고서에서 “서비스산업 규제 건수가 제조업의 네 배가 넘는다”고 지적했다. 서비스산업이 R&D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2015년 8.1%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규제가 많고 R&D 인센티브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 서비스산업이 그만큼 개방에 덜 노출됐고, 혁신 경쟁력도 갖추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성장과 분배 혼미현장
전체적으로 문제는 더 깊은 實狀에 자리한다. 성장전략의 실행과 분배정책 집행간의 갈등구조 실태가 현재의 한국기업 현장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 기업의 성장부문 문제점부터 조명해 보자. 삼성·SK 반도체 등의 호황에도 불구, 한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해야 할 기업경기는 IMF 후 처음으로 1년 내내 '꽁꽁' 얼어붙어 있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 제조 기업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대기업 경기는 여전히 부진, 지난 1997년 전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와 비슷한 양상으로 평가될 정도다.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은 최근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경기실사지수(Business Survey Index) 조사 결과 12월 전망치가 96.5를 기록, 19개월 연속 기준선 100에 못미치고 있다고 지난달 28일 밝혔다. 즉, 전망치가 이처럼 한 번도 기준선을 넘지 못한 해는 1997년 전후 발생한 외환위기 이후 올해가 처음이라는 분석이다. 경제의 구조적 문제와 대내외 불확실성이 지속되면서 기업들의 우려가 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요국과의 통상 마찰, 북핵문제, 가계부채, 미국 금리인상 가능성 등 으로 설(1월, 89.9)과 추석(10월, 92.3)이 있는 달의 명절 특수도 없었고, 5월 효과(91.7)도 사라졌다.
이같은 상황과 관련, 송원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IMF 외환위기 때보다 수출, 외환보유액, 국가신용등급 같은 거시지표는 개선되었지만 구조개혁과 같은 과제가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라면서, "하락하고 있는 한국의 잠재성장률을 위해 시스템 개혁과 경제체질 개선에 나서 줄것"을 강조했다.
대기업 '분배' 실태 - 1
다음은 '분배'와 관련, 국가경제를 사실상 끌어가는 대기업의 자세를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다. 1차적 핵심은 역시 민생과 관련된 취업문제다. 최근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일자리는 2323만개로 2015년(2301만개)보다 22만개 늘어 났지만, 호황을 누린 대기업 일자리는 9만개나 줄어 368만개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통계에서 대기업은 업종별로 매출이 400억~1500억원을 넘고 고용 여력이 있는 업체를 뜻한다. 지난 2015년 대기업 일자리가 7만개 늘었던 것과 비교하면 지난해 상황은 이렇게 크게 나빠진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그야말로 호황을 누린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종의 경우도 관련 대기업들이 오히려 고용을 축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례없는 호황에 실적이 큰 폭으로 개선됐지만, 고용은 뒷걸음질하는 현상을 보인 것이다.
전문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해당산업을 대표하는 삼성전자·LG전자·삼성디스플레이·LG디스플레이의 고용인원은 최근 3년간 감소했다. 삼성전자의 올해 총 고용인원은 9만7888명으로, 2015년 10만명을 넘어선 지 2년 만에 10만명 아래로 떨어졌다. 삼성전자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합친 총 고용인원은 2015년 10만2672명, 지난해에는 10만900명이었다. 큰 호황에도 불구, 3년동안 정규직은 4459명, 비정규직은 325명 줄어든 셈이다.
LG전자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같은 기간 LG전자의 정규직은 292명 줄었고 디스플레이 부문도 총 고용인원이 줄었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의 경우도 같은 기간 각각 2904명, 87명 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기업의 실적이 큰 상승세에 있었음에도 고용을 줄였다는 점은 대한민국 대표 대기업들의 빈약한 일자리 창출 의지를 가늠케 한다.
