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권 총리, 손원일 외무부 장관 특종 보도”
“YS 비서실장 제안에 거절했지만 盧에 설득돼”
“비서실장 교체된 것 몰랐지만 YS가 위로 줘”
“신한국당 명운 걸려 이회창 비서실장 맡아”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을 모아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
시대산책 신경식 편
- ‘정일권 총리 임명’ 단독 보도 내막
- 정인숙 사건에 얽힌 혼외자 사건
- YS 비서실장서 교체된 뒤 후일담
- 이회창 총재 비서실장으로의 의리
- 1938년 충북 청원, 청주고, 고려대 영문과, 대한일보 정치부장, 국회의장 비서실장, 민자당 대표 비서실장, 14대 대통령 총재 비서실장, 신한국당총재비서실장, 13·14·15대 국회의원(충북 청원), 정무제1장관, 한나라당 사무총장, 대한민국헌정회 부회장, 대한민국헌정회 제19대 회장, 현 육아방송 회장
비서실장만 다섯 번을 지냈다. 신경식 전 국회의원이다. 정일권 김영삼(YS) 이회창의 참모였다. 처세에 모남이 없어 그를 신뢰했다.
지난 10월 23일 여의도 극동VIP빌딩 육아방송을 찾았다. 신경식 전 의원(이하 신경식)이 회장으로 있다. 저출생 시대, 대한민국은 위기다. 육아방송은 행복한 출산과 아이들의 인성 교육을 통해 새로운 가족 문화를 선도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근황 관련해 이런저런 여담을 나누면서 시대산책을 떠났다.
- 중앙청 출입 기자, 신민당 출입 기자도 하면서 여야를 넘나들었습니다. 인맥을 많이 형성한 것 같은데 특별한 방법이 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일종의 성격 탓이죠.”
언론에 비친 인물평은 유하다는 것.
“신문기자할 때 가능하면 좋은 점을 많이 써주다 보니까 사람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죠.”
비서실장만 다섯 번
- 도합 다섯 번의 비서실장 임명장을 받았는데 비결은 무엇입니까.
“고향이 충정도입니다.”
충청도 덕도 있다며 꺼낸 말.
“충청도는 타협적인 편인데 중도적이라 할 수 있죠.”
역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며 말을 이었다.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시대의 접경지가 충주 남한강 일대에요. 고구려나 신라가 쳐들어왔을 때 어느 한 쪽에 동참한 사람들이 싹 죽다 보니까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가야지 총대 메고 앞장섰다가는 간다….”
혼잣말하듯 말을 줄여 나갔다. 암튼 이런 기질이 배었다는 것.
그가 쓴 회고록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이 <7부 능선엔 적이 없다>. 신문기자 시절 만나본 정치인들에 대한 평들이 재미나게 녹아 있다.
감정을 절제해 담백하면서도 정갈하게 써 놨다. 책에 소개된 정일권, 이재형, 유진산, 정일형, 이철승, 조윤형, 김상현, 김수한 등 내로라하는 이름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며 정치인들에 대한 인물평을 물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박정희 정권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정일권과의 일화다.
정일권과의 인연
자연스레 정일권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신경식은 1978년부터 6년간 국회의장 정일권 밑에서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처음 인연은 정일권이 국회의장에 앞서 총리로 발탁되던 때로 올라간다. 신경식은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한일보> 중앙청 출입기자로 있었다.
1964년 5월 9일 비가 주룩주룩 오던 날이었다. 중앙청 입구에 들어섰는데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최두선 국무총리 밑에서 외무부 장관을 맡았던 정일권이 보였다. 그는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떤 촉을 느낀 신경식은 신경 안 쓰는 듯 겉으로 천연덕스럽게 행동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귀를 쫑긋하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형님이 꼭 외무부 장관을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외국에서도 해군제독이 외무부 장관을 맡는 일은 많아요. 형님이 안 맡으면 저도 총리 그만두겠습니다.”
정일권은 수화기에 대고 이런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순간 그 말을 듣는데 신경식의 심장이 빨라지고 있었다.
‘특종이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사람은 우선 누구일지 짐작이 됐다. 정일권이 상대방을 향해 ‘해군제독’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손원일 제독일 것이 틀림없었다.
통화 내용으로 미뤄 보면 손 제독은 외무부 장관직을 고사하려는데 정일권은 안 된다며 설득하고 있었다.
당시 개각 명단 중 오리무중이었던 것이 특히 총리직이었다. 누가 맡게 될 것인지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정일권의 입에서 ‘저도 총리 그만…” 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옳다구나.’
가슴이 요동쳤다. 대어를 낚은 것이다.
‘정일권 총리, 손원일 외무부 장관…. 그것도 둘이나!’
신문사로 뛰어간 신경식은 부리나케 특종을 써 내려갔다. 기사는 다음날 신문 일면 톱을 장식했다.
정일권으로서는 ‘아찔’했다.
