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좌익 조직에 끌려가 총살당할 뻔했던 DJ 간신히 도망”
“박정희 정권, 마타도에 활용하며 DJ에 색깔론 프레임 씌어”
“전두환 정권까지 가장 강한 정적이었던 DJ 제거하려 탄압”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들을 보도해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시대가 주는 명암은 도화지와 같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
시대산책 ‖ DJ(김대중) 수행비서 이윤수 편
- 독극물 테러
- 납치 전후DJ
- 내막진산파동
- 색깔론의 유래
- 수행비서 일화
인동초(忍冬草).
겨울을 이겨내는 꽃이다. DJ(김대중, 6선·15대 대통령)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고 해서 인동초라 불렸다. 그라는 역사적 한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생을 색깔론에 시달렸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본지가 만나온 동교동계 인사들은 DJ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중도실용보수주의자라고 설파하곤 했다. 종북 논란과는 엄연히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그도 일생을 색깔론 프레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1997년 정치 역정 40년 만에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한때 ‘영남·기업인·공직자·군부에서 반대해 어렵다’는 4대 불가론이라는 말이 휑휑했다.
그에 대한 색깔론은 언제부터였나.
“있잖소….”
말을 건네는 이윤수(14‧15‧16 3선). 그는 DJ를 오랫동안 수행했다.
“그때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눈빛은 이미 수십 년 전 과거의 어느 곳을 비추고 있었다.
테러범, DJ 연설 중 청산가리 음료수 건네고 도주
조작범 몰려 경찰서 조사 後 간신히 풀려나기도
“탁! 퍽! 타탁!”
“으윽….”
“퍽”
“우당탕탕….”
“아아악-----.”
‘무슨 일이지?’
1969년 서울 종로구 신민당(1969 재창당~1980) 중앙당사에 막 들어선 이윤수는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봤다. 2층이었다. 누군가 폭행을 당하고 있는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아래층까지 길게 새어나왔다.
‘다다닥!’
청년국 소속이던 이윤수는 후배 몇몇을 데리고 뛰어올라갔다.
“누구야??”
“이 자식들이! 무슨 짓이야!”
방안에서는 진산계(유진산계)가 DJ(김대중)를 가둬두고 구타를 하던 중이었다고 이윤수가 설명했다. 그는 그 즉시 달려가 진산계로부터 DJ를 떼어냈다. 일당들을 쫓아내고 DJ를 구출하다시피 빼냈다.
“고맙네. 자네 이름이 뭔가?”
“이윤수입니다.”
그날이 DJ와의 첫 대면이었다.
“어디 사나?”
“경기도 광주가 고향입니다.”
사는 곳은 약수동이었다.
“혹시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나하고 같이 좀 다니면 안 되겠소?”
“같이 다닌다니 무슨 말입니까?”
“비서를 좀 해주시오.”
경호하는 역할을 말했다.
이윤수의 키는 175cm였지만, 강골이었다. 듬직하니 장수기질이 엿보였다.
“그때만 해도 그 양반(DJ)을 잘 모를 땐데…”
부연이 필요하다고 생각됐는지 기자들을 쳐다봤다.
그 순간 시계는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DJ와의 인연부터 듣고 싶어요.“
기자의 요청에 청년 시절 DJ와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됐는지를 들려줄 때였다.
이윤수를 만난 것은 지난해 12월 16일 국회 헌정회관.
“여기도 오랜만에 와요.”
헌정회관 1층 운영위원회의실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터프하고 무심한 듯한 목소리다.
- 그래서 수행비서를 하게 된 건가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냥 왔다 갔다 하면 남한테 깡패 소리나 듣고, 주먹질이나 하는 인상을 주겠다 싶더라고요.”
DJ로부터 비서 제안을 받았던 때로 돌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죠. 뭐.”
다음날부터 동교동으로 출근해 수행을 하게 됐다.
DJ 영원한 비서실장이라 불리는 권노갑(3선)이 비서로 있을 때였다.
모두 젊었다.
- 초창기네요. 완전.
“그러면요. 아주 오래된 얘기요.”
눈빛이 아득해 뵀다.
“수행하면서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지.”
비서 생활 전반이 수난이었다고 말하는 그.
- 예를 들면요?
“교통사고가 났다던가.”