한발 더 나아가, 대기업들의 장애인 고용실적은 더 저조하다. 고용노동부는 최근 2016년 12월 기준으로 장애인 고용 실적이 현저하게 낮은 국가·자치단체 9곳, 공공기관 23곳, 민간기업 507곳 등 총 539곳의 명단을 공표했다. 그 가운데 SK, 한진, 미래에셋, 대림 등 대기업 계열사들의 장애인 고용실적이 매우 저조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즉, 실적부진 민간기업 중에는 부영주택, 진에어, 미래에셋컨설팅, SK그룹의 나래에너지서비스, 대림그룹의 고려개발 등 자산총액 10조 원 이상 대기업 16곳에 속한 25개 계열사가 포함됐다. 이 가운데 최근 3회나 연속 명단이 공표된 대기업집단 소속 기업도 GS엔텍, XI O&M, 주)삼호, 고려개발(주), 이테크건설(주), 주)디섹, 주)호텔현대, 하이엠솔루텍(주), 주)대한항공, 금호산업(주), 현대 E&T(주), 주)진에어, 주)부영주택, 주)현대캐터링시스템 등 14개사나 된다.
대기업 '분배' 실태 - 2
그 뿐 아니다. 국내 매출 상위 500대 기업들은 대폭적 실적 호전에도 불구, 올들어 사회 기부금을 13%나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국내 1위 기업인 삼성전자도 40%나 줄였고, 삼성생명, 삼성SDS, 서울도시가스, 대우건설, SK가스 등 11곳은 기부금을 무려 90% 넘게 삭감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기부금 상황은 지난달 29일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가 국내 매출 기준 상위 500대 기업 중 분기보고서를 제출해 기부금 내역을 공시한 257곳의 올해 1~3분기 기부금 현황을 조사한 결과 나왔다.
이때문에 올해 기부금 전체 집행 규모는 총 9788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조1299억 원보다 13.4%(1511억원)가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올 들어 국내 500대 기업의 영업이익이 38.1%나 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기업들이 기부와 분배에 얼마나 인색해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특히,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삼성그룹 계열사들 감소 폭이 두드러진 것은 눈길을 끄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삼성그룹 14개 기업의 합산 영업이익 전망치는 총 15조7600억원으로 추계됐다. 지난해 6조4700억원에 머물렀던 영업이익이 올해 143.6%나 급등한 셈이다. 올해 유가증권시장의 3분기 영업이익 전망치가 모두 48조5000억원인 것을 고려하면, 이 가운데 삼성그룹의 비중은 32%를 넘어선다. 개별 기업별로는 삼성전기의 영업이익이 지난해보다 768.9%나 증가, 가장 높은 성장세를 기록했다. 삼성전자는 178.8%로 두 번째로 높은 상승률을 나타냈고, 삼성SDI도 123.4% 올라 흑자로 전환됐다. 이같이 막대한 흑자에도, 삼성은 사회 일반 곳곳을 지원하는 규모를 오히려 40% 가까이나 대폭 삭감한 것이다. 이렇게 대기업들이 기부금을 줄인 것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것도 사실로 보인다. 그것은 대기업들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낸 기부금으로 곤욕을 치른 뒤, 기부금 집행에 인색해졌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기부금 액수의 이같이 급격한 감소규모는 지나친 것으로, 호황 대기업들의 '분배자세'에 문제가 있다는 분석들이 높은 실정이다.
민간 혁신업계 요구
이같은 실질적 현상들은 정부가 쏟아낸 많은 대책들이 '현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의 근거가 된다. '혁신성장'도 마찬가지다. 민간 혁신벤처기업계는 최근 그동안 혁신성장의 최대 걸림돌로 낡은 관행과 규제를 지목하고, 민간 기업인들이 주체가 되어 혁신성장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벤처기업협회 등 8개 벤처기업 단체로 구성돼 있는 혁신벤처단체협의회는 최근 "과거와 같은 임시방편적 제도 개선으로는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할 수 없다”면서 160개 추진과제와 5대 선결 인프라로 구성된 250쪽 분량의 ‘혁신벤처 정책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 발표내용에는 증시 상장 절차와 규제를 신생 기업에 한해 대폭 간소화하는 ‘한국판 잡스법’의 제정을 비롯, 사업 실패자에 대한 재도전 기회를 법적으로 보장해 줄것을 요청하는 등 업계에 절실한 과제가 망라됐다. 벤처업계가 이런 정책 제안을 내놓은 것은 현 정부 들어 처음이다.
