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인사(人事)가 만사(萬事)",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가 생전에 입버릇처럼 한 말이다. 사람의 일이 곧 만 가지 일이다. 좋은 인재를 등용해서 그들에게 걸맞은 자리에 알맞게 배치해야 모든 일이 좋게 풀린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라도 직접 관리 가능한 범위에 한계가 있어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우수한 인재를 채용해 그들이 보유한 지식과 전문성, 경험에 걸맞은 위치에 앉혀야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아무리 풍부한 자본과 탄탄한 시스템을 갖춘 회사여도 몇몇 사람들로 인해 순식간에 흔들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때문에 기업의 인사는 투자자들에게 있어서 그 업체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 사항 중 하나로 분류되기도 한다. [人事萬事](인사만사) 코너에선 기업의 인사를 조명해 기업의 만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광주 사고 이후 인적 쇄신, 표면적으론 성공적
지난해 연초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2022년 1월 11일 광주 서구 화정동에 위치한 '광주화정 아이파크 2단지' 신축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아파트 일부가 콘크리트 타설 작업 중 붕괴됐다. 이 사고로 현장에서 작업 중이던 노동자 6명이 목숨을 잃었다. 건물 23층부터 39층까지 한꺼번에 무너지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 현장의 원청 건설사는 2021년 6월 광주 학동 붕괴사고의 최종 책임업체인 HDC현대산업개발, 동일한 기업이 관리하는 사업장에서 연속으로 벌어진 대형사고, 모두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참사였다.
이후 관계당국과 지방자치단체의 처분과는 별개로 HDC현대산업개발은 강도 높은 인적 쇄신에 들어갔다. 그룹 오너인 정몽규 회장이 HDC현대산업개발 회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역대 사장단을 중심으로 비상안전위원회를 신설해 사고 수습과 피해보상에 집중했다. 또한 CSO(최고안전책임자)제를 도입했고, 경영진을 대대적으로 물갈이했다. 유병규 대표와 하원기 대표가 직을 내려놓았고, 그 빈자리를 최익훈 대표(CEO)와 김회언 대표(CFO)가 채웠다. 현대건설 출신 외부 인사인 정익희 대표를 CSO로 영입했으며, 이광희 상무(안전관리부문장)와 박용현 상무(품질혁신부문장) 등 현대건설맨도 정익희 대표와 함께 합류했다. 당초 회사 안팎에선 최익훈-김회언-정익희 삼두마차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최익훈·김회언 대표는 1999년 정몽규 회장과 함께 현대자동차에서 HDC현대산업개발로 자리를 옮긴 오너일가 가신 집단으로 분류되는 인물인 데다, 정익희 대표도 현대차그룹 계열 현대건설에서 온 만큼, '도로 정몽구'가 된 게 아니냐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 같은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3인 대표 체제 하에서 HDC현대산업개발은 순항을 이어갔다. 국민적 공분을 샀음에도 관양현대 등 수주 실적을 쌓으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용산역사박물관 리모델링 공사를 준공하며 용산철도병원부지 개발사업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 광주 사고와 관련해서도 활발하게 대관 활동을 펼치며 일부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는다. 행정처분이 거듭 지연 중이고, 건설업 면허 취소까지 언급됐던 처벌 수위도 현재는 영업정지 수준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사망자와 유가족, 입주예정자 등 피해자들에겐 억장이 무너질 수 있는 일이겠으나, HDC현대산업개발 입장에선 한시름 놓은 셈이다.
실적도 양호했다. HDC현대산업개발은 2022년 연결기준 매출 3조2983억 원, 영업이익 1163억7970만 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1.95%, 영업이익은 57.44% 각각 감소했다. 최근 원자재 가격 급등과 고금리로 국내 건설사 대부분의 실적이 반토막이 난 실정임을 감안하면, 대형 참사를 야기했음에도 선방했다고 평가할 만한 수준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광주 사고, 아시아나 인수 실패 등과 관련한 수천억 원 규모 손실·충당부채 등이 반영된 성적표인 만큼, 나름 호실적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삼두마차에 대한 긍정적인 내부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참사 이후 진행한 강도 높은 인적 쇄신 작업이 성공했다고 볼 만한 대목이다. 물론 표면적이지만 말이다.
직원 대거 이탈에 경영진이 꺼낸 ‘급여 인상 약속’
이 과정에서 HDC현대산업개발의 속은 곪아갔다. 회사의 허리 역할을 맡고 있던 실무진들이 이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민연금공단 자료에 따르면 HDC현대산업개발(본사)의 퇴사자 수는 2021년 331명에서 2022년 522명으로 57.70% 급증했다. 이 수치는 정규직(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과 비정규직(기간제 근로자) 퇴직자 수를 모두 합친 것이다. 그럼에도 사업보고서상 직원 수는 2021년 말 1665명에서 2022년 말 1830명으로 늘었다. 핵심 인력들의 빈자리를 신입·경력 직원, 정규직 전환 직원들로 메꾼 것이다. 실제로 같은 기간 HDC현대산업개발 직원 1인 평균 급여액은 7300만 원에서 6700만 원으로 8.96% 줄었다.
