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에 계란치기여도 대의명분 옳으면 돌진한 YS”
“79년 전대서 총재 선출된 것이 유신 몰락의 단초”
“집 두 채 갖는 것조차 이해 못해…청렴결백 상징”
“부산 발전사 흔적은 모두 문민정부서 이룬 것”
“민주화의 상징 김영삼대통령기념관 건립돼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을 모아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
시대산책 문정수 편
- 7대 선거 김영삼 캠프 합류 배경
- 평소 YS 목소리를 똑같이 낸 일화
- 1979년 10·26 당시 수배된 이유는
- 신군부에 의한 정치규제 당시 상황
- 무교동 사랑방 운영, 문 닫은 사연
- 12대 총선 부산 북구로 가가 된 우여곡절
- 서석재와 조직국장 놓고 비서진 신경전
- 3당합당 때 참여 안 하려 했을 때
- 민선초대 시장 출마의 우여곡절
- YS 사후 재산 정리 때 발견한 것
1939년 부산, 경남 중ㆍ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행정학석사), 동아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과정수료, 12~14대 부산북구, 북구갑 역임, 김영삼의원(전 대통령) 보좌관, 신민당 총무국장, 사무처장,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위원, 통일민주당 민자당 부산시 지부장, 민주자유당 중앙당 사무총장, 초대민선 부산광역시시장, 부산국제영화제 창설 조직위원장(1회~ 4회), 신라대학교 초빙교수, 대한민국헌정회 이사 |
문정수 전 부산시장은 원조 상도동계다. 김동영 서석재 김봉조 등과 故김영삼(YS) 전 대통령 비서진 1세대로 불렸다.
YS 서거 9주기를 앞두고 지난 14일 국회헌정회관에서 문 전 시장을 만났다.
- 평소 YS 목소리를 똑같이 내서 비서진들도 혼동할 정도였다고 하던데요?
“누가 그 말을 합디까?(웃음).”
- 김덕룡 전 대표(상도동계 좌장)한테 들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가…. 경상도 아닌 사람들이 듣기론 잘 분별이 안 돼요. YS가 신민당 원내총무이던 시절인데 모시고 있었으니 전화하는 버릇, 특징을 잘 알아요.”
YS : 아-난데 누구야, 김 비서야?
- 김덕룡 전 대표는 너무 똑같다고 하더라고요.
“여직원들은 잘 안 속는데 남자들은 거의 열이면 열 다 속았어요.”
상도동 입문
- 이력을 찾아보니 1967년 7대 선거에서 자발적으로 김영삼 캠프에 합류하며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노동청 공무원이었는데 YS 캠프에 간 까닭은 뭔지가 궁금하더라고요.
“그 얘기도 많이들 모르는 건데 노동청에 근무했다는 것은 또 어떻게 찾아냈소?”
- 노동청 공무원이면 안정적인 직업인데 캠프에 갔던 이유가 뭐였는지, YS가 7대 때는 일개 국회의원이었잖아요.
“나는 4·19때 학생운동을 했어요.”
말문을 여는데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시절 얘기부터 꺼낸다.
“4·19 데모에 참여하고, 5·16이 날 때 군에 입대했어요. 복학을 했는데 4·19라는 위대한 혁명이 5·16 쿠데타 군인들에 의해 취지가 전도된 겁니다. 문과는 취직하기 굉장히 어려웠어요. 정치학과는 원서를 받아주는 데가 거의 없고 신문사에서나 받아줬어요. 그 수도 많지 않아 한 학교당 한 사람 될까 말까 했어요. 외교관을 지망할까 했는데 어쩌다 보니 노동청 발족하는 팀에 들어가게 됐지요.”
1966년 10월 말 무렵.
“크리스마스 연말인데 휴가를 나와 고민한 것이 노동청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이 맞는가, 평상시 마음먹었던 정치 현장에 뛰어드는 것이 맞는가 하는 거였어요. 마침 지역이 YS 선거구(부산)였습니다.”
YS와 문정수는 경남고등학교 동문.
“당시 YS는 30대 초반의 아주 젊은 나이에 각광을 받는 정치인이었어요.”
문정수 말대로 촉망받던 YS.
거슬러 올라가면 청소년 시절부터 YS는 남달랐다고 볼 수 있다.
중학생 때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하겠다며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이라고 써 붙였다. 서울대 문리과학대학 철학과 재학 시절부터 정치학을 두루 공부했고 웅변에 능했다.
장택상 외무장관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이래 1954년 만 25세라는 역대 최연소 나이로 경남 거제 3대 민의원 선거에 나가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1954년 이승만 정권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자 이에 반발하며 자유당을 탈당한 뒤 신익희 조병옥 등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 구파로 활동했다.
5·16이 난 뒤에는 박정희 2인자인 JP(김종필)가 야당 국회의원들을 불러 혁명에 동참하라고 하자, “너희들은 쿠데타 세력이다”면서 신랄하게 비판하는 용기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YS는 고향인 경남 거제에서의 재선을 거쳐 6대 총선부터는 부산 서구로 지역구를 옮겨 3선에 이르고 있었다. 1965년에는 민중당 창당에 참여, 만27세 역대 최연소 원내총무로 선출됐다. 1967년 신민당 창당을 주도했다.
4선 고지인 7대 선거는 그해 6월.
문정수는 캠프 문을 두드렸다.
“부산 사무실에 있는 당직자 중 학교동문인 선배가 있더라고. 그분을 만나서는 정치를 좀 배우고 싶다고 했어요. 학교도 제대로 나온 멀쩡한 젊은 친구가 야당 쪽에 뛰어든다는 것이 드물고 귀할 때였죠.”
