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유골로써 타살의혹을 밝혀낸 故 장준하 선생의 유해가 30일 경기도 파주시 장준하공원에 안장된다.
장 선생은 19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에 파병되었다가 6개월 만에 일본군을 탈출, 임시정부를 찾아 독립 운동과 민족 운동을 벌였다. 또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유신 반대 투쟁에 앞장,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렸다.
그러던 장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경기 포천시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당시 경찰은 실족사라고 발표했지만, 사인에 대한 논란은 최근까지도 계속됐다.
특히 지난해 8월 묘소의 석축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장 선생의 유골이 드러나면서 타살 의혹은 더욱 짙어졌다. 처음 공개된 두개골에서 원형 형태의 둔기로 가격당한 함몰 흔적이 뚜렷이 발견된 것.
이에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지난해 9월 장준하 암살의혹 규명 국민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이들은 유골 정밀 재검사 의뢰, 암살의혹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요구 100만인 서명운동 전개, 국정원, 기무사에 대한 정보공개 요청 시위 등 범국민운동을 전개했다.
유해 감식 결과 발표가 있던 지난 26일 이정빈 서울대 법의학 명예교수는 "외부 가격으로 두개골이 함몰돼 즉사한 뒤 추락해 엉덩이뼈가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족사라는 기존의 정부 발표를 전면 뒤집은 것으로 장 선생이 숨진 지 38년 만에 명백한 타살임이 밝혀진 것이다.
앞서 국회 부의장을 지낸 정의화 새누리당 의원도 장 선생의 사인 관련 "두개골이 신경외과 전문의인 내게 외치는 듯하다. 타살!"이라고 전한 바 있다.
무엇보다 장 선생 사인이 정치적 암살이 아니냐는 일각의 의혹은 더욱 커지는 분위기다.
장준하 의문사를 맨 처음 다뤘던 윤재걸 전 동아일보 기자 역시 <시사 오늘>에 "장 선생은 정치적 모살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숨진 당시에도 남모르게 ‘정치적 모살이다, 박정희 정권에서 자기의 걸림돌이니까 죽였다’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언급했다.
유신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숙명적 라이벌이자 눈엣가시로 거론됐던 장 선생. 누구보다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장 선생이었다는 게 일각의 지적이다.
실제로 장 선생은 살아 생전 유신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맹비난해왔다. 이는 장 선생이 1967년 신민당 소속일 당시 벌였던 유세 연설 대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장 선생은 "박정희 씨가 동남아를 순회하고 나서 한국 인구가 많다고 걱정하였는데 그 후 월남파병을 하여 팔아먹었다", "박정희 씨가 일제 광복 운동을 하였다고 하는데 실제 내가 참여하였고 박정희는 만주 일본군에서 장교로 있었다"등의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을 때도 장 선생은 부정선거 규탄연설을 통해 피를 토하듯 "박정희야! 박정희야! 박정희야!"만을 외쳐 좌중을 숙연케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장 선생은 75년 8월 20일 유신 독재를 저지하기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한다. 그러나 거사는 시작도 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다. 서명운동이 있기 3일 전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고상만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은 "박정희 정권이 장준하 선생을 암살한 결정적 원인은 장 선생이 제2차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하려 했기 때문"이라며 "박정희 정권은 이 점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암살 의혹과 관련해 여전히 풀지 못한 과제들이 남아 있다. 고 전 조사관에 따르면 장 선생에 대한 존안 자료 중 국가정보원이나 기무사로부터 단 한 장의 문서 협조를 받지 못해 진실을 쫒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추가 조사가 필요한 상황에서 장차 장 선생에 대한 모든 의혹이 규명될 지 주목되고 있다.
한편 故 장준하 선생 추모 겨레장이 전날 열린 가운데 분향소를 찾은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는 방명록에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진실을 기록할 수 있는 나라를 열어가겠습니다. 무거운 짐 내려놓으시고 이제 편히 잠드시기 바랍니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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