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편은 주요 선거마다 돌파한 이긴
지도자 사례 보면서 안철수 행보 관심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치라이뷰팀|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한다. 기자들과 데스크의 시각 ‘정치라이-뷰(Li-view)’는 취재를 녹인 분석들의 조합이다. 라이-뷰는 살아있는 정치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편집자 주> |
1. 그들은 어떻게 대표가 됐고, 대선후보가 됐나?
# YS
“(청와대에) 반격할 경우 김영삼(YS)의 정치생명은 끝날 것이다.”
이는 1990년 5월 9일 3당 합당에 따른 통합 전당대회를 앞두고 노태우 대통령 측근이 YS를 겨냥해 언론을 통해 겁박하듯 흘린 극언이었습니다.
당시 YS는 호랑이 굴에 들어와 호랑이를 잡으려 했지만, 당내 지분이 20%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주류였던 민정계는 민주계인 YS가 민자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안기부를 활용해 공작정치를 펼쳤습니다. 비밀문서를 만들어 YS 이미지를 실추시킬 것과 국민 지지도에 있어 1노(노태우)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중 YS가 최하위인 것처럼 유포할 것과 측근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신진 지원세력의 조직화를 철저히 견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YS는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여론전을 통해 전면전에 나서며 노 대통령과 담판을 지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임했을 때인데 YS는 당대표 최고위원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합의를 이끌었습니다. 주도권을 잡은 YS는 이윽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습니다.
최초의 문민정부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의 수난사는 계속됐습니다. YS가 자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민정계는 총선 패배의 책임을 씌우려고 군불을 지폈습니다. 이를 간파한 YS는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하며 분위기 전환을 꾀했습니다. 민정계가 이번엔 내각제 파동을 일으켜 또다시 그를 궁지로 몰았습니다.
YS는 위기를 기회로 삼고, 자신은 처음부터 내각제에 반대했다는 것과 국민이 원치 않는 개헌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천명했습니다. 청와대를 상대로 내각제 문서를 유출한 배후를 집중추궁했으며, 민주계와 뜻을 모아 집단 탈당 각오를 불사하면서 투쟁해나갔습니다. 결국, 명분을 잃은 노 대통령은 배수진을 친 YS 결기에 한발 물러나 내각제 뜻을 접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러한 돌파 끝에 YS는 그해 민자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는 분석입니다.
# DJ
최초의 호남 대통령이 된 DJ(김대중)도 무수한 돌파 끝에 선거에서 이겨왔습니다.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 초창기만 해도 비주류에다 소수파인 그가 선출되리라고는 감히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구민주당 소속의 주류이자 원내총무를 맡고 있던 YS가 처음부터 40대 기수론을 들고나와 판을 주도해나간 것이기에 자칫 들러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막판에 유진산 총재 또한 YS를 지명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이철승 후보 역시 유진산 총재가 지명하는 후보를 지원키로 약속한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DJ는 ‘자신이 대선후보가 되면 당권은 이철승한테 주겠다’는 각서를 만들어 설득했고 그 힘으로 1위였던 YS를 결선에서 역전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색깔론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DJ는 ‘영남·기업인·공직자·군부에서 반대해 대통령 되기 어렵다’는 4대 불가론에 발목이 잡혀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가 3전 4기 끝에 15대 대통령이 될 수 있던 것은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연대와 포용 덕분이었습니다. 내각제를 고리로 JP(김종필)와는 연대를, 자신을 탄압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용서하고 기념관을 세우겠다고 공언하면서 포용과 통합의 정치를 꾀했습니다. 그 결과 훗날 노벨문학상까지 받는 국민의정부 대통령이 됐다는 평가입니다.
# 노무현
최초로 민주당 내 영남 대통령이 된 인물이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입니다. 그 또한 결정적 돌파력 끝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 대통령이 됐습니다. 당초 DJ를 향해 지역주의를 심화시킨 원흉이라며 비판에 마지않던 그였지만 15대 대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고 그때부터 열심히 후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려 했으나 DJ가 고건 전 총리를 내세우려 하자 뜻을 접고 종로 재보궐로 걸음을 옮겨 신임을 얻었습니다.