선거 기간 고생은 심했다. 선전부장 직책을 맡았는데 집에도 못 들어가고 여관 같은 곳에서 합숙을 하며 하루 유세 12군데가량을 뛰었다. 장티푸스에 걸려 몸이 상하기도 했다.
YS는 7대 국회의원에 당선.
- 이후 상도동 비서실에 정식으로 합류한 건지요.
“처음엔 신민당 부산지구당 지역비서로 있었어요. 김동영 의원이 원내총무 전문위원으로 있으면서 정책위 간사를 맡고 있었는데 오라고 하더라고요. 안 가고 부산에 있었죠. 일 년 쯤 지났나. 서울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969년쯤 되겠습니다.”
40대 기수론과 YS
그 무렵 전후 YS는 6·8 부정선거에 항의해 174일간 원외투쟁을 벌였다. 또 박정희 3선개헌 반대투쟁을 주도하다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69년 말에는 41살의 나이로 7대 대통령선거에 도전장을 던졌다. 3선개헌으로 정국이 무기력감에 빠져들자, YS는 40대 기수론을 들고나왔다.
총재이던 유진산은 ‘구상유취’라며 비판했다. 같은 40대 정치인인 DJ, 이철승까지 가세하면서 경선 판은 역동적으로 변화했다. 국민적 흥행이 일어났다. 자연스레 이야기가 DJ쪽으로 흘러갔다.
- 당시 분위기를 어떻게 기억합니까.
“40대 기수론 나왔을 때 DJ(김대중)보다 당 서열이 훨씬 높았거든요. YS는 원내총무, DJ는 대변인 할 때였지요. 한 번은 대구 공설운동장에서 삼선개헌 투쟁을 했어요. YS는 맨 앞자리에 앉아 있고 내 바로 앞자리에 DJ가 있었어요. 연설 순서도 열 몇 번째였지요. 한 열 장 정도 되는 연설문에 촘촘히 적어놨더라고요. 깨알같이 쓴 연설문을 붙잡고서는 자기 차례 될 때까지 읽고 또 읽고 하는 모습을 봤지요. 그때의 DJ는 달변가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7대 대선 경선 오면서는 확 달라지대요. 엄청난 노력으로 웅변가가 됐구나 싶었죠.”
1971년 신민당 대선 경선에서 선두를 달린 것은 YS였다. 1차 투표에서도 승리했다. 그러나 2차 결선투표에서 DJ-이철승 밀약에 밀려 떨어졌다.
이듬해 4월 7대 대선이 치러졌다. YS는 전국을 돌며 DJ 지지를 호소했다. 40대 기수론 돌풍을 통해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3년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선명 야당 노선
- 이후 YS가 선명야당을 기치로 1974년, 79년 당권을 잡았는데요. 그 시기 어떤 역할을 했는지요.
“수행도 하고, 조직도 하러 다녔지요. 74년 4월 당수인 유진산 총재가 별세하면서 8월 명동국립극장에서 신민당 전당대회가 치러졌어요. 조직도 돈도 당원명부도 없던 때라….”
- 당원 확보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 부분이 비하인드 스토리에요. 신도환계가 주류였고, YS는 비주류였잖아요. 남산헬스장에 운동을 하고 있는데 YS한테 전화가 왔어요. 대의원 명단을 챙기라는 거였어요. 800여 명 당연직 대의원들 중 500명 남짓은 어렵사리 알아냈는데 300명 명단은 몰랐어요. 조직국에 감사들이 있었어요. ‘어찌 지냅니까?’ 하면서 천 간사를 찾아갔어요. 어느 지역 누가 대의원인지 700명까지는 확보하게 됩니다. 나머지 100명은 끝내 알아내지 못했어요. 결국 모른 채로 전대를 치렀지요.”
- 명단은 사무총장인 신도환이 쥐고 있었을 테니 잘 협상했다면 안 줬을까요?
“안 주죠. 신도환과 YS 관계가 좋지 않았잖아요.”
계보가 달랐던 둘은 당 노선을 놓고 대척점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YS는 선명야당 노선의 강경 투쟁을, 신도환은 박 정권과 결탁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명단 확보에 그만큼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요.”
하지만 이겼고, YS는 만 46세 나이에 역대 최연소 총재에 선출될 수 있었다. YS는 그 길로 개헌을 위한 원외투쟁에 나서며 반유신 투쟁에 돌입했다. 국내는 물론 미국과 일본 등을 돌며 개헌운동의 국제적 지원을 호소했다.
1976년 전대에서는 박 정권의 방해공작으로 이철승한테 당권을 뺏기고 만다. 시간이 흘러 다시 전대를 눈앞에 두게 됐다. YS는 어느덧 7선을 하고 있었다.(이후까지 생각하면 총 9선 역임)
- YS가 1979년 5·30 전대에 도전하려 할 때는 이철승한테 안 되는 분위기였잖아요. 박 정권이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면서 김덕룡 비서실장도 감옥에 들어가고 말이죠.
“주변에서는 지는 싸움이라고들 했지요. 도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그때도 기적처럼 된 것이죠.”
- 당권을 잡을 수 있던 첫 번째는 가택연금 중이던 라이벌인 DJ(김대중)가 전대 하루 전 을지로 아서원(중국집)에 나타나 YS를 지지한 점, 두 번째는 이기택이 이철승과 더 친할 텐데도 YS를 지지해서였습니다. 이기택의 선택을 놓고 여러 설이 있었죠. 그중 하나가 이철승한테 부총재 자리를 요구했다가 ‘자네가 무슨 부총재야’면서 거절당해 YS를 지지했다는 거였습니다. 고흥문 회고록에 나오는 얘긴데 어떻게 봅니까.