‘신경식이라는 이 기자가 어떻게 알게 된 건가?’
정일권은 취임을 마친 뒤 신경식을 찾았다. 둘이 가진 첫 대면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나중에는 국회의장과 비서실장 관계로 발전했다. 정일권은 신경식의 정계 입문을 도와준 인물이었다.
정인숙 혼외자, 진실은?
신경식은 그가 쓴 회고록에서 정일권에 대해 “내가 모셨던 정일권 의장은 육군대장으로 두 번에 걸친 참모총장, 6년 7개월의 국무총리직, 6년간의 국회의장직 등 대단한 관운을 타고난 분이었다”고 소회했다.
하지만, 그런 정일권에게도 시련이 오는데 정인숙과의 추문이다.
당시는 요정 정치가 중심이었다. ‘선운각’에서 일하던 정인숙은 박정희 정권 시절 빼어난 외모로 정계 인사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유명 에이스였다. 1968년 혼외자를 낳았다. 아버지가 박정희냐, 정일권이냐, 이후락이냐 등 소문이 파다했다.
정권을 흔드는 예민한 사건으로 확산되고 있을 즈음 정인숙은 1970년 26세 나이로 총격 피살되고 마는 비운을 맞고 만다. 박 정권이 개입된 것인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정일권은 정인숙과의 추문으로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되는데, 아이 아버지일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 실제 진실은 뭡니까.
“정일권 의장은 아닙니다.”
신경식은 ‘아니다’는데 무게를 뒀다.
“한번은 프랑스에 같이 갔는데….”
정일권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며 회상에 잠겼다.
하루는 정일권이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이동원과 함께 수유리 요정을 찾게 됐다. 점심을 하는데 정인숙이 옆에 앉았다. 날씬하니 예뻐 보였다. 저녁에도 몇 번 가서 술을 먹게 됐다.
그런데 7개월을 만난 시점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만난 지 7개월 만에 애를 낳을 수가 있느냐는 것에 의문이 들더래요. 산부인과 교수에게 물으니 인큐베이터 같은 데서 잘 키우면 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이가 조그맣고 조막만 해야 하는데 달덩이처럼 크더라는 것이죠. 크고 건강해 뵈니 ‘아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해요.”
그런 생각에 집으로 들어갔다는 정일권.
할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네가 어디 가서 아들을 낳았다는 게 장안의 화제다. 데리고 키우자.”
난처한 정일권.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부터 본인까지 삼대가 독자다.
“자기애라는 확신이 있으면 할머니한테 안겨주고 싶은데 도저히 과학적으로 안 되니까 ‘사실이 아닙니다’고 말씀드렸대요.”
새로 알려진 뒷얘기였다. 정인숙의 아들은 후에 친자확인소송을 진행했다가 얼아 안 가 취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YS 비서실장
1991년 5월 중순 신경식은 김영삼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의 신임 비서실장으로 임명된다. 민주계가 아닌 민정계에서 비서실장으로 내정된 것을 두고 정치권 안팎에서는 민자당 내 탈계파를 목표로 한 단합과 노태우-YS와의 신뢰 관계를 이루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봤다.
- YS 비서실장이 된 것은 허주(김윤환)의 추천 때문입니까.
“YS가 한 건데, (내게) 그러더라고요.”
신경식이 YS 초대로 상도동 댁을 방문했을 때다.
YS : 자꾸 밑에서 상당히 따로 놀고 있는데(3당 합당 후 민자당은 민정당계, 민주계, 공화당계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민정계와 민주계가 부닥치는 일들이 많았다) 단합을 시켜야 하잖소. 제일 중요한 것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비서실장이 돼야 한다는 겁니다. 당신이 제일 적합해서 쓰려고 해요.
이렇게 말하며 비서실장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신경식 : 정일권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6년간 있었는데 또 다른 분을 모시는 게 말이 됩니까.
그 길로 돌아선 신경식.
- 이후 YS가 다시 설득해 온 겁니까.
“이번엔 노태우 대통령한테 연락이 온 겁니다.”
대통령이 한사코 하라는데 안 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하겠다고 말한 뒤 청와대를 나왔다. 상도동에 전화를 걸었다. YS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신경식 : 내일부터 열심히 하겠습니다.
YS : 잘 결정했어요.
등을 두들겨 줬다고 한다.
훗날 신경식은 회고록에서 당시를 소회하며 이렇게 적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단식, 데모, 투쟁 등으로 강성 이미지였지만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소박한 인정미가 넘치는 분이었다.”
둘은 헤어졌고 다음날(5월 20일) 공식 발표됐다.
비서실장이 된 뒤 신경식은 계파 간 가로 놓인 담을 허무는 데 노력했다.
민정계 의원들에게 자신의 방(비서실장)에 놀러 오라고 권유했다. 민정계 의원들의 발길도 갈수록 늘어났다.