16대 대선에서는 당내 강력한 대선주자였던 이인제 후보보다 인지도나 지지도 모두 미약했던 그였습니다. 당 주류인 한화갑 후보와는 조직력 면에서 비교가 안 됐습니다. 그러나 영남 후보론이 필요하다고 본 DJ 지원사격과 완전국민경선으로 바람을 일으킨 끝에 마침내 대선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의 경쟁력에서 밀리자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와의 단일화 승부수로 지지율 역전을 이뤄냈습니다. 이후 단일화가 파기됐어도 그 집 앞을 찾아 수모를 겪는 모습을 연출하는 등 동정론을 일으켜 적극 지지층의 투표를 이끈 끝에 참여정부를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견해입니다.
2. 우하향 패턴 안철수, 왜?
이처럼 주요 선거마다 숱한 장애물들을 돌파해 내는 것은 온전히 지도자 몫입니다. 그 관점에서 최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한 안철수 당대표 후보를 보겠습니다. 10년 정치해오면서 그만큼 입지전적의 이력을 쌓아온 경우도 찾기 어렵습니다. 새정치 신드롬의 당사자로 2012년 대선 당시 단박에 50%대 지지율을 거머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고 있으며 2016년 총선에서는 삼김 이후 처음으로 가장 큰 제3정당 의석수를 만들어낸 주인공이었습니다.
2017년 대선에서는 제3정당 후보임에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와 불과 2.6%포인트 차밖에 나지 않을 만큼 거대정당을 상대로 막강한 위력을 떨쳤습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처음으로 동서화합 정당을 도모하는 실험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와의 4·7 재보선 단일화를 통해서는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20대 대선 막판 윤석열 대선후보와의 단일화에 나서면서는 정권교체의 보조적 주역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안철수는 끝났다’는 말이 나돌 때도 결국, 다시 살아 돌아오는 끈질긴 부활의 행보를 보여왔고 말입니다.
다만, 안 후보는 결정적 선거마다 우하향 패턴으로 맥을 못 추기 일쑤였습니다. 2012년과 2017년 대선은 말할 것도 없고 2021년 재보궐, 2022년 대선과 또 올해 당대표 경선까지 초반에 선두로 치고 나갔던 것과 달리 후반기로 갈수록 내림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결국, 강세였던 양자 대결마저도 뒤처지는 양상을 공통되게 거듭해왔습니다.
주요 선거에서 특유의 돌파력으로 주도권을 잡고 기선을 제압하거나 덧셈 정치로 몸집을 부풀리거나 혹은 후계자로 인정받아 승리를 거머쥐었던 역대 사례와 달리 안 후보는 강풍을 태풍으로 만들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어쩌면 처음보다 못한 뺄셈 정치를 해온 것은 아닌지, 또 불안한 리더십으로 신뢰를 깎아 먹은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번 전당대회는 이기면 기적이요, 져도 잘 싸웠다고 할 만큼 안 후보에게는 여러모로 불리한 선거였을 거로 가늠되고는 있습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 “정권 안정론을 위해서는 윤석열 대통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등의 분위기 속에 강력한 대선주자의 당대표 도전을 가로막는 불공정한 분위기 또한 상당했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 후보를 향한 대통령실 관계자의 도 넘은 발언이나 공무직으로서 중립을 지켜야 함에도 대통령실의 일부 행정관들이 개입 의혹 등 안 후보를 조직적으로 방해했다는 의심마저 불거지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선거는 이기는 게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앞선 YS나 DJ,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적처럼 첩첩산중을 넘어 돌파해 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안 후보야 가진 돈의 절반인 1500억 원을 사회에 기부하고 20대 대선 단일화를 위해 선거자금 70억 원을 포기하고도 여전히 천억 원대 자산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많은 돈을 갖고 있으니 여느 정치인들보다 자신감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초등학생부터 어른까지 ‘안철수’하면 웬만한 국민은 다 아는 인지도에 중도층 중심의 고정표 20%를 보유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으니 언제든 다시 도전할만한 기본 힘은 충분한 셈입니다.
현재 전당대회가 높은 투표율로 치러지면서 결선으로 가게 될지, 역전에 성공할지 등을 놓고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성공한다면 모르지만 만에 하나 실패한다면 앞으로 재도전하기에 앞서 대대적 점검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본인의 강점인 강연 정치를 위주로 해왔다면 앞으로는 적극적 스킨십 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전면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가 의미 있으려면 다음에 성공했을 때입니다. 돌파해 나갈지 지켜보겠습니다.
이런 라이뷰 어떤가요.
독자 여러분의 댓글 환영합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좌우명 : 꿈은 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