혁신벤처업계가 이번에 발표한 '혁신벤처 생태계 발전 5개년(2018∼2022년) 계획'은 정부가 규제를 풀어주면 향후 5년간 20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이 협의회는 일자리 200만 개 창출의 전제로 △클라우드와 데이터규제 혁파 △법제 혁신 △민간중심의 정책 혁신 △기업가 정신 고양 △정부 연구·개발(R&D) 혁신 등 5대 과제를 제시했다. 크게 보면 규제혁신과 민간주도 혁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혁신성장은 정부가 주도하는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다. 대통령이 회의 한 번 주재했다고 단박에 혁신이 나오지도 않는다. 우리 경제가 정부주도의 계획과 개입에 의존, 운용되는 단계를 이미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바다. 그보단 단 하나라도 시장 요구를 성심껏 들어주는 게 정부의 옳은 방향일 것이다. 정부는 벤처 등 기업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기만 하면 된다. 신산업, 신기술에 대한 규제 혁파에 나서, 혁신의 토양부터 조성, 뒤에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는 보조 역할에 그쳐야 한다.
정치권 역할
국회도 문제로, 과거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다. 국회에서 처리될 듯하던 '규제프리존특별법'에 최근 제동이 걸린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개혁을 퇴보시켰다. 정치야말로 민생불안을 덜고, 소비심리를 자극하고, 시장에 긍정적 분위기가 감돌게 함으로써 기업의 투자를 재촉하는 선순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심각한 경제현실은 정치의 가장 시급한 책무로서 국회의 적극적 민생·경제대책이 요구된다.
정책실패의 대표적 사례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일부 경솔한 발언, 정책당국의 엇갈린 자세 등이 자주 거론되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주요 정책이 제때 시행될 수 있도록 법제화를 서둘렀어야 할 국회의 기능 부전이었다. 이 정부 당시 정기국회 들어 통과된 법안이 6건에 지나지 않았고, 각 상임위원회의 법안ㆍ예산 소위 구성비율을 둘러싼 여야 줄다리기가 '불임국회'의 주된 요인이 되었다.
사태가 이러하니 정부정책은 말 잔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치권 역시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이해타산만 따질 것이 아니라 나라 경제를 내다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경제 발전을 위한 여건과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며, 그 책임의 핵심이 정치권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제개혁 실패史 교훈
역대정권들의 경제정책 실패 사례는 '오늘'에 교훈을 던진다. 노무현 참여정부 경제정책 경우를 일예로 들 수 있다. 당시 중앙리서치가 실시한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지지도 조사'결과 국민들의 92%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잘못됐다고 응답한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 조사결과의 특징 중 하나는 정치적으로 노무현정부 지지도가 가장 높았던 20대의 경제 위기의식이 오히려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당시 8% 안팍의 청년실업률이 보여주었듯, 젊은층이 당장 시급한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참여정부 역시 오늘의 문재인 정부와 비슷하게 성장보다 분배와 균형에 초점을 둔 경제정책을 폈지만, '분배 부문'의 상황도 개선되지 못했다. 소득 상위 20%의 월평균 소득을 하위 20%로 나눈 소득배율(所得倍率)이 점점 높아지는 등 소득격차가 더욱 벌어졌고, 빈부격차는 물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 등 사회 각 부문의 양극화는 오히려 심화되어 갔다. 당시 조사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빈부격차 해소,부동산,균형발전보다 '경제활성화(43.7%)'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사실은 분배보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성장이 시급한 과제라는 점을 요즘처럼 잘 보여줬다.