“이기택 의원은 젊었지만 부총재를 해도 괜찮을 만큼 성장하고 있던 때였어요. 그 ‘설’은 아니라고 봐요. 건물 바깥에서 YS를 연호하는 군중의 함성으로부터 거대하고도 도도한 민주주의 흐름을 읽었기에 대세를 따른 거였다고 봅니다. 전대가 변두리에 있던 마포 신축 당사 건물에서 열렸던 것이 신의 한수였어요. 창문 너머로 밖이 다 보이는 곳이라 많은 시민들을 볼 수가 있었죠. 바깥을 볼 수 없는 세종문화회관 같은 곳에서 했다면 기적을 기대하기 어려웠을지 몰라요.”
7·5동지회와 사슴파
- 상도동 내부에서는 1979년 전대 이후 조직국장 자리를 놓고 서석재 전 의원과 신경전을 펼쳤던 일이 자주 회자되고 있습니다. 총무국장이 조직국장보다 서열상 위잖습니까. 왜 다들 조직국장을 하고 싶어 하는 건가요.
“조직국장은 당원들을 관리하잖아요. 돈이 생기거나 명예로운 직무는 아니지만 사람을 모으는 역할이라 꽃자리와 같은 것이죠.”
- 그때는 김덕룡 전 대표는 시장님을 조직국장으로 밀었고 김동영 김봉조 이런 분들은 서석재 전 의원을 시켜주자고 했다던데요.
“이원종 수석(문민정부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역임)은 상도동 비서진은 아니지만 김덕룡 의원과 친했어요. 같은 경복고 선후배였지요. 김명윤 의원의 멤버이기도 했고요. 그분들이 내가 조직국장의 적임자다, 이랬는데….”
(필자는 김덕룡 전 대표로 언급했지만 문 전 시장은 김덕룡 의원으로 호칭했다. 인터뷰 도중 열거한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모두 현역인양 전(前)을 갖다 붙이지 않았다. 이 점을 살리고자 인터뷰이의 답변에서는 현역처럼 놔뒀다.)
- 하지만 서석재 전 의원이 되잖아요.
“원래 조직국장은 나로 결정됐어요. 근데 양보했지요.”
다음은 관련 일화.
발표 날 아침 신민당 박권흠 대변인이 문정수를 찾아와 메모를 건넸다.
‘조직국장 문정수, 총무국장 서석재’
박권흠 : YS는 발표하기에 앞서 김동영 의원한테 먼저 전화해 알려주고 난 뒤 기자들한테 오픈하라고 했습니다. 근데 김 의원과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 그냥 발표하라고 하지요?
“YS로부터 김동영 의원한테 먼저 귀띔하라는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죠. 당신께서 양측 사이에서 얼마나 난처했을지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문정수 : 조직국장이 뭔데 이렇게까지 하나.
“그 길로 김덕룡 의원을 찾아갔어요.”
문정수 : 박권흠 대변인이 발표한다는데 김동영 의원도 수배가 안 되고…. 내가 하지 말까?
- 김덕룡 전 대표는 뭐라 하던가요.
“알아서 하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 뒤 YS한테 가서는….”
문정수 : 김동영 의원도 연락이 안 되고, 제가 총무국장으로 가겠습니다.
- 아, 그렇게 된 거군요.
“YS가 한시름 놨는지 ‘그래 잘 생각했다. 총무국장이 선임국장이야.’ 굉장히 기분 좋아하더라고요.”
- 김봉조 전 의원 얘기론 서석재 전 의원이 생활고를 많이 느꼈다고 합니다. 김 전 의원은 YS한테 월급 받는 비서였는데 서 전 의원도 되게 하고 싶어 했다고….
“서 의원도 국회의원 보좌관을 한 적이 있어요. 야당 정치인들이 거의 다 어려웠을 때였죠.”
- 김덕룡 전 대표는 부인이 의사여서 생활이 좀 나았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집사람(김명신)이 약국을 했어요. 비교적 밥을 먹고살 수 있는 편에 속했죠.”
- 조직국장 신경전 이후 비서진이 75동지회와 사슴파로 갈리잖아요?
“김덕룡 의원도 사실상 YS 일급 참모였지만, 김동영 서석재 김봉조 이런 분들은 그 당시 상도동 주류였지요.”
- 같은 주류 아닙니까.
“우리(사슴파)도 다 같은 주류긴 했지만 마인드가 좀 젊고 진보적인 편이었어요.”
- (사슴파는) 좀 더 개혁적인…?
“그렇죠.”
- 사슴파로 불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명윤 의원 사무실이 관철동 삼일빌딩에 있었는데 ‘사슴’이라는 카페 있었어요.
- 생맥줏집이라고 하던데요?
“자그마한 카페로 맥주도 팔았죠. 거기서 자주 모인다고 사슴파로 불렸지요.”
문정수를 비롯해 김덕룡 김명윤 이원종 등이 뭉쳤다.
김동영 김봉조 서석재 등의 7·5동지회가 YS와 정치 여정을 시작한 1세대 구파라면 사슴파는 신파에 빗댈 수 있다.
- 김영삼 비서실 1기인데 2기였던 김덕룡 전 대표와 친분이 두텁게 된 이유는 왜 그렇습니까.
“김덕룡 의원이 내하고 친하다고 합디까.”
돌연 반문해왔다. 딱히 답은 안 하는데,
“안 친해요. 하하하.”
유머가 몸에 밴 듯했다.
“부산서 어제 서울로 올라왔는데 오늘에라도 김 의원 사무실에 들르려다 여기 인터뷰도 있고 해서 못 갔지요.”
- 다른 비서진들도 많은데 친분이 두터웠던 이유가 궁금하더라고요.
“김덕룡 의원한테는 빚이 있어요. 어찌 보면 YS 대신에 우리들 대신에 네 번 투옥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호남 인사임에도 YS를 지켜 더 힘들었을 테고 말입니다.”