광주 사고 이전에도 HDC현대산업개발 직원들의 불만은 상당한 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원가절감 경영 기조 때문이었다. HDC현대산업개발의 전체 직원 중 비정규직(기간제 근로자)이 차지하는 비율은 2022년 말 기준 41.86%로 10대 건설사 최상위권이다. 정몽규 회장이 HDC현대산업개발로 몸을 옮긴 직후인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30%p 가량 확대됐다. 2018년엔 애자일 경영이 도입됐다. 애자일(Agile, 민첩·유연한) 경영은 주로 보험업에서 활용되는 기법으로, 조직·절차 등을 슬림·유연화하고 일선현장에서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영업팀에게 여러 권한을 집중시켜 영업 능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HDC현대산업개발은 부서 간 경계를 허물어 현장에 의사결정 권한을 부여하겠다는 명분 하에 기존에 전문 분야별로 분산됐던 인적 자원을 이동시키고, 통폐합했다. 수주영업본부가 신설되기도 했고, 개발본부와 수주본부가 개발영업본부로 통합되기도 했다. 또한 프로젝트가 생기면 그때마다 TF를 구성해 그 팀이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업무를 보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이 상당한 불편과 혼란을 느꼈으며,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이 회사를 떠나는 일도 늘었다. 그리고 광주 사고가 대규모 인력 이탈의 트리거가 된 것이다.
퇴사 사례가 빈번해지자 최익훈 대표 등 경영진은 지난해 공식적·비공식적 자리에서 노동조합과 직원들에게 '10대 건설사 수준으로 급여 인상·복리후생 강화', '공정한 성과 배분' 등을 수차례 공언했다는 후문이다. 거듭된 직원 이탈을 막기 위해 제시한 카드였다. 하지만 해가 지나 새해가 찾아와도, 정기주주총회를 앞둔 3월에 이르러도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최대 1억 원의 주택자금 저리대출, 입원치료비 확대, 복지시설 바우처 제공 등 조치를 통해 복리후생을 강화했다는게 HDC현대산업개발의 설명이다.
다만, 경영진의 약속 이행은 쉬이 이뤄지지 않았다. 복수의 HDC현대산업개발 관계자들은 "현 경영진이 직원들의 보수와 처우를 정상화하기 위한 안을 준비했는데 정몽규 회장이 이를 거부했다고 들었다. 지금이 급여 수준이나 복리후생을 강화할 때냐는 논리로 말이다. 성과급 얘기도 가로막혔다"며 "오히려 가뜩이나 타사 대비 임금피크제에 따른 임금 하락폭이 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연차 직원들을 저성과자 낙인을 찍으면서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직원들 입장에서 저성과자는 아시아나 인수를 주도한 정몽규 회장"이라고 토로했다.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HDC현대산업개발에서 물러난 정몽규 회장은 어떻게 HDC현대산업개발의 직원 급여·성과급 테이블과 복리후생 정책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었을까. 이는 정몽규 회장이 지주사인 HDC 회장직을 유지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로, 합법적인 권한 행사다. HDC의 사업목적이 명시된 정관 제2조엔 '자회사 등 경영성과의 평가 및 보상의 결정', '자회사 등의 업무와 재산 상태에 대한 검사' 등이 표기돼 있다. HDC현대산업개발은 HDC의 자회사이고, 정몽규 회장은 HDC의 사령탑이니 HDC현대산업개발의 경영성과 평가와 보상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대기업집단 지주회사들이 비슷한 사업목적을 갖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자회사 이사회 무력화', '지주사의 과도한 경영간섭', '오너일가의 지나친 영향력 행사', '영향력을 행사하고도 지배구조 측면에서 법적 책임 회피' 등을 이유로 이 같은 조항에 비판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진정한 인사는 '집안 결속'인데…주주환원 정책 놓고도 내부 불만 고조
HDC현대산업개발은 위기에 직면했다. 잇따른 사고로 시장과 소비자들의 신뢰에 금이 갔고, 재무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다. 서울시의 행정처분도 예정돼 있다. 고물가와 고금리, 부동산 침체로 업황 자체도 좋지 않다. 직원 급여 수준이나 복리후생 따위를 제고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항변은 분명 이유 있다. 집도 잘 짓지 못하면서 성과급 파티나 하고 있다는 식으로 자칫 여론이 악화될 소지가 될 수도 있다. 설사 경영진이 약속을 한 사항이라도, 약속을 지키라는 직원들의 요구는 회사 안팎서 봤을 때 '무리하다'고 여겨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같은 측면에서 현재 HDC현대산업개발의 문제는 약속 이행 여부, 급여·복리후생·성과급 인상·강화 여부가 아니라 위기를 극복할 체력을 과연 갖췄느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의 체력은 인적·물적 자원이고, 그중에서도 중요한 건 사람, 곧 인사(人事)다.