DJ는 1971년 8대 총선에서 교통사고가 나 엉덩이 관절을 다쳤다. 이후 고문에 더해 평생을 지팡이에 의지해 살았다. 6‧25까지 포함하면 5번 생사를 오갔다. 오사일생(五死一生)이다. DJ 비서를 했던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역임한 한화갑(4선)은 재작년 본지를 만나 이렇게 얘기했다.
"교통사고,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납치. 처음엔 호텔에서 죽이려다 못 죽이자 배에 태워 죽이려 했잖아요. 전두환 정권에서는 내란 음모를 씌어 사형 선고까지…. 그렇지만 살아났잖아요. 하나님이 DJ를 살려주신 것은 써먹을 일이 있어 그런다. 대통령이 돼서 좋은 정치해라. 그러니 절대로 안 죽는다…. DJ는 반드시 대통령이 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신념과도 같은 거였죠."
-한화갑 2020년 9월 본지 ‘민추협 되짚기’ 중-
이윤수로부터 새롭게 전해들은 이야기는 청산가리 테러였다.
“한번은 연설 도중 청중 쪽에서 음료수를 건넨 거요.”
71년 대선 때였다. DJ는 신민당 대선후보로 박정희와 겨뤘다.
“독극물이 검출되더라고.”
평소 갖고 다니던 은수저 티스푼을 꺼내 저어본 결과였다.
“그 양반은 절대 내가 체크하지 않으면 안 마셔. 담가 보니까 새까맣게 죽잖아.”
깜짝 놀라 “저놈 잡아라!” 했지만 이미 도망친 뒤였다.
“경찰서에서는 내가 조작했다면서 붙잡아 가더라고.”
강원도 원주에서였다.
“아무리 조작해도 분수가 있지.”
수십 년이 지나도 화가 치미는지 숨이 거칠어졌다.
- 어떻게 됐나요.
“박순천 할머니(최초의 여성 당수)가 그때 같이 와줬는데 경찰서장을 불러 막 야단치고…, ‘이 사람은 김대중 비서다. 내가 보증한다.’ 그제야 풀려날 수 있었죠.”
“진산 파동 주동자로 몰렸으나 재판서 무죄 선고”
“DJ 내란음모 혐의 끌려가 지금까지 고문 후유증”
- DJ가 일본 망명 갔을 때는 어디서 활동했나요. (DJ는 10월 유신이 선포된 이후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신민당에서 유진산(7선‧신민당 당수) 씨가 DJ 비서라고 공천을 안 줘요.”
8대 총선을 앞두고서였다.
- 왜 안 주려한 겁니까.
“진산파동을 내가 주동했다고 생각한 거요.”
- 아이고. 그랬군요.
“….”
1971년 5‧6 진산파동은 신민당 일부 청년들이 유진산 자택에 난립해 사퇴를 촉구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은 유진산이 8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지역구인 영등포갑 출마 대신 전국구 1번으로 선회한 것에 반발했다. 지역구를 공화당 후보에 팔아넘기려 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 직접 진산 자택에도 갔던 건가요.
“가긴 갔었죠.”
진산이 막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등록하려 할 때였다. 청년들이 쫓아가 항의했다. 성토가 커지자, 진산은 차를 타고 황급히 자택으로 향했다. 이윤수도 뒤쫓았다. 문화방송 홍 모 기자의 차를 얻어 타고 갔었다.
“청년들이 와서 때려 부수고 그럴 때예요.”
- 주도한 건 맞나요?
“난 전혀 그런 적이 없어!”
격앙했다.
“진산이 DJ하고 사이가 안 좋았잖소. 진산이 트집 잡을 게 없으니까 ‘김대중의 비서 이윤수가 와서 부셨다’고 한 거요.”
억울해했다. 이윤수를 주모자로 지목했지만, 얼마 안 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유씨가 지난 5월6일 시내(상도동) 그의 자택 난동 사건의 주모자로 몰아세웠던 김대중 씨의 비서 이윤수 씨를 7인위에 증인으로 출석시켜 대질신문한 결과 이씨는 그날 모방송국의 취재차에 편승해 상도동에 갔다는 점과 이씨가 난동을 부리는 당원들에게 돈을 주어 선동한 사실이 없음이 밝혀져 오히려 이씨가 유씨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는 태도를 밝혔다고.”