- 김덕룡 전 대표 경우 YS로부터 특히 신뢰를 많이 받았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뭐라 생각합니까.
“굉장히 합리적이고 판단이 분명해요. 비서진 중에서도 정무감각이 뛰어났어요. 겪어보면 신뢰를 할 수밖에 없었죠. YS와는 서울대 문리대 선후배 사이잖아요. 같은 김녕 김씨 후손이기도 하죠.”
- 김정남 김도현 등 재야 인사들을 연결할 수 있는 중간고리 역할을 해서가 아닐까요?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건 후자로 봅니다.”
유신의 몰락
1979년 당권을 잡은 YS와 상도동계는 반유신 투쟁을 이어갔다. 집단 농성하다 폭력 진압을 당해 신민당으로 피신해온 YH무역 여성 노동자들 200여 명을 돕게 된다.
- 꽤 많은 인원이 당사에 있던 셈인데 밥값은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건물 앞에 ‘진고개’라는 식당이 있었어요. 여공들 200명에 당원들 100명…300명은 됐을 겁니다. 지금 돈으로 인당 만 원이 드니 두 끼만 먹어도 600만 원이 나가는 겁니다. 감당이 안 돼 농성 이틀째부터는 원내총무인 황낙주 의원 부인을 비롯해 국회의원 부인들이 밥을 해다 주기도 했죠. 도시락도 먹고 했는데, 밥을 배달해주던 젊은 여직원이 한 명 있었어요. 스무 살 아가씨였어요. 여공인 김경숙 양이 희생돼 장례가 치러졌는데 그 아가씨도 그만 죽은 거예요.”
- 저런….
“세상은 잘 몰랐지요.”
-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건가요.
“절망스러운 사건들을 보면서 우울해져 신세를 비관하게 됐던 것 같아요. 이름도 성도 모르고 묻혀 버렸죠.”
이 자리를 통해서나마 명목을 빌어주고 싶은 듯했다.
- 1979년 10·26 당시 수배 중이었던데 무슨 일 때문인지요.
“YH 농성 사건 때 김경숙 죽음에 대한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촉구하다 집시법 위반 등에 걸렸어요. YS에 대한 총재 직무 정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진 것에 반발해 재판부에 대한 화형식도 하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 때문에 수배가 떨어진 것이죠. 지금은 목소리가 허스키하지만 예전엔 고음이라 맑았어요. 클래식 노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잘 불렀어요. 하루는 새벽 2시에 무장 경찰들이 쳐들어왔어요. 무기한 농성을 벌이며 격렬하게 대치하다보니 목마저 망가졌지요. 당사를 관리하는 책임자여서 얼굴이 팔려 있었어요. 수배가 떨어졌는데 그때 잡혔다면 고초를 많이 겪었을 거예요.”
- 다행히 안 잡혔네요.
“고문당하기 싫었거든요.”
- 도피하면서 ‘희망이 없다’는 생각도 했을 듯합니다. 유신 정권에 대한 무기력함 같은 감정도 느꼈을 거로 보는데 어땠습니까.
“아니요.”
단호히 말해왔다.
“절망적이면 열심히 도망 다니지 않았겠지요(웃음).”
-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국회의원들이 사표 내고 농성하고…. 이런 것을 접하면서 ‘이 싸움은 오래 안 갈 것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같은 기간 YS는 박정희 정권 타도를 선언했다. 미국 <뉴욕타임스>와도 인터뷰를 통해 박 정권에 대한 미국을 결단을 촉구했다.
박 정권에서는 용공 이적 행위로 몰아 의원직을 제명했다. 의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직 제명이 공화당에 의해 날치기 통과된 것이었다.
이는 국민적 분노로 돌아왔다.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10일 후 궁정동 안가에서는 유신의 심장을 향한 총격이 가해졌다.
무차별 폭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겠다는 박정희 차지철 계획을 들은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눈 것이다.
- 10·26을 돌아보면 결국 그날의 격발사가 유신 체제의 막을 내리게 한 거잖아요.
“몰락의 시작은 5·30 전대였다고 봐요. YS가 기적처럼 총재로 선출되면서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10·26을 끝으로 유신이 무너져 내린 겁니다.”
암흑 속에서도 꽃 핀 사랑방
박정희 서거로 잠시 서울의 봄이 오는 듯했지만 전두환 신군부가 들이닥쳤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불법 연행하며 12·12 쿠데타를 일으켰다.
YS는 계엄령 해제를 촉구하며 윤보선 양일동 DJ와의 4자회담을 주도했다. DJ는 신민당 입당을 포기해 야권은 하나 되지 못했다. 그 사이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야당 지도자들은 가택 연금되거나 연행됐다.
-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정치규제에 묶여있을 때 적격심사청구를 했는지, 했다면 서석재 등 일부 인사는 받아들여졌는데, 본인은 왜 안 된 건가요.
“하긴 했는데 안 받아들여졌어요. 정치규제를 처음 당해봤어요. 우리가 규제당할 이유가 뭐 있느냐, 정당하게 민주주의하자는 데 뭔 잘못이냐 항의하기도 했어요.”
- 박권흠은 민정당, 서석재는 민한당에 갔습니다.
“손을 뻗치니 잡았던 거고….”
- 손을 뻗쳐오는 건 없었어요?
“예를 들어 YS한테 전해달라고 하면서 우리한테 오잖아요. 말 같지 않은 얘기 마라, 들어줄 사람 아니다. 이렇게 거절하면서 뻗쳤어요. 자기들도 나름 검색을 안 해보겠습니까. 협조적일 것 같은 사람은 풀어주고 안 할 것 같으면 안 해주고 했겠죠.”
- 복진풍 같은 분은 ‘서석재가 허삼수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 했다’고 한 바 있습니다. 줄을 대려 했을 거라는 거죠.