대선 경선을 앞두고 차츰 민정계는 친YS, 반YS로 갈렸다. 허주 김윤환이 대표적인 친YS로 바뀌었다.
대세론이 굳어지면서 YS는 경선서 무난하게 승리했다.
YS 인사 스타일
- 대선 후보로 확정된 후 비서실장이 교체됐잖습니까. 책(회고록)을 읽어보니 YS가 본인도 모르게 교체했다고 하던데 그게 원래 YS 스타일입니까.
“YS 인사 문제는 아주 철저해요.”
보안이 철저하다는 말로 들렸다. 민주화 투쟁할 때부터 각별히 철통보안에 신경을 썼던 게 몸에 밴 듯했다.
교체된 내막은 이러했다. YS가 민자당 대선후보로 확정되자 노태우는 자신이 추천한 인사를 비서실장으로 천거했다. 공보처 장관을 맡고 있던 최창윤이었다.
새 후임 발표가 났을 당시 신경식은 기자들과 함께 있었다. 바뀐 소감을 묻는 질문에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어 어리둥절했다. “교체된 것을 모르고 있었냐.” 한 기자가 파고들어왔다.
신경식은 곧바로 “인사 문제 말이오? 그거 벌써 끝난 일인데 이제 발표했나.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지”라고 태연하게 받아쳤다.
상황을 수습하려는 답변이었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던 차 저녁에 YS가 불렀다.
YS : 대선 기획단에서 일해 보세요.
거취를 정해준 것이었다.
- YS가 단둘이 만나 전별금까지 쥐어줬다는데 얼마를 준 겁니까.
“얼만지 생각이 안 납니다. 섭섭지 않게 준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회창 비서실장으로
YS가 14대 대통령에 선출된 뒤 우여곡절 끝에 신경식은 장관 자리가 아닌 당 총재 비서실장으로 들어갔다. 정치 인생에서 세 번째 비서실장을 역임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 이후 문민정부에서의 정무장관을 거쳐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 비서실장을 맡게 되잖습니까. 그때는 어떻게 맡게 된 것인지요.
“대선을 두어 달 앞두고 이회창 총재가 나를 찾아왔어요.”
1997년 10월 초순이었다. 대선후보인 이회창은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신경식은 사양했다. YS와 이회창 간 갈등설이 들리던 때였다.
그런데 만나고 난 뒤 다음날 신문지면에는 신경식이 이미 이회창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고 보도돼 있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정정하기에는 이회창 꼴이 말이 아닐 수가 있었다.
DJ(김대중)는 JP(김종필)와 연대해 있고, 이인제까지 독자 출마해 여권이 갈라진 상황이었다. 위기 국면 속에서 자칫 ‘이회창이 힘이 없어 비서실장을 맡으려는 사람들이 없구나’ 라는 소문이 정가에 퍼질 수 있었다.
명운이 걸린 대선을 앞두고 후보에 상처를 낼 수 없었다.
신경식은 하는수 없이 수락했다. 또 그것이 인연이 돼 이회창이 낙선해 2선 후퇴한 뒤 명예총재로 추대돼 있을 때도 비서실장 자리를 지켰다.
남대문 근처 빌딩에 명예총재 사무실이 차려졌다. 신경식은 책상 하나를 갖다 뒀다. 장관을 지낸 3선 의원의 신분(신경식은 이후 16대 국회까지 4선을 역임했다)으로 왜 맡느냐는 얘기들도 들려왔다. 하지만 낙선했을 때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신경식의 첫 선거 도전은 11대 총선 때였다. 민한당 소속으로 고향(충북 청주?청원군)에 출마했지만 떨어졌다. 12대 총선서도 패배했다. 낙선의 경험은 체험하지 않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될 만큼 쓰라렸다.
신경식은 회고록에서도 “낙선 후 나를 대하는 남들의 시선이 전과자를 대하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고 한 바 있다.
그는 “낙선,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절망은 겪어보지 않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다. 우주에 혼자 내버려진 듯 고독했다”고 술회했다.
이회창의 마음을 헤아렸다. 여당 대선후로 출마해 떨어진 것이니 심적 고통의 무게감은 더 컸을 것으로 짐작했다. 자신이라도 비서실장 자리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연한 물처럼 흘러오면서도 변심하지 않은 의리의 정치 행보가 엿보였다. 마치면서는 다섯 번의 비서실장을 하면서 느꼈을 소회가 궁금했다. 거기에서 오는 정치 철학이 있을 법했다.
그는 회고록 제목이기도 한 ‘7부 능선’에 빗댔다.
“10부 정상은 적이 많아 오르기 험하지만 7부 능선엔 적이 없어요. 나는 ‘7부 능선엔 적이 없다’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분수에 맞게 처신해왔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충청도의 중도적 기질이라 할 수 있죠.”
돌고 돌아 충청 예찬이 더해졌다. 겸손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자상한 미소 가운데 단단한 심줄이 느껴졌다. 이런 인간미는 오랜 여운을 준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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