-1971년 6월 17일 <경향신문> 기사 중-
“그런데도 나를 제명까지 한 거 아니요.” 지난 일을 전한 것이지만 분함이 느껴졌다. 재판을 통해 명예가 회복되기는 했으나 당시 일을 생각하면 여전히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1973년 9대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 공천 시기가 돌아왔다. 김홍일(2선)-양일동(5선) 등 반진산계는 힘을 쓰지 못했다. 이에 탈당해 만든 당이 민주통일당(1973~1980년)이었다.
DJ계 이윤수도 따라갔다. 경기도 광주-이천-여주군 후보로 공천을 받았다. 상대는 공화당의 차지철(4선·박정희 경호실장).
“차지철하고 붙어서 이기겠어요? 떨어졌죠.”
“동경 납치 전 숙소 바꿔 …DJ 구속당할까, 귀국 못해”
“DJ 색깔론, 마타도어 심했던 7대 총선 거슬러 가야”
- DJ하고는 어떻게 교류했습니까.
“(1973년 동경에서) 납치되기 전에 일본에서 만났어요.”
“제국호텔이라는 데서 내가 그랬어요. 들어가자고요.”
- 하지만 안 들어갔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했죠.”
당시 이모부가 일본에 살았다.
“용돈을 좀 얻으려 갔다가 오니까 호텔에 안 계시는 거예요.”
찾을 수가 없었다. 호텔에서도 안 가르쳐줬다.
“내가 비서라고 해도 모른다는 거야.”
- 그때 납치됐던 겁니까.
“그때는 아니고…나중에 알고 보니 옆방에 은신해 있던 거예요.”
신변의 안전을 위해 거처를 자주 바꿔야 했다.
- DJ가 국내에 못 들어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속당할까 봐서죠. 죽이려고 일본서도 배에 태워서는 바닷가에 수장시키려 했잖아요. 헬리콥터로 CIA가 와서 구출해준 거죠.”
1973년 박정희 정권에서 행한 동경 납치 사건이었다.
- 서울의 봄때는 경호실장 격으로 같이 다녔던 거죠?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내란음모 사건 당시 DJ와 같이 잡혀간 것으로 아는데.
“제일 견디기 힘든 게….”
몸을 앞으로 숙였다.
“네모진 각목을 팔 양쪽에다 끼우고 무릎을 꿇려요.”
입을 가리키며 “물 붓고 코에다 고춧가루 붓고… 여기(무릎)를 막 치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몸서리쳤다. “자 봐요.” 바지를 무릎까지 거둬 올렸다. “이렇게 튀어나와 있잖소.” 고문 뒤 생긴 후유증이었다. “지금도 춥거나 하면 아파서 걷지를 못해요.” 지팡이에 의지해 걸을 수밖에 없다. “그런 것 생각하면 열불이 나요.” 따질 수도 없고 천 불이 날 일이었다.
- 보통 그 정도 되면 쓰라는 대로 적게 된다고 하던데요.
“더 악이 나죠.”
단칼에 말했다.
“아, 인간이 그렇습니다. 그놈들이 그렇게 나오니까….”
이윤수는 그럴수록 더 악에 받치는 경우였다.
“자꾸 불라고 하는데 사실이 아닌 걸 씌어 거짓말로 진술하라고 하니 뭘 불 수 있었겠습니까.”
- 예를 들면 어떤 방식입니까.
“걔네들이 묻는 게 ‘김대중이 빨갱이 아니냐.’ ‘어디 어디서 간첩을 만났다는데 너 모르냐.’ ‘너도 빨갱이 아니냐.’”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신군부는 DJ에 내란음모 혐의를 적용해 동교동계 다수를 끌고 갔다. 정보부에서는 DJ는 애미 빨갱이, 이윤수는 새끼 빨갱이라고 불렀다.
- 왜 하필 DJ한테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었을까요.
“대한민국 국민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빨갱이잖아요. 전부 좌익으로 몰아서 잡았잖소.”
- YS(김영삼)한테는 빨갱이라고 하지 않지 않았습니까.
“다 그런 이유가 있어요.”
거기까지만 말했다.
‘박정희 정권 때 생긴 지역주의 프레임이 더해져서 아니겠느냐’. ‘차별받던 호남과 달리 YS는 영남 출신이라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 이 질문을 던지고 싶었으나 못했다.
- DJ한테 처음 빨갱이 소리가 붙여진 것은 언제입니까.
“목포에서 사업을 했잖소.”
