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아카이브팀 |글 정세운/ 스텝 윤진석·김자영, 내래이션 우한나·녹음 신성일PD]
40여 년이 넘은 과거의 일들을 추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증언자가 고령에 접어들어 가물거리는 기억을 복원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하지만 이 흩어진 기억들을 하나로 묶어 그날의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역사적 전환점이 돼왔던 그날을 추적하기 위해 <시사오늘>은 10여 년간 사실에 근거한 증언자의 증언을 기록해왔다. 네 번째로 무성한 이야기들로 미스터리를 남겼던 노태우 탈당과 SK, 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을 둘러싼 뒷얘기 속으로 들어가 봤다.
노태우 탈당
1992년 9월 18일 오전 11시 청와대.
대통령이던 노태우와 민자당 대통령 후보이던 YS는 회동을 시작했다. 노태우는 이날 민자당을 탈당하겠다고 말했다. YS는 말도 안 되는 결정이라며 반대 입장을 뚜렷이 했다.
YS는 분명했다. 노태우가 떠날 경우 당은 대혼란에 빠질 게 뻔했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한 이종찬이 탈당해 당이 동요하고 있는데 노태우까지 탈당해 버리면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알 수 없었다.
이 같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태우는 밖에 대기하고 있던 정무수석이던 김중권을 불러 탈당 의사를 언론에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혼동의 연속
노태우 탈당은 정치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집권여당이던 민자당은 혼란에 빠졌으며, 김대중의 민주당과 정주영의 국민당은 환호를 보냈다.
YS 정치특보를 맡고, 문민정부에서 공보처장관을 지낸 오인환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YS는 노태우에게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끼는 눈치였어요. 여당은 대들보가 빠진 느낌이었습니다. 불안감이 몰려왔어요.”
-오인환, 2023년 9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노태우 탈당은 민정계 연쇄 탈당으로 이어졌다. 박태준이 탈당하며 물꼬를 텄고 10월 13일 당 고문인 채문식 윤길중 등 11명, 14일에는 박철언 김용환을 비롯한 5명이 집단 탈당했다.
노태우 결심, 왜?
그렇다면 노태우는 왜 탈당을 결심하게 됐을까?
표면적 이유는 충남 연기군 관권선거 논란에 따른 공정선거관리였다.
1992년 8월 31일. 14대 총선 당시 연기군수였던 한준수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상연 내무장관과 이종국 충남지사 등이 노태우 측근인 민자당 임재길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자금을 살포하고 공무원을 동원했다고 폭로했다. 야권의 공세에 검찰 수사를 통해 임재길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수세에 몰린 여권은 쇄신책을 내놓아야 했다. 공명선거를 위한 중립내각 구성이 그 방책이었다. 이는 노태우와 YS의 교감 아래 이뤄졌다.
“노태우 대통령이 불러 안으로 들어갔더니 대통령께서는 YS와 중립내각 구성에 관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관권선거의 폐단을 막고자 중립내각을 구성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 김중권, 2024년 4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노태우는 민자당 당적을 정리하겠다며 탈당을 선언해버렸다. 이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왜 갑자기 이런 발표를 한 것일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노태우 결심은 대선후보이던 YS와의 불화가 직접적 원인이 됐다.
노태우-YS 간 불화, 왜?
발단은 SK(선경) 이동통신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불거져 나왔다.
1992년 8월 체신부가 노태우 사돈 기업인 SK를 사업자로 선정할 움직임을 보이자 YS는 선거에 악재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며 대선 후로 결정을 연기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청와대와 체신부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8월 20일 오전 체신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SK가 확정됐음을 발표했다.
선정 후 YS는 노태우에 대한 공세를 높였다.
“정부가 깨끗하고 대통령이 정직해야 국민이 따를 것”이라고 비난한데 이어, YS 정치특보이던 오인환은 기자들을 불러 “YS는 SK 사업자 선정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8월 24일 YS는 최종현 SK(선경)회장을 하얏트호텔에서 만나 담판을 졌다.
YS의 설득에 최종현은 자진 반납의 뜻을 밝혔다.
“내가 직접 최 회장을 하얏트호텔로 불러내서 ‘국민들이 반대하는데 선정을 반납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어요. 최 회장도 ‘공정한 심사를 받을 수 있다면 반납을 하겠다’는 뜻을 전했지요.”
-김영삼, 2009년 10월 <시사오늘> 대담에서
그리고 SK(선경)는 8월 27일 ‘사업권 포기’를 선언했다. 또, 특혜 시비를 우려해 노태우 정부에서는 통신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 일로 노태우는 정부 사업을 뒤집어엎은 YS에 대한 악감정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9월 18일 탈당까지 해버린 것이었다.
