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붕괴의 장전, 이기택의 마지막 선택 ‘왜’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아카이브팀|정세운·윤진석/내래이션 우한나·녹음 신성일PD]
40여 년이 넘은 과거의 일들을 추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증언자가 고령에 접어들어 가물거리는 기억을 복원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하지만 이 흩어진 기억들을 하나로 묶어 그날의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시사오늘>은 지난 10여 년간 사실에 근거한 정치사를 기록하고자, 증언자의 증언을 추적했다. 두 번째로 유신 붕괴의 트리거가 됐던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 속으로 들어가 봤다.
1979년 5월 30일 마포 신축당사에서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 당권에 도전했던 이기택의 마지막 ‘선택’은 유신을 붕괴시키는 장전 역할을 했다. 한편의 드라마 같았던 그날로 들어가 보자.
이날의 전당대회는 이철승 체제를 지속시키려는 유신정권의 공작정치와 김영삼의 선명성 대결이었다. 유신에 빌붙어 정당의 생명을 간식히 존속하는 관제야당으로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유신을 무너뜨리는 데 진짜 야당의 길을 갈 것이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절체절명의 대척점 앞에서 당시 민심은 어느 편에 서 있었던가. 명운을 걸고 야당성 회복의 선봉에 섰던 김영삼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이날 전당대회는 신민당원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거리의 라디오에서는 대회 소식을 알릴 때마다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날씨는 유난히 더웠다. 대회장 안에 들어올 수 없었던 당원들과 시민들은 당사 바깥에서 내리쬐는 햇볕 속에 서 있었다. 그들은 바깥에 스피커를 달아 달라고 소리쳤다. 유신의 얼음장 밑에서 민주주의의 타는 목마름이 솟구쳐 올랐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서
YS 회고대로 그날의 분위기는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들썩거렸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현장의 분위기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바 있다.
“1979년 5월 30일 그날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신민당 전당대회가 마포 신축당사에서 열렸다. 전부들 이철승 당수가 선출될 거라고 했지만 결과는 YS가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현장을 지나다 보게 됐지만, 막판에 이기택 후보가 YS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바로 거기서 박정희 정권의 몰락이 시작된 것이다.”
-김형준, 2021년 7월 7인의 대동령들 ‘김영삼편’ 특강 중-
이를 증명하듯 1차투표 결과는 김영삼의 대약진이었다.
재석 대의원 7백 51명 중 이철승 2백92표, 김영삼 2백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
유신 정권의 방해에도 김영삼은 단숨에 높은 득표로 1위이던 이철승을 위협하고 있었다.
2차 결승투표를 앞두고 이철승과 김영삼 측은 캐스팅보트를 쥔 이기택을 잡는데 총력을 쏟았다. 이기택의 선택이 승부를 가를 열쇠였다. 이철승이 이기택과 먼저 독대를 하면서 협조를 요청했다. 그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김영삼은 이기택을 3층 창문가로 데리고 가 지지를 요청했다. 당사 밖에서는 시민 학생 등 수천 명이 ‘김영삼’ ‘이기택’을 외치고 있었다.
“신도환에 대한 설득은 이미 포기한 상태여서 이기택에게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회의장 밖을 나온 이기택이 나를 보자 웃으며 손을 꼭 잡더라고요.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석재, 2008년 4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극적인 순간이었다. 김영삼과 이기택은 손을 잡고 대회장으로 들어간 뒤 연단에 올라 세를 과시했다. 신도환이 나서서 이철승 지지를 선언했으나, 대세를 바꾸기는 힘들었다.
오후 7시 결선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김영삼 3백 78표, 이철승 3백 67표. 대역전 드라마였다.
도전에서 당권 경쟁까지
김영삼이 역전의 드라마를 써내기까지 어떤 상황을 거쳐 왔을까. 역사의 시계바늘을 돌려 처음 어떻게 당권을 도전했고 9부 능선을 넘어 고지를 점령하게 됐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격적인 당권경쟁은 4월 지구당 개편대회를 통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이철승의 ‘중도통합론’에 대해 ‘사쿠라’. ‘유신야합’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출마선언자도 늘어갔다. 신도환이 4월 12일 당수출마를 선언한 데 이어, 김재광도 뛰어들었다. 조윤형, 이기택, 박영록도 도전의사를 밝혔다.
후보 난립상황에서 김영삼의 당권도전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측근들조차 조직과 부족한 자금으로 이철승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당권도전 여부를 놓고 상도동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일 정도였다.
더욱이 유신정권의 정치공작은 파상적이었다. 권력의 중심축인 차지철과 김재규는 이철승 당권사수를 위한 공작을 전개했다.
신도환은 ‘중도 포기하고 이철승을 지지하라’는 회유를 받았다. 국세청은 이기택 집안기업이었던 태광의 회계장부를 모조리 압수해갔다. 김재규는 노골적으로 태광 세무조사를 빌미로 이철승 지지를 요구했다.