정치입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목포상고를 졸업한 DJ는 해운회사 다닌 것을 계기로 광복 후 흥국해운을 경영했다.
“6‧25가 터지니까 도망갈 수밖에 없잖아요.”
얼마 못가 인민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민주계통 사람들과 다 같이 잡혀서 지하실에 갇혔거든요.”
전부 총살되고…. DJ 차례가 왔다.
“그런데 아는 사람 한 명이 있었나 봐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오사일생 중 첫 번째를 말했다.
- 그게 색깔론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겁니까.
“공화당이 이를 공격의 빌미로 사용한 거요.”
6·25 때 살아돌아온 것을 갖고 ‘좌파랑 가까우니 살려준 거 아니냐.’ 색깔론을 씌었다는 거였다. 1967년 6‧8 총선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신민당의 DJ와 목포에서 맞붙은 공화당의 김병삼은 중진 후보였다. 박정희는 직접 목포로 내려와 국무회의를 두 차례나 열었다. 재선에 도전한 DJ를 떨어뜨리고 자당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DJ를 상대로 집요한 마타도어를 벌였다는 얘기였다.
“또 잘못하다간 깡패들이 끌어다 칼 대고….”
분위기가 살벌했다.
- 아니 그러니까 굳이 왜 DJ한테 빨갱이 프레임을 씌웠냐는 거죠.
“DJ가 제일 강자 아닙니까?”
당연하다는 듯 반문해왔다.
- YS도 강자였죠.
“YS와 DJ하고는 상대가 안 돼요.”
상도동계가 YS 공로를 가장 크게 보듯, 동교동계 역시 DJ를 최고로 보는 충정이 엿보였다.
- 어쨌거나 7대 총선부터라는 거지요?
“….”
두 번 말하기 싫다는 듯 긍정도 부정도 안 했다.
다른 분석도 전해진다.
해방정국서 DJ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좌익 계열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DJ는 탈당했다. 문제는 건준위에서의 활동 이력이 꼬리표처럼 남아 발목을 잡았다는 전언이었다.
조총련 자금을 받아 오해를 샀다는 증언도 있다.
다음은 민추협 사무총장 조찬옥의 얘기다.
“시중서는 DJ가 대통령 되면 공산화된다는 얘기가 있긴 있었죠. 일본의 조총련계가 DJ한테 자금을 지원해준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빨갱이 논쟁이 나온 거예요.’”
-2022년 12월 15일 전갑길 본지 인터뷰 중-
색깔론은 전두환 정권으로까지 이어졌다.
“‘동교동 전화를 100% 도청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런 날도 있었다. 비서들끼리 돌아가면서 당직하던 때였다. “숙직실에 있으면 어떤 놈이 밤중에 돌을 던지지나 않을까, 총이나 안 쏠까 겁났어요. 자고 있는데 막 전화가 와요. 이상한 욕을 해대고 빨갱이 노래 틀어놓고 심리적인 불안감을 많이 줬어요. 그 짓들을 한 거죠.”
-이석현(6선) 본지 인터뷰 중-
대권 나선 양김, 악수한다고 손잡은 것 아냐
盧, 대통령감으로 안 봐… 文 싫어 朴 지지
1985년 DJ가 귀국했다. 이윤수는 다시 수행비서로 활동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는 조직국장을 맡았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대선을 앞두고 양김(김영삼-김대중)은 단일화에 실패했다. 민추협도 양분됐다. 통일민주당(신한민주당 후신)도 상도동계만 남았다. 동교동계는 4자 필승론을 내세운 DJ를 따라 평화민주당을 만들었다. 양김 누구도 되지 못했다. 대선은 노태우에 돌아갔다.
- 손을 잡았던 두 사람인데 말이죠.
“DJ와 YS가 무슨 손을 잡아요.”
- 힘 합쳐 민주투쟁을 했잖습니까. 민추협도 그렇고요. 87체제를 만든 실질적 주역들 아닙니까.
“어떤 분들이 들으면 나를 욕할지 몰라도….”
이 말을 전제로 말을 이었다. “안 되는 것은 죽을 때까지 안 되는 거요. 악수한다고 손이 잡아지나? 다들 대권하겠다고 나선 건데….”
냉소적 시선이 느껴졌다.
- 또 하나 궁금한 게요. 열린우리당 때는 왜 안 따라간 건가요.