앞서 거론했듯 지금 HDC현대산업개발은 겉으론 대규모 경영진 물갈이를 통해 만사(萬事)를 이룰 인사를 꾀한 것처럼 보이나, 진정한 인사인 '집안 결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양새다. 노사간 소통으로 서둘러 이 문제를 해소하지 않는다면 직원들의 사기 저하, 근로의욕 상실 현상이 나타날 것이고, 이는 생산성 저하 등 더 큰 위기를 불러올 공산이 상당하다. 또한 집안 결속이 이뤄지지 않을 시 그룹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주주가치 제고 정책의 의미까지 퇴색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광주 참사 이후 HDC현대산업개발과 지주사인 HDC, 그리고 오너인 정몽규 회장은 지난해 HDC현대산업개발, HDC 주식을 지속적으로 매집했다. 올해 들어서도 이 같은 행보는 이어지고 있다. HDC현대산업개발은 지난 6일 총 200억 원을 투입해 자기주식 191만2045주를 취득키로 했다고 공시했으며, 같은 날 HDC도 총 200억 원을 들여 자사주 333만3333주를 매입키로 했다고 공시했다. 취득 목적은 주가 안정화를 통한 주주가치 제고다. 올라간 주주가치만큼 HDC현대산업개발 직원들의 원성은 높아졌다. 내부 구성원들의 가치 제고엔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나아가 주주환원이 아닌 오너일가 챙기기라는 비판 여론까지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주가 방어를 명분으로 지분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오너일가의 지분율이 확대된 가운데, 전년 대비 실적이 떨어진 HDC와 HDC현대산업개발이 현금 배당 수준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대주주에게 배당금을 챙겨주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비판 여론의 배경이다. 실제로 HDC는 지난해 연결기준 주당순이익이 -93원인데 전년과 동일하게 주당 현금배당금 250원을 고수했으며, HDC현대산업개발은 주당순이익 764원에 주당 현금배당금 600원을 책정해 배당성향 78.5%를 기록했다. 때문에 사측이 자사주를 취득해 직원들에게 성과급 명목으로 나눠주는 조치를 취했다면 애사심과 자부심이 확대됐을 텐데 아쉽고 서운하다는 반응이 회사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는 게 복수의 HDC현대산업개발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최근 HDC현대산업개발은 재도약을 위한 대외 이미지 회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올해 실적 부진이 예상되는 가운데에도 지난 17일 대·중소기업·농어업 협력재단에 전년보다 10% 규모가 확대된 3억3000만 원 규모 상생협력기금을 출연했다. 해당 기금은 우수협력사 포상금 지급, 교육지원, 기술협력 등 협력업체와의 동반성장을 위해 쓰인다. 지난 2일에는 안전·품질 경영 선포식을 개최하고 재해예방과 품질향상을 통해 시장과 고객 신뢰를 회복하겠다고 천명했다. 또한 광주 지역 취약계층 식료품 전달, 광주 일대 소방용품 지원, 서울 구룡마을 화재 이재민 돕기 성금 전달 등 사회공헌활동도 연초부터 최근까지 적극 전개 중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했다. 집안 결속을 도모해 인사를 회복하지 않는다면 이 같은 기업 이미지 쇄신 노력의 결실은 축소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이미 직원들의 불만은 세상 밖으로 슬슬 터져나올 조짐을 보이고 있다.
본지는 HDC와 HDC현대산업개발의 자사주 취득 공시 이튿날인 지난 7일 이재승 전(前) HDC현대산업개발 노조위원장이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입수했다. 그는 "외부에 보여지는 회사 모습을 멋있게 포장한들, 내부에 있는 고객(직원)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충성심과 주인의식이 결여돼 이직이 잦아지고, 조직이 안정화되지 못해 지속가능경영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동요하고 있는 임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용기를 북돋아 작금의 위기를 전(全)임직원이 힘을 모아 헤쳐나아갈 수 있도록, 주주가치 제고와 더불어 기업 핵심가치인 직원들에 대한 대우와 배려를 우선시해야 한다"며 "실질적 노사관계 확립을 통해 상시 경영진과 직원들이 소통하고, 노사간 신뢰를 바탕으로 한 노사협력으로 위기를 헤쳐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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