“서석재 의원이 허삼수 부산고등학교 선배에요. 울산의 심완구 시장은 허삼수 동기고요.”
-1980년 김덕룡 최기선 이영석 김병환 등과 함께 무교동에 사랑방이라는 주점을 차렸는데 왜 열었으며 6개월 만에 문을 닫게 된 이유는 또 뭔가요.
“그전에 개업 날짜를 아무도 모르대요. 개업 날짜 모르죠?”
- 네.
“4월 2일이에요. 4월 1일이 만우절이잖소. 그날 개업하려니까 남들이 만우절이다, 웃기지 마라 할 것 같더라고요.”
이어서는 문을 열고 닫게 된 이유가 전해졌다.
“신군부에 의해 국회도 해산되고 당도 없어지고 난리가 났잖아요. 정치규제에도 묶였고요. 사무실이 없으니 모일 데가 없었어요. 다방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김덕룡 의원은 ‘산다’라는 이름의 호텔 커피숍을 자주 갔어요. 서울 시청 근처에 김병환이라는 친구가 곰탕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김덕룡은 예전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그 집 이름을 두고 <다대포>였다고 한 바 있다. 김덕룡은 소금구이집으로 기억했지만, 문정수는 곰탕집으로 기억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옥집이었는데 마침 문을 닫게 된 겁니다. 우리가 장사하면서 사랑방 모임 겸 사무실 대용으로 쓰고자 인수하게 됐지요.”
문정수 김덕룡 최기선 김병환 이영석 다섯 명이 3000만 원을 모아 비빔밥 집을 차렸다. 막걸리도 팔았는데 간판은 <사랑방>.
- 비빔밥은 누가 만든 건가요.
“부엌일하며 전주비빔밥을 잘 할 줄 아는 분이 있었어요. 일류 요리사는 아니고 이급 정도 됐는데 지금도 안 잊어버리는 것이….”
‘전주비빔밥계의 거상 김00 여사 상경하다’
- 플래카드를 걸었군요.
“아니요. <한국일보>에서 나오는 주간지 등 이런 데서 기자들이 써줬거든요.
기사 제목이었나 보다.
“4~5월 처음 한두 달은 장사가 잘됐어요.”
- 매상은 한 얼마 정도였습니까.
“하루 50만 원, 지금으로 치면 500만 원은 될 거예요.”
- 정말 잘 됐네요.
“줄 서서 먹었지요. 일반 시민부터 시청 공무원들도 많이 왔어요. 정치규제에 묶인 이민우 황낙주 의원 등 이런 분들도 출입하니까 정보요원들도 요시찰하기 위해 다녀들 갔지요. 그런 모습이 이상해 보였는지 차츰 공무원들도 석연찮아 하는 겁니다. 한 1~2개월 북적거리다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손님이 떨어졌어요.”
- 원인은 뭘까요.
“공무원들이 기피한 것도 있을 테지요. 비빔밥으로 단일메뉴로 운영하다 보니 그런 것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요. 여름이 되면서 에어컨도 설치해 놨는데 사람이 뚝 떨어지고 없으니….”
에어컨 설치비용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그 때 돈으로 대략 50만 원씩 냈던 것 같아요. 최기선 의원은 돈이 없다며 못 냈지요. 김덕룡 의원이 제일 많이 분담했어요.”
여름이 지나 가을이 다가왔다.
“10월 말쯤 되니 히터를 설치해야 되잖아요. 또 몇 백만 원 드는 거예요. 돈을 거둬야 하는데 갹출이 안 되다 보니 차라리 문을 닫자….”
- 아하.
“결국 난방시설을 못해 닫게 된 겁니다(웃음).”
- 외상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것도 영향을 미친 것 아닐까요?
“물 반에 고기 반이라고, 당원들이야 공짜로 먹었죠. 외상값도 많았는데 안들 갚으니 그런 타격도 있었죠. 처음에 600만 원씩 투자했는데 김덕룡 의원이 절반 정도 찾아가고 아예 못 낸 사람은 하나도 못 찾아갔죠. 분담금 낸 사람이나 못 낸 사람이나 다 까먹은 거죠.”
10월 말 문을 닫았다.
그 시기 YS는 가택 연금돼 있던 중이었다. 이듬해가 되면서는 1차 연금이 해제됐다. 김동영 최형우 문부식 김덕룡 등과 함께 산행을 시작했다. 훗날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산파가 돼줬던 민주산악회를 발족했다.
- 민산 활동은 했었나요?
“나는 부산에서 활동했어요. 민산 활동을 정당 생활이라고 생각을 안 해 참여를 안 했던 것 같아요.”
1982년이 되면서 YS는 다시 2차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이듬해 5·18 3주기를 앞둘 무렵이었다. YS는 23일간의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목숨을 건 투쟁 끝에 가택연금이 해제됐다. 미국에 있던 DJ와 민주화 투쟁의 중요성을 담은 8·15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YS는 민주 세력의 결집을 주도했다.
완전한 민주주의를 향해
마침내 1984년 5월 18일 민추협 발족.
- 민추협에서 운영위원을 맡았습니다.
“네.”
- 상도동 동교동 지분을 5대 5로 했잖습니까. 상도동계는 다들 참여해 자리가 없는 반면에 동교동계에서는 미국에 있던 DJ가 참여하지 말라고 해 자리가 남아돌았다고 하더라고요.
“동교동계에서는 김상현 의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지요. 그 말도 일리가 있어요.”
- 재미난 일화가 듣고 싶습니다.
“무교동 사무실 구할 때 어려움이 컸지요.”
익히 알려진 내용이었다. 신군부의 방해공작으로 위장 사무실로 계약을 하거나 나중에 들켜 쫓겨나 돗자리 회의를 하는 등 어려움이 컸다.