“민주당 지켜야죠.”
- 지켜야 되는 이유는 뭡니까.
“아니. 민주당원이 민주당 지켜야지.”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식으로 쳐다봤다. 그러면서 “무슨 열린당인지 뚜껑당인지 그거 만든 당을 왜 따라갑니까. 노무현 씨가 만든 데를 어떻게 따라갑니까. 내가 거기를 들어가요?”
- 노 전 대통령과 사이가 안 좋았습니까.
“나하고는 형님동생 사이에요.”
하지만, “대통령감으로 안 봤다”고 했다. “지금도 이상한 게 어떻게 대통령이 됐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 16대에서 선수가 끊겼잖아요. 14-15-16대까지 국회의원하고 더는 못했단 말이죠.
“….”
이윤수는 14대부터 경기성남수정구에서 내리 3선을 지냈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노무현 탄핵 역풍’이 거셌다. 표심은 친노가 만든 신당(열린우리당)에 쏠렸다. 초선의원만 108명이 될 정도였다. 동교동계는 새천년민주당에 잔류했다. 이윤수는 총선서 떨어졌다.
- 만약 그때 따라갔다면 17대도 됐을 텐데 후회는 없습니까.
“없어요.”
잘라 말했다.
“세 번을 했으면 됐지. 무슨 소신까지 팔아먹으면서 가요.”
담담했다.
- 또 하나 궁금한 게 2012년 대선서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 지지했잖습니까. 왜 한 건가요.
“문재인 씨가 싫어서요.”
‘툭’ ‘툭’ 튀어나온 솔직한 답이 묘하게 정감을 줬다.
- 왜 싫습니까.
“문재인 씨나 노무현 씨나 다 좌파 아니오. 내가 전직 의원들 37명을 데리고서는 여기서(국회) 기자회견을 했죠.”
-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닐 거 아닙니까.
“박정희가 독재자인 거지, 박근혜 씨가 독재자는 아니잖소. 아버지를 그렇게 둔 죄밖에 더 있냐는 거요. 앉아서 대화를 해봤는데 똑똑하더라고. 세계정세도 훤히 알고 놀랐어요.”
- 한화갑 대표와 인터뷰 해보니까 DJ가 ‘박근혜를 지도자로 키워보자’ 얘기했다는데 사실인가요.
“….”
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화갑 씨가 어떻게 해서 우리 동교동에 왔냐면 대통령 후보 운동할 때 엄창록 씨가 데려왔어요.”
71년 대선 때를 말하는 듯했다. 엄창록은 DJ 참모였다. 선거의 귀재로 불렸다. 1971년 대선을 기점으로 결별했다. 공화당의 박정희 캠프로 건너가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선거 전략을 구사했다는 설이 있다.
한화갑에 대해서는 “경상도 조직을 맡겼어요. 선거 운동해야 하는데 명함 내놓을 게 없잖아요. 다들 ‘김대중 비서라 해라.’ 처음부터 비서는 아니었지.”
- 나중엔 정식 비서가 된 거잖아요.
“DJ가 목포가 고향이고 한화갑 씨는 신안 아니오. 호남 사람들 위주로 전부 시키니 우리 같은 경기도 민주당 골수들은 곁에 있을 수가 없었죠. DJ가 실수한 거예요. 정대철 씨도 고향이 그쪽(호남)이 아니잖소.”
동교동계 중 비호남 정치인으로서의 불만이 느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주류가 되기는 힘들었다는 말로도 들렸다.
- 후농 김상현(6선) 의원은 호남이잖아요. 근데 왜 못 컸을까요.
“꾀를 부려요. 머리가 너무 좋아요. DJ를 넘어가려고 자꾸 하면 되겠습니까? 잡아먹으려한다고 DJ가 잡혀먹습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발등을 찍는 거야.”
가신그룹은 대체로 후농에 대한 평가가 박했다.
“DJ 민주화 지대한 공… 대인관계 철두철미”
“요즘 정치, 국가와 국민 생각 않아 아쉬워”
화제를 돌렸다.
- DJ는 역사적으로 어떤 지도자입니까.
“민주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죠. 지금도 우리가 존경하는 이유에요. 그분만큼 싸운 사람도 없어요. 우리는 같이 싸우지 않을 수가 없어요.”
- 투쟁 방식은 뭐였나요.