참여정부 들어 '경제 올인'을 선언했다가 흐지부지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님을 이제 다시한번 되새겨야 한다. 그야말로 더이상 말이 아니라 과감한 실천만이 중요함을 오늘의 정부에 일깨운다. 혁신은 말처럼 쉽지 않고 멀리 갈 것도 없다. 바로 박근혜정부도 반면교사다. 박 전 대통령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세웠다. 전국 17개 도시에 18개 창조경제혁신센터도 세웠다. 2014년 봄 청와대에서 열린 규제완화 끝장토론은 7시간 넘게 이어지기도 했지만 역시 말잔치로 끝났다. 한국은 여전히 규제공화국이란 오명을 벗지 못했다. 그 때도 의료 등 기득권 세력은 철옹성처럼 단단했다. 한 손에 예산, 다른 손에 규제를 틀어쥔 공무원들도 어느 것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정책혁신은 역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거 정권들의 실패사례를 적극적으로 참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공직 개혁
지난 실패 사례에서 보듯, 발상의 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규제 몇 개만 손봐서 될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창조적 파괴'의 자세가 관건으로, 파괴는 기득권을 부수는 데서 출발한다. 기득권을 누가 보호하는가. 그것은 바로 정부인 것이 아직도 '현실'이다. 정부는 이미 2011년부터 공무원을 대상으로 2진 아웃제를 시행하고 있다. 공무원 철밥통을 깨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 제도를 통해 옷을 벗은 공무원은 여태껏 단 한 명도 없다. ‘3진 아웃제’를 시행 중인 정부 출연 연구소도 대동소이하다. 정부 스스로 정책 홍보에나 급급할 게 아니라 실행 성적표로 국민 평가를 구해야 마땅하다.
공직 선호 열풍에 힘입어 공무원 조직은 물론 공공기관까지 우수 인재를 쓸어담고 있지만, 공공 부문은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공공부문 256곳의 생산성을 조사한 결과 1인당 생산성이 평균 연봉을 넘는 곳이 단 17곳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분석도 있다. 민간 기업이 뛴다면 공공기관은 기는 셈이다. 왜 이런가. 일단 채용만 되면 마음을 놓아도 그만인 ‘무사안일’ 풍토가 크게 작용한 탓으로 볼 수밖에 없다. 공공부문 특유의 ‘고인 물의 폐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혁신성장의 개념은 다분히 추상적이다. 모호한 개념에 매달려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스마트 시티, 자율주행차, 스마트 공장 등을 통한 제조 혁신 등 혁신성장을 선도할 사업등 에서 구체적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가시적인 성과를 통해 혁신성장의 규범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정부부터 규제 권한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규제연구센터는 최근 혁신성장의 키워드를 '규제개혁'이라는 단 한 단어로 요약한 바 있다.
그런 면에서, 계획수립과정을 통해 실천적 과제로서 민간부문의 역할제고, 민간부문의 자생력 향상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정부역할의 한계를 분명히 정할 일이다. 특히 성장과 복지증진의 갈등구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를 보다 선명히 국민에 설명치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개입해야 할 곳, 개입하지 말아야 할 곳을 정확히 가리려는 노력이 정부자세에 요청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핵심은 과학기술
'혁신성장'의 실질 핵심은 역시 과학기술 창달에 있다. 이는 우리 경제가 지향하는 방향이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이어야 한다는 점과 연관된다. 선진국 문턱을 넘는 힘은 기술력일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 보편적으로, '혁신성장'이 '과학기술혁신과 신성장 전략'으로 바뀌어 이어지고 있는 현상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선진국을 보면 연구개발 투자가 설비투자를 능가할 정도로 투자개념이 바뀌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국내 기업의 경우 이런 전환은 세제혜택같은 유인책만으로는 이뤄지기 어렵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과 맞물려야만 가능하다는 OECD의 지적은 그런 점에서 되새겨 볼 만하다.