- 김무성 전 대표가 사무실 구할 때 절반 정도의 비용을 댔다고 하더라고요.
“그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YS는 민추협을 지렛대 삼아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했다. 1985년 2월 12일 총선을 한 달 앞둔 상황.
문정수도 부산 북구에 출마하는데….
- 12대 총선 관련해서 말이죠. 정재문 전 의원한테 생전에 듣기론 원래 부산 진구에서 자기가 공천을 받았는데 부산 북구 공천을 받은 김정수 전 의원이 바득바득 부산 진구로 나가겠다고 했다는 거죠.
“…”
- 그런 차에 정재문 전 의원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내가 양보해야겠다고 판단해 본인은 비례대표로 빠지고, 진구는 ‘김정수’ 줘라 했다는 겁니다.
“뉘앙스가 조금 다르지만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 그 바람에 ‘문정수 시장이 북구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정재문 전 의원의 얘기인 것이죠. 결과적으로 ‘문정수 시장은 나한테 큰 빚을 진 거다’ 이리 말했거든요.
“하하, 내가 감사 인사를 안 했네?(웃음).”
문정수는 원래 서울 강동이나 부산 영도를 희망했지만 가신그룹인 만큼 상대당 후보 영입 등 신민당 세가 규합돼 가는 과정에서 뒤로 밀려나 공천을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2월 선거면 전년도 12월엔 공천 작업이 마무리됩니다. 김정수 의원은 진구로 공천이 됐는데 북구만 비워놓고 안 하는 겁니다. 그러다 연휴 끝날 쯤에 YS가 찾는다고 난리예요.”
YS : 니 지금 뭐하고 다니노.
문정수 : 공천을 안 주니까 연휴에 놀다 왔지요.
북구로 나가라는 YS.
문정수 : 남들 다 공천 받고 선거 운동하는데 지금 나가 어떻게 합니꺼-
YS : 돈이 없으면 선거 기간이 짧아야 좋은 기래이.
- YS가 그래요?
“YS 지론이었어요. 내가 돈이 없는 걸 알잖아요. 이름도 없는 거 알잖아요. 선거구도 낯선데 인 것을 알잖아요. 그리 할라 카면 선거 기간이 짧아야 좋다는 거였지요.”
- 그래서 몇 월 공천을 받은 겁니까.
“우여곡절 끝에 1월 15일 공천을 받았어요. 총선 한 달도 안 남았을 땐데 지구당 창당하러 내려간 날이 선거 시작한 날이에요.”
북구는 12대 총선 때 신설된 선거구였다. 진구로 통합돼 있다가 분구됐다.
“나한테는 아무 연고도 없었어요. 집사람도 모교 동창 단 한 사람도 없었지요. 내가 살던 곳에서 제일 끝에서 끝이기도 했어요.”
주변서도 경험이나 쌓아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당선될 것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선명 야당을 기치로 내건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켜가고 있었다. 12대 총선을 통해 선거 혁명이 일어났다. 신민당은 제1야당으로 올라섰다.
문정수도 12대 총선서 당선.
알려진 바로는 선거 운동 기간 YS 육성테이프를 적극 활용했다는 전언이다. YS 부인 손명순 여사도 지원에 나서줬다. 상대는 민한당 사무총장이던 신상우였다. 이미 4선이나 한 중진이었지만 기세를 누르고 국회에 등원할 수 있었다.
- 의정 활동은 어떻게 했나요.
“광주 민주화운동 사망자가 2000명에 이른다고 발표했어요.”
광주시에서 발행한 통계를 집요하게 분석한 결과였다. 백몇 십 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지던 것에서 2000명이 폭로되니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이 같은 행보 때문에 ‘겁 없는 초선’이라는 평판이 따라붙었다.
“6월 4일 국회에서 터트렸는데 <동아일보>에서 일면 톱으로 내보내려다 포기했어요.”
- 왜 그랬던 겁니까.
“정치부장이 광주 출신이었어요. 본인이 내보내면 지역 연고 때문에 그런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본 거죠. 망설이다 결국 못 실었지요.”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 다음날 <중앙일보>에서 박스로 조그맣게 내보냈어요. 그러자 <동아일보>에서도 서둘러내더라고요.”
<동아일보>에서는 광주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새 통계자료를 제시한 문정수에 대해 ‘찌들지 않은 야당 당료’라고 평가했다.
“재밌는 표현이라서 지금도 그 말을 기억해요.”
흡족해하는 표정.
상도동계 초선이 광주 희생자들 통계 추이를 폭로하자 하루는 동교동계 인사가 찾아왔다. DJ가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을 가져왔다.
“6월 7일 동교동 DJ 댁을 갔어요. 얼마 전 아들 김홍걸 씨가 팔았다는 ‘DJ 사저’를 한창 짓고 있을 때였어요. DJ는 옆 부근으로 이사를 가 있었습니다.”
DJ : 부산 쪽에 있으면서 호남에 대해 진실 규명에 나서줬소. 고맙소.
“칭찬을 받고 함께 아침을 먹는데 상차림이 굉장히 푸짐해요. YS 경우는 상도동 댁에서 미역국이나 시래깃국 등 단출하게 잡숫는데 DJ 아침상은 생선도 나오고 그득하더라고요. 또 밥도 한 그릇 다 드세요.”
- 또 YS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내가 학위 논문(박사과정)으로 YS DJ 두 지도자에 대한 리더십을 비교 연구한 적이 있어요. 지도교수가 재밌겠다고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두 분 모두 생존해 계실 때라 나쁜 얘기는 못 쓸 것 같고 DJ는 치밀하게 준비한다는 데 주목했지요. 그리고 세심하고요. YS는 우리가 겪어봤잖아요. 대의명분이 주어지면 앞길 가리지 않고 돌진해요. 하나님이 점지해준 것처럼 마치 운명이 찍어준 것처럼 도저히 안 되는 싸움인데 도전을 합니다. 주변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웃음).”
