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아카이브팀 |글 정세운/ 스텝 윤진석·내래이션 우한나·녹음 신성일PD]
40여 년이 넘은 과거의 일들을 추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증언자가 고령에 접어들어 가물거리는 기억을 복원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하지만 이 흩어진 기억들을 하나로 묶어 그날의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역사적 전환점이 돼왔던 그날을 추적하기 위해 <시사오늘>은 10여 년간 사실에 근거한 증언자의 증언을 기록해왔다. 세 번째로 많은 억측을 불러왔던 김영삼과 박정희 영수회담 속으로 들어가 봤다.
영수회담 배경
1975년 5월 21일. 제1야당 김영삼(YS) 신민당 총재와 박정희 대통령 간의 영수회담이 열린 날이다. 이날 회담은 지금까지도 갖은 추측과 억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진실은 무엇일까.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당시 정치상황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974년 8월 정보부 개입에도 불구하고 최연소 총재로 선출된 YS는 선명야당 구축을 통한 대여투쟁을 선언했다. 그 일환으로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투쟁을 선언했으며, 부정부패 색출규탄운동을 전개하며 대여 투쟁을 강화해 나갔다.
YS의 대여투쟁은 해가 바뀐 1975년에도 이어졌다. 그해 2월. 조윤형 최형우 김상현 등 8대 국회의원 13명은 1972년 유신 직후 정보부 등에 끌려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이어 YS를 중심으로 ‘고문정치의 종식을 위한 선언’을 발표하며 박정희 정권을 압박해 들어갔다.
하지만 국제상황이 야당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1975년 4월, 크메르 정부군과 월남이 공산군에 함락되면서 한반도에도 긴장감이 고조됐다. 여기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며 야당탄압에 나섰다.
김영삼-박정희 회동
국제상황이 여의치 않자 4월 말 YS는 박정희와의 회담을 제의했다. 한 달 후인 5월 21일 영수회담이 열렸다. 이날 청와대에서 오전 10시 30분부터 배석자 없이 이뤄진 YS-박정희 간 회동.
두 시간 가량 회담 후 집무실을 나온 두 사람. 표정이 무척 밝았다. YS는 현관까지 나온 박정희의 배웅을 받기도 했다.
두 사람 간에는 어떤 얘기들이 오고갔을까? YS는 회담내용을 공개하지 않기로 박정희와 약속했다는 이유를 들어 함구했다.
청와대 김성진 대변인도 “난국 극복을 위해 여야가 힘을 모으기로 의견을 같이했다”는 정도의 내용만을 발표해, 의구심은 증폭됐다.
회동 후 YS의 대여투쟁 강도가 약해지자 두 사람간 밀약설이 돌기 시작했다. 당 내에서는 비주류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고흥문의 그랜드계, 신도환의 신우회, 정일형의 화요회, 이철승계, 김대중계 등이 비주류 연대 움직임을 가시화하며 YS를 압박했다. 결국 YS는 1976년 당권을 이철승에게 넘겨줬다.
상황이 궁지에 몰렸음에도, YS는 박정희 서거 전까지 회담내용을 일체 비밀에 부쳤다.
YS가 박정희 서거 후 밝힌, 회담 내용은 이랬다.
“박정희는 창밖의 새를 가리키며 ‘김 총재, 내 신세가 저 새 같습니다’라고 하고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인간적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박정희에게 ‘민주주의 하자, 대통령 직선제 하자’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박정희는 ‘김 총재, 나 욕심 없습니다. 집사람은 공산당 총 맞아 죽고 이런 절간 같은데서 오래할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박정희는 ‘김 총재, 이 이야기는 절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내가 정권을 내려놓는다고 하면 대통령으로 일하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일단 진심으로 믿어보기로 했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YS-박정희, 밀약은?
그렇다면 두 사람 간의 밀약은 정말 없었을까? 회담 때 YS를 수행했던 정치인은 이택돈 대변인과 박권흠 비서실장이다. 두 사람의 주장이 사뭇 다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택돈은 당시 상황을 육성으로 남겨 놨다.
“내가 ‘어떻게 된 거예요?’라고 물었더니, YS는 ‘요는 말이야 이거야. 여당은 자기(박정희)가 하고 말이야. 야당은 내가 하라 이 얘기야’라고 답했다. 그래서 내가(이택돈) ‘DJ는 어떻게 하고요?’ 그랬더니, ‘갔어’ 이러는 거야. 그러면서 YS에게 박정희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내가(박정희) 누가 있느냐. 다음은 네(YS) 차례다.’”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현대한국구술자료관> 이택돈 육성
요약하자면 이택돈의 증언은 YS와 박정희 간 밀약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박권흠은 2015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YS는 박정희의 인간적 호소에 상당히 감명 받은 것 같았어요.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박정희 얘기를 그대로 믿는 눈치였어요. YS는 ‘민주주의 될거요’만 되풀이했지, 그 외는 일절 다른 말을 하지 않았어요. 다만 박정희로부터 비밀약속을 받은 게 있다고 귀띔해 줬어요. <동아일보> 광고탄압을 중지하고 구속 중인 정치인 석방을 약속했다는 것이었어요.”
-박권흠, 2015년 <시사오늘> 인터뷰 중
증폭되는 의구심, 진실은?
두 사람의 증언, 어느 쪽이 신빙성이 높을까.
이택돈과 박권흠 증언의 진실성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또 YS와 박정희 영수회담 후 벌어진 정치상황이 어땠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박권흠은 신문기자 시절 YS와 인연을 맺은 후 1969년 정식으로 YS 비서실에 합류한 상도동 직계 인사다. 이택돈은 동교동계로 분류된다.
상도동 직계 인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이 대변인에게 했다는 건 어색하다.