반전의 시작은 재야에 있던 윤보선과 김대중이 김영삼을 적극 지지하면서다. 김대중은 이철승에 맞서는 후보단일화 작업에 착수해 대회 하루 전 박영록 조윤형 김재광 등 동교동 인사들을 사퇴시키고 김영삼을 지지하도록 했다.
우후죽순처럼 난립하던 당권경쟁은 이철승 김영삼 신도환 이기택 김옥선 등 5파전으로 압축됐다. 대회 전날 고흥문 이충환 유치송 세 최고위원은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이철승 지지를 선언했다. 정치공작을 받고 있던 신도환도 이철승 지지로 돌아설 것이 분명했다.
당헌을 집단지도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로 바꾼 5월 30일 전당대회는 이런 과정을 거쳐 이철승 대 김영삼의 싸움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기택의 선택이 역사의 분수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기택의 YS지지, 왜?
그렇다면 이기택은 왜 김영삼을 지지했을까?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왜냐하면 이기택은 김영삼과는 노선이 달랐던 신도환계였다.
반공청년단에 몸담았던 신도환은 박정희 정권과 결탁해 어용 야당 정치인으로 의심받고 있었다. 반면에 이기택은 고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4‧19 민주화 세대의 주역으로 불린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결이 다른 신도환계가 됐을까? 그것은 이기택 특유의 온정주의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정설이다. 신도환은 이기택이 궁핍할 때 쌀을 대신 팔아주고 정치적으로 끌어줬다.
또, 이기택은 김영삼을 지지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철승과 가까웠다.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잡은 이철승은 사무총장에 이기택을 지명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봐줬다. 이기택은 2013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철승 대표는 리더십, 능력, 인품, 애국심 등에서 YS나 DJ를 훨씬 앞서는 분이었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이철승이 아닌 김영삼을 선택한 것에 대해 본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무총장이었던 나는 대의원들의 지지성향을 대충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김영삼이나 이철승 모두 과반수를 차지하기는 어려웠어요. 2차투표에서 내가 손들어 주는 사람이 승리하게 됐어요. 나는 일찌감치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건 김영삼을 지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기택, 2013년 <월간조선> 6월호 인터뷰 중
하지만 그의 비서관이었던 박관용 전 국회의장조차도 이기택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2차 경선을 앞두고 내가 이기택 의원을 붙들고 창밖의 저 함성이 안 들립니까? 영원히 살려면 김영삼 후보를 밀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기택 의원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듣고만 있더라고요. 나는 이 의원이 정부의 압력에 굴복했다고 생각했어요.”
-2020년 12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그러나 그것은 박관용의 오해였다. 얼마 안 가 이기택은 단상에 올라 김영삼의 손을 번쩍 들고 뜨겁게 지지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공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기택은 왜 자신의 측근에게조차 김영삼 지지를 알리지 않은 것일까. 2009년 사석에서 만나 이기택은 <시사오늘>에 당시를 이렇게 서술했다.
“당시 나를 지지했던 그룹은 ‘민주사상연구회’라는 외인부대였어요. 원외의원장이 다수였고요. 그들의 성향은 원래 이철승이나 김영삼을 지지했던 분이예요. 내 의사를 먼저 밝히면 이탈 없이 한쪽으로 몰고 갈 수가 없어요. 제가 마지막에 ‘우리표가 갈라지면 안 된다. 우리가 힘을 합쳐 한곳을 밀어야 된다고 설득했죠.”
-이기택, 2009년 증언
하지만 반론도 존재한다. 이철승이 이기택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아 김영삼 지지로 바꿨다는 주장이다.
“이기택은 이철승에게 부총재 자리를 요구하며 고대 선후배의 인연을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철승은 ‘자네가 벌써 무슨 부총재야’하며 거절했죠.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 된거죠.”
고흥문 회고록, <못다 이룬 민주의 꿈> 중에서
고흥문의 증언이 근거가 있어 보인다. 이기택은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면서 부총재 자리를 요구했다. 실제로 김영삼은 총재에 복귀한 뒤 부총재에 이기택을 지명했다.
또 다른 증언도 있다.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전당대회가 열렸던 마포당사 앞에 모여든 시민들의 YS지지를 거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세는 김영삼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이기택 씨가 이철승을 지지한다고 하면 자긴 끝이란 것을 알았던 거예요. 그만큼 전당대회를 휘감던 역사적 도도한 물줄기를 감히 거스를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것이죠.”
- 김봉조, 2023년 12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영상은 유튜브 채널 <시사오늘>에서도 시청할 수 있습니다.
책임 총괄 : 정세운
글·자료 : 정세운·윤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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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 시사오늘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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