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에 ‘원전 한시 저장’ 조항 더해지며 “임시의 영구화 아니냐” 반발도
타당성 있는 선택지 더 필요해…혼자 어렵다면 터놓고 공론장 열 필요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권현정 기자]
21대 국회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고준위 방폐물 관리 및 유치지역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이하 고준위법)에 대한 갑론을박이 격화하는 모습입니다. 여야는 필요성에서는 합의를 봤다지만, 국회 장외에서는 여전히 찬반 목소리가 첨예하게 맞붙습니다.
그런데 찬반 각 장을 들여다보자면 묘합니다. 한쪽은 특별법이 통과되면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의 영구화 우려가 해소될 거라고 주장하는데, 다른 한쪽은 법이 바로 그 영구화를 위한 것이라고 외치고 있거든요.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한쪽이 법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정말이지 법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읽히기 때문입니다.
원전 바깥 영구 방폐장 설치 취지 고준위법…유치 지역 인센티브 등 내용 담겨
고준위법은 현재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에 보관돼 있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즉 핵폐기물을 원전 외부 별도의 중간·영구저장시설(이하 영구 방폐장)에 옮기기 위한 법입니다. 영구 방폐장 유치지역 인센티브 등의 항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핵폐기물은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임시라곤 하지만 건식저장시설로, 기술적으로는 ‘임시’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오래된 저장시설은 벌써 40여 년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도 하고요.
다만, 이미 국책사업으로 원전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인 주민들에게 원전 내 임시 건식저장시설을 추가로 더 짓자고 요구하는 건 그 자체로 지방자치단체 및 주민들과의 반목을 예견한 선택일 겁니다.
정부는 오래 전부터 주민들에게 원전 바깥 방폐장 설치를 꼭 달성하겠다고 약속해 왔습니다.
물론, 약속은 신청 지역이 없어서 또는 주민 반대로, 조사해보니 방폐장을 짓기에 적절한 부지가 아니라서 등 다양한 이유로 벌써 8차례(중·저준위 방폐장에 한해 설치 성공한 9번째 제외) 고꾸라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고준위법 카드를 들고 나온 정부는 ‘이번엔 다르다’며 자신감을 보이는 모습입니다. 고준위법이 보장하는 ‘인센티브’가 생긴다면, 이런 문제는 해소될 거란 겁니다.
‘원전 내 한시 보관’ 내용 못 빼…주민들, ‘독소조항’ 외치면서도 울며 겨자먹기 찬성
다만, 이 같은 정부의 취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법안의 한 부분이 마음에 걸립니다. 법안은 제안이유에서 ‘원전 부지 내 (외부 방폐장 설치 전까지) 한시적으로 저장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적고 있거든요.
발의 법안 대부분이 ‘언제까지’ 외부 방폐장을 설치한단 시한을 정하지 않은 상황인 만큼, 일각에선 사실상 영구저장시설화의 포석을 놓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합니다.
찬성 측조차 해당 항목의 ‘찝찝함’을 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성을 외치는 모습입니다. 경주시원전범시민대책위원회 관계자는 “처음엔 법안 내 ‘독소조항’(원전 부지 내 한시적 저장시설 설치)도 삭제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니까 법안 논의가 미뤄져버리더라.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대승적으로, 궁여지책으로 인정한 거다”라고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정부는 강력하게 반발하는 모습입니다. 법안의 취지는 빠른 방폐장 건설을 위한 것이라고요. 이를 증명하려는 듯 법 통과 이후의 계획도 내놓고 있습니다.
정부는 기본조사 후보부지를 도출하고(1년), 지역주민 의견확인·인접 시군구 협의 등을 포함한 부지공모를 실시하며(2년), 기본·심층조사(9년)를 거쳐 부지 확정(1년)에 나선단 방침입니다.
여러 발의안 중 국민의힘 김영식 의원이 지난 2022년 8월 발의한 법안은 각 단계의 시한까지 정하고 있습니다. 2035년까지 부지 확보, 2043년까지 중간저장시설 확보, 2050년까지 처분시설 확보, 2043년부터 원전 내 고준위 방폐물 방출 순입니다.
취지 증명하려면 계획과 근거 필요…안 된다면 인정하고 ‘제3의 길’ 공론 필요도
정부가 그 취지를 정말 증명하기 위해선 계획과 함께 해당 계획이 실현 가능하다는 근거를 같이 제시해야 한단 목소리가 나옵니다.
계획의 실현 가능성을 살피려면, 어느 지역이 어느 정도의 인센티브가 있다면 방폐장 유치를 고려하겠다고 목소리를 냈다는 등의 사례가 필요한데, 아직까진 ‘인센티브가 있으면 신청 지역이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두드러진단 겁니다.
방폐장 설치를 두고 국내에서 벌어졌던 관련 전사(前事)도 정부의 기대를 뒷받침해 주진 못 하는 모습입니다.
고준위 특별법 전에도 방사성폐기물 관리사업의 촉진 및 시설 주변지역의 지원에 관한 법률(방촉법) 및 방촉법을 흡수한 발전소주변지역법(발주법) 등은 방폐장 유치 지역에 대한 인센티브를 보장하고 있었거든요.
주민수용성 확보에 성공하더라도 해당 땅이 방폐장 설치에 적절할지는 또다른 문제입니다. 정부는 영구저장시설 모델로 방폐물을 땅 깊은 곳에 묻는 심지층 방식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해당 방식에 적절한 부지는 지진에도 버텨줄 크고 튼튼한 암반이 부지 아래 존재해야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박종운 동국대 에너지·전기공학과 교수는 “(주민 수용성 확보가 어렵다고) 산 속에 갖다 넣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절한 부지가 아니라면 방폐장은 못 들어간다. 반대로 제일 좋은 부지가 있더라도 사람이 많이 살면, 예컨대 강남에 있으면 부지 선정은 안 된다. 1억을 인센티브로 줬는데, 집값이 5억 떨어지면 그걸 누가 하려고 하겠나”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원전 지역 주민들은 당장은 이 같은 막연한 기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경주시원전범시민대책위원회 관계자는 “법이라도 만들어져야 명분이 쌓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민수용성 확보 가능성도, 신청한 지자체가 영구시설을 설치하기에 적절한 부지일 가능성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정부가 한계를 인정하고, ‘안 되는’ 싸움에 기대를 걸기보단 ‘되는’ 싸움을 찾아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방폐물 재처리를 방향으로 다시 잡든, 원전 정책을 방폐물 처리 계획과 연결해 다시 고민하든 해야한단 겁니다. 무엇보다 ‘같이’ 터놓고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박 교수의 말을 빌려 필담을 마칩니다.
“장밋빛 법을 내놓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타당성 있는 플랜이 있어야 하고, (심지층 방폐장 국내 유치를 포함해) 옵션이 3개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와 관련해 공론화가 필요한데, 지금 대체 누구와 논의를 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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