상도동 1세대이자 YS 비서출신인 김봉조 전 의원도 2010년 이렇게 회고했다.
“비서인 나한테도 회담내용을 일체 얘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해달라고 하면, YS는 그냥 웃기만 했습니다. 그 후 박정희 정권이 탄압(김옥선 파동과 김덕룡 구속)을 계속해오자, 내가 ‘영수회담 잘 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YS는 ‘잘될 거요’만 되풀이 했어요.”
-김봉조, 2010년 1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자유당 때부터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후 진산계로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한 후 고흥문계와 상도동계에서 활동한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의 말도 의미심장하다.
“이택돈 대변인이 그런 증언을 했다는 건 좀 억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컨대 김대중(DJ)이 최형우나 김덕룡을 만나서 ‘YS는 끝났어’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설사 박정희가 ‘후계자는 당신(YS)이야’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 측근도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고 다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얘기예요.
당시 영수회담 후 YS가 함구하자 이를 둘러싼 시비도 무성했고, 항간에는 금품수수설까지 나돌았어요. 그런 얘기를 이 대변인이 들었다면 당시에 폭로했을 겁니다.”
-故노병구, 2016년 1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영수회담 후의 정치상황도 이 대변인 증언의 신빙성을 의심케 한다.
YS와 박정희 회담이 끝난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이택돈은 대변인 직을 사퇴했다. 이유는 대변인에게도 회담내용을 알려주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택돈의 증언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택돈이 사퇴하자, YS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병채 의원을 대변인으로 임명했다. YS는 자신의 회견문 등이 박정희 정권이나 동교동계에 흘러들어가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는데, 그 통로를 이택돈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대변인 사퇴를 즉각 받아들여 새로운 사람을 임명한 것도 이 같은 이유로 보여 진다.
남겨진 의문, 풀리는 매듭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박정희와 회동 후 YS의 대여투쟁 강도가 현저히 약해졌다.
회담 3개월 후인 1975년 8월 YS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됐고, 해를 바꿔 1976년 1월 검찰에 기소 당했다. 또한 김옥선 파동과 최측근 김덕룡 등이 구속됐다. 박정희 정권은 야권을 압박했지만 YS는 개헌투쟁을 유보한 채 계속해서 온건노선을 걸었다. 왜 그랬을까?
이는 YS 정치스타일과 관련 있다. YS는 일단 약속하면 끝까지 믿는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와도 이를 낙천적으로 바라본다.
한 예로 1992년 대선을 앞두고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국민당을 만들어 대선출마 선언을 하는 순간까지 YS는 ‘정주영 회장이 나를 돕기 위해 국민당을 만들었고, 내가 민자당 대선후보가 됐으니까 조만간 후보직을 사퇴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 증언이 나온다.
2011년 홍인길 전 의원은 YS의 낙천적인 성격을 그대로 증언했다.
“YS와 정주영 회장과의 친분이 깊었습니다. 아마도 정주영 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민정계가 민자당 대선후보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국민당 대선후보로 당신(YS)을 영입할 생각이다’라고 전한 것 같았어요. 국민당이 14대 총선서 돌풍을 이끌어내며 30석을 얻었잖아요. 그리고 바로 YS가 민자당 대선후보가 됐고요. 그러면서 정주영이 국민당 후보로 대선에 나온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됐습니다. 그런데도 YS는 끝까지 ‘정주영 회장은 대선 안 나온다’고 하는 겁니다. YS, 참 순진합니다.”
-홍인길, 2011년 <시사오늘> ‘민산되짚기’ 인터뷰 중
1987년 야권의 후보단일화 때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YS와 DJ 간 후보단일화가 여의치 않자 여의도 정가에는 DJ가 곧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신당을 꾸릴 것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당시 김덕룡이 이 같은 소문을 전하자 YS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DJ와의 비밀회동 내용을 전했다.
김덕룡이 전하는 당시 YS와 DJ 간 회동 내용이다.
“DJ가 ‘나는 이번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없다. 지금 불출마를 선언하면 지지자들이 이탈한다. 양측 지지세력을 끝까지 끌고 가기 위해서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지금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말을 YS는 철석같이 믿었죠.”
-김덕룡, 2013년 <시사오늘> ‘민산되짚기’ 인터뷰 중
YS는 박정희가 ‘민주주의 하겠다’는 말을 곧이 믿은 것 같다. 1978년 8대 대통령 임기를 끝으로 개헌을 해 민주주의를 할 것으로 기대한 듯하다.
“박정희가 울지만 않았으면, 나는 ‘그럼 언제 할 거냐’고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물 때문에 추궁하려던 나의 마음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꼭 민주주의 하겠다’는 박정희의 말은 ‘이번 임기를 마지막으로 물러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중
하지만 YS의 바람은 기대에 불과했다. 실제로 박정희는 1978년 12월, 9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YS는 그제야 ‘민주주의 하겠다’는 약속이 허구였음을 깨달았다. 이후 YS가 대여투쟁의 강도를 높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람 말을 잘 믿는 것은 YS 자신의 정치철학과 맥을 같이 한다.
YS는 <시사오늘>에 정치원로로서 후배정치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이렇게 남겼다.
“정치는 정직해야 한다.”
-김영삼, 2009년 10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회담 성과
그렇다면 1975년 5월 열렸던 YS와 박정희 간 영수회담 성과가 없었을까.
박권흠 증언처럼, <동아일보> 광고 탄압은 중지됐고 조윤형 김상현 김한수 의원 등은 석방됐다.
다만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간 ‘민주주의 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영상은 유튜브 채널 <시사오늘>에서도 시청할 수 있습니다.
책임 총괄 : 정세운
글·자료 : 정세운
스텝 : 윤진석
음성·녹음 : 신성일 PD
내래이션 : 우한나
제작 : 시사오늘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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