탈당 미스터리
두 사람 간 불화의 깊이는 어땠을까? 노태우와 YS의 행보로 추측해 볼 수 있다.
YS는 노태우 면전에서 “대통령선거 끝날 때까지 당신을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YS는 노태우 탈당을 두고 당선을 방해하려는 의사표시로 봤다.
“선거를 앞두고 최대 계파를 대변하는 노태우가 탈당하는 것은 나의 당선을 방해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언론에서는 이동통신 문제와 연기군 선거부정 사건에서 빚어진 나와의 마찰이 탈당의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지만 이는 해석에 불과했다. 노태우는 나의 당선을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자신이 탈당할 경우 당이 분열돼 나의 당선 가능성이 희박해질 것이라는 계산까지 하고 있었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중
노태우는 노태우대로 YS를 멀리하며 김대중 정주영과의 스킨십을 늘렸다. 김대중은 청와대 오찬에서 한껏 노태우를 치켜세우며 “민주주의 청사에 길이 빛날 하나의 역사적인 결단을 한 것”이라고 화답했다.
또한 탈당 직후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김대중에게 20억 원을 제공했다.
“하루는 노태우 대통령이 불러서 DJ한테 선거 자금을 지원해 주고 싶다는 거예요. 야당이니 힘들지 않겠느냐면서요.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치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경호실에서 와이셔츠용 선물상자를 들고 오더라고요. 그길로 목동 처제 집에 있는 DJ를 만나러 가서 선물 박스를 내밀었어요. DJ는 비서에게 상자를 풀어보라고 했어요. 빳빳한 수표가 가득히 보였어요. 100만 원짜리 수표 20다발이 들어있더라고요. 이후 DJ 비서실장인 권노갑 씨를 사우나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때 ‘20억 원 준 것 고맙소’라고 하더라고요.”
- 김중권, 2024년 4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노태우의 SK 지원설, 진실은?
그렇다면 노태우가 SK 사업자 선정을 도왔다는 얘기는 사실일까?
사업자 선정을 위해 측면에서 지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SK가 직접적 도움을 받았는지는 의문이다.
SK 사업자 선정 과정을 들여다보자. 1990년부터 미국 IT업체와 합작하며 정보통신산업 진출을 준비하던 SK는 제2이동통신 사업권 입찰 경쟁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사업자에 선정된 뒤 노태우 사돈이라는 특혜 시비가 제기되자 YS와의 담판을 계기로 일주일 만에 자진 반납을 선언했다.
가정 하에, YS가 대선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사업자 선정 문제를 선거 이후로 단순 연기한 거라면 ‘노태우가 도왔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추론 또한 불가능에 가깝다.
노태우와 YS, 두 사람 간의 갈등 불화를 볼 때도 그렇고, 이는 YS 정치스타일과도 멀다. YS 성격상 최종현을 만나 ‘선거에서 불리하니 내가 대통령 된 후 사업자를 선정해 주겠다’는 밀약을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1984년 민한당 전남 여수 지구당위원장이었던 심의석은 YS가 이끄는 민주산악회 합류를 권유받았다. 호남 인사가 YS를 선택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YS의 23일 단식투쟁을 계기로 함께하기로 마음먹고 YS와 만난 심의석은 신당(신민당) 공천을 요구했다.
“YS와 만나 ‘지역구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지만, YS가 ‘그건 약속할 수 없어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왜 못해요’라고 했더니 ‘정당하다 보면 주고 싶어도 안 될 수 있는 겁니다’고 하는 겁니다. YS는 그런 밀약식 거래를 제일 싫어하는 성격이었어요.”
-심의석, 2011년 10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노태우 탈당 이후 노태우 YS와의 두 사람 간 행보로 미뤄볼 때, YS가 ‘노태우를 위해 SK 사업자 선정’에 인센티브를 줬을 가능성은 불가능에 가깝다.
실제로 SK가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 1994년 한국이동통신(제1이동통신사업자)을 인수하는 것으로 선회해 정보통신사업 1등 기업에 박차를 가했다.
결과적으로 SK는 노태우 정부 때나 김영삼 정부 모두 제2이동통신사업권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SK에 사업자 선정을 도와준 것으로 안다. 노태우 탈당만큼이나 미스터리다.
**영상은 유튜브 채널 <시사오늘>에서도 시청할 수 있습니다.
책임 총괄 : 정세운
글 : 정세운
스텝 : 윤진석, 김자영
음성·녹음 : 신성일 PD
내래이션 : 우한나
제작 : 시사오늘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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