현안이 되고 있는 일자리 창출도 정보기술 등 기업의 신사업들과 밀접한 것이고,그런 점에서 정부의 신산업 육성책은 주목된다. 업종간 분야간 기술융합이 신산업의 특성이고 보면, 기업규제들이 엉뚱하게 신산업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분명히 따져 볼 일이다. 중소기업이라 하더라도 기술혁신을 성공시킨 경우는 제대로 대접하는 풍토로 바꿔 나가야만 한다. 기술 혁신 노력을 펼치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의 비율이 유럽연합이나 독일 등에 비해 크게 낮은 것으로 드러난 적도 있었다. 한 때 산업연구원(KIET)의 조사 결과 기술 혁신에 힘쓰고 있는 기업의 비율은 불과 38%로 독일(67%)의 절반 수준 정도에 머물고 있고, 유럽연합(47%)에 비해서도 뒤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조사결과는 기술혁신이 곧 성장동력과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 전체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케 한다.
사실, 내용적으로 들어가면 겉으로 나타난 수치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제조업체들 가운데 연구개발 및 기술 혁신분야에 투자된 금액이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상위 5개 기업을 제외하면, 중소기업들의 연구개발 투자비 증가 폭은 매년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대기업들은 충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기술 혁신에 어느 정도 적극적이지만, 내수 부진과 경제 양극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 벤처기업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율은 계속 약화되는 흐름에 있는 것이다. 단순히 수치상으로만 본다면 감소 폭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대기업의 성장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해야 하는 중소기업의 연구개발이나 기술 혁신 투자가 이처럼 지지부진하면 한국경제 전체의 미래에 활력을 되찾기는 어려운 구조다.
대기업들의 보다 적극적인 투자를 위해 연구개발 투자에 따르는 위험 부담을 덜어주는 장치 마련도 필요하겠지만, 부품 소재를 중심으로 한 하청업계의 연구개발 촉진 대책이 더 필요한 것도 이때문이다. 오늘의 선진국은 과학기술이 앞선 나라이고, 21세기는 가히 과학기술의 시대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과학기술혁신이 21세기에 대비한 우리나라의 중심전략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계속 강조할 수 밖에 없다. 기술경쟁에 이기지 못한다면 국제수지 확대 및 소득향상 선진국 진입은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게 될것임을 거듭 주문한다.
난국극복과 자기개혁
총량적인 경제지표만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이제 거의 선진국 문턱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같은 발전에 걸맞게 국민 개개인의 삶도 향상됐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다. 양극화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청년층의 취업율도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복지 예산은 선진국의 20∼40% 수준에 비해 아직도 매우 미약한 것이 현실이다. 기본적으로 삶의 질이 세계화 되어 나가야 한다. 때문에 복지 수준을 한단계 도약시켜야할 절박한 시점이다. 거창한 구호를 내세운다고 당장 삶의 질이 향상되지는 않는다. 성장과 분배·복지의 세가지 목표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조화시키는 정책, 그리고 참된 실천의지가 결정적 과제라 할 수 있다. 성장의 혜택을 어떻게 고루 돌아가게 하느냐가 역시 중요한 관건이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정부의 자세와 정책이 믿음과 일관성을 유지, 불신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의 역할분담을 명확히 설정, 각 부문의 자기개혁 부터 적극화하는 분위기 조성이 선결 과제다. 현실적으로, 기업의 투자의욕이나 근로자의 근로의식의 고취는 최소한 물가의 안정없이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안정기조를 유지하면서 경기부양책도 강구돼야 하고, 분배·복지책의 조정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가장 일선 현장에 있는 기업들은 재테크등 비생산적 투자행위를 지양, 기술혁신과 신제품 개발에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며, 근로자는 건강한 기업활동을 저해할 소지가 있는, 무리한 임금인상 요구나 과격한 노사분쟁을 삼가야 할 것임을 강조한다.
이병도는…
1952년 경남 진양에서 출생했고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후 1981년 연합뉴스로 자리를 옮겨 정치부 야당출입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저서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