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기자]
혁명과 쿠데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시대를 훔치는 자들이다. 한 시대를 품기 위해서 이들은 세상을 뒤엎는다. 조선 건국 주체 신진사대부와 그 후예 사림도 그랬지만 결국 권력의 화신이 됐다.
87체제 최대 수혜자 586의 35년 지배체제가 역사적 소임이 다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87체제 개혁은 586의 퇴진을 의미한다. 현대판 사림 586이 물러나야 할 때다.
신진사대부, 권문세족을 내쫓다
고려는 사실상 대몽항쟁기와 함께 망했다. 원간섭기는 식민지 시대다. 백성은 몽골 치하에 하루살이도 버거울 정도였지만 기득권 권문세족의 탐욕은 멈추지 않았다. 고려 기득권 복합체 권문세족은 전 국토를 사유화했다. 권력 독점이 이들의 헌법이 됐다.
지방 하급 관리층 향리는 혁명을 꿈꿨다. 권문세족을 내쫓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먼저 프레임 전쟁에 전념했다. 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내세워 타락한 불교 자본과 결탁한 권문세족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불교 승려들은 권문세족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신진사대부는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 불교와 권문세족을 싸잡아 악의 축으로 몰아 세워 자신들의 혁명 명분으로 삼았다. 권문세족과 불교 복합 연합체는 프레임 전쟁 개전 초기 철저히 무너졌다.
외교도 쟁점화됐다. 권문세족은 친원사대주의를 맹신했다.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도 그가 죽자 중단됐다. 권력을 잡은 이인임은 허수아비 우왕을 내세워 친원을 국정기조로 삼았다. 원명교체기의 국제 정세 깜깜이들의 패착이었다.
신진사대부는 친명으로 맞섰다. 원래 성리학이 한족 국가 송의 학문이었기에 이민족 왕조 원에 맞설 중요한 사상적 무기가 될 수 있었다. 백성은 원나라의 극악무도한 횡포와 강탈을 잊지 않았기에 신진사대부의 손을 들어줬다.
군권 장악도 노렸다. 권문세족의 군사적 기반을 제거할 신흥 무인을 찾았다. 최영과 이성계였다. 홍건적과 왜구를 제압해 국민 영웅이 된 두 명장을 포섭했다. 최영은 고려 왕조 부활을 꿈꿨고,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위해 신진사대부가 내민 손을 잡았다.
개혁 군주 공민왕이 급사한 대혼란기에 권좌에 오른 이인임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음껏 누렸다. 최영과 이성계가 이인임을 제거했다. 권문세족이 무너졌다. 문제는 권력은 나눠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신진사대부가 분열됐다. 고려왕조 유지를 원하는 온건파 사대부와 역성혁명을 꿈꾸는 혁명파로 나눠졌다. 신흥무인도 패가 갈렸다. 최영은 온건파와, 이성계는 혁명파와 손을 잡았다. 최영과 정몽주가 기선을 제압해 정국을 장악했다. 혁명파는 반전이 절실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판을 뒤집었다. 최영이 죽고, 정몽주가 참살됐다. 혁명파가 새로운 시대 조선을 열었다.
조선판 민주화 세력 사림
혁명파와의 대결에서 참패한 온건파 사대부는 향촌으로 기약 없는 길을 떠났다. 아니 세상을 등졌다. 이들은 권토중래를 기획했다. 혁명파가 권력의 단맛에 취해 있을때 향촌의 민초들을 서서히 포섭했다.
마침 혁명파 내분이 발생했다. 정도전이 참살됐다. 이방원이 왕권 강화를 위해 위협이 될만한 외척과 공신들을 철저히 제거했다. 향촌에 몰락한 세력들이 모여들었다. 온건파 우군들이 증가한 셈이다.
계유정란이 터졌다. 훈구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부국강병과 중앙집권을 국정기조로 삼은 훈구는 조선의 번영을 이끌었지만 정권 비리도 비례해 폭증했다. 국가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온건파는 훈구의 권력 전횡을 자양분으로 삼았다. 조선의 민주화 세력 사육신을 따르는 무리들도 향촌에 은거했다. 생육신이 대표적이다. 훈구가 고려 적폐 권문세족화 될수록, 온건파는 힘을 얻었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온건파는 큰 그림을 그렸다. 도학정치로 사상의 우월적 지위를 선점했다. 향촌자치로 권력 분점을 약속했다. 서원과 향약을 세력 확장 화수분으로 삼았다. 과거는 권부 진출의 합법적 수단이 됐다.
수도 한양은 훈구 천하였지만, 조선 팔도는 사실상 온건파의 세상이 됐다. 내친 김에 간판도 갈아 치웠다. ‘사림’이 대표 브랜드가 됐다. 훈구 독재 피로증에 지친 백성들은 사림을 대안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과거로 권부에 진출한 사림은 훈구와 사사건건 맞섰다. 노회한 훈구도 사화를 통해 사림을 통제했지만, 자신들도 점차 약화됐다. 을사사화가 대표적이다. 훈구끼리의 권력투쟁인 을사사화는 민심이반의 결정타가 됐다.
선조는 사림 천하를 열어줬다. 사림이 조선을 장악했지만 내분을 피할 수 없었다. 권력 독점은 비정한 권력의 속성이다.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해 혈투를 벌였다. 훈구가 물러났지만 민생은 더 도탄에 빠졌다. 옛도적이 사라지니 신도적이 등장한 꼴이 됐다.
이들도 훈구와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더했다. 수백년을 굶주렸던 권력이기에 훈구보다 더 민생을 유린했다. 종주국 중국에서 사장된 성리학을 교조화해 소중화로 사상적 우월감에 빠져 들었다. 만사 소중화가 훈장이 됐다. 소중화와 개혁을 내세워 반대파를 적폐로 몰아 척살했다.
신적폐 사림은 일본의 성장을 외면한 탓에 조일전쟁 경고등도 스스로 꺼버렸다. 조일전쟁과 병자호란이 터져도 내 권력만 유지하면 됐다. 조선은 망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림은 권문세족과 훈구와 다를 바 없었다.
현대판 사림 586, 신적폐 길로?
586는 현대판 사림이다. 민주화 프레임으로 30대 나이에 권력층에 진출한 이들은 87체제의 최대 수혜자다.
이들이 내세우는 민주화 훈장은 4·19와 유신독재에 항거한 민주 투사들의 희생이 밑거름이 됐다. 5공 신군부 독재 시절에도 양김이 이끄는 민주화 운동이 없었다면 586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6월 항쟁도 586의 독점물이 아니다.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시민이 진짜 주인공이다. 박종철과 이한열과 같은 고귀한 영웅들의 희생이 만든 국민의 민주화다.
진짜 영웅들의 희생으로 창조한 87체제 35년을 장악한 586은 국민의 민주화 열매를 철저히 가로챘다는 평가도 나온다. 민주화는 이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지난 수년간 발생했고, 현재도 터져 나오고 있는 권력형 비리에도 586이 있다. 권력형 비리는 좌우 586을 가리지 않는다. 신적폐가 된 586, 스스로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건 당위론인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