“투쟁 방식이라기보다 그 양반은 대인관계에 아주 많은 노력을 했어요. 선생(기자)과 만난다고 쳐요. 부인이 누구고, 애들이 몇이고, 학교는 어디 나오고…. 이런 걸 다 파악합니다.”
만나서는 “‘부인이 참 훌륭합니다.’, ‘애들이 초등학교 다니죠? 공부 잘합니까.’ 해봐요. 다들 놀래지.”
“본인은 어떻습니까.” 물었다. “예를 들어 지역구(성남) 어느 집에 초상이 났다. 남들은 한 번 가지만 난 돌아가셨을 때와 발인, 삼우제 이렇게 세 번을 갑니다.”
- 그럼 표가 오겠네요.
“말할 것도 없죠. 성남에서만 주례를 1만 7000쌍 섰어요. 하루에 열 번할 때도 있어요. 환갑, 칠순, 팔순, 돌, 백일잔치까지 생각하면 궁뎅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새가 없어요(웃음).”
모처럼만에 웃었다.
- DJ를 수행할 때 기억에 남는 일화는 뭔가요.
“특징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요. 차를 타고 가면서도 읽다가 무릎에 종이를 대고 글씨 같은 걸 써요. 연습한다면서요.”
손으로 “이렇게 한 자 한 자….” 써보는 시늉을 했다. 뒤이어 “DJ는 내가 모셔서가 아니라…. 분신이라고까지 소리를 들었는데 그 양반한테 배울 점은 인내와 노력입니다. 특히 노력은 따라갈 자가 없어요. 대통령도 노력으로 한 거예요. 참 대단한 양반이야.”
혀를 내두르면서도 자랑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어디 지역서 연설한 뒤 여관이나 호텔에 들어가도 전기를 안 켜요.”
- 왜요?
“촛불을 켜고 책을 읽어요.”
- 눈이 나빠질 텐데….
“눈이야 좋죠.”
- 근데 왜 촛불을 켜면서까지?
“집중이 더 잘 되나 봐요. 형광등 아래서 책을 읽으면 산만하죠.”
“또 기억에 남는 것은요.” 잠시 뜸을 들이다, “그 양반이 강원도 인제 보궐 선거 나갈 때 나는 인근의 7사단 군인으로 있었습니다. 선거에 떨어지고 첫 번째 부인이 돌아가셨잖소. 그 뒤로 웃음이 별로 없었어요.”
쓸쓸한 말이었다.
“동교동계가 갖는 역사성에 대해서도 말해주죠.”
분위기를 전환했다.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나뿐 아니라 나 같은 사람들이 전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찹니다.”
- 지금 보면 586들만 민주화운동을 한 것처럼 조명되고 있잖습니까. 선배 정치인으로서 안타까울 법도 한데요.
“우리는 정말 끌려가서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내가 아까 말했죠?”
- 네. 고문의 후유증이 상당하다고요.
“데모하는 데 거의 안 나간 일이 없어요. 경찰이 집에 가둬두질 않나. 하루 종일 미행하지 않나. 별의 별 고통 다 당했습니다.”
- 요즘 정치권을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했어요.”
지금은 “국민과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개탄했다. “여야 다 똑같다고 봅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민주당은 좌파 일색이고 여당은 너무 약해요. 윤석열 대통령…? 참신하죠. 하지만 검사만 20여년 했잖소. 사람 잡아넣는 것만 했지 뭘 했겠어요. 나라 장래가 걱정입니다.”
- 왜 이렇게 됐다고 보나요.
“뭘 모르니까 그렇죠.”
해법으로 생각하는 것은 뭘까.
“이제라도 단합해서 국민이 뭘 바라는가를 알아야죠.”
- 동교동계 중 DJ가 가장 신뢰한 인물은 누구로 봅니까.
“DJ는 사람을 믿지 않아요.”
- 일을 시킬 때도 부분, 부분만 시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임무가 다 다르니까 그렇죠.”
-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계승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동교동만 팔아먹지, 동교동 사람 불러다가 밥 한 번 산 적이 있습니까?”
모를 일이다.
“돈 많잖아요? 우리는 단돈 20원도 못 먹었어요. 난 지금 1000만 원 보증금에 16만 원짜리 사글세 살아요. 국회의원도 세 번이나 한 놈이니 다들 믿지 않아. ‘쌓아놓고 그러는 거 아니냐.’ 아니. 미쳤다고 쌓아놓고 고생하고 살아?”
