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사위원장 차지하면 ‘법안 묶어두기’ 가능
“협치 위해선 법사위 권한 줄여야” 지적도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시작부터 파행이다. 제22대 국회가 개원 직후부터 ‘강대강(强對强)’ 대결로 치닫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과반을 훌쩍 넘는 의석수를 무기로 국회를 단독 개원했다. 6월 10일에는 본회의를 열어 제22대 국회 전반기 운영위원장에 박찬대 의원, 법제사법위원장에 정청래 의원 등을 선출하는 내용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선출 안건을 통과시켰다. 특정 정당이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 운영위원장을 독식한 건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국민의힘은 여야 합의 없는 원구성에 항의하며 본회의에 불참했다. 11개 상임위원장 선출을 위해 우원식 국회의장이 임의로 배정한 상임위원들도 사임계를 제출했다. 이뿐만 아니라 국민의힘은 원구성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면서 상임위를 포함한 국회 의사일정을 전면 거부했다. 역대 어느 국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최악의 출발이다.
극한 대치 원인은 법사위원장
이 같은 극한 갈등의 배경에는 운영위원회와 법사위원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가 있다. 여당은 대통령실을 피감기관으로 둔 운영위를 확보해야 김건희 여사에 대한 야당의 정치 공세를 차단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운영위 사수에 사활을 걸어 왔다. 반면 야당은 김 여사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대통령실 비선 의혹 등을 규명하기 위해 운영위를 반드시 가져가겠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여당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방송 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을 ‘언론 장악법’이라며 과방위 단계에서부터 저지하겠다고 강조해왔다. 이에 맞서 야당은 방송 3법 재추진을 위해 과방위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리는 법사위였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양당은 제22대 국회가 개원하기 전부터 법사위원장 자리를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홍익표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는 4월 17일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법사위원장은 다수의석을 가진 민주당이 맡는 게 맞고 그게 이번 총선의 민심”이라고 주장했다.
박찬대 신임 원내대표도 5월 6일 같은 프로그램에서 “민주당은 제21대 국회에서 180석의 거대 의석수를 가진 제1당이었음에도 운영위와 법사위를 양보하다 보니 민생 입법이나 특검과 같은 부분에서 실기한 사례가 많았다”며 “법사위와 운영위를 확실하게 가져가겠다”고 했다.
이에 김기현 전 국민의힘 대표는 4월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법사위를 다시 민주당이 가져가겠다고 하는 것은 여당을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오만함의 발상이며, 입법 폭주를 위한 모든 걸림돌을 제거하겠다는 무소불위의 독재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권성동 의원 역시 5월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행정부와 입법부 간 견제도 중요하지만, 국회 내 여야 균형도 중요하다”면서 “법사위원장을 국회의장과 다른 소속으로 임명해 온 관례는 이러한 취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는 민주당이 본회의를 단독 개최하기 직전인 6월 10일 오후 우원식 국회의장 주재로 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와 두 차례 회동한 뒤 기자들과 만나 “막판에 저희가 법사위를 여당에게 준다면 운영위와 과방위를 포기하겠다고 했다”며 “민주당이 단칼에 거부했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독주’라는 오명을 감수하고서라도, 국민의힘은 운영위와 과방위를 모두 포기하고서라도 가져가고 싶었던 상임위가 법사위였다는 의미다.
법사위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이처럼 여야가 유독 법사위원장 자리에 목을 매는 데는 이유가 있다. 법사위는 상임위의 ‘상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법 제37조에 따르면 법사위의 소관 사항은 △법무부 소관에 속하는 사항 △법제처 소관에 속하는 사항 △감사원 소관에 속하는 사항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소관에 속하는 사항 △헌법재판소 사무에 관한 사항 △법원·군사법원의 사법행정에 관한 사항 △탄핵소추에 관한 사항 △법률안·국회규칙안의 체계·형식과 자구의 심사에 관한 사항 등이다.