- YS 성품은 어떻습니까. 예컨대 김정남 전 수석 경우는 약간 어리숙하게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나쁜 뜻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거짓말할 줄도 모르고 누굴 속일 줄도 몰라서 내가(김정남) 도와주지 않으면 낙오될 것 같은 느낌이다’는 것이죠.
“깊게 생각해서 그러는지 모르지만 YS를 처음 볼 땐 유명한 정치인이니 잘 배워보자는 생각이 컸지요. 겪어보니 상대방이 부끄러울 정도로 순박한 성품이에요. 결단을 내리면 남들은 흉내조차 못 낼 정도로 엄청 대찬 면이 있잖아요. 평소에는 세심하고 순진하다고나 할까…. 약속을 꼭 지키고 대의명분을 좇는 데 주저함이 없지요. 대도무문(大道無門, YS 지론) 같은 분이었어요. 소인과는 거리가 멀지요.”
85년 12대 선거 혁명을 기점으로 신군부의 위세는 서서히 꺾여 들어가고 있었다. YS는 1000만 개헌서명 운동을 천명했다.
야권으로부터 발화된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라는 대중적 구호는 국민을 결집해나가는 데 동력이 됐다.
1987년 6월 항쟁 승리를 거쳐 직선제를 쟁취할 수 있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던 YS 어록처럼 민주주의 광명이 찾아왔다.
하지만 13대 대선에서 DJ가 야권 단일화를 깨면서 각자 출마해 노태우 1위, YS 2위, DJ 3위 등의 순으로 갈리게 된다.
YS는 야권 통합을 목표로 1988년 통일민주당 총재직에서 사퇴를 감행했다. DJ가 요구한 소선거구제도 수용했다. 그러나 동교동계가 파투를 냄으로써 또다시 야권 분열이 되고 만다.
3당통합 일화
1990년 1월 민정당, 공화당과 3당합당을 선언하는 YS.
- 3당합당 당시 참여를 하지 않으려 했잖습니까. 비서진 출신 중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 인사는 시장님이 처음인 것으로 아는데 이유가 궁금합니다.
“비서진은 나만요? 최기선 의원 얘기는 안 나옵디까.”
- 글쎄요.
“박관용 김광일 나 강삼재 서청원 등 이렇게 6명이서 탈당 성명서를 썼어요. 딴 사람 변은 모르겠고 박관용 의원 워딩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해요.”
박관용 : 총재님은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잡아먹히고 말 겁니다.
“생존할 가능성이 35%도 안 되는데 뻔히 알면서 왜 따라가느냐는 것이죠.”
- 어쨌거나 탈당할 생각이었던 거네요.
“탈당 멤버 중 하나였죠. 그때는 입만 열면 ‘탈당’을 외치던 때였어요. (구체적 날짜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처음엔 마포에서 기자회견하기 위해 팔리스 호텔에 모이기로 했어요. 같이 잔 뒤 다음날 아침 기자회견을 하자는 거였지요. 하지만 내가 반대했어요.”
- 왜 반대했습니까.
“소신이 분명한데 흔들릴 게 있나? 이런 생각이었지요. 그리고 나는 바로 탈당부터 할 수 없었어요. 상도동에 가서 YS께 먼저 이야기해야 했어요. 정 안 되면 전화라도 해서 탈당합니다, 말하는 게 인간적 도리라고 생각한 거죠.”
마침 상도동에서 연락이 왔다.
비서진 : YS가 아침에 들어오라 카디요.
문정수 : 안 그래도 가려고 하고 있어.
YS는 탈당파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 벌써 ‘말이 샜네?’ 싶었다. 가게 되면 더 힘들어질까봐 다음날 아침 전화를 걸었다.
문정수 : 저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린 갑니다.
“근데 YS 워딩이 재밌어요.”
YS : 네가 가면 되나? 네 하나라도 안 가야지. 수를 줄여야지.
문정수 : 내 하나 가고 안 가고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YS : 어째 그럴 수가 있나. 수를 줄여야지.
만류를 뿌리치고 마포 기자회견 장소로 향했다. 회견장을 갔더니 병풍이 쳐져 있었다.
“홍인길 김봉조 의원 등이 와있는 겁니다. YS는 병풍 뒤에 있고 말입니다. 맨투맨으로 탈당 회견을 못하게 설득하고…. 결국 기자회견을 못한 겁니다. 그날 저녁 상도동에서는 비탈당파들이 마포가든에 모였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쪽을 일망타진했다고 생각하며 한잔 했겠죠(웃음).”
- 지나고 보니 3당합당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최선책은 아니었지만 군정을 종식하기 위한 차선책은 됐다고 봅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았잖아요. 문민정부를 출범하고 전광석화와 같이 하나회를 척결했어요. 전두환 노태우를 감옥에 보냈어요. 민주주의 절차를 완전히 뿌리내렸기 때문에 DJ도 평화적으로 다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던 겁니다.
안 그랬으면 미얀마처럼 군부 쿠데타가 다시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지금 한류 열풍이 엄청난데 우리가 선진국이 될 수 있던 것도 문화 강국이 될 수 있던 것도 모두 YS가 군정을 종식했기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그 모든 게 민주주의 시대가 바탕이 됐기 때문이고 말입니다.”
- 차선책이 아닌 최선책이었다는 시각은요.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정치자금법, 지방자치, 정보통신망 구축 등 지금 우리는 YS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잖아요. 제2의 건국인 것이죠.
“그래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높은 평가를 받을 겁니다. 명예혁명이죠. 무혈 명예혁명.”