차상위보호대상이다. 그나마 국회의원을 해서 연금 120만 원을 받는다. “동네서 쌀 2킬로, 김장도 두세 포기 갖다 줘요. 여기 헌정회 원로들 중에서도 점심 굶는 이들부터 며느리 눈치 보면서 점심 먹으러 멀리서 걸어오는 분들도 있고 그래요.”
그는 국회의원일 당시에도 여야 통틀어 가장 재산이 적었다.
“민주당의원 재산공개에서 928만 4000의 총액을 공개, 꼴찌한 이윤수 의원(성남 수정)에겐 요즘 ‘당신 재산 그거 정말이냐’는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심지어 한 TV 카메라기자는 인터뷰 도중 갑자기 지갑속을 한번 촬영하자고 할 정도였다. 금배지의 재산으로는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다.”
-1993년 중앙일보 기사 중-
일생을 원체 청빈한 삶을 살아서이기도 하지만, 1938년 경기도 광주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던 그가 가난해진 데에는 가문 자체가 민주당 집안으로서 어려운 시대 정치를 했던 영향도 큰 듯했다. 아버지는 이한종 씨다. 동향인 해공 신익희(3선) 선생을 따라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함께 고향인 광주로 와서는 정치를 했다.
해공은 제헌국회 때부터 광주에서 내리 3선을 했다. 이한종 씨는 민주당 광주 지역위원장을 맡아 가산을 팔아 해공을 뒷바라지했다.
가세가 기울어져 갔지만, 이윤수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야(野)성이 강한 집안이었다. 이윤수 자신도 스무 살이 채 안 됐을 때부터 민주당 청년당원이 돼 제대로 된 월급 한번 만져볼 기회 없이 반독재 투쟁에 뛰어들었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수십 년간을 그렇게 산 데다 국회의원 3선을 하면서도 부를 축적하는 재주가 없었다. 그 사이 3번 낙선한 것도 없는 삶을 더 궁핍하게 만드는 요인이 됐으리라.
“나는 아직도 자랑스러워요. 내가 못된 짓 한 것도 아니고. 그렇잖소?”
딱한 듯 자신을 보는 기자의 눈을 읽었는지 말을 해왔다.
- 민주화유공자 신청은 안 했나요.
“하라고 하는데, 안했어요. 가짜가 좀 많나요? 그게 뭡니까. 뭐 상 받으려고 민주 투쟁한 것도 아니잖소.”
- 장기표 선생도 안 하고, 故유성환(2선) 선생도 안 하고…. 무슨 마음에서 신청하지 않는지 압니다만 역사는 유공자로 기록된 사람만을 민주화투쟁 했다고 할는지 모르잖습니까.
“건방진 소리가 아니라, 나이 먹은 분들은 지금도 나 몰라보는 사람 별로 없어요.”
- 먼 훗날 역사는 또 다르잖습니까.
“….”
분위기를 전환하며, “기억에 남는 의정활동은 뭔가요.” 소개해주고 싶었다. 그 질문이 반가웠는지 냉큼 설명을 이어나갔다.
“14대 때 교통체신위원회 소속이었어요. 수도권 전화번호는 시외요금 받았을 때인데 서울 가격과 똑같이 해놨어요. 성남 비행장 주변은 고도제한으로 묶여 있었는데 17층까지 지을 수 있도록 했고요. 경기도에 빌딩이 많이 생긴 거예요(웃음). 광주로 해서 이천·여주까지 전철 만든 것, 군인들 1인 1 침대 사용하도록 한 것 등 많죠.”
그는 3선을 하는 동안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예산결산특별위원회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는 이 말을 건넸다.
- 지난날을 소회하면 어떻습니까. 워낙 어린나이에 정치했고 말입니다. 후회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옛날 일 생각하면 뭣합니까.”
하면서도 “후회는 안 하고요.” 이 말을 덧붙였다. 또, 그러면서도 “나도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마음먹은 일인 듯했다.
시종일관 초연한 모습 그대로 지팡이에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 점심 먹어야지?”
한 전직 의원이 인터뷰가 진행됐던 회의장의 문을 열고 재촉했다.
우루루 나가는 모양이었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다음엔 민추협 되짚기를 통해 다시 만나야겠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좌우명 : 꿈은 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