이 중 핵심적인 권한은 법률안·국회규칙안의 체계·형식과 자구의 심사에 관한 사항이다. 체계 심사란 법안의 위헌 소지가 없는지, 다른 법률과의 충돌은 없는지를 살피는 절차다. 자구 심사는 오탈자 여부를 검사하고 법률 용어를 다듬는 일이다. 국회법 제86조 제1항은 ‘위원회에서 법률안의 심사를 마치거나 입안을 했을 때는 법사위에 회부해 체계와 자구에 대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한다. 다른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이라도 본회의에 부의되기 위해서는 법사위의 ‘최종 점검’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다 보니 법사위원장이 갖는 ‘파워’는 상상 이상일 수밖에 없다. 법안 상정 권한, 의사 진행 권한 등을 가진 법사위원장이 회의를 열지 않거나 법안 상정을 거부하면 아예 법안 심사를 진행할 수 없는 까닭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행사로 논란이 된 양곡관리법·방송법·노란봉투법·간호법 등이 법사위를 통과하지 못한 것도 여당 소속 법사위원장이 심사를 미뤘던 탓이 컸다. 타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이라도 법사위원장이 마음만 먹으면 본회의 부의를 막을 수 있는 게 현재 구조다.
물론 법사위를 우회해 곧바로 본회의로 가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지난 2012년 개정된 국회법,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에는 법안이 회부된 날부터 60일 이내에 법사위가 이유 없이 심사를 마치지 않으면 소관 상임위 재적 위원 중 5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해당 법안을 본회의에 올릴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법사위를 통과하지 않고 본회의에 회부된 양곡관리법·방송법·노란봉투법·간호법 등이 바로 이 과정을 거쳤다.
국회법 제85조의2가 규정하는 ‘패스트트랙’ 제도도 있다. 상임위 재적 의원 5분의 3 찬성을 통해 패스트트랙 안건으로 지정하면, 최대 330일 후 본회의에 법안을 자동 상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법사위원장 자리를 가져가면 굳이 직회부나 패스트트랙 등을 동원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법안이 하루 만에 상임위·법사위·본회의를 모두 거치는 것도 가능하다.
직회부나 패스트트랙 발동 시 동반되는 정치적 부담도 덜 수 있다. 민주당 장경태 최고위원이 “법사위는 관문 상임위로서 매우 중요하다”며 “우리 입장에서 법사위를 포기하라는 건 국회의 과반 의석을 포기하라는 것과 거의 같다”고 주장한 배경이다.
“법사위 권한 줄여야 협치 가능” 지적도
이런 막강한 권한으로 인해 김대중 정부 때부터는 법사위원장 자리를 야당이 갖는 관례가 정착됐다. 법률 제·개정 과정에서 강력한 실권을 쥐고 있는 법사위마저 여당이 가져가면 야당이 정부·여당을 견제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 관례는 제20대 국회 전반기에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이 법사위원장 자리를 가져가며 무너졌다.
제21대 국회 전반기에는 민주당이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독식하며 ‘국회의장·법사위원장 분리’ 관례도 깨졌다. 노무현 정부 이후 국회에서는 국회의장을 원내 제1당이, 법사위원장을 제2당이 맡는 게 관행이었다. 그러나 제21대 총선에서 180석을 획득한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의 ‘개혁 드라이브’를 뒷받침한다는 명분으로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모두 가져갔다. 이후 거대양당은 원구성 때마다 ‘힘의 논리’를 앞세워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다.
이에 정치권에서는 법사위의 과도한 권한을 축소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이선우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각 상임위에서 주요한 내용이 대부분 결정돼서 올라가는데 법사위가 체계·자구 심사를 근거로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음으로써 사실상의 상원 역할을 해 왔다”며 “법사위 권한을 줄여야 법사위를 놓고 벌이는 여야 간 갈등이 완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도 “국회에도 입법 전문가들이 있는 만큼 상임위에서 합의가 된 것은 전문가를 통하거나 상임위 차원에서 체계·자구 심사를 하면 된다”고 충고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역시 “위헌 여부는 소관 상임위에서 검토하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국회 본회의에서 하면 된다. 체계·자구 심사도 상임위와 국회 법제실에 있는 사무직원이 하면 된다”면서 “법사위를 사실상의 상원으로 만들 이유가 없다”고 꼬집었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 또한 “각 상임위에도 전문위원들이 있어 법사위가 아닌 상임위에서 체계·자구 심사까지 담당하게 할 수 있다”며 “아니면 국회사무처에 별개 조직을 만들어 체계·자구 심사를 맡기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실제로 김진표 전 국회의장은 법사위를 법제위와 사법위로 분리해 체계·자구 심사를 법제위가 전담하도록 하자는 국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