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악 쓰면 동반추락…품위 있는 국회가 국격 높인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형석 논설위원)
정치권에서 막말이 날로 ‘풍성’해지고 있다. 방송을 보고 있자면 마치 막말 대잔치를 보는 느낌이다. 여야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토론 프로그램의 패널들도 경쟁적으로 험한 말을 쏟아낸다. 주로 대통령을 겨냥, 비난의 경계를 훌쩍 넘어서 거침없이 조롱 수준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 패널은 망설임 없이 “대통령은 민주주의자도 아니고 법치주의자도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한 야당 의원은 “덩칫값 못하는 쪼잔한 대통령”이라고 조롱하는가 하면 다른 의원은 급기야 “5년 임기를 보장 못 할 수도 있다”며 여과 없이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짐승 같은 정권’은 차라리 점잖은 편이다.
여당 내부에서 시작
수준 낮은 언어로 정쟁을 일삼든 말든 그건 엄격히 말해 그들이 감내해야 할 몫이다. 서민들이 크게 관여할 바가 못된다. 그러나 걱정 많은 우리 서민들은 영향력 막강한 그 지도급 인사들의 언행이 특히 청소년들에게까지 전염될까 두렵다. 실제로 며칠 전 길거리에서 키 큰 학생에게 친구들이 “야, 덩치만 크구 쪼잔한 X아!”라며 즐거워하는 장면이 사람들에게 목격됐단다. 이른바 지도층이라는 국회의원의 막강한 영향력 ‘덕분’이다.
권위주의 시대에 억눌렸던 대통령 비판이 노무현 시대 전후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국민들도 대통령 비난을 듣는 게 즐거웠다. 대리만족이었던 셈이다. 이후 막말이 진화를 거듭, 이젠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듣기 민망할 정도가 됐다. 브레이크가 풀려버려, 윤리 규정이 있는 방송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패널들도 거리낌 없이 거친 말을 해댄다. 하긴 집권당에서 대표를 지낸 사람부터 자당에서 배출한 대통령을 향해 양두구육(羊頭狗肉) 신군부, 절대자 등의 험한 말로 비난했으니 반대파에게 일찌감치 비난의 길을 터준 셈이다.
함께 악쓰면 동반추락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이나 우리 모두의 언론자유가 남을 헐뜯고 조롱하는 권리와 자유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닐 터다. 그러나 요즘의 사태는 그런 권리와 자유까지도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모양새다. 당하는 쪽에서는 별도의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됐으나 대통령실이나 여당은 무대응을 원칙으로 하는 모습이어서 참 딱하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대통령이 당하는 모습이 딱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국민 입장에서는 ‘국가대표 선수’ 격인 자국의 대통령한테 ‘쪼잔한’ 이미지가 덧씌워져 나라의 위상까지 함께 추락하는 게 안타깝다는 얘기다.
설사 여당이 이제부터 적극 대응에 나선다 해도 국민은 여전히 불안하다. 솜씨 없는 여당과 대통령실의 서툰 대응을 여러 차례 목격했기 때문이다. 또 무슨 에러나 내지 않을까 하고…. 누구 말마따나 참 국민 해먹기 힘든 나라가 됐다.
여당측에 충고한다. 똑같이 악 써서는 동반추락하기 십상이다. 그보다는 여유로운 대응, 예를 들어 유머나 감싸안는 대화로 전반적인 분위기를 순화시키는 게 바람직하다. 집권당의 장기전략으로는 더욱 그렇다.
내 덩치에 값 매겨줘 고맙네!
구미 각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정치권의 유머 전통이 정착돼왔다. 앤드루 존슨 미국 17대 대통령은 알래스카를 당시의 소련으로부터 싼 값에 사들여 칭송 받는 사람이다. 그는 초등학교도 못 나왔다는 상대당의 노골적인 공격에 대해 ‘예수가 초등학교 다녔다는 말을 못 들어봤다’고 응수, 상대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링컨은 자신을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비난에 대해 “제가 두 얼굴이라면 하필 이런 얼굴을 하고 있겠습니까”라고 대응했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유머 정치’는 유별날 정도여서 상원의원을 지낸 ‘밥 돌’이 지은 ‘대통령의 위트(Great Presidential Wit)’라는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을 정도다.
유머정치의 달인은 역시 영국의 처칠 수상. ‘늦잠 자는 게으른 사람’이라는 비난에 ‘마누라가 이뻐서…’라고 여유롭게 응대했단다. 누구나 한두 가지씩은 안고 있는 약점을 우스갯소리로 유연하게 넘긴 케이스. 연단에 올라가다가 넘어져 청중들이 박장대소를 하자 “여러분이 그렇게 즐거워하시니 한 번 더 넘어지겠습니다”. 말년에 젊은 기자가 내년에도 뵐 수 있겠느냐고 하자, “자네, 매우 건강해 보이니 걱정 마시게”라는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처칠의 유머는 웃음을 제공하면서 위기돌파용으로도 유용하게 쓰인 사례다.
우리 정치권에도 이런 유머들이 수입되면 어떨까 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꿔봤다.
“양두구육? 이제 개고기는 잘 안 팔린다던데.. 그래서 선거 때 제값을 못 받았나?”
“우리가 ‘신군부 정권’같았다면 어째 귀하를 삼청교육대에 보내지 않았을까”
“검사만 해온 나를 ‘법치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하는 그 분에게 법률공부를 다시 배우고 싶다”
“덩칫값 못 한다고? 내 덩치에 값을 매겨줬으니 일단 고맙긴 하네”
“임기보장 못 한다... 하긴 2년도 채 안 남긴 분이 5년짜리 임기를 어케 보장허겄누?”
대통령이 일일이 대응하는 게 어렵다면 측근들이라도 거들어주는 게 어떨까 싶다. 당장 경제를 일으켜세울 묘수도 없는 처지에…. 국민들께 웃음이라도 선물해줘서 나쁠 게 없겠지.
청소년 위해 자제를
거친 말이 난무하고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정치판을 지켜보면서 답답한 마음에 그들과 함께 ‘헛 말씀’을 잠깐 내놓아봤다.
도덕적 타락이 갈 데까지 간 우리 정치권에 언어의 품위를 기대하는 일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러나 품위 있는 국회가 국격을 높인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또 거듭 강조하지만 정치인들의 좋지 않은 언행이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점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정치인들과 주변의 ‘정치인 호소인들’께 최소한의 자제력을 가져달라고 부탁 아닌 부탁의 말씀을 드리게 된 거다.
김형석(金亨錫) 논설위원은…
연합뉴스 지방1부, 사회부, 경제부, 주간부, 산업부, 전국부, 뉴미디어실 기자를 지냈다. 생활경제부장, 산업부장, 논설위원, 전략사업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정년퇴직 후 경력으로 △2007년 말 창간한 신설 언론사 아주일보(현 아주경제)편집총괄 전무 △광고대행사 KGT 회장 △물류회사 물류혁명 수석고문 △시설안전공단 사외이사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 사외이사 △ 중앙언론사 전·현직 경제분야 논설위원 모임 ‘시장경제포럼’ 창설 등이 있다.