YS를 닮은 정치인
- 1995년 첫 지방선거에서 노무현 후보와 일합을 겨뤄 승리하잖습니까. 당시에는 국회의원이 시장이나 도지사 출마를 꺼렸던 것으로 압니다. 김봉조 전 의원 경우도 (경남지사 출마 권유에) 반발해 안 나갔는데 본인 경우 선뜻 출마 결심을 하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YS를 정치 9단이라고 하잖아요.”
일화가 전해졌다.
3선 현역 시절, 하루는 YS가 호출했다. 청와대를 향했다. 별 말이 없는 YS. 문정수는 속으로 ‘뭣 때문에 불렀지?’ 머리를 굴렸다.
YS : 부산은 별일 없나?
문정수 : 부산요? 별일 없지요.
왜 새삼스레 부산을 언급하나, 더욱 궁금한 마음이 샘솟았다.
YS : 부산시장이 참 중요하데이.
문정수 : 부산시장이 중요한 이유를 누가 모릅니꺼-
청와대 밖을 나오면서도 찜찜했다. ‘뭔 지시를 하려다 안 한 건가? (부산시당 위원장이니) 잘하란 말인가. (부산시장 후보를) 잘 천거하라는 뜻인가.’ 아리송했다.
문정수는 통일민주당 시절부터 3당합당 후까지 10여 년 간 부산시당을 책임지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박관용(당시 비서실장)이 부산시장에 나갈 것이지를 물어왔다.
- 거절은 안 했습니까.
“내 경우는 하고 싶은 맘도 없지 않아 있었거든요.”
- 아하. 그랬습니까.
“지방선거 전에는 관선시장들이 태만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고 있었어요.”
그 점을 개선하고 싶은 의지가 있던 모양이었다.
“좋은 명분과 좋은 정책으로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예산을 따낼 수 있고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었지요.”
이렇게 해서 나간 첫 부장시장 선거였다. 처음엔 청문회 스타인 노무현 후보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엎치락뒤치락 하던 중 의외의 현장에서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노무현 주도로 끝날 것으로 예상됐던 방송 토론회에서 갈수록 문정수의 선전이 돋보였던 것. 선거는 문정수의 승리로 돌아갔다. 끝나고도 노무현 후보를 찾아가 위로하는 등 관계에 있어 사려 깊음이 녹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민선초대 부산시장이 되고 난 후 부산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세계 영화제로 각광받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도 문정수 시장이 창궐했다.
다들 안 된다고 했지만 베니스, 칸 영화제처럼 바닷가 도시에서의 국제영화제 유치는 대성공을 거뒀다.
관광지로 유명해진 광안대교를 건설했으며 비행장을 짓고 정부단지를 조성했다. 거가대교를 만들고 컨테이너 항만을 옮긴 부지를 시민에 돌려주자는 계획도 문정수 부산시정 때 시작된 것이었다. 내후년 완공될 계획이다.
이명박 서울시장 때 추진한 교통카드도 문정수 시장 때 부산에서 먼저 도입된 정책이었다. 삼성자동차도 그때 유치됐다.
- 성과가 대단합니다.
“그 모든 게 문민정부가 나를 통해 해낸 거예요. YS께 더더욱 감사하죠.”
- 부산하면 YS인데 정작 김영삼 기념관 하나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더라고요. 야당에서 반대하고 있잖습니까.
“일부에서 그럴지 몰라도 공식 반대는 아닐 겁니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김영삼 대통령 기념관’으로 조성되도록 방향을 잘 잡아나가리라 봐요.”
오는 11월 22일 YS 서거 9주기다. ‘특종’을 하나 주겠다며 YS 사후 재산 장부를 정리하는 일에 참여했던 때를 상기해나갔다.
“YS가 전 재산을 기부했잖습니까. 오십몇 억 원이었는데 거제 땅 40필지 중 20필지는 할아버지가 이룬 재산이고, 나머지 절반은 아버지가 이룬 재산인 겁니다. YS가 이룬 재산은 상도동 집 한 채밖에 없었어요. 시가 12억 원 정도 됐는데 그 역시 손 여사가 작고하면 사회에 환원한다고 한 겁니다. 생전 땅 한 평, 아파트 한 채도 본인 손으로 만든 분이 아닌 거예요.
한 번은 이런 일화도 있었다.
“YS 아버지가 일군 벽돌집이 마산에 있었는데 이십 년 넘게 살던 집이었어요. 마산 전경이 내다보이는 새 아파트 한 채를 더 구입하게 됐는데 이를 알게 된 YS가 큰일 났다며 기겁을 하는 것입니다. 집이 한 채만 있으면 되지 두 채를 갖고 있으면 어떡하느냐며 얼른 팔아야 한다고 난리인 겁니다. 요즘같이 영끌하면서 아파트 사러 혈안인 세상에서 보면 이 얼마나 놀랠 일입니까. 순진하달까 뭐라 캅니까. 돈도 안 되는 집이라 천천히 팔아도 되는 것을 집 두 채 가지면 큰일 날 것처럼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청렴함이 금융실명 제를 만들 수 있던 바탕이 될 수 있었겠지요.”
문정수도 아무 연고 없던 부산 북구에 정착한 뒤로 40년 넘게 살던 아파트에서 계속 머무르고 있다. 국회의원하면서 골프 하나 안 쳤다.
“모두 YS한테서 배운 거예요. 내 비록 9룡, 10룡도 못되고 정치적으로 마감을 했지만 YS로부터 그런 좋은 점을 배울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 말을 강조하는 모습이 그가 기억해온 옛날신문의 한 표현처럼 ‘찌들지 않아’ 보였다. 장장 3시간 넘는 인터뷰 속에서는 이회창 이인제 9룡 관련해 신한국당 대선에 얽힌 생생한 증언 등이 쏟아졌다.
미처 담지 못했다. 언제